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주버님이 남편으로: Chapter 1 - Chapter 10

30 Chapters

제1화

“죄송합니다, 이해리 씨.”전화기 너머 보험사 고객센터 직원이 차갑게 말했다.“조회 결과 차주인인 정도원 씨는 기혼이 맞지만, 저희 쪽에 등록된 배우자가 고객님이 아닙니다.”서경 그룹으로 향하는 길에 이해리는 교통사고를 당했다.정도원이 줄곧 전화를 받지 않아 그녀는 보험사에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이 차가 정도원의 명의로 되어 있지만 두 사람은 부부이니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정도원 씨가 차를 인수할 때 배우자와 함께 오셔서 혼인 관계 증명서 원본도 제출하셨어요. 아내분 성함은 윤유나 씨였습니다.”이해리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 정면으로 뺨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이해리와 정도원은 어릴 적부터 친구로 지냈고 두 집안은 대대로 친분을 쌓았다. 해성에서는 정도원이 이해리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그토록 차분하고 냉정하던 남자는 단 하루도 이해리와 떨어져 지내기를 아쉬워했다.3년 전, 이해리가 해외로 유학을 떠났을 때, 정도원은 웅장한 기세로 그녀를 배웅했다.그녀가 워렌에 있는 3년 동안, 정도원은 그녀를 편하게 돌보기 위해 다국적 사업을 시작했다. 16000킬로미터를 일주일에 한 번씩 넘나들며 그녀를 만났었지.이해리가 폐가 안 좋아서 거의 죽을 뻔했던 해,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동안 지내면서도 정도원은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 곁을 지키며 반지를 끼워주었다.“네가 만약 잘못되면 나도 함께 따라갈 거야. 우리 다음 생에도 부부로 지내.”정도원 때문에 그녀는 지도교수의 연구실 잔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귀국했다.기쁜 마음으로 정도원을 찾아가 서프라이즈를 해주려 했는데 대표이사실 문을 연 순간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의 허리에 걸터앉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여자는 청순한 얼굴을 살짝 들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대표님, 이해리 씨 돌아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정도원은 푹신한 가죽 의자에 앉아 커다란 체구로 여자를 감싸 안고서 냉랭한 얼굴에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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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다음 날, 이해리가 잠에서 깼을 때 정도원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 균형 잡힌 완벽한 몸매였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해리는 가슴이 답답하고 아팠다.정도원은 그녀를 위해 요리를 배웠다. 서경 그룹이 위태롭던 그 시절, 정도원의 사업 경쟁자들이 그녀를 노리고 사람을 매수하여 그녀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었다.결국, 이해리는 사흘 밤낮을 혼수상태로 지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정도원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돼서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이해리가 깨어나니 덩치 큰 체구의 남자는 마침내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품에 와락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그 뒤로 정도원은 깜짝 놀랄 속도로 요리를 배워서 그녀의 모든 식사를 도맡아 했다.조미료조차 구분하지 못하던 황태자께서 한 달도 채 안 돼 미슐랭 주방장 수준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별안간 휴대폰이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정도원의 전화였다.딱히 몸을 움직일 생각도 없었는데 정도원이 어느새 주방에서 나와 앞치마도 풀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긴장감이 스쳤다.한편 이해리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세수하러 들어갔다.다시 나왔을 때 정도원은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옷걸이에 걸린 정장 재킷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가 나오자 남자는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아침은 너 혼자 먹어야겠어, 해리야.”이해리가 답했다.“그래, 일이 중요하지.”정도원은 진짜 급했는지 그녀의 말투에 스며든 냉랭함과 삭막함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평소 이해리한테서 전혀 들어볼 수 없는 말투였건만...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떠나가는 정도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식탁 위의 음식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쏟아부었다.이어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전에 하신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전화기 너머에서는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더 말을 이어가다가 마지막에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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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이해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호가했다.