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밤이 깊어도 손바닥의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침대 위에 누워 손을 펴 보았다.방 안에는 촛불 하나만 남아 있었고, 천장에는 흔들리는 그림자가 얇게 걸렸다.명단도 화살촉도 다미안에게 넘겼다.독 분석은 기사단이 맡았다.알렉세이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졸데 쪽으로 돌릴 문장을 준비하면 된다.정리할 것은 정리했다.그런데 눈을 감으면 갑옷에 남은 흠이 먼저 떠올랐다.그다음에는 장갑의 결이 손바닥 안쪽에 다시 닿았다. 살아남았다는 증거라고 하면 편했다.문제는 증거치고 너무 따뜻하게 남는다는 점이었다.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렸다.자자. 오늘은 더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잠을 자야 내일 덜 망한다.그렇게 생각한 것까지는 기억났다.***꿈속의 방은 내 방이 아니었다.벽지가 어두웠고, 창가에는 무거운 휘장이 내려와 있었다.촛불은 멀리 있었는데도 열은 피부 가까이 닿는 듯했다.누군가 바로 앞에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남자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넓은 어깨와 낮은 숨소리, 가까이 올 때마다 먼저 닿는 체온.움직이려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아니, 몸은 움직였다. 다만 그녀가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손이 먼저 올라갔다.손끝이 낯선 옷깃을 스쳤고, 몸은 그 감촉을 이미 아는 것처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손목을 잡힌 것도 아니었다. 끌려간 것도 아니었다.몸은 그 거리감을 먼저 받아들였다.조수석에 앉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다 보이는데 방향을 틀 수 없었다.브레이크를 밟고 싶은데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얼굴 없는 남자의 손이 뺨 가까이를 지나갔다.손등인지 손가락인지 모를 감각이 짧게 남았다. 그다음에는 목덜미 쪽으로 숨이 닿았다.말은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몸은 그 침묵을 무서워하지 않았다.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왜 무서워하지 않아.질문은 꿈속에서 소리가 되지 않았다. 대신 몸이 대답했다. 오래 알고 있었다는 듯, 다시 만난 것처럼, 잃어버렸던 것을 확인하듯.감각이 먼저 가고 생각은 뒤에 끌려왔다
정원 쪽 회랑은 집무실보다 조용했다.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레온이 따라 나오려 했고, 다미안은 서류를 든 채 내 곁에 섰다.둘 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같은 뜻이었다.오늘 독화살을 맞을 뻔한 사람이 혼자 정원으로 나가는 건, 상식적으로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레온은 문 안쪽에 있어. 내가 부르면 바로 와.""공작님.""명령이야."레온은 입을 다물었다. 다미안이 대신 짧게 물었다."기록은 제가 이어서 보겠습니다.""응. 동선부터. 누가 기다리고 있었는지.""알겠습니다."테오도어는 회랑 쪽 문을 열어 두었다. 바깥에서 젖은 흙 냄새가 들어왔다.해가 기운 뒤라 정원 돌길은 낮의 열을 거의 잃고 있었다.걸음을 옮겼다. 이건 업무였다. 독화살 조사 경과를 듣고, 사교계에 나갈 문장을 정하고, 세르주 기사단장과 공식 대응 방향을 맞추는 일. 딱 거기까지.그렇게 정리하면 쉬워야 했다.그런데 손바닥에는 아직 장갑의 결이 남아 있었다.***세르주는 정원 회랑 끝에 서 있었다.검은 갑옷은 닦여 있었지만 왼쪽 흉갑에는 얕은 흠이 남아 있었다. 화살촉이 비틀렸던 자리였다.가까이서 보니 검푸른 독 자국은 사라졌고, 금속 표면만 거칠게 긁혀 있었다.그래도 나는 그 흠을 보는 순간 숨이 잠깐 막혔다.세르주가 먼저 예를 갖췄다."공작.""기사단장님."알현실 복도 때와 비슷했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았다.사교계가 보면 또 문장 하나쯤 만들기 좋은 간격이었다. 아, 이제 거리까지 문장 단위로 계산하게 생겼네. 정말 싫다.세르주는 그 계산을 모르는 사람처럼 곧바로 보고했다."휘장 뒤에서 단궁의 받침 조각을 찾았습니다.의전청 임시 인력 명단에 있던 한 사람이 사라졌고, 기사단이 성문 쪽을 막았습니다.""독은요?""분석 중입니다. 피부에 닿아도 위험한 종류로 보입니다. 화살촉은 봉인했습니다."짧고 정확했다. 지금 듣기 좋은 방식이었다. 사건, 증거, 다음 조치. 감정을 끼워 넣을 틈이 없었다.그래서 오히려 사적인 질문이 끼어들 틈이
