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처형에 서명한 공작과 계약 결혼했다

내 처형에 서명한 공작과 계약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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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을 사랑한 대가는 처형이었다. 죽기 직전, 세레나는 자신의 사형 승인서에 테오도르 칼베른의 서명이 남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일곱 해 전으로 회귀한 그녀는 이름을 버리고 치료사 ‘세리스’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그녀를 알아보고, 성전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남자와 맺은 두 번째 혼인. 이번 생에서 세레나는 사랑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붙잡는 대신 그녀가 떠날 권리를 지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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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공작이 서명한 죽음

지하 감옥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와 천장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한 방울이 바닥의 얕은 웅덩이를 때릴 때마다 철창 너머의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세레나 베일런은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

처음 갇혔을 때는 세어 보았다. 백을 넘기고, 천을 넘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숫자라도 붙잡고 있으면 아직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일이 정해진 뒤로는 그마저 그만두었다.

결정을 내릴 권리는 오래전에 그녀의 손을 떠났다.

“마지막 식사다.”

철문 아래의 작은 구멍이 열리며 나무 쟁반이 밀려 들어왔다.

굳은 빵 한 조각과 묽은 수프, 나무잔에 담긴 물이 전부였다. 

세레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발목을 휘감은 족쇄가 움직일 때마다 뼈를 긁었지만, 

이제는 통증조차 새롭지 않았다.

간수가 문을 두드렸다.

“먹어 둬. 처형대까지 걸어가려면 힘이 필요할 테니까.”

목소리에는 조롱도 연민도 없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업무를 확인하는 말투였다.

세레나는 한참 뒤에야 손을 뻗었다.

손톱 아래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이어진 심문 때문이 아니었다. 

감옥으로 끌려오던 날, 복도에 쓰러진 늙은 죄수의 상처를 막아 주다가 묻은 피였다. 

치료사는 성전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를 치료해선 안 된다고 간수가 소리쳤지만, 

피가 흐르는 몸 앞에서 허가를 기다리는 습관은 끝내 들이지 못했다.

그 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수를 모르고 남의 목숨에 끼어든 손.

공작의 관심을 구걸하고, 귀족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마침내 공작의 정략결혼 상대에게 독을 먹인 손.

세레나는 나무잔을 들었다.

물은 맑아 보였다. 그러나 잔이 입술 가까이 왔을 때 희미한 향이 났다. 

씁쓸한 아몬드와 오래된 쇠붙이가 섞인 냄새였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심장을 빠르게 멈추게 하는 독은 아니었다. 

숨을 얕게 만들고 근육을 무르게 해, 사형수의 저항을 막는 종류였다. 

처형을 앞둔 죄수에게 종종 사용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었지만, 

황실 재판소는 공식적으로 그런 약의 존재를 부정했다.

세레나는 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간수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물을 마셔라.”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

며칠간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러나 발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곧 마시고 싶어질 거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세레나는 잔을 바라보았다. 

사형 선고가 확정된 사람에게 굳이 독을 먹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누군가 그녀가 처형대에 오르기 전까지 입을 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습게도 세레나는 그 사실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누군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두려워했다.

무릎을 세운 채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댔다.

재판에서 그녀는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했다.

마리엘의 차에 독을 넣지 않았다.

황실 성물 보관실에 들어간 적이 없다.

공작가의 인장을 훔치지 않았다.

그러나 증거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세레나의 방에서 독약병이 발견됐고, 

그녀의 필체로 작성된 협박 편지가 나왔으며, 

성물 보관실 출입 명부에는 베일런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녀가 치료사였다는 사실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

독을 다룰 지식이 있으며, 사람의 몸을 해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

재판관은 그것을 동기와 능력이라 불렀다.

세레나의 손가락이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한때 그 손은 테오도르 칼베른의 상처를 수없이 꿰맸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의 옆구리에 박힌 화살촉을 뽑았고, 

열에 들뜬 밤이면 식은 천을 갈아 주었다. 

공작가의 의원들이 손을 놓은 순간에도 그녀는 침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감사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부상이 생길 때마다 사람을 보냈다.