“3억4천 하겠습니다.”하지만 이어서 윤유나도 값을 불렀다.“3억5천이요.”공교롭게도 그녀의 매번 호가는 최저 호가 단위인 천만 원씩 이해리의 가격에 덧붙여졌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해리를 바라보며 애원하듯 말했다.“해리 씨는 액세서리가 많잖아요. 이 팔찌 저한테 양보하면 안 돼요? 진짜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저는 해리 씨처럼 좋은 집안에 태어나 원하는 모든 걸 쉽게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돼요. 더 이상 값을 올리면 저도 정말 돈이 없어요.”이해리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입꼬리만 씩 올렸다.“정 대표가 돈 대주는 거 아니었나요?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죠?”윤유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나직이 말을 이어갔다.“대표님도 힘들게 돈 버시잖아요. 아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아끼려고 그러는 거죠.”그야말로 배려가 넘치는 예의였다.몇 번의 호가 경쟁 끝에 팔찌 가격은 어느덧 4억 원에 달했다. 이해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이제 막 입을 열려는데 정도원이 덥석 가로챘다.“자기야, 이 팔찌 그냥 유나한테 양보하는 게 어때?”그 순간 이해리는 주먹을 꽉 쥐어서 손톱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들고 마지막 남은 온기마저 차갑게 식어갔다.“방금 뭐라고 했어?”정도원은 난감한 듯 한숨을 쉬고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자기야, 나 이미 유나한테 선물 하나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마침 이 팔찌가 마음에 든다잖아. 그냥 네가 양보해 줘. 게다가 너한테 액세서리 몇 개나 낙찰시켜줬잖아. 아직도 부족해?”더할 나위 없이 홀가분한 말투, 이 남자는 마치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툭 내뱉었다.이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형언할 수 없는 쓰라림이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심장을 옥죄여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윤유나의 집안 배경으로는 4억은커녕 이곳에 들어올 자격도 없다.그녀가 지금 여기에 앉아서 이해리와 호가 경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정도원 덕분이다.결국,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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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미안해 해리야, 난 그런 뜻이 아니었어. 낯선 남자에게 질투하면 안 되는 건데... 다 내 잘못이야.”정도원은 눈시울을 붉혔다.“하지만 나랑 유나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얘한테 고마워서 데려왔을 뿐이야. 용서해주라, 해리야.”그 모습을 본 윤유나가 가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그래요, 해리 씨. 행여나 저랑 대표님 사이를 오해할까 봐 최대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도.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괜찮은 생일 선물 하나 갖고 싶었을 뿐이에요. 제 집안 형편은 해리 씨랑 비교가 안 돼요. 해리 씨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라서 뭐든지 쉽게 가질 수 있고 또 정 대표님처럼 좋은 남자랑 결혼까지 했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선물 하나 고를 자격조차 없는 건가요?”“그저 선물?”이해리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윤유나 씨, 내가 거슬리는 건 유나 씨가 말하는 그 선물이 아니에요. 서경 그룹 직원으로서 유나 씨는 지금 엄연히 선을 넘었어요!”두 여자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정도원은 본능적으로 윤유나 앞에 나서며 다정하게 말했다.“해리야, 정 그렇게 거슬린다면 경매 끝나고 유나를 지사로 보낼게. 하지만 오늘은 내 면을 봐서라도 이 염주 팔찌를 유나한테 양보해. 돌아가거든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다 사줄게.”윤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눈가에는 이미 눈물 몇 방울이 고여 있었다. 그녀는 애원에 가까운 어조로 말했다.“해리 씨... 저 진짜 이 팔찌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해리 씨는 이미 모든 걸 다 가졌는데 왜 기어코 이런 거로 저랑 다투려 해요? 설마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부러 그러시는 건가요?”“윤유나 씨가 뭔데 내가 마음에 들어야 하죠?”이해리가 싸늘하게 비웃었다.“이건 원래 내 것이었어요. 왜 유나 씨한테 양보해야 하는 건지 설명 좀 해볼래요?”그녀는 안내 직원이 내민 팔찌를 선뜻 받아들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주제 파악 좀 해요, 윤유나 씨!”