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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찻잔을 보존하십시오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03 21:53:43

독.

단어가 먼저 떠올랐고, 몸은 그다음에야 알아들었다.

명치 끝에 뜨거운 바늘 같은 통증이 박혔다.

그 감각이 아래로 퍼지기 전에 의자에서 밀려나듯 일어났다. 책상 모서리에 허벅지가 부딪혔지만 아픈 줄도 몰랐고, 잔은 아직 내 손끝에 걸려 있었다.

우아하게 죽을 팔자는 아니라는 걸 그 순간 확신했다. 손가락을 입안으로 밀어 넣자 목 안쪽이 긁히고, 뜨거운 차와 침이 뒤섞여 한꺼번에 올라왔다.

"공작님!"

시종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말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책상 옆으로 몸을 숙인 채 게워 냈다. 찻물이 바닥에 흩어지고, 풀잎 냄새에 시큼한 기운이 섞여 코 안쪽을 찔렀다.

눈물이 맺혔고, 목은 불에 긁힌 것처럼 따가웠다.

살면서 이런 방식으로 품위가 망가질 줄은 몰랐다. 아니, 지금 품위가 문제냐. 방금 독을 마셨는데.

숨을 고르려다 시종의 얼굴을 봤다.

그는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경직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내가 토해 낸 것을 본 뒤에야 입가가 아주 조금 풀렸고, 그제야 눈가에 안도가 스쳤다.

'...시종 표정 저거 봐. 이미 알고 있었네.'

분노는 이상하게 뜨겁지 않았다. 명치 안쪽은 아직도 뜨거운데, 머리만 찬물에 담근 것처럼 식었다.

나는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지 않고, 쟁반 가장자리로 밀어붙였다. 흘러내린 찻물이 은쟁반 위에서 얇게 번졌다.

"물러서."

내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그래도 시종은 움직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람을 불러야 하는데, 공작 침실에서 사람을 어떻게 부르는지 몰랐다.

'어떻게 불러야 하지. 말로 해야 하나? 육성으로 부를거 같지는 않은데?'

주변을 둘러보다 책상 옆 금색 줄을 잡아당기자, 먼 곳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됐다. 일단 아무거나 맞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겹쳤다. 문이 열리기 전, 나는 허리를 펴고 잔을 가리켰다.

속은 아직 뒤집혀 있었지만, 적어도 손가락만은 떨리지 않게 붙들 수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그리고 저 사람을 방 밖으로 내보내지 마세요."

젊은 하녀 하나가 문가에서 멈췄다. 눈이 바닥의 찻물과 내 얼굴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테오도어 집사님을 부르세요. 찻잔과 쟁반은 그대로 보존하고, 누구도 만지지 못하게 하십시오. 주치의도 조용히 부르세요."

말을 끝내고 나서야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들한테 명령해도 되는 거 맞나.

맞겠지. 공작이라며. 처형 예정 악녀라도 일단 직책은 공작이잖아.

하녀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공작님."

시종의 눈동자가 그때 처음 흔들렸다.

늦었다. 네가 안심한 것보다 내가 사람 부르는 게 조금 더 빨랐으니까.

***

테오도어 헤르만은 소리 없이 들어왔다.

정말로 소리가 없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 있었고, 그 사이에 마른 백발의 집사가 이미 방 안에 서 있었다.

이 집사님 존재감이 뭐 이래? 사람이 아니라 관저 규칙이 걸어 들어온 느낌이었다.

"공작님."

그는 바닥의 흔적, 쟁반 위 잔, 문가에 붙들린 시종을 차례로 보았다.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는데, 시선이 지나간 순서만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차에 문제가 있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짧았다. 너무 짧아서 오히려 숨이 막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거나 묻거나, 적어도 '괜찮으십니까'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지금은 저 무표정이 낫다. 울고불고하면 내가 먼저 쓰러진다.

"테오도어 집사님, 저 시종을 따로 두고 감시하시고, 주방과 차를 준비한 사람도 확인하십시오. 찻잔과 쟁반은 그대로 두고, 주치의가 보기 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세요."

말을 하면서도 호칭이 입안에서 걸렸다.

집사님이 맞나, 집사라고 해야 하나, 공작이면 그냥 이름을 부르나. 권력자의 호칭 매뉴얼 같은 건 내 머리에 없었다.

테오도어는 그 어설픈 틈을 못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대로 하겠습니다. 공작님, 먼저 앉으시지요."

군더더기 없는 말이었다. 위로도, 호들갑도 없이. 사실만 전달하는 집사. 무섭게 유능하네.                      

                                                                                                                                                                                                                                           

의자에 앉자 그제서야 다리가 떨렸다.

바닥에 번진 찻물은 늦은 오후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 반짝임이 더 불쾌했다.

시종은 두 하인에게 양팔을 잡힌 채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변명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공작님."

테오도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미안 님께도 알리겠습니다."

다미안.

서자이자 이복남동생. 유능하고, 냉정하고, 원작 속 카이렌을 경멸하던 사람.

아 진짜. 독차 다음 일정이 가족 면담이라니, 이 세계는 일정표도 악의적으로 짠다.

***

다미안 벨포르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은발은 나와 비슷했지만 눈은 회색이었고, 시선이 방 안을 훑는 속도는 느리지 않았다.

바닥의 얼룩, 쟁반, 문가의 시종, 내 손끝까지 보고 나서야 그는 고개를 숙였다.

"누님."

존댓말인데 따뜻하지는 않다. 친근함이 빠진 호칭은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독차라 들었습니다."

"아직 확인 전이야."

"그런데 시종은 붙잡아 두셨고, 찻잔은 보존하라 명하셨군요."

다미안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멈췄다.

"평소와 다르십니다."

'...들킨 건가.'

너무 빠르잖아. 등장하자마자 왜 핵심을 찌르는데. 이 사람이 예리한건가? 아니면 내가 지금 너무 티가 나는 건가.

나는 찻잔 대신 다미안을 봤다. 목은 아직 아팠고, 입안에는 떫은맛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은 어떻게든 공작의 것처럼 붙들어 두었다.

"다미안, 독을 마신 사람이 평소와 같기를 바라니?"

다미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씀은 타당합니다. 다만 누님께서 타당한 말씀을 먼저 하시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와. 이 집안 대화 난이도 뭐야.

테오도어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인들에게 눈짓했고, 시종은 조용히 끌려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나는 그 작은 소리를 들으며 숨을 삼켰다. 방 안에는 찻물 냄새, 시큼한 기운, 그리고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정적이 남았다.

"그러면 오늘부터 드문 일을 자주 보게 될 거야."

말하고 나서 나도 놀랐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평온했다.

다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쟁반 위의 잔을 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

"누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살고 싶다.'

그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았다. 너무 솔직했고, 너무 초라했다.

공작이 자기 방에서 독차를 마신 뒤 남동생에게 할 말로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말이 남았다.

나는 조금 전 내가 게워 낸 바닥의 얼룩을 봤다. 처형 장면보다 그 얼룩이 더 현실적이었다.

목이 날아가는 미래보다, 지금 타는 목구멍과 떫은 혀가 먼저였다.

그래. 죽지는 말자.

거창한 각오 같은 건 없었다. 멋있게 운명을 거부할 정신도 없었다.

다만 다시는 누가 건넨 차를 아무 생각 없이 마시지 않겠다는 아주 현실적인 결론만 있었다.

"누가 이 차를 준비했는지, 누구의 지시였는지 알아내."

나는 다미안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미안. 이 일은 아직 방 밖으로 새지 않게 해."

다미안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누님."

그는 고개를 숙였지만, 시선은 끝까지 나를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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