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걸복걸! 도련님의 고백의 모든 챕터: 챕터 1 - 챕터 10

100 챕터

제1화 적합하지 않습니다

다시 서지혁을 만난 건 4년 뒤였다.하시윤은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골수 적합성 검사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이었다. 의사는 전화로 적합 여부를 말하지 않고 면담하자고 했다.하던 일을 내려놓고 급히 과장에게 반차를 낸 후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길이 막혀 십여 분 늦게 도착했다. 도착했을 땐 의사 사무실에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하시윤은 문을 열다가 멈칫했다. 서씨 가문의 사람이 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그 사람일 줄은 몰랐다.남자는 문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느슨한 자세로 몸을 뒤로 기댄 채 두 손을 포개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복도 창문이 열려 있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시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문득 4년 전의 그 아침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자세로 호텔 방 소파에 앉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씨 가문에서 감히 날 속여?”의사가 검사 결과서를 넘기며 하시윤을 올려다봤다.“들어와요.”하시윤이 심호흡하고 말했다.“죄송합니다. 길이 막혀서요.”그녀가 자리에 앉자 의사가 검사 결과서를 건네며 한숨을 내쉬었다.“골수 적합성 검사 결과입니다.”결과를 명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의사의 말투만으로도 이미 모든 걸 짐작할 수 있었다.하시윤은 결과서의 마지막 줄을 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몇 초 뒤 옆에 앉은 남자가 가느다란 손으로 검사 결과서를 가져갔다. 남자의 말투는 무뚝뚝하기만 했다.“적합하지 않단 말씀입니까?”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적합성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 이식 수술을 할 수 없습니다.”하시윤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다른 방법은 없나요?”의사는 그녀를 한 번 쳐다봤다가 옆에 앉은 남자를 봤다.“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현재로선 유일한 대안이죠. 두 분 고려해 보세요...”...하시윤이 회사로 돌아왔을 땐 마침 점심시간이라 동료들이 삼삼오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만 사람들 틈을 거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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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누구세요?

서씨 가문의 본가는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시윤이 이곳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에서 내려 서지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본가가 아주 널찍했는데 대문을 지나면 주차장이었고 그 너머엔 커다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긴 복도를 지나야 본관에 이르렀다.집사가 본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도련님.”서지혁이 물었다.“정우는 어때요?”집사가 대답했다.“작은 도련님 아까 좀 불편해하셨는데 심연정 씨가 오셔서 달래준 뒤로 좀 나아지셨어요.”하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두어 걸음 뒤에 서 있었다.심연정, 서지혁의 연인이었다.소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깊이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해 파티 이후 약혼을 공식 발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하시윤과의 일이 터지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나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약혼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미뤄졌다.“네.”서지혁은 짧게 대답한 뒤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본관 3층 계단 입구에 소독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대기하던 가정부는 서지혁을 보자마자 그의 전신을 소독했다. 그러다 하시윤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서지혁이 말했다.“이 사람도 들어갈 거예요.”가정부는 재빨리 시선을 늘어뜨리고 하시윤에게도 소독을 해주었다.서정우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다. 문에 다다르기도 전에 안에서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한 여자의 상냥한 목소리였다.“아픈 데 더 있어?”아이가 투덜거렸다.“네. 있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그럼 엄마가 더 문질러줄게.”그러자 아이가 예의 바르게 답했다.“고마워요.”서지혁이 문을 열었다.“정우야.”하시윤은 문 앞에 서서 방 안을 둘러봤다. 방이 꽤 넓고 채광도 좋았다. 사진 속 아이가 침대 옆에 있었는데 한 여자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아이는 서지혁을 보자마자 바로 손을 뻗었다.“아빠.”서지혁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어디가 또 아파?”서정우는 대답하지 않고 문 앞에 서 있는 하시윤에게 시선을 돌렸다.심연정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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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결혼 말고 원하는 게 뭐야?