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정도원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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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이해리가 눈썹을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윤유나 씨가 재무팀장이라고요?”윤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네, 해리 씨.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도원 씨... 아니 정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지만 염려 마세요. 해리 씨 말씀은 꼭 전해드릴게요.”이해리가 피식 웃었다.“아니요. 괜찮아요.”그녀는 흥미진진한 눈길로 윤유나를 바라보았다.“도원이가 아니라 유나 씨를 찾아왔거든요.”윤유나의 미소가 돌연 굳어졌다.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해리 씨, 어젯밤 경매 일 때문에 불편하신 건 알지만 저랑 정 대표님 관계를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그녀가 손을 들어 보였다. 약지에 끼워진 정교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눈 부신 빛을 반사했고 윤유나의 얼굴에는 약간의 수줍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저는 이미 결혼했고 남편과도 사이가 아주 좋아요.”반지를 노려보던 이해리는 한순간 숨이 멎을 뻔했다.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울 수 있을까? 이들 사이에서 이해리 그녀야말로 ‘상간녀’였다니.그 반지는 정도원이 자신에게 프러포즈할 때 주었던 것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이해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반지는 예쁘지만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저는 그저 최신 재무제표를 받으러 왔을 뿐이에요. 그 외에는 다른 볼일 없어요.”이해리는 윤유나의 굳어진 얼굴을 힐끗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오히려 유나 씨가 더 긴장한 것 같은데요.”윤유나의 표정이 확 돌변했다. 앞서 득의양양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이해리는 여유롭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윤 팀장, 다시 한번 제 요구를 말씀드려야 할까요?”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도원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모든 상황을 쭉 훑어본 뒤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해리야, 어젯밤에 그 난리를 피우고도 모자라?”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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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이해리는 거실 구석에 서서 모두가 정지안에게 와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정도원도 심여진 옆에 서서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조금 전까지 정도원에게 아부하던 삼촌들은 방향을 틀어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지안아, 어떻게 갑자기 돌아오게 된 거야?”“너 요즘 국내 회사를 하나 인수하느라 바쁘다며? 정말 갈수록 대단해지는구나.”“자자, 얼른 들어와 앉아. 최고급 차로 타 놨어.”정도원은 자신을 향한 삼촌들의 온도 차가 확연히 다른 걸 느끼며 미소가 옅어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은 듯 씩 웃으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했다.이해리는 훤칠한 몸매에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는 정지안이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거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도 몰래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제 그녀는 사람들 틈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뒤따라 들어오는 이들에게 길을 내주며 존재감을 낮추려 노력할 따름이었다.이때 정지안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왔다.정도원의 화려하고 밝은 모습과는 달리 이 남자는 더 침울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고귀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정지안은 주변의 아첨에 고개만 끄덕일 뿐 무심코 모두를 살펴보았다.다시 한번 이해리에게 시선이 스쳤고 그 순간 정지안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이에 정도원도 잇달아 멈춰 섰다.“왜 그래 형?”정지안은 대꾸 없이 이해리를 무심히 훑어보았다.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이해리는 심장이 철렁거렸다.왠지 모르게 침범당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하지만 그녀는 이 남자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정도원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정지안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고 저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해리야, 이리 와서 아주버님께 인사드려야지.”