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공작을 사랑한 대가는 처형이었다. 죽기 직전, 세레나는 자신의 사형 승인서에 테오도르 칼베른의 서명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일곱 해 전으로 회귀한 그녀는 이름을 버리고 치료사 ‘세리스’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그녀를 알아보고, 성전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남자와 맺은 두 번째 혼인. 이번 생에서 세레나는 사랑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붙잡는 대신 그녀가 떠날 권리를 지키기 시작한다.
더 보기지하 감옥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와 천장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한 방울이 바닥의 얕은 웅덩이를 때릴 때마다 철창 너머의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레나 베일런은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
처음 갇혔을 때는 세어 보았다. 백을 넘기고, 천을 넘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숫자라도 붙잡고 있으면 아직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일이 정해진 뒤로는 그마저 그만두었다.
결정을 내릴 권리는 오래전에 그녀의 손을 떠났다.
“마지막 식사다.”
철문 아래의 작은 구멍이 열리며 나무 쟁반이 밀려 들어왔다.
굳은 빵 한 조각과 묽은 수프, 나무잔에 담긴 물이 전부였다.
세레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발목을 휘감은 족쇄가 움직일 때마다 뼈를 긁었지만,
이제는 통증조차 새롭지 않았다.
간수가 문을 두드렸다.
“먹어 둬. 처형대까지 걸어가려면 힘이 필요할 테니까.”
목소리에는 조롱도 연민도 없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업무를 확인하는 말투였다.
세레나는 한참 뒤에야 손을 뻗었다.
손톱 아래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이어진 심문 때문이 아니었다.
감옥으로 끌려오던 날, 복도에 쓰러진 늙은 죄수의 상처를 막아 주다가 묻은 피였다.
치료사는 성전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를 치료해선 안 된다고 간수가 소리쳤지만,
피가 흐르는 몸 앞에서 허가를 기다리는 습관은 끝내 들이지 못했다.
그 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수를 모르고 남의 목숨에 끼어든 손.
공작의 관심을 구걸하고, 귀족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마침내 공작의 정략결혼 상대에게 독을 먹인 손.
세레나는 나무잔을 들었다.
물은 맑아 보였다. 그러나 잔이 입술 가까이 왔을 때 희미한 향이 났다.
씁쓸한 아몬드와 오래된 쇠붙이가 섞인 냄새였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심장을 빠르게 멈추게 하는 독은 아니었다.
숨을 얕게 만들고 근육을 무르게 해, 사형수의 저항을 막는 종류였다.
처형을 앞둔 죄수에게 종종 사용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황실 재판소는 공식적으로 그런 약의 존재를 부정했다.
세레나는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간수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물을 마셔라.”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며칠간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러나 발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곧 마시고 싶어질 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세레나는 잔을 바라보았다.
사형 선고가 확정된 사람에게 굳이 독을 먹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그녀가 처형대에 오르기 전까지 입을 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습게도 세레나는 그 사실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누군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두려워했다.
무릎을 세운 채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재판에서 그녀는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마리엘의 차에 독을 넣지 않았다.
황실 성물 보관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공작가의 인장을 훔치지 않았다.
그러나 증거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세레나의 방에서 독약병이 발견됐고,
그녀의 필체로 작성된 협박 편지가 나왔으며,
성물 보관실 출입 명부에는 베일런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가 치료사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독을 다룰 지식이 있으며, 사람의 몸을 해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
재판관은 그것을 동기와 능력이라 불렀다.
세레나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한때 그 손은 테오도르 칼베른의 상처를 수없이 꿰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의 옆구리에 박힌 화살촉을 뽑았고,
열에 들뜬 밤이면 식은 천을 갈아 주었다.
공작가의 의원들이 손을 놓은 순간에도 그녀는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부상이 생길 때마다 사람을 보냈다.
세레나는 그것을 신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사랑에 가장 가까운 증거라고 믿었다.
손가락 사이로 족쇄의 사슬이 미끄러졌다.
필요와 사랑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구별하지 못한 대가는 목숨이었다.