아이가 깊이 잠든 후 서지혁은 조심스레 아이를 내려놓았다.“내려가서 얘기해.”세 사람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거실에 서지혁의 할머니 한효진이 소파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한 가정부가 뒤에서 관자놀이를 주물러주고 있었다.계단을 내려오는 인기척에 한효진은 손을 들어 가정부를 물렸다.“정우 자?”서지혁이 답했다.“네.”한효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바로 물었다.“어디 편찮으세요?”한효진이 손을 내저었다.“괜찮아.”그녀의 시선이 하시윤에게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훑으면서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는 태도로 물었다.“정우 만났어?”“네.”하시윤의 대답을 들은 한효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만났으면 됐어. 어렸을 때부터 곁에서 키우지 않았으니 정이 없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이젠 얼굴을 봐서 마음이 달라질 거야. 앞으로 네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하시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서지혁이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목적을 알고 있었다. 열 달 품어 낳은 친자식을 직접 보게 하려는 의도였다. 만나지 않았다면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 있지만 만나면 모성애 때문에 모든 걸 양보하게 되니까.한효진이 또 말했다.“앉아. 서 있지만 말고.”심연정이 먼저 한효진의 곁에 앉았다.“할머니,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세요? 요즘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제가 아는 한의사가 있는데 몸조리에는 아주 일가견이 있거든요. 그분 불러서 진맥 한번 받아보시는 건 어떠세요?”한효진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너무 민폐 끼치는 거 아니야?”“민폐라니요.”심연정은 한효진에게 바짝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할머니께서 건강하셔야 저희가 마음이 편하죠.”한효진은 심연정이 효심이 깊다고 칭찬했다. 시선이 하시윤에게 닿았을 때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하시윤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눈에 보였다.하지만 그 탐탁지 않음이 혐오라기보다는 그저 하시윤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 같았다.한효진은 잠깐 더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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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손찌검

하시윤은 3년 만에 다시 하씨 별장으로 돌아왔다.별장 대문이 열려 있어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하민지가 소파에 앉아 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가 매니큐어를 두어 번 칠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엄마, 집에 누가 왔어요.”주방에서 청소하던 조경순이 소리를 듣고 나왔다.“누가 왔다고? 이 밤중에...”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시윤을 보고 멈칫했다. 표정이 급변하더니 손에 든 행주를 털며 말했다.“아이고, 이게 누구야? 우리 집안의 큰 아가씨 아니신가?”그러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며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찾으러 왔어? 네 아빠 오늘 회식 있어서 언제 올지 몰라. 급하면 전화하고 아니면 내일 낮에 와.”조경순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어쩐지 오늘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더라니. 재수 없어, 정말.”하시윤의 시선이 하민지에게 닿았다. 하민지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는데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하시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3년 전 아이를 서씨 가문에 넘겨줄 때 혹시 돈 받았어요?”하민지가 움직이던 손을 멈췄고 주방에 있던 조경순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시윤이 이어서 말했다.“그때 당신들이 나더러 아이를 낳으라고 설득했죠. 그리고 나중엔 아이가 그 집에서 살아야 더 나은 삶을 살 거라고 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를 위한다는 말은 다 거짓이고 그냥 아이를 팔아서 돈이나 챙기려던 거 맞죠?”말이 끝나자마자 주방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조경순이 대야를 조리대에 내리친 소리였다.그녀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누가 돈 받았다고 그래? 이 배은망덕한 것아. 그때 너도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 그래서 네 마음 따라 설득한 건데. 임신 기간 내내 좋은 거 먹이고 재우고 돌봐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이런 소리를 해?”말하면서 행주를 쥔 채 주방에서 나왔다. 조경순이 눈을 부릅뜨고 계속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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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그 제안 동의할게

서지혁은 서정우의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불안한지 얼굴을 찌푸리고 자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잠시 후 문이 열렸다. 한효진을 돌보는 가정부 유민숙이 들어와 심연정이 가려 한다고 일렀다.유민숙은 한효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했다. 심연정이 직접 차를 몰고 오긴 했지만 서지혁더러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라 했다고 했다.서지혁은 서정우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심연정이 거실문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서지혁이 다가가 말했다.“가자.”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으로 갔다. 차에 오른 뒤 심연정이 입을 열었다.“할머니한테서 들었어. 시윤 씨의 골수가 정우랑 적합하지 않다며?”그녀의 시선이 서지혁에게 향했다.“가족들 중에 아직 골수 검사를 안 한 사람도 있지 않아? 그 사람들이 해보면 혹시 맞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서지혁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전에 가족들이 병원에서 건강검진 받을 때 내가 몰래 골수 적합성 검사를 하라고 했어. 그런데 다 적합하지 않아.”심연정은 멈칫했다가 한참 뒤에야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랬구나.”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정말 방법이 없다면 의사 선생님 말대로 하나 더 낳는 수밖에. 요즘 기술이 발달해서 시험관 시술도 편하니까 큰 문제 없을 거야. 다만 돈이 좀 더 들겠지. 시윤 씨도 분명 동의할 거야.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정우를 낳아서 넘기고 돈을 받았잖아. 돈이라면 뭐든...”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지혁이 액셀을 밟아 차를 출발시켰다.갑작스러운 가속에 심연정은 하던 말을 멈췄다.심연정은 4년 전 일을 다시 꺼내서 서지혁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예전이었더라면 알아서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여 산에서 내려온 뒤 다시 입을 열었다.“내가 이쪽에 아는 의사가 있어. 불임 치료로 많은 가정을 도운 의사야. 내일 전화해서 물어볼까?”서지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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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여자친구 아니야

