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경민이 한효진의 방에서 나왔을 때, 마침 하시윤도 서정우를 데리고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는 새로 갈아입은 옷 덕분인지 안색이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아이를 안고 있던 가정부가 서경민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서경민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바라보았다.“정우야.”그는 곁에 서 있는 하시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서경민이 말을 섞을 기미가 없으니 하시윤 역시 굳이 먼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서정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니?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아이는 대답이 없었다. 아마 자신에게 묻는 말이라고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옆에 있던 가정부가 대신 입을 열었다.“아침 일찍 체온을 쟀는데 정상이었어요. 오늘 컨디션도 아주 좋아 보이네요.”서경민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다행이구나.”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가정부가 조심스레 물었다.“식사하고 가시겠어요?”서경민은 대꾸도 없이 성큼성큼 대문을 나섰다. 민망해진 가정부가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집 밖으로 나온 하시윤은 뒷마당 쪽으로 향했다. 금붕어들이 노니는 연못 대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산책을 시작했다.서씨 가문의 뒷마당은 꽤 넓었다. 2층짜리 건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하나는 가정부들의 숙소였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는 별채였다.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고는 해도 꾸준히 관리를 한 덕에 건물이 낡아 보이거나 흉물스럽지는 않았다.하지만 하시윤이 건물의 정면에 다다랐을 때, 기묘한 광경에 발길을 멈췄다. 별채 1층의 출입문과 창문이 하나도 빠짐없이 판자로 빽빽하게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건물 옆으로 조잡한 철제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것은 2층 테라스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하시윤은 의아한 듯 물었다.“1층은 아예 안 쓰는 건가요? 왜 저렇게 꽁꽁 막아둔 거예요?”곁에 있던 가정부가 대답했다.“예전에
서재를 나서는 서지혁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굳어 있었다.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모든 감정을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하시윤의 방을 향해 걸어갔다.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살피니 그녀는 이미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별 탈은 없어 보였다.그는 한참 동안 그녀의 잠든 얼굴을 지켜본 뒤에야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뱉었다.“앞으로는 방 비울 때 문이라도 잠가야겠네.”서인준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서재 갔다 오는 거야?”서지혁은 대꾸 없이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향했다. 서인준이 다시 물었다.“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별거 아니야.”서지혁이 무심하게 답했다.“심씨 가문에 대해 좀 물어봤어. 오늘 거기 다녀오셨다기에 무슨 말이 오갔나 싶어서.”“그래서, 뭐라셔?”서인준이 다그치듯 묻자 서지혁이 말을 이었다.“중요한 건 없었어. 심연정 몸이 안 좋은 건 순전히 자기 문제라고 했대.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진 않았나 봐.”서인준은 형을 가만히 응시하며 몇 초간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정말 그게 다야?”“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말을 마친 서지혁이 아차 싶은 듯 덧붙였다.“아, 오늘 밤에 있었던 교통사고 말하는 거라면 아빠한테는 입도 뻥긋 안 했어. 말해봤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니까.”그는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됐으니까 너도 이만 가서 자. 시간 늦었다.”“형.”서인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나한테 숨기는 거 없지?”“내가 너한테 숨길 게 뭐가 있어.”서지혁의 말투는 담담했다. 서인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형의 뒤를 쫓아갔다.“형이 나한테 숨기는 게 아주 많은 것 같아. 형뿐만 아니라 식구들 전부 다 나만 빼고 뭔가를 감추고 있는 기분이야.”그는 욕실 문틀에 몸을 기대며 씁쓸하게 덧붙였다.“이런 기분, 진짜 별로거든.”칫솔에 치약을 짜던
본가로 돌아와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새로 보충된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아까 서경민의 발길질에 박살 났던 테이블은 이미 새것으로 교체되어 있었고, 장식장과 대형 화분 역시 원래 자리에 채워져 있었다. 자잘한 소품들까지는 다 채우지 못했으나 굵직한 가구들이 자리를 잡으니 거실은 언제 난장판이었냐는 듯 말끔한 모습이었다.청소를 막 끝낸 가정부가 밖으로 나가려다 일행을 보고 멈춰 섰다. 서인준이 물었다.“다들 집에 계세요?”가정부는 그렇다며 모두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전했다. 서인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지혁과 하시윤을 돌아보며 말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이만 쉬죠.”그는 다시 하시윤을 살피며 덧붙였다.“혹시라도 어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해요.”하시윤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세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하시윤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려던 찰나 방문이 열리더니 서지혁이 들어왔다. 놀란 하시윤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할 말이라도 있어?”“아니.”서지혁이 낮게 대답했다.“그냥 좀 보러 왔어.”그는 다시금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정말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지?”사고에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시윤은 그를 안심시키려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진짜 괜찮아. 걱정 마. 조금이라도 이상했으면 벌써 말했을 거야.”서지혁은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았다.“그냥 자. 나 여기 좀만 앉아 있다가 너 잠드는 거 보고 갈게. 눈앞에 없으면 도저히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하시윤은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자리에 누웠다.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녀는 몇 분 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지혁은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을 때까지 한참을 지켜본 뒤에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발길이 향한 곳은 서경민의 서재였다.넓은 서재 한쪽 벽면은 책으로 가득했고, 다른 쪽 선반에는 온갖 트로피와 상패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
