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은 경신의 피부과 정밀 진료가 예정된 날이었다.
하지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신의 미간은 좁아졌다.
제 뒤를 그림자처럼 따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따라 들어오는 태하 때문이었다.
“아니, 태하 씨. 처치실까지 뭐 하러 따라오는데요?”
“보호자.”태하가 짧고 묵직하게 대꾸했다. ‘보호자’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듯,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경신을 응시했다.
“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
할 말이 없어진 경신은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인자한 인상에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동네 어디서나 볼 법한 할아버지 의사가 경신의 손바닥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떼어냈다.
“학생, 이만하니 천만다행이야. 어때, 통증은 좀 가라앉았어?”
“아, 네. 생각보다 괜찮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신경까지 다칠 뻔했어. 얼마오늘은 경신의 피부과 정밀 진료가 예정된 날이었다.하지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경신의 미간은 좁아졌다.제 뒤를 그림자처럼 따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따라 들어오는 태하 때문이었다.“아니, 태하 씨. 처치실까지 뭐 하러 따라오는데요?” “보호자.”태하가 짧고 묵직하게 대꾸했다. ‘보호자’라는 단어 하나에 모든 권리가 함축되어 있다는 듯, 그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경신을 응시했다.“네. 네. 마음대로 하세요.”할 말이 없어진 경신은 의사 앞으로 다가갔다. 인자한 인상에 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동네 어디서나 볼 법한 할아버지 의사가 경신의 손바닥에 붙은 거즈를 조심스레 떼어냈다.“학생, 이만하니 천만다행이야. 어때, 통증은 좀 가라앉았어?” “아, 네. 생각보다 괜찮아요.” “조금만 늦었어도 신경까지 다칠 뻔했어. 얼마나 뜨겁고 아팠겠어.”경신은 그때를 떠올렸다. 오직 태하를 구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아드레날린이 온몸을 지배해 통각조차 마비되었던 그 순간, 그녀는 가녀린 손으로 불길이 치솟는 차 문을 뜯어내듯 열어젖혔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만큼 무모하고도 절박한 순간이었다.“왜 이리 무모해?.” “연기 나는 차 안에 사람이 갇혀 있는데··· 죽게 놔둘 수가 없어서요.” “세상에, 이건 나라에서 상을 줘야 해.”백발의 의사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감탄했다. 경신은 민망함에 볼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상은 무슨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런데 저 뒤에 있는 오빠는 뭐 했어? 어린 동생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갑작스러운 화살이 태하에게로 향했다.의사의 날카로운 지적에 태하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경신이 당황하여
마호는 피부과 병동 환자 대기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하와 경신을 먼발치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들고 있던 태하의 검사 결과지로 옮겨졌다.“태하 녀석, 천운이야 정말.”검사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화재 현장에서 유해가스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직후 경신이 발 빠르게 씌워준 KF94 마스크 덕분에 폐 손상이 거의 없었다.골절이나 혈액 검사 수치도 정상을 기록했다. 경신의 기지와 헌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중환자실에 누워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마호는 이 아찔한 사고가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절대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는 태하의 서슬 퍼런 엄명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축배라도 들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림자처럼 몸을 숨기고 눈치 레이다를 가동하던 그때, 정적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어, 봉 실장?”-네, 사장님.“좀 쉬어. 어제 고생 많았는데 토요일까지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은 좀 릴랙스하라고.”-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게··· 사장님, JJ의 현수가 좀 이상합니다.봉선규의 한마디에 마호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현수는 요즘 왜 이리 자주 언급되는 지. 이름만으로도 공기를 차갑게 얼리는 그 남자의 언급에 마호는 통화 중인 수화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왜? 무슨 일인데.”-어제 서정우 사장님이 현수가 여기 온 것 같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아마 신곡 얻어 내려는 집념으로 온 것 같습니다.역시 서정우는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돈으로 사람의 영혼까지 묶어 두는 것 같았다.“그냥 MH에 올 수도 있지, 뭐 사장이 뒤를 밟고 그러지?”-아마 최근에 도윤이하고 친해져서 그런것 같습니다. 도윤이는
그 시각 현수의 오피스텔.“······도윤 씨, 아침이야.”햇살이 얇은 블라인드를 뚫고 들어오는 아침, 현수가 짐짓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도윤은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가슴으로 이어지는 여린 살결을 지독하게 베어 물며 놓아주지 않았다.“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참아. 가야 하는데······.”도윤의 낮게 깔린 숨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현수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입으로는 가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지만, 몸은 그를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오히려 그가 자신 때문에 지각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를 알아채 주길 바라는 음흉한 욕심마저 솟구쳤다.도윤은 현수의 허리를 거세게 쥐어 잡으며 그녀의 깊은 곳을 뜨겁게 파고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어루만지며,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덮쳤다.“현수 씨, 너무 섹시해서 큰일이네, 진짜······.”밀려드는 강렬한 자극에 현수는 어제의 참혹했던 사고 현장과 짓눌렸던 자괴감이 씻은 듯 날아가는 기분을 느꼈다.이 좁고 초라한 오피스텔에, 감히 대단한 거물인 도윤이 친히 발걸음해 자신을 이토록 갈구해 주다니. 어제의 악몽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도윤 씨······ 내가 이런 좁은 곳에 있게 해서 미안······.”현수가 가련한 척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자, 도윤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맞아, 나 오느라 너무 피곤했어. 안 되겠다. 현수 씨 JJ 소속사 프라이빗 숙소로 옮겨달라고 사장님한테 당장 말해야겠어.”그 말에 현수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소속사 내에서도 단 극소수의 톱스타에게만 허락된다는 그 럭셔리한 팬트하우스. 현수가 지난 10년간 갈망해 마지않던 꿈의 공간이었다.“어머, 도