하녀는 세레나에게 고개를 숙인 뒤 창문으로 내려가지 않고, 감시가 비어 있는 복도를 통해 빠져나갔다.세레나는 문을 잠그고 약제함을 책상 위에 올렸다.바깥에서는 별관의 불을 끄라는 고함과 종소리가 이어졌다. 유리창 너머로 붉은 불빛이 번졌고, 어머니의 진료실이 있던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세레나는 창문 앞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불길을 바라본다고 사라진 기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구해 온 것을 확인하고,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야 했다.에마가 젖은 천으로 세레나의 얼굴에 묻은 그을음을 닦아 주려 하자, 세레나는 천을 받아 직접 닦았다.“에마의 손부터 확인하겠습니다.”“제 손은 괜찮아요.”“불 속을 지나왔습니다. 열기 때문에 감각이 둔해졌을 수도 있어요.”붕대를 풀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의 색과 온도, 통증 변화를 확인했다. 에마가 문제없다고 말한 뒤에야 세레나는 자신의 장갑을 벗었다.손바닥에는 밧줄에 쓸린 붉은 자국이 남았지만 피부가 찢어지지는 않았다.두 사람은 책상에 앉아 어머니의 연구서를 다시 펼쳤다.불길을 피해 가져온 책에는 마지막 장이 없었다.세레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페이지를 촛불 가까이 가져갔다. 찢긴 자국은 거칠었지만, 종이 표면에는 앞장을 눌러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 장을 작성할 때 힘을 주어 쓴 글씨가 바로 앞 페이지에 희미하게 새겨진 것이다.맨눈으로는 선 몇 개만 보였다.“무슨 글씨인지 알 수 있을까요?”에마가 물었다.세레나는 서랍에서 잘게 간 흑연 가루를 꺼냈다. 평소 치료 도구의 금속 균열을 확인할 때 쓰던 것이었다. 부드러운 천에 가루를 묻혀 종이 위를 아주 가볍게 문지르자, 눌린 홈 사이로 검은 선이 서서히 드러났다.어머니의 필체가 거꾸로 떠올랐다.문장은 완전하지 않았다. 마지막 장을 찢은 사람이 일부러 앞 페이지까지 긁어 낸 듯, 여러 단어가 상처처럼 지워져 있었다.세레나는 거울을 가져와 반사된 글자를 읽었다.‘생명인장은 죽은 것을 살리지 못한다.’그 아래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약장을 옆으로 밀었다. 마룻바닥이 긁히며 낮은 소리가 났고, 동시에 문밖의 대화가 멈췄다.“안에 누가 있나?”세레나는 약장 뒤의 나무판을 열었다.어두운 통로 아래로 밧줄과 작은 발판이 보였다. 성인 두 사람이 함께 타기에는 좁았지만, 한 사람씩 내려가면 지하 약초 저장실로 이어질 수 있었다.“에마가 먼저 내려가세요.”“아가씨께서 먼저 가세요. 책도 들고 계시잖아요.”“밧줄을 아래에서 고정해야 제가 약제함까지 들고 내려갈 수 있습니다.”에마는 더 다투지 않고 승강구 안으로 몸을 넣었다.문고리가 돌아갔다.“잠겼는데?”“열쇠가 바뀐 것 같습니다.”“부수어.”문 바깥에서 어깨로 나무를 들이받는 소리가 울렸다.에마의 발이 아래에 닿았다는 신호가 오자 세레나는 약제함을 끈으로 묶어 먼저 내렸다. 연구서의 무게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어머니가 남긴 병의 기록, 성전과 광산을 연결할 증거, 그리고 누군가 가져간 마지막 장.문이 다시 한 번 크게 흔들렸다.세레나는 승강구 안으로 들어간 뒤 나무판을 닫으려 했다.그 순간 진료실 문이 안쪽으로 부서졌다.등불을 든 하인의 그림자가 방바닥을 가로질렀다. 세레나는 나무판을 완전히 닫지 못한 채 몸을 낮췄고, 좁은 틈 사이로 장화를 신은 발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누가 뒤졌어.”하인이 열린 금고를 발견했다.“부인께 바로 알려.”“먼저 기름부터 뿌려. 안에 있던 사람이 아직 건물에 있을 수도 있어.”세레나는 입술을 다문 채 밧줄을 잡았다.에마가 아래에서 밧줄을 당겼다.세레나가 몸을 내리자 장갑 안쪽으로 거친 마찰이 전해졌다. 좁은 통로에서는 위에서 붓는 기름 냄새가 훨씬 짙게 느껴졌다.발이 저장실 바닥에 닿는 순간, 머리 위에서 불붙는 소리가 났다.마른 종이와 약초는 순식간에 불을 먹었다. 승강구 안으로 붉은 빛이 번졌고, 뜨거운 공기가 아래로 밀려왔다.에마가 약제함을 끌어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어디로 나가요?”세레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에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세레나는 힘으로 돌리는 대신 손바닥을 금고 표면에 댔다.진료실에서 에마를 치료할 때 보였던 성맥의 빛은 사람의 몸에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철문 안쪽에서도 아주 희미한 흐름이 보였다. 금속 사이에 백휘석 가루를 넣어 만든 잠금장치였다. 올바른 성력의 흐름을 가진 사람이 접촉해야 내부 걸쇠가 움직이는 구조였다.어머니는 혈통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금고를 잠갔다.세레나는 성력을 손바닥 전체로 밀어 넣지 않았다.