세레나는 그것을 신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사랑에 가장 가까운 증거라고 믿었다.

손가락 사이로 족쇄의 사슬이 미끄러졌다.

필요와 사랑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구별하기 어려웠다.

구별하지 못한 대가는 목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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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챕터
1. 공작이 서명한 죽음
지하 감옥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다.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와 천장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한 방울이 바닥의 얕은 웅덩이를 때릴 때마다 철창 너머의 어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세레나 베일런은 그 소리를 세지 않았다.처음 갇혔을 때는 세어 보았다. 백을 넘기고, 천을 넘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숫자라도 붙잡고 있으면 아직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사형 집행일이 정해진 뒤로는 그마저 그만두었다.결정을 내릴 권리는 오래전에 그녀의 손을 떠났다.“마지막 식사다.”철문 아래의 작은 구멍이 열리며 나무 쟁반이 밀려 들어왔다.굳은 빵 한 조각과 묽은 수프, 나무잔에 담긴 물이 전부였다. 세레나는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발목을 휘감은 족쇄가 움직일 때마다 뼈를 긁었지만, 이제는 통증조차 새롭지 않았다.간수가 문을 두드렸다.“먹어 둬. 처형대까지 걸어가려면 힘이 필요할 테니까.”목소리에는 조롱도 연민도 없었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사람이 업무를 확인하는 말투였다.세레나는 한참 뒤에야 손을 뻗었다.손톱 아래에는 피가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이어진 심문 때문이 아니었다. 감옥으로 끌려오던 날, 복도에 쓰러진 늙은 죄수의 상처를 막아 주다가 묻은 피였다. 치료사는 성전의 허가를 받지 않은 자를 치료해선 안 된다고 간수가 소리쳤지만, 피가 흐르는 몸 앞에서 허가를 기다리는 습관은 끝내 들이지 못했다.그 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분수를 모르고 남의 목숨에 끼어든 손.공작의 관심을 구걸하고, 귀족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마침내 공작의 정략결혼 상대에게 독을 먹인 손.세레나는 나무잔을 들었다.물은 맑아 보였다. 그러나 잔이 입술 가까이 왔을 때 희미한 향이 났다. 씁쓸한 아몬드와 오래된 쇠붙이가 섞인 냄새였다.그녀의 손이 멈췄다.심장을 빠르게 멈추게 하는 독은 아니었다. 숨을 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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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야초의 향기 아래
철문 바깥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돌아가고,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등불의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시간이다.”집행관 두 명과 사제 한 명이 서 있었다.사제는 세레나를 보지 않았다. 품에 안은 기도서를 펼친 채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구절을 외울 뿐이었다.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세레나는 벽을 짚고 일어섰다.오랫동안 굽혀 있던 무릎이 펴지며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몸이 휘청였지만 집행관의 손이 닿기 전에 스스로 균형을 잡았다.“부축은 필요 없습니다.”집행관이 비웃듯 입꼬리를 움직였다.“처형대에 오르는 데도 체면이 필요한가?”세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몸에 남은 마지막 것이 체면이라면, 그것마저 타인의 손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좁은 계단을 올라가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재판소의 지하와 처형장을 잇는 회랑은 유난히 길었다. 양쪽 벽에는 제국의 역대 황제와 성인들의 부조가 새겨져 있었다. 정의와 자비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돌로 된 눈을 내리깔고 죄수의 마지막 걸음을 지켜보고 있었다.회랑 끝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연한 하늘색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쓸었다. 진주가 박힌 신발과 눈처럼 흰 장갑, 흐트러짐 없이 말아 올린 금발.세레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마리엘 베일런이 먼저 멈췄다.“언니.”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어릴 적 세레나가 열병에 걸렸을 때 침대 곁에서 동화를 읽어 주던 목소리와 같았다. 사교계에서 누구도 마리엘을 미워하지 못한 이유도 그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따뜻한 천으로 덮인 채 피부 안쪽으로 천천히 파고들었다.집행관들이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곧 칼베른 공작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영애를 함부로 재촉할 수는 없었다.마리엘이 세레나에게 다가왔다.“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그녀의 눈가가 희미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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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테오도르 칼베른의 서명