충돌 직전 급브레이크를 밟았는지 정면으로 들이받았음에도 충격이 아주 파괴적이지는 않았다.여기에 서지혁의 차가 워낙 견고한 덕도 컸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차체가 앞뒤로 크게 울렁였을 뿐, 다행히 전복될 정도의 대형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다.서지혁은 찰나의 순간 브레이크를 끝까지 밟아 차를 세우는 동시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하시윤을 감싸 안았다. 혹시라도 유리창이 터져 파편이 튀지 않을까 싶어 그녀를 제 품 안으로 완전히 숨겼다.하시윤은 그 짧은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쥔 채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뒷좌석의 서인준 역시 제 몸 하나 돌볼 겨를도 없었다. 그는 앞좌석 사이의 좁은 틈으로 상체를 들이밀며 이미 하시윤을 안고 있는 서지혁의 등 위로 팔을 뻗어 두 사람을 동시에 보호하려 애썼다.다행히 유리는 무사했고 거칠게 흔들리던 차체도 이내 멈춰 섰다.가장 먼저 팔을 푼 건 서인준이었다. 그는 창밖 상황을 살피더니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네.”서지혁도 그제야 하시윤을 품에서 놓아주며 다급하게 물었다.“어디 부딪친 데 없어? 몸 괜찮아?”배를 꼭 움켜쥐고 제 몸을 살피던 하시윤이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멀쩡해.”그제야 서지혁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량 파손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헤드라이트가 깨지고 트렁크 쪽이 찌그러졌을 뿐이었다.서인준은 차가 멈추자마자 먼저 내려 곧장 뒤쪽에 있는 차로 다가가더니 한 손으로 문을 확 열어젖히고 운전기사를 그대로 끌어냈다.운전기사는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낡아빠진 승합차에서 끌려 내려온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하루 종일 배달 일을 하느라 너무 졸려서 순간적으로 액셀을 브레이크로 착각했다는 구차한 변명과 사과를 쏟아냈다.하지만 서인준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중년의 멱살을 잡아채 차 앞으로 질질 끌고 갔다.그는 찌그러진 차 트렁크를 가리키며 서슬 퍼런 분노를 터뜨렸다.“이 안에 임산부 타고 있는 거
서지혁은 하시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갓 꺾은 장미 한 송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예쁘지? 여기에서 제일 예쁘게 핀 꽃이야.”하시윤은 꽃을 건네받았다. 확실히 눈이 즐거울 정도로 잘 핀 꽃이었지만 지금 그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대체 아래층 상황은 어떻게 된 거야?”서지혁은 가위를 한쪽 선반에 내려놓고 장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하시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정원 밖으로 이끌었다.“글쎄. 회사 쪽에 좀 골치 아픈 일이 터진 모양이야. 뚜껑 열리셨는데 밖에서 대놓고 화풀이할 처지는 못 되니 집에 와서 애먼 가구들에 화풀이한 거지.”하시윤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런데 지혁 씨는 왜 불러 내신 거야?”“그냥 이것저것 좀 캐묻더라고.”서지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꽤 규모가 큰 프로젝트였는데 손실이 어마어마한가 봐. 나더러 그 이유를 아냐고 묻더라고.”서지혁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 손 한 번 거친 적 없는 일인 데다가 난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프로젝트인데 말이야. 일이 터지고 나니까 이제야 나한테 상황 파악이 됐냐고 묻는데 내가 뭘 알겠어?”그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양반이라니까.”두 사람이 정원을 빠져나올 때쯤, 서지혁이 화제를 돌렸다.“식당 예약해 뒀어. 저녁은 나가서 먹자.”의외의 제안에 하시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응?”“오늘 저녁 식탁 분위기 보나 마나 가시방석일 텐데 굳이 거기 끼어 있을 필요 없잖아. 의사 선생님도 네가 마음 편하게 먹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우린 쏙 빠져나가자고.”하시윤이 헛웃음을 지었다.“지혁 씨도 참 잔머리 하나는 알아줘야 해.”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거실 입구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계단 입구에 서 있는 한효진을 발견했다.내려오려던 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쑥대밭이 된 거실 꼴을 보더니 이내 마음을 바꾼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그래. 차라리 밖에서 먹는 게 낫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심연정은 정경란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그녀의 안색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곁에 앉은 정경란의 표정 역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문가에 서서 눈치를 보던 심태진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연정이가 저러는 거야?”정경란은 남편의 얼굴조차 마주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아무것도 아니니까 가서 쉬어. 연정이는 내가 돌볼 테니까.”심태진도 대충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혀를 찼다.“또 서지혁 때문이야?”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다들 왜 그러는 거야.”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경란이 이불 위로 심연정을 토닥이며 나직하게 물었다.“지혁이가 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 지경이 됐어?”그녀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놈이 너한테 쌀쌀맞게 군 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전에는 신경도 안 썼잖아.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무너진 거야?”심연정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했다.“오늘에야 확실히 알았어요. 그동안 저 보라고 연기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지혁이는 진심으로 하시윤을 사랑해요.”눈을 감자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내가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사람이 된 기분이에요.”사실 그녀가 웃음거리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서인준이 대놓고 무시하며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퍼부을 때도 그녀는 그저 자기를 괴롭히려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하지만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서인준의 그 독설은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가소롭게 여겨서 나온 멸시였다는 것을.어디 서인준뿐일까. 서강 그룹의 직원들도 뒤에서는 그녀를 얼마나 비웃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심연정이 몸을 돌려 정경란을 마주 보며 베개에 눈물을 닦아냈다.“저한테 못되게 구는 건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건 걔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차가울 때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