登入그런데 그날 이후 주세훈은 완전히 풀이 죽어 버렸다.정지안이 오든 이해리가 오든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 말로는 요양원에서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대체 무슨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 없었다.이해리 역시 속으로는 조금 의아했다.정지안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지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일은 두 남자만 아는 비밀로 남겨 두기로 한 듯했다.이해리도 오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지금 그녀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바로 다음 날 세바스찬이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이해리를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이해리가 과거에 그에게 약을 먹였던 일 때문에 결국 복수를 시작한 모양이다.세바스찬의 공세는 치졸하면서도 집요했다.이해리를 상대하겠다며 해외에 새 실험실을 세웠다.목적은 명백했다. 이해리의 경쟁자가 되려는 것이었다.세바스찬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해리도 금세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처음에는 그저 여러 실험실을 열겠다는 소식을 흘리는 정도였다.하지만 실험실의 주제나 연구 프로젝트를 보면 이해리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는 게 너무 분명했다.게다가 그 후에도 세바스찬은 계속 여러 움직임을 보였다.이해리는 그 일을 처리하면서도 실험실 사람들의 상태를 계속 확인했다.그날 집에 돌아오니 마침 정지안이 있었다.이해리는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물었다.“요즘 애들 상태는 어때요?”정지안은 이해리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낮게 말했다.“내가 있는데도 걱정돼? 다들 잘 있어.”“회복은 잘하고 있어요? 특히 많이 다친...”이해리는 정지안의 눈치를 보며 차마 주세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정지안은 잠깐 생각했다.주세훈이 저렇게 풀이 죽은 건 자신과 나눈 대화 때문이 분명했다.하지만 그 사실을 이해리에게 말하면 자신이 몰래 주세훈과 담판을 지었다는 일까지 전부 알려지게 된다.애초에 이해리 몰래 찾아간 일이었다.지금 와서 전부 말하면 그때 굳이 조용히 처리한 의미도
그 말에 정지안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서로 사랑한다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정지안의 태연한 반응에 주세훈은 더욱 화가 났다.“당연히 알죠. 며칠 전에도 선배는 계속 병원에 와서 저를 돌봐 줬어요. 선배가 저를 신경 쓰니까 그런 거잖아요. 아니면 왜 밤새 제 옆에 있어 줬겠어요? 밤낮으로 저를 간호해 줬는데 그게 대표님과의 감정보다 못하다고요?”그러다 주세훈은 최근 실험실에서 이해리와 함께 일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확고한 눈빛으로 정지안을 바라봤다.“저랑 선배는 최고의 파트너예요. 서로의 연구를 이해하고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사이라고요.”자신만만하게 늘어놓는 주세훈의 말을 들으며 정지안은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그게 정지안이 지금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네 말대로 해리가 매일 병원에 오긴 했어. 그런데 이건 널 돌본 게 아니라 모든 후배를 똑같이 챙긴 거야. 그동안 나도 계속 같이 병원에 있었고.”정지안은 주세훈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그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걸 보자 오히려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날 밤에도 해리는 세 병실을 오가며 너희들을 살폈어. 마지막에 우연히 네 병실에 들렀으니까 네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에 있었던 것뿐이야.”그 말을 들은 순간 주세훈의 마음속에 부풀어 있던 기대가 한꺼번에 꺼졌다.“그러니까 그날 밤 선배가 계속 제 옆에 있었던 게 아니라고요?”“아니야.”정지안은 다시 말했다.“그리고 너는 둘이 같은 일을 하니까 서로를 이해한다고 했지. 그런데 이해리 회사랑 지금 실험실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게 도운 사람이 누군지 알아? 나야. 그 전에 해리가 회사를 시작할 때도 내가 옆에서 도왔어.”이해리와 함께 겪어 온 일들을 하나씩 되짚다 보니 정지안 자신도 잊고 있던 일들이 많았다.두 사람은 생각보다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돌이켜 보니 정지안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그래서 말을 이어갈수록 목소리에도 자연스럽게
