“실은, 아기 아빠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경신의 파격적인 고백에 진료실 안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적막해졌다. 지원의 눈빛이 멍하니 흔들렸고, 뒤에 서 있던 규련과 화야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속 알맹이는 수십 년을 살아냈지만, 임신은 인생 4회차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몇 번의 삶을 거치며 쌓아온 산전수전의 경험도, 미래를 아는 능력도 '아기 아빠의 부재'라는 황당한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하지만 몰라도 상관없어요.”단호함이 서린 경신의 목소리가 고요를 깨트렸다. 미혼모든 비혼주의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오래 살아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는 것만이 최우선 과제였다. 뒤늦게 기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경신은, 의심 어린 시선들 속에서 차오르는 민망함을 눌러 담으며 허겁지겁 변명을 덧붙였다.“아! 저기, 오해는 마세요. 저 문란하게 산 사람 아니에요! 실은 제가 기억이 좀 없어서 그래요.”“네? 기억이라니요?”“오늘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현생의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더라고요. 살던 모습도, 아기 아빠가 누군지도 전부요.”화야가 성큼 다가와 눈을 가늘게 떴다.“보살님, 우리에 대해서는 줄줄 꿰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 기억만 없다는 건가요?”“화야야, 맞아. 진짜야.”지원은 펜 끝으로 차트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사고라도 당했나요?”“음, 다사다난했죠. 사실 전생은 또렷하게 잘 기억하는데, 전생엔 임신을 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하는 중이에요.”'전생'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화야와 규련은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지원 역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환자분은 제가 평생 만난 환자 중 가장 특별하시네요.”“선생님, 아마 앞으로도 저 같은 환자는 또 없을 거예요.”경신은 짐짓 의연하게 웃어 보였지만, 배 위에 올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웃음기 어린 낯빛 뒤로, 참아왔던 서러움과 아득한 두려움이 먹구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전생에서의 자신은
최신 업데이트 : 2026-09-20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