이해리가 막 걸음을 떼려는데 정지안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왔다.정도원과 다른 사람들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그에게 먼저 다가갔고 그는 꿈쩍하지 않았으니까.정지안의 깊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이해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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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해리가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저 혼인신고서를 내려오려고요.”정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더 캐묻지 않고 의자를 밀어냈다.훤칠한 키에 다리가 길어서 발끝만 살짝 들어도 쉽게 선반 위의 서류철에 손이 닿았다.정지안은 혼인신고서를 쓱 훑어보다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그는 혼인신고서를 이해리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그렇군요.”이해리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서류를 받아 들며 가볍게 말했다.“고마워요, 아주버님.”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서 혼인신고서를 받아 들고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느꼈다.서류에 적힌 내용은 이 결혼이 얼마나 허망한 농담인지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정도원의 그 지독한 사랑 연기 속에는 처음부터 세 사람이 공존했던 것이다.정지안이 시선을 내렸다.이해리보다 키가 훨씬 커서 그녀의 동그랗고 예쁜 정수리만 보였다.그녀는 새하얀 손으로 혼인신고서를 꽉 잡고 있었는데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버렸다.남자가 태연하게 물었다.“혼인신고서는 왜 가져가는 거죠?”“아, 그냥 집에 가져다 두려고요.”이해리는 서둘러 변명을 둘러댔다.남자는 따스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데일 것 같지만 끝내 아무런 제스처가 없었다.그는 천천히 소매 단추를 고쳐 매고 문밖을 나섰다.이해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수납장에 등을 기댔다.허벅지 안쪽에는 여전히 지독한 열기가 남아 있어 황급히 치맛자락을 끌어 내리고 혼인신고서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음을 추스르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태연하게 문밖을 나섰다.정도원은 아직도 뒤 정원에서 몇몇 친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때 이해리가 담담한 얼굴로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몇몇 친척이 정도원에게 얘기했다.“지안이가 며칠 전에 왔으면서 오늘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대.”정도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오늘 비행기로 온 거 아니었어요?”“아니야. 뭐 경매 같은 데 간 모양이야. 나도 얼핏 들었는데 골든 경매장에 갔다나 뭐라나.”“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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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정도원은 움찔하더니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 방금 힘을 준 탓에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는 피식 비웃었지만,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대단해, 이해리!”정도원은 곧장 액셀을 밟았다.두 사람은 가는 길 내내 차 안에서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집에 도착하자 정도원은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이해리가 혼인신고서를 넣어둔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에 뜬 이름 [Y]를 보자 여자의 직감이 또다시 발동했다.단언컨대 이 발신자는 윤유나였다.이해리는 망설임 없이 화면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로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남편 뭐 해? 보고 싶어 죽겠어. 왜 말이 없어? 자기야?”이해리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차갑게 비꼬았다.“윤유나 씨, 타이밍 참 안 좋네요. 도원이 지금 샤워 중이에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가서 불러줄 테니.”전화기 너머의 윤유나가 숨을 들이켰다.“해리 씨?”이해리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마침 정도원이 샤워 가운을 걸치고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단단한 가슴팍에는 물방울도 채 마르지 않았다.얼굴에 당혹감이 스치더니 이해리를 보자 그녀의 손에 쥔 휴대폰에 시선이 꽂혔다.“해리야...”“윤유나 씨가 찾아.”이해리는 눈썹을 치키고 휴대폰을 내밀었다.정도원은 찔린 듯 휴대폰을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뒤에서 이해리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무슨 전화인데 나까지 피하는 거야?”