“그럼 간병은...”정지안이 곧바로 답했다.“내가 할게.”“지안 씨, 요즘 회사 일이 안 바빠요?”“별로 안 바빠. 그동안에도 계속 너 따라 여기저기 다녔잖아.”그 말을 들은 이해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정말 괜찮겠어요? 그래도 다들 아직 요양 중이고 특히...”이해리는 주세훈이 정지안의 말을 잘 듣지 않을까 봐 걱정됐다.하지만 정지안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잘라 말했다.“할 수 있어. 난 그냥 네가 더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기서 계속 시간을 쓰면 나중에 처리해야 할 일이 그만큼 더 쌓일 거잖아.”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나중에 밀린 일 때문에 불안해하며 밤새 몰아서 처리하느니 정지안에게 맡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이해리는 여전히 마음이 쓰였다.“정말 괜찮겠어요? 지금 나한테는 이 일도, 실험실 일도 다 중요하단 말이에요.”“당연하지. 네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시간을 만들어 주려는 거야.”정지안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분했다.그의 품은 따뜻하고 든든했다. 덕분에 이해리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알겠어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올게요.”“내 실력 못 믿어? 응?”정지안은 웃으며 이해리의 입술에 뜨겁게 입을 맞췄다.두 사람은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다음 날부터 이해리는 다시 일에 복귀했고, 정지안이 대신 요양원에서 사람들을 챙겼다.그다음 날 아침에도 정지안은 필요한 물건들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갔다.주세훈은 또 다른 사람들이 정지안을 칭찬하는 걸 들으며 속으로 못마땅해했다.그때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선배가 왔을 거야. 한 사람의 발소리만 들리는 걸 보아 오늘은 정 대표님이 같이 오지 않은 건가?’주세훈은 기뻐하며 문 쪽으로 나갔다.하지만 나타난 사람은 정지안이었다.병실 문은 열려 있었다.정지안은 자신을 보자마자 주세훈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보고 방 안을 한번 흘끗 바라봤다.다른 사람들은 아직 문가의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주세훈은 문을 조용히
“형부는 우리한테 정말 잘해줘.”정지안이 가져온 과일을 먹던 한 여자 후배가 말했다.“그러니까. 요양원까지 따로 알아봐 줬잖아. 난 사실 이제 멀쩡해. 그냥 좀 놀랐던 것뿐인데 선배랑 형부가 우리를 엄청 걱정해 주는 것 같아.”“두 분 다 좋은 사람이야. 진짜 잘 어울리고. 난 둘이 너무 좋아.”그 말을 듣던 주세훈의 얼굴이 곧바로 굳었다.“정 대표님한테 뭐라도 받았어? 왜 다들 그렇게 칭찬해? 우리를 신경 써준 건 선배야. 선배가 아니었으면 정 대표님은 아무것도 안 했을 거야.”주세훈의 찬물 끼얹는 말에 병실 안에는 금세 적막이 흘렀다.다른 사람들은 그를 한번 흘겨보더니 더는 대꾸하지 않았고 곧 둘씩 모여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정지안과 이해리는 병실 문 밖에서 그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이해리는 순간 몹시 난처해졌다.주세훈이 정지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더 난감했다.정지안은 이해리의 미묘한 반응을 지켜봤다.정지안은 처음엔 그 말을 문제 삼으려다가 오히려 이해리의 반응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자. 들어가서 애들 보자.”정지안이 먼저 말하자 이해리는 오히려 어쩔 줄 몰랐다.방금 정지안을 좋지 않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그래도 이해리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정지안과 함께 문을 열었다.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두 사람이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주세훈도 이해리 옆에 서 있는 정지안을 발견했다.그의 얼굴은 곧 더 어두워졌다.‘선배도 분명 나와 같은 마음인데 왜 계속 정 대표님과 함께 있는 거야? 분명 정 대표님이 선배를 위협했거나, 뭔가 꼬투리를 잡은 게 틀림없어.’주세훈은 질투하고 원망 어린 시선으로 정지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도 불복과 못마땅함이 가득했다.정지안은 그 시선을 느끼자 속으로 살짝 긴장했다.주세훈이 실험실을 위해 많은