펜던트와 철문 사이에 끊긴 부분만 찾았다. 에마의 손바닥에서 했던 것처럼 막힌 지점에 아주 가느다란 길을 놓자 금속 안쪽에서 빛이 번졌다.찰칵.작은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에마가 놀라 세레나를 바라봤지만, 세레나는 안쪽에 든 물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금고 안에는 붉은 끈으로 묶인 책 한 권과 작은 나무 상자,편지 봉투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책은 검은 가죽으로 표지를 씌웠고, 겉면에는 제목 대신 은실로 성맥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세레나는 붉은 끈을 손끝으로 쓸었다.어머니의 연구 기록이었다.책을 꺼내는 순간 금고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얇은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에마가 그것을 주웠다.“아가씨께 드리는 편지 같아요.”봉투 앞면에는 엘레노라의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세레나에게.세레나는 봉투를 받았지만 바로 뜯지 않았다. 봉랍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한쪽 모서리에 누군가 칼을 넣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자신보다 먼저 이 금고를 연 사람이 있었다.“누가 읽고 다시 넣어 둔 걸까요?”에마가 물었다.세레나는 봉투 안의 편지를 꺼냈다.편지지는 남아 있었지만 내용은 한 줄뿐이었다.‘이 책의 마지막 장은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된다.’그 아래에는 문장이 이어졌을 만한 빈 공간이 넓게 남아 있었다. 잘라 낸 흔적은 없었다.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한 문장만 적은 것인지, 뒤의 글씨가 지워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세레나는 연구서를 펼쳤다.첫 장에는 성맥의 기본
세레나는 건물 옆의 좁은 길로 들어갔다.어머니는 환자들이 본관을 통과하지 않도록 별도의 출입문을 사용했다.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지 않고 치료했던 탓에 오르센과 자주 다투었지만, 엘레노라는 자신의 진료실에 들어오는 사람에게만큼은 어떤 문장을 붙이지 않았다.세레나도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약초를 말리던 선반, 붉은 실로 묶은 진료 기록, 어머니가 사용하던 작은 은제 청진관. 기억 속 풍경은 선명했지만,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한 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다.헬레나는 방을 정리했다고 말했다.세레나는 그 말을 믿었다.전생의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다른 사람의 말로 확인했다.약재 반입문에는 녹이 슨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세레나는 약제함에서 가느다란 봉합 바늘과 작은 집게를 꺼냈다. 자물쇠를 열어 본 경험은 없었지만, 오래된 구조라 내부의 걸쇠가 단순했다. 집게로 내부 판을 밀고 바늘을 돌리자 금속이 안쪽에서 몇 번 걸렸다.에마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치료사들은 원래 자물쇠도 열어요?”“환자 몸 안의 쇳조각보다는 단순하네요.”세 번째 시도 끝에 걸쇠가 풀렸다.문을 조금 열자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틈 사이로 빠져나왔다. 마른 약초와 먼지, 오래된 목재 냄새 사이로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남아 있었다.세레나의 손이 문고리에서 멈췄다.어머니가 옷장과 책 사이에 넣어 두던 향낭 냄새였다.시간은 사람을 데려갔지만, 냄새는 이상하리만큼 오래 남았다.에마가 먼저 들어가려 하자 세레나는 약제함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잠깐 기다리세요.”그녀는 문 안쪽 바닥과 천장을 확인했다. 약품을 보관했던 방에는 쥐약이나 독성 약초가 남아 있을 수 있었고,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공간의 곰팡이도 위험했다.창문 하나를 조금 열어 공기를 통하게 만든 뒤에야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어머니의 진료실은 누군가 오래전에 떠난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책상 서랍은 전부 열려 있었고, 벽면의 약초 표본은 이름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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