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아, 아니야 그런 거... 네가 시끄러울까 봐 그런 거지.”“시끄럽긴. 스피커폰으로 해봐. 대체 무슨 일이길래 한밤중에 전화 와서 다짜고짜 남편이라고 부르는지 나도 들어야겠어.”이해리는 계단 난간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정도원을 넌지시 바라봤다.정도원은 순간 멈칫하더니 태도를 바꿨다.“잘못 걸었나 보네.”그는 휴대폰을 들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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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자를 훔쳐본 순간, 이해리는 역겨워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정도원이 그녀를 흘끗 보다가 뺨을 쓸어내렸다. 이어서 그녀가 깊이 잠들었다고 여기고는 부랴부랴 겉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문이 닫힌 순간, 이해리는 재빨리 화장실에 달려가 변기를 잡고 토했다.속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몸이 불편했지만 겨우 지탱하며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변호사에게 온 전화였다.“이해리 씨, 정도원 씨의 재산 조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소송을 거치시면 재산의 절반인 주택 다섯 채, 토지 두 필지, 그리고 자산 천억 원을 분할 받으실 수 있습니다.”이해리는 휴대폰을 꽉 잡고 다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제 주식까지 합쳐도 고작 이것뿐인가요?”“네. 정도원 씨는 이미 대부분 자금을 회사 운영에 투입한 상태입니다. 더 많은 돈을 원하신다면 남편분의 다른 잘못이나 범죄 증거를 확보해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셔야 합니다.”이해리는 거의 즉시 정도원과 윤유나의 사실혼이 떠올랐다.비록 중혼죄가 없지만, 그동안 이해리를 속여 회사 밑거름으로 쓰게 만들었고 소중한 청춘까지 낭비했으니 모든 죄목을 합치면 정도원의 대부분 재산을 배상받을 수 있다.지금은 증거 수집을 계속해서 정도원이 변명의 여지 없이 돈으로 배상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해야만 마음속의 울분을 삭일 수 있을 것 같았다.이해리는 눈을 감았다가 문득 부동산 한 채가 생각났다.그 별장만 생각하면 가슴을 옥죄이듯 아팠다.어머니가 위독하실 때, 그녀가 정도원과 화해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결혼 선물로 강변 뷰의 자윤 빌리지를 사주셨다. 또한 일부러 두 사람 공동명의로 해주었다.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해리는 쓰라린 추억이 되살아날까 봐 차마 그곳에 가보지 못했고 결국 단 하루도 그 별장에서 지낸 적이 없었다.자윤 빌리지는 유일하게 두 사람 공동명의로 된 재산이지만 정도원에게 일 전 한 푼 내줄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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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오초아의 격한 질책이 휴대폰을 타고 이해리의 귓가에 닿자 그동안 간신히 붙잡고 있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코끝이 시큰해지며 그녀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른 후에야 겨우 말을 이었다.“초아야, 우리 엄마가 나랑 정도원 명의로 강변 뷰 별장을 한 채 사주셨는데 이걸 처리해야겠어. 내가 부동산에 내놓으면 네가 바로 사들였다가 이혼 수속 마치거든 다시 나한테 되팔아주라.”“오케이. 다 정리되면 바로 연락 줘.”오초아는 흔쾌히 승낙하며 안타까운 기색을 드러냈다.이해리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나중에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뒤 전화를 끊었다.어느덧 새벽 한 시를 훌쩍 넘긴 시간, 그녀는 도통 잠이 오지 않아 집을 팔기 위한 서류들을 정리해서 부동산에 보냈다.그때 문득 카톡에 새로운 친구 추가 요청이 떴다.이해리는 휴대폰을 들어 신청자를 확인했다.프로필 사진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의 뒷모습이었고 닉네임은 하트 기호 하나가 전부였다. 다른 정보는 전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수락]을 눌렀다.친구 추가가 성공하자마자 상대방이 사진 한 장을 보냈다.침대, 분홍색 시트, 그리고 깍지 낀 두 손에 비친 결혼반지까지...이해리는 화가 나기보다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이제 대놓고 도발하시겠다?’안 그래도 속이 뒤집힐 판이라 그녀도 강하게 맞섰다.컴퓨터를 켜자 모니터 불빛이 예쁜 얼굴을 감쌌다.이해리가 해킹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도원은 전혀 모른다.지난번 정도원을 용서했을 때 그에게 너무나 많은 믿음을 쏟았다. 윤유나와는 완전히 끝났다고 믿었기에 남편에 관련된 정보를 한 번도 해킹해본 적이 없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 맹목적인 신뢰가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정도원은 그녀의 믿음을 이용하고 배신했으며 두 여자 사이에서 대놓고 즐겼다.‘너도 이제 좋은 날은 끝이야, 정도원 이 개자식!’이해리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키보드 위를 가로질렀다. 불과 몇 분 만에 정도원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냈는데 자윤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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