처음으로 존칭이 사라졌다.마리엘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세레나는 그녀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뒤에서 마리엘이 무언가 말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회랑 끝의 대기실에는 나무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창문은 작았고, 쇠창살 사이로 흐린 하늘이 보였다.집행관이 두꺼운 서류철을 탁자 위에 펼쳤다.“형 집행 전 확인 절차다.”세레나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집행관은 죄목과 판결문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황실 성물 훼손, 고위 귀족 독살 미수, 공문서 위조, 성전 치료 규율 위반.마지막에는 사형을 승인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졌다.황실 재판관.루멘 성전 대신관.피해자 측 대리인.그리고 북부 칼베른 공작.세레나의 눈이 문서 아래에서 멈췄다.테오도르 칼베른.반듯한 글씨 아래 검은 늑대 문양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그녀는 그 필체를 알고 있었다.전쟁터에서 보내온 짧은 명령서와 약재 요청서, 생일마다 도착하던 의례적인 카드. 단 한 번도 사랑을 적지 않았으면서도, 세레나가 그 여백까지 사랑하게 만들었던 글씨였다.집행관이 서류를 접으려 했다.세레나가 손을 뻗었다.“잠깐.”“무엇을 하려는 거지?”“한 번만 보겠습니다.”집행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도망칠 곳도, 바꿀 수 있는 판결도 없었다.세레나는 종이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쓸었다.잉크는 완전히 말라 있었다.누군가 위조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인장 가장자리에 생기는 미세한 균열까지 공작가의 정식 문서와 같았다.테오도르가 직접 서명했다.그녀가 죽어도 된다고.아니, 제국의 질서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마음이 조용히 식었다.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대신 손끝이 아주 차가워졌다.전쟁에서 돌아온 테오도르의 몸이 이보다 차가웠던 적이 있었다. 세레나는 사흘 동안 잠들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몸이 견디지 못해 피를 토하면서도 성력을 멈추지 않았다.그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한 말은 감사가 아니었다.다음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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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꽃 속으로 사라진 이름
검은 천이 눈앞을 덮었다.세상이 어두워졌다.테오도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대신 작은 치료원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아이와,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간 병사와, 치료비가 없어 문밖에서 돌아서던 노인의 등이 지나갔다.세레나는 그들을 살리고 싶었다.공작의 곁에 머물기 위해 치료사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릴 수 있었기에 치료사로 살고 싶었다.그 사실을 너무 늦게 기억했다.처형대의 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목걸이 안쪽에서 열이 번졌다.처음에는 심장이 마지막으로 크게 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열기는 목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끝과 발끝으로 빠르게 퍼졌다.은제 펜던트에 금이 가는 감각이 손바닥에 전해졌다.어둠 속에서 새하얀 선들이 나타났다.수없이 많은 혈관처럼 얽힌 빛이 세레나의 몸을 감싸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치솟았다.칼날이 떨어졌다.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숨이 막혔다.세레나는 몸을 일으키며 거칠게 공기를 들이마셨다.손이 목으로 올라갔다. 피부는 매끄러웠다. 칼날이 지나간 흔적도, 족쇄에 긁힌 상처도 없었다.눈앞에 검은 천 대신 연한 청색 침대 휘장이 흔들리고 있었다.창문 틈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장미 문양이 수놓인 커튼과 오래된 호두나무 서랍장, 벽에 걸린 작은 풍경화.세레나는 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이 방을 알고 있었다.베일런 저택에서 열아홉 살까지 사용했던 침실.처형되기 일곱 해 전에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곳이었다.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세레나는 침대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 손등은 희고 매끈했고, 성력 소진으로 생겼던 검은 반점도 사라져 있었다.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열아홉 살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처형을 기다리며 앙상하게 패였던 뺨은 둥글었고, 목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눈동자만은 낯설었다.젊은 얼굴 안에 죽음을 본 사람의 눈이 들어 있었다.세레나는 거울을 짚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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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태운 편지