알렉세이가 몸을 일으키자, 토너먼트장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독이 묻은 화살은 아직 바닥에 있었고, 세르주의 갑옷 위에는 검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황제의 기사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범인이 도망간 곳보다 알렉세이의 입을 먼저 보았다.그는 그런 시선을 어떻게 받는지 아는 사람이었다.알렉세이는 느리게 예를 갖췄다."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방금 일은 제국 귀빈석을 향한 중대한 공격입니다."말은 맞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맞는 말로 시작하는 사람은 보통 틀린 결론을 준비한다.황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허락처럼 내려앉자, 알렉세이의 시선이 내게 왔다."벨포르 공작.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염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손바닥을 살짝 접었다. 장갑의 결이 아직 남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세르주의 손을 잡았던 감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그 감각을 곱씹을 시간은 없었다.알렉세이가 그 순간을 사람들 앞에 올려놓으려는 참이었다.그가 부드럽게 웃었다."다만 모두가 보았습니다. 세르주 경께서 공작을 위해 몸을 던지셨고, 공작께서도 그 손을 잡으셨지요.제국의 의전상 확인이 필요할 듯합니다."관람석이 술렁였다.알렉세이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낮췄기 때문에 더 멀리 갔다."세르주 경과 공작의 관계가 공식화되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아, 저걸 지금 묻는다고.숨을 삼켰다. 독화살 다음에 관계 확인이라니, 이건 위기관리 순서가 아니라 일부러 순서를 망가뜨리는 쪽이었다.사람이 죽을 뻔한 자리에서 사람들은 놀랄 만큼 빨리 가십으로 돌아왔다.정확히는, 누군가가 돌아가게 만들었다.레온의 손이 검집 위에서 굳었다. 다미안은 입을 다문 채 알렉세이 쪽을 보고 있었다.세르주는 내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일어섰다."전하."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나갔다."방금 이 자리에서 확인할 것은 제 관계가 아니라, 제국 귀빈석을 향한 공격입니다.기사단장님은 기사단장으로서 움직이셨고, 저는
토너먼트 관람석 배치표는 아침까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붉은 선으로 표시된 귀빈석을 보았다.황제의 단상과 너무 가깝고, 경기장에서도 너무 잘 보이는 자리였다.숨을 곳이 없었다. 의전청이 보낸 배치표답게 예의는 완벽했고, 완벽한 예의는 가끔 덫처럼 보였다.다미안이 맞은편에서 말했다."벨포르 공작가 자리는 황제 폐하의 왼쪽 아래입니다.사교계가 보기에는 영광이고, 경호 입장에서는 좋지 않습니다.""그래. 영광이라는 말은 늘 도망갈 문이 없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레온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제가 뒤에 서겠습니다. 관람석 난간과 계단 쪽을 동시에 보겠습니다.""너 혼자 다 보려고 하지 마. 눈은 두 개고, 관람석은 훨씬 넓어."배치표 가장자리를 눌렀다.어젯밤까지 감사원 인장이 찍혀 있던 자리에 의전청 인장이 찍혔고, 오늘은 그 인장이 나를 사람들 앞에 세웠다."다미안, 관람석 출입 명단을 받아 와. 레온은 의전청 경비 배치와 겹치지 않는 위치를 잡고. 테오도어 집사님은 비상용 마차를 북쪽 문 가까이에 준비해 주세요."