현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JJ 엔터테인먼트 신사옥 앞의 작은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섰다.도어록을 누르는 지문 위로 식은땀이 들러붙어 몇 번이나 경고음이 울렸다.태하의 차량이 참혹하게 전복되던 사고 현장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쥐새끼처럼 도망쳐 나온 곳이 겨우 이 답답한 오피스텔이라니.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눌러써도 그렇지. 오늘도 돌아다니는 동안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한민국 최고 걸그룹의 보컬이었는데. 그 유명세도 무색하게, 자신의 인지도만 없는 현실이 초라함으로 돌아왔다.‘그래도 그 년, 용기는 대단하네.’현수는 화장대 앞에 털썩 주저앉아 입술을 마구 짓씹었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눈동자가 흉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결국 그 남자는 살아났을 것이다. 그리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경신은 몸과 얼굴에 불이 그을린 채, 평생 끔찍한 화상 치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겠지.자신은 몸과 얼굴이 생명인 고귀한 연예인이니까 몸을 사리는 게 당연했다.자신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현명했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합리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 가녀린 몸으로 태하를 끌어내던 경신의 잔상이 가슴속에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내려가지 않았다.비겁하고 졸렬한 제 모습에 치가 떨렸고, 동시에 목숨을 걸고 남자를 얻어낸 그 여자에 대한 자격지심이 속을 새하얗게 태웠다.똑- 똑-.그때, 침묵을 깨고 정적을 가르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두드려졌다.[현수 씨, 나야! 보고 싶어서 왔어!]문 너머로 들려오는 도윤의 익숙하고 다정한 목소리.현수는 순간 흠칫하며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도윤 씨! 내 인생에는 당신이라도 있어야 해!’스
응급실 복도, 세상 어디에도 없을 달콤한 기류를 뿜어내는 태하와 경신. 그들의 토크 타임에 혹여 방해가 될까 봐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지켜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사장님, 저거 봐요. 기적인가요?” “봉 실장, 이거 꿈 아니지?”태하가 사라져 한참을 헤매던 마호와 봉선규는, 뜻밖의 장소에서 경신과 ‘꽁냥’거리는 태하를 목격하고는 기염을 토했다.“둘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게 맞나 싶네요. 경신 양은 태하를 얼음처럼 대했었는데.” “경신 양은 기억을 잃은 상태니까 가능한거죠.”마호는 경신이 머리를 다쳤을까 봐 다른 의미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그러고 보니 경신 양의 성격도 완전히 바뀌었더라고.” “어쨌든 저런 모습은 정말 놀랍네요.”과거의 태하는 무조건 일방통행으로 마음을 밀어붙였고, 경신은 그를 거부하며 멀어지려고만 했다. 마호가 보기에 둘은 늘 벼랑 끝에 선 아슬아슬한 연인 같았다.그런데 지금,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마주 앉아 있다니. 마호는 인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태하를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태하의 진심이 하늘에 닿았나 봐.”오직 한 여자에게만 꽂혀 있는 태하의 집요한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호와 봉선규는 그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랐다. *** 생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경신은 잘 알고 있었다.태양처럼 빛나다 한순간 별처럼 저버린 남자로 인해 처절하게 아파본 그녀에게,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행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하지만 태하는 결이 달랐다. 자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다니. 심장에 이토록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는 건 반칙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도자기를 다루듯 제 얼굴의 그을음을 하나하나 닦아내는 태하를 보며, 경신은 몸 둘 바를 몰라 발가락을 오므렸다.
병원 응급실 복도의 디지털시계는 이미 토요일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손을 다친 경신은 세수조차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시커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무력하게 의료진을 기다릴 뿐이었다.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공평한 선물은 시간이라지만, 경신에게 오늘의 시간은 유독 길고도 가혹했다. 차디찬 침상 위에서 깜빡깜빡 졸다 깨기를 반복하던 경신은 서서히 밀려오는 현실적인 통증에 몸을 떨었다.“아이고, 힘드네···.”당장이라도 기숙사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대형 사고로 마비된 응급실에서 경신의 차례는 아직 멀어 보였다. 그때, 경신의 병상 근처 의자에 어린아이와 아주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모자는 경신을 보자마자 흠칫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엄마, 저 누나 무서워.” “쉿!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임산부지만 아직 스물한 살의 청춘이라 ‘누나’ 소리를 듣는 건 다행이었으나, 이어지는 대화는 마냥 웃어넘길 수 없었다.“화상을 입었나 봐. 온몸에 그을음 좀 봐라. 쯧쯧, 얼마나 아플까.” “그럼 죽어?” “병원에서 치료받으면 살아. 하지만 엄청 고생하겠네.”흉흉한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경신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는 고스란히 마음을 긁어내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한 일상을 보냈는데, 하마터면 삶의 궤적을 뒤트는 사건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엄마, 집에 가고 싶어. 병원 무서워.” “거봐, 너도 이제 아무거나 입에 넣지 마. 구슬 삼키면 큰일 난다고 엄마가 말했지?”아주머니는 가방에서 주스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주스를 쭉쭉 빨아먹는 동안, 아주머니는 아이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잠시 후, 수납 영수증을 든 아이의 아빠가 미안한 기색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