편지지는 생각보다 오래 타지 않았다.불길은 종이의 가장자리를 둥글게 말아 올린 뒤, 잉크가 마르지 않은 문장을 차례로 삼켰다. ‘테오도르 공작님께’라는 첫 줄이 검게 무너지자 세레나는 벽난로 앞에 선 채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처형 승인서에 남아 있던 서명과 같은 이름이었다. 한쪽은 자신이 사랑을 고백하려 적은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 사랑의 끝에 놓인 죽음을 허락한 것이었다.문밖의 하인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아가씨, 공작가에서 급히 오신 분입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세레나는 대답 대신 불쏘시개를 집어 남은 종이를 안쪽으로 밀었다. 편지 귀퉁이에 묻어 있던 붉은 밀랍이 열을 받아 녹으면서 칼베른의 검은 늑대 문양이 일그러졌다.전생에는 저 문양을 볼 때마다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테오도르의 전령이 도착하면 식사를 하던 중에도 자리에서 일어났고, 잠옷 위에 망토만 걸친 채 마차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는 언제나 다쳐 있었고, 세레나는 자신이 아니면 그를 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이 그녀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순간, 그 믿음은 의심할 틈도 없이 의무가 되었다.지금도 몸은 그때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약제함을 챙기고, 머리를 묶고, 오른손에 얇은 장갑을 낀 뒤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공작저까지 마차로 한 시간 반. 사냥터에서 입은 상처라면 오염 가능성이 높으니 봉합 바늘보다 세정용 술을 먼저 확인해야 했다.세레나의 손이 탁자 위 약제함을 향해 움직이다 멈췄다.죽기 직전의 기억은 머리에 남았지만, 열아홉 살의 몸은 아직 테오도르의 부름에 복종하고 있었다.그녀는 약제함이 아니라 촛불 옆에 놓인 은제 목걸이를 집었다.목걸이는 처형대에서 빛을 터뜨리기 전과 같은 형태였다. 타원형 펜던트 표면에 작은 덩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베일런 가문의 오래된 꽃 문장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다만 가장자리 한쪽에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균열이 생겨 있었다.세레나는 손톱으로 금을 더듬었다.전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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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지 않겠습니다
세레나는 벽난로 집게를 제자리에 놓았다.전생의 자신이라면 그 말을 선물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공작저에는 황실 의원보다 뛰어난 치료사가 있었는데도 테오도르가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부풀었을 테고,‘원한다’는 말을 ‘필요하다’로, 다시 ‘사랑한다’로 바꾸어 이해했을 것이다.지금 들으니 이상할 만큼 간단했다.그가 원하고, 세레나는 달려간다.두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그 문장만 있었다.“가지 않겠습니다.”에마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굳었다.“아가씨?”“아래에 계신 분께 전해 주세요. 저는 정식 치료사 자격이 없으니 공작님의 상처를 맡을 수 없다고요. 공작가에는 저보다 경험이 많은 의원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전에도 공작님을 여러 번 치료하셨잖아요.”“그래서 더는 하지 않으려는 겁니다.”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에마는 곧바로 돌아서지 못했다.질문이 입술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지는 것이 보였다.세레나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열었다.새벽이 걷히고 있었다. 베일런 저택의 정원은 겨울이 끝난 뒤라 황량했고, 마른 장미 덩굴 사이로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정문 앞에는 칼베른 공작가의 검은 마차가 서 있었다. 말 두 필의 입김이 하얗게 번졌고, 검은 군복을 입은 기사가 현관 계단 아래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렸다.저 마차를 탔던 기억이 났다.처음에는 테오도르의 상처를 치료하러 갔고, 그다음에는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러 갔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마리엘과의 혼인을 축하하는 연회에 초대받아 같은 문양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에는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죄수 호송 명령서가 그녀를 재판소로 데려갔다.같은 문양이었지만 세레나에게 허락된 자리는 매번 달랐다.“제가 거절했다고 정확히 전해 주세요.”에마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헬레나 부인께서 아시면…….”“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아가씨께서 혼나실 텐데요.”세레나는 창밖을 보며 망설이지 않았다.“그것도 제가 감당할 일입니다.”에마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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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빠른 방법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라서