테오도어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그리하겠습니다, 공작님."마지막으로 붉은 선이 그어진 배치표를 접었다. 종이가 접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무대라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내려올 길은 미리 봐 두어야 했다.***토너먼트장은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소리로 가득 찼다.말발굽이 흙바닥을 두드렸고, 관람석의 비단 소매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귀족들은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며 웃었고, 그들의 시선은 경기보다 자리의 높이에 더 오래 머물렀다.정해진 귀빈석에 앉아 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다.황제의 단상 아래쪽에는 기사단이 줄지어 섰다.그중 세르주는 귀빈석으로 오르는 낮은 계단 옆에 있었고,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무도회의 예복이나 알현실의 정복 외투와 달랐다. 저 옷은 사람을 가리기보다 무엇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그가 잠깐 시선을 들었다.나와 눈이 마주친 시간은 스치듯 짧았다. 그는 곧 다시 경기
공문은 다음 날 오전에 도착했다.테오도어가 은쟁반 위에 봉투를 올려놓았을 때, 집무실 안의 말소리가 먼저 멈췄다.봉투에는 감사원 인장이 찍혀 있었다.어제 다미안이 말한 그대로였다. 말은 오래 떠돌지 않았다. 곧바로 종이가 되어 봉인까지 갖춘 채 내 책상 위에 놓였다.다미안이 봉투를 열었다.레온은 창가 쪽에 서 있다가 한 걸음 다가왔고, 테오도어는 문가에 남아 조용히 대기했다.방 안의 누구도 먼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서가 드러낼 것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감사원 조사 요청서입니다."다미안이 첫 줄을 읽고,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남부 교역 확장 건에 제이황자파 사적 자금이 섞였다는 의혹.벨포르 공작가가 황실의 중립을 훼손했다는 주장. 조사 개시 전 황제 폐하께 예비 보고를 청한다는 형식입니다."레온의 턱이 굳었다."루머를 그대로 문서에 옮겼군요.""그보다 조금 더 나쁩니다." 다미안이 마지막 장을 짚었다. "교역권 심사 보류와 황궁 출입 제한까지 함께 건의했습니다.기각되지 않으면, 조사 자체가 처분처럼 보이게 됩니다."봉투의 접힌 자국을 보았다. 목덜미가 먼저 차가워졌다.소문은 사람을 귀찮게 만들지만, 공문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그럼 답도 문서로 해야지."책상 위의 서류 묶음을 앞으로 밀었다."승인서 원본, 관세 납부 기록, 남부 상단 선급금 증서, 공작가 장부 사본.그리고 어젯밤 소문이 돌았던 자리 목록까지. 원본은 내가 들고 가고, 사본은 다미안이 순서대로 묶어.""폐하 앞에서 직접 설명하실 겁니까?""나를 부른 문서잖아. 대신 읽어 주는 사람 뒤에 숨을 이유가 없지."레온이 낮게 말했다."알현실까지 동행하겠습니다."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황궁으로 가는 길은 혼자 걸어도 같았지만, 같은 편이 뒤에 있다는 표시는 필요했다.***황제의 알현실은 낮인데도 어두웠다.높은 창으로 빛이 들어왔지만, 빛은 바닥의 문양 위에서 끊겼다.황제는 옥좌에 앉아 있었고, 좌우에는 감사
다음 날 아침, 소문은 나보다 먼저 관저에 도착했다.테오도어가 은쟁반 위에 편지 세 장을 올려놓았다.봉인은 모두 달랐고, 문장은 정중했다. 그런데 편지의 첫머리는 거의 같았다.남부 교역 확장이 제이황자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첫 줄을 읽고 잠깐 눈을 감았다.아, 빠르다. 정말 빠르다.어젯밤 이름표가 오늘 아침 광고 문구가 됐다.유통 경로를 봐야겠다고 말한 지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소문은 이미 시제품 출시까지 끝낸 상태였다."세 장 모두 같은 내용이야?""표현은 다릅니다."다미안이 종이를 넘겼다. 눈 밑에 피로가 살짝 내려앉았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했다."