윤유나가 말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초조함이 묻어났다.이해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평소라면 독설을 퍼붓고도 남았을 윤유나가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걸까? 혹시 윤유나가 병원에 온 데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 걸까?’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보니 이해리의 마음속에도 불안감이 피어올랐다.병실로 돌아가던 중 이해리는 문득 방금 윤유나가 병원에서 누군가를 상대로 정보를 알아보는 듯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항 사건은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로 크게 번졌고 정부 측에서도 공식 발표까지 했다.윤유나 역시 그 소식을 보고 움직인 건 아닐까?그렇다면 지금 병원에 온 목적은 자신을 상대로 뭔가 꾸미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그 생각이 들자 이해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가 정지안에게 이 일을 상의했다.“병원에 있으면 애들이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거야?”이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이유나가 병원에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그럼 정도원은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움직임을 알아내면 또 찾아올 수도 있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대비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정지안은 이해리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그건 내가 알아볼게.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로 옮길 생각이야?”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정지안은 이해리의 눈에 살짝 찔리는 기색이 떠오른 걸 알아챘다.“설마 너...”이해리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안 돼요?”정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안 되는 건 아닌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어?”“위험할 것 같아요? 난 오히려 이게 제일 좋은 방법 같거든요.”이해리가 생각한 건 사람들을 집처럼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요양시키는 것이었다.물론 지금 자신들이 사는 집으로 모두 데려올 수는 없었다.그래서 작은 요양 시설을 따로 알아볼 생각이었다.“다 같이 있어야 관리하기도 편해요. 그래야 나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고.
이해리는 배달 봉투를 들고 병실로 돌아오며 답답한 듯 이마를 두드렸다.그 모습을 본 주세훈이 급히 물었다.“선배, 제가 애들 먹으라고 시킨 밀크티인데 왜 선배가 들고 왔어요?”“이거 네가 시킨 거였어?”이해리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지금은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야 해. 배달 음식이나 밀크티는 절대 먹으면 안 돼. 앞으로는 이런 거 시키지 마. 나 방금 간호사한테 한참 혼났잖아.”그 말을 들은 주세훈은 고개를 푹 숙였다.그 장면을 마침 병실로 들어오던 정지안이 목격했다.며칠째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다친 후배들을 돌보는 이해리를 보며 정지안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마침 꼬투리를 잡자 곧바로 이해리 옆으로 와 한마디 얹었다.“자기가 환자인 건 알고 있나? 몸 상태 생각도 안 하고 배달 음식까지 시켜?”주세훈은 입을 열었다가 정지안의 얼굴을 보고 다시 다물었다.사실 그는 이해리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 보여 자신도 뭔가 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정작 일을 더 만들 줄은 몰랐다.이해리는 정지안의 날 선 태도를 눈치채고는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그만 해요. 주세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며칠 동안 내가 병원에서 동분서주하는 게 안쓰러워서 뭐라도 돕고 싶었나 봐요.”이해리가 주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내 말이 맞지?”정지안 앞에서 이해리가 자신을 감싸 주자 주세훈은 금세 눈빛이 반짝거렸다.그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네. 선배, 고마워요.”‘역시 선배는 내 편이야. 어쩌면 정 대표님보다 나를 더 챙겨 주는 것 같네.’그렇게 생각하자 주세훈은 마음이 꿀을 먹은 것처럼 달콤해졌다.한편 윤유나는 해외 쪽 사람들의 지시대로 실험실 구성원들에게 손을 댈 방법을 찾고 있었다.정부가 조사를 시작한 이상 이해리에게 직접 접근하기는 어려웠다.그렇다면 공항에서 다친 사람들을 노리는 게 나았다.윤유나는 몰래 정보를 알아보다가 부상자들이 아직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곧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요 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