하인이 물러나자 세레나는 뒤늦게 봉투를 놓았던 손을 치맛자락에 가볍게 문질렀다.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그렇다고 다시 그의 사람이 되지도 않는다.그 두 선택 사이에는 전생의 세레나가 한 번도 걸어 보지 않은 길이 있었다.칼베른 공작가의 기사는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세레나가 옷을 갈아입고 침실을 나왔을 때도 그는 현관에 서 있었다. 진흙이 튄 장화와 헝클어진 머리에서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사는 세레나를 보자마자 계단을 두 칸씩 올라왔다.“베일런 영애.”에마가 막으려 했지만 세레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말씀하세요.”기사는 주변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공작님께서는 다른 치료사의 손길을 싫어하십니다. 영애께서 오시면 상처를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상처를 보이지 않는 것은 공작님의 선택입니다.”“위중하실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의원에게 필요한 내용을 적어 드렸습니다.”기사는 손에 든 봉투를 내려다봤다. 아직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글 몇 줄로 사람의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저도 압니다.”세레나는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하지만 제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치료를 거부하시는 분을 설득할 권한까지 제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작님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목적이라면, 저를 이곳에서 붙잡아 둘 시간에 의원에게 그 봉투부터 전해 주시는 편이 낫습니다.”기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테오도르를 가까이 모시는 기사라면 세레나를 알고 있을 것이다. 부름을 받으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던 영애, 공작의 상처라면 자신의 몸이 망가져도 성력을 퍼붓던 여자. 그래서 지금의 거절을 변덕이나 감정싸움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컸다.“공작님과 다투셨습니까?”기어이 나온 질문에 에마의 얼굴이 굳었다.세레나는 난간 위에 얹은 손을 거두었다.“기사님.”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으나 기사는 자세를 바로 했다.“테오도르 칼베른 공작께서 다치신 일과 제가 그분께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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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사랑을 이유로 내 선택을 넘기지 않을 것
제국력 612년 초봄, 열이틀째.테오도르의 낙마 사고.그 아래에는 기억나는 사건을 시간순으로 적기 시작했다. 베일런 광산의 두 번째 붕괴, 북부 국경의 대규모 전투, 황제의 첫 발작, 루멘 성전에서 원인 불명의 열병 환자가 나타난 시기.마리엘과 테오도르의 정략혼 발표일과 자신의 체포일도 빠뜨리지 않았다.기억은 완전하지 않았다.전생의 세레나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관련된 날짜는 계절과 시간까지 떠올랐지만, 제국을 뒤흔든 사건들은 신문의 제목이나 공작저 사용인들의 대화로만 기억했다. 황태자와 에드릭 황자의 갈등이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는지,루멘 성전이 백휘석 가격을 올린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선명하지 않았다.그 불균형이 종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났다.테오도르의 사건에는 날짜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죽음에는 계절만 있었다.세레나는 펜을 내려놓고 손을 씻었다.물그릇의 표면이 잉크로 희미하게 흐려졌다. 손가락을 닦은 뒤 장부로 돌아온 그녀는 테오도르의 이름 옆에 썼던 세부 내용을 몇 줄 지웠다.이 장부는 그를 구하기 위한 기록이 아니었다.자신이 같은 길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기록이었다.세레나는 첫 장을 다시 펼쳤다.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던 펜이 종이를 눌렀다.‘내 삶을 가질 것.’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밖으로 정오의 빛이 들어왔다. 장부의 흰 면 위에서 문장이 지나치게 단정해 보였다. 목적이라기보다 맹세에 가까웠고, 맹세라는 말은 언제나 사람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면이 있었다.세레나는 그 아래에 구체적인 항목을 덧붙였다.정식 치료사 자격을 얻을 것.가문과 분리된 재산을 마련할 것.베일런의 빚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확인할 것.누군가의 허락 없이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치료원을 세울 것.마지막 줄에서 펜이 잠시 멈췄다.테오도르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쓰려다가 그만두었다.감정은 명령으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처형 승인서에서 그의 이름을 본 뒤에도,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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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공작 대신 하녀를 살리다