첫 번째는 '제이황자 전하의 후의',두 번째는 '남부 교역권의 새로운 후원자',세 번째는 더 노골적입니다. '벨포르가 황자파로 돌아섰다'고 했습니다."레온의 얼굴이 굳었다."모함입니다.""맞아."편지를 내려놓았다."그런데 모함이라고 외치면 모함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겠지."분노는 나중이다. 지금 화를 내면 감정전이 되고, 감정전에서는 소리를 먼저 지른 쪽이 진다. 이건 배포전이다.누가 먼저 문장을 뿌렸고, 누가 더 믿기 쉬운 증거를 붙이느냐의 싸움."다미안, 어젯밤 목록."다미안은 기다렸다는 듯 얇은 묶음을 책상 위에 올렸다."말씀하신 대로 정리했습니다. 이름표, 발화 위치, 들은 사람, 다음으로 옮긴 사람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적었습니다.""좋아. 그리고 남부 교역 서류."테오도어가 이번에는 묵직한 서류 상자를 가져왔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공작님께서 수도로 오시기 전 준비하라 하신 계약 사본입니다.""고마워요, 테오도어 집사님."테오도어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물러났다.서류 첫 장을 펼쳤다.남부 교역로 확장 승인서, 상단 납품 계약, 관세 납부 기록, 벨포르 인장과 남부 남작가들의 서명. 종이는 무겁고, 마른 잉크 냄새가 났다."이 소문이 틀렸다는 증거는 여기 있어.""시점이 맞지 않습니다."다미안이 바로
다음 날 오전, 서재의 잉크 냄새는 전날보다 옅었고 내 눈 밑의 피로는 전날보다 선명했다.장부와 찢긴 연대기를 나란히 두고 밤을 보낸 대가였다.공작가 침대는 비싼 만큼 푹신했지만,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굴러다니면 깃털 매트리스도 돌판이 됐다.문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들어와."말하고 나서 잠깐 멈췄다.'공작이면 들어오라가 맞나, 들어오십시오가 맞나.'다미안이면 반말이어도 되는 것 같은데, 문밖 사람이 다미안이 아닐 수도 있었다.다행히 문을 연 건 다미안이었다.그는 검은 가죽 서류철 하나를 들었고, 손끝에는 얇은 면
황궁 알현은 이상할 정도로 무난하게 끝났다.무난하다는 말이 이렇게 수상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황제 제라드 폰 아르네스는 오래 닦인 금속처럼 차고 반듯한 사람이었고, 내 안부를 물으면서도 내 대답보다 내가 단어를 고르는 속도를 재는 듯했다.나는 벨포르의 충성을 말했고, 황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세르주는 끝까지 필요한 말만 했다.큰 사건은 없었다. 다만 황제가 누구를 먼저 보는지, 대신들이 숨을 죽이는 타이밍, 황제가 세르주에게 말할 때와 나를 볼 때의 말끝 차이를 죄다 머릿속에 담아 왔다.정보 수집 모드였다. 살아
"벨포르 공작님. 기사단장 각하께서 직접 호위를 맡으셨습니다."황궁 서쪽 응접실 문 앞에서 시종이 그렇게 말했다.잠깐만. 원작에선 이 시점에 세르주랑 말도 안 섞었는데?손에 낀 장갑 안쪽이 답답해졌다. 새 장갑이라 그런 건지, 내가 지금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건지 구분이 안 됐다.황궁 응접실의 문양은 전부 금으로 반짝였고, 바닥은 사람 얼굴이 비칠 만큼 닦여 있었으며, 나는 어느 문이 알현실로 이어지는지 아직도 제대로 몰랐다.절차는 몸이 외우고 있었다.응접실에서 기다린다, 황궁 시종이 부르면 일어난다, 황제의 명이 먼저
독.단어가 먼저 떠올랐고, 몸은 그다음에야 알아들었다.명치 끝에 뜨거운 바늘 같은 통증이 박혔다.그 감각이 아래로 퍼지기 전에 의자에서 밀려나듯 일어났다.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가 부딪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고, 잔은 아직 내 손끝에 걸려 있었다.우아하게 죽을 팔자는 아니라는 걸 그 순간 확신했다.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목 안쪽이 긁히고, 뜨거운 차와 침이 뒤섞여 한꺼번에 올라왔다."공작님!"시종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말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나는 책상 옆으로 몸을 숙인 채 게워 냈다. 찻물이 바닥에 흩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