전생이라면 바로 성력을 끌어올렸을 것이다.상처를 봉합하고 손상된 힘줄을 연결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력을 밀어 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연구도, 성전의 정식 교육도 받기 전인 열아홉 살의 몸이었다. 힘의 흐름이 전생과 같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세레나는 먼저 유리 조각의 위치를 확인했다.그 순간 에마의 피부 아래에서 빛이 번졌다.처음에는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피 위에서 반사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은은한 빛은 상처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손목에서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각 손가락으로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선들이었다.생명력이 흐르는 성맥.전생에도 수없이 보았던 것이지만 전혀 달랐다. 그때는 눈을 감고 집중해야 겨우 느낄 수 있었고, 환자의 맥박과 자신의 성력을 연결한 뒤에야 흐름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지금은 맨눈으로 보였다.잘린 힘줄 주변에서 빛이 끊겼고, 유리 조각 아래에 눌린 작은 성맥은 막힌 물길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손바닥 깊은 곳에서 시작된 출혈의 위치까지 선명하게 드러났다.세레나의 손이 멈췄다.“아가씨?”에마가 불안하게 불렀다.세레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펜던트의 균열이 옷깃 안쪽에서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회귀하며 사라진 것은 시간이 아니었다.전생의 경험도 기억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몸 안에 흐르는 힘만은, 죽기 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깊어져 있었다.세레나는 에마의 손을 받친 채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끊어진 성맥 사이에서 빛 한 줄기가 그녀의 손끝을 향해 움직였다.끊어진 성맥 사이에서 흘러나온 빛은 세레나의 손끝에 닿기 직전 방향을 틀었다.에마의 손바닥 안쪽을 따라 가느다랗게 흔들리던 선이 유리 조각 주변에서 엉키며 몇 번이나 맥박쳤다. 힘줄이 끊어진 자리는 흐름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찢어진 천의 올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벌어져 있었다. 전생의 세레나라면 환자의 손을 붙잡고 눈을 감은 뒤, 자신의 성력을 밀어 넣으면서 반응을 더듬었을 것이다. 지금은 피부
last update최신 업데이트 : 202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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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빛에 휩쓸리지 않는 손길
지금도 같았다.눈앞에 펼쳐진 성맥의 빛은 유혹에 가까웠다. 손만 뻗으면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지만, 그 힘이 어디서 왔고 어느 정도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회귀 직후부터 능력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것도 위험했다.무엇보다 에마의 손은 시험 도구가 아니었다.세레나는 자신의 소매 안쪽에서 얇은 손수건을 꺼내 유리 조각 주변을 조심스럽게 닦았다.“아가씨.”에마가 낮게 불렀다.“말씀하세요.”“저 때문에 공작님께 가실 시간을 놓치신 건 아니죠?”세레나의 손끝이 아주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저는 공작님께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하지만 아까 기사님이…….”“공작저에는 의원이 있습니다. 필요한 의견도 전달했고요.”에마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레나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전생의 세레나였다면 그 시선에서 동정이나 의심을 읽으려 했겠지만, 지금은 상처 가장자리의 색과 출혈량만 확인했다.복도 반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베일런 가문의 의원 라울이 가죽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쉰을 넘긴 그는 오랜 세월 베일런 저택의 가족과 사용인을 진료했으나, 헬레나가 살림을 맡은 뒤로는 약제실과 사용인 치료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희끗한 수염 아래로 숨을 몰아쉬던 라울은 바닥에 흩어진 유리와 세레나를 번갈아 보고는 곧장 에마 앞에 앉았다.“상처를 보여 주십시오.”세레나는 자리를 비켜 주지 않고 상태부터 전달했다.“오른손 손바닥 중앙이 찢어졌고, 약지 쪽 힘줄 손상이 의심됩니다. 유리 조각 하나가 남아 있으며 조각 아래의 혈관에서 출혈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손목 위를 압박했지만 너무 오래 묶지는 않았습니다.”라울의 시선이 세레나의 얼굴에 머물렀다.“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손가락 움직임과 출혈 위치를 봤습니다.”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피부 아래의 성맥이 보였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라울은 에마의 손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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