하시윤은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기다렸다. 서지혁이 빠르게 도착했고 차는 곧장 그녀 옆에 멈췄다.차 문을 열고 내린 서지혁은 하시윤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하시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얼굴에 상처가 있었고 머리를 다시 묶어도 여전히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조금 전 1대2의 싸움이라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하시윤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내가 뭘 하면 돼?”서지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언제 시간 돼? 사람 보낼 테니까 짐 챙겨서 먼저 우리 집에 들어와 살아.”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시윤의 전화가 울렸다. 몸을 살짝 돌려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아버지 하병우였다.집에 왔다가 얼굴이 퉁퉁 부은 아내와 딸을 보고 따져 물으려고 전화한 게 틀림없었다.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고 다시 몸을 돌렸다.“괜찮다면 오늘 밤에 이사해도 될까?”그녀는 누구보다 하병우를 잘 알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직접 찾아올 게 분명했다.서지혁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 밤이든 내일이든 별 차이 없었으니까.하시윤이 세 들어 사는 곳은 낡은 아파트였다. 경비원에게 얘기하고 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갔다.한 층에 두 가구가 사는 구조로 복도에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서지혁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관에 서 있었다. 거실 하나에 방이 하나인 10평 남짓한 작은 집이었다.하시윤은 캐리어를 꺼내 생필품을 간단히 챙겼다.“다 됐어.”서지혁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1층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사이 옆집 문이 열렸다.상반신을 벗은 남자가 나오더니 하시윤을 보곤 헤벌쭉 웃었다.“아가씨, 퇴근했어?”입에 담배를 물고 있었는데 말할 때마다 담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말을 마치고 나서야 하시윤의 옆에 있는 서지혁을 보고는 혀를 끌끌 차며 노골적으로 말했다.“고객이 데리러 왔어? 출장 서비스도 하는구나?”술에 취한 남자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서지혁을 가까이서 훑어보았다.서지혁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고 남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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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계략

하시윤은 그 남자의 상태를 묻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서지혁이 엘리베이터에 타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갔다.서씨 가문 본가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하시윤이 지낼 방을 마련했다. 2층 복도 끝에 있는 방이었다.가정부가 그녀를 문 앞까지 안내했고 하시윤은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욕실이 딸린 아주 넓은 방이었다. 필요한 물건도 모두 갖춰져 있었다.하시윤이 캐리어 안의 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침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렸다. 또 하병우였다.그녀는 계속 받지 않았다. 전화가 자동으로 끊기면 30초도 안 되어 다시 울렸다.이번엔 아파트 관리사무소였다.하시윤은 잠깐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 너머로 관리사무소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시윤 씨, 지금 집에 없어요?”하시윤이 없다고 답하자 직원이 누군가에게 말했다.“정말 집에 없네요. 다음에 다시 오세요. 계속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다른 입주민들한테 피해가 갑니다.”곧이어 하병우의 고함이 들렸다.“집에 없긴 왜 없어요? 분명 집 안에 숨어 있을 거예요. 당장 나오라고 해요!”역시나 집까지 찾아왔다. 속도도 보통 빠른 게 아니었다.전화기에서 하병우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핸드폰 이리 줘요.”직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핸드폰을 확 낚아채고는 고함을 질렀다.“하시윤, 당장 문 열어.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빨리 나와!”하시윤이 침대 옆에 앉아 덤덤하게 말했다.“왜요? 와이프랑 딸이 맞아서 마음 아파요? 그럼 내 아이를 판 건 뭐라 변명할 건데요?”하병우는 조경순처럼 아니라고 잡아떼진 않았다. 다만 뻔뻔한 건 다를 바 없었다.“팔았다니? 그쪽에서 손주 하나 얻었는데 당연히 돈 내야지. 그리고 그때 서지혁이 끼어들지 않았어도 손 대표가 우리한테 투자했을 거야. 손 대표가 나중에 돈을 안 줬으니 서지혁이 메우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왜 우리가 손해를 봐야 해?”손철민 얘기가 나온 순간 하시윤은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4년 전 하시윤은 약에 취해 손철민에게 보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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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 정도 인내심도 없어?

서정우가 침대 옆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가정부가 밥을 떠먹여 줬고 옆에 털이 복슬복슬한 인형이 놓여 있었다. 왜소한 아이는 인형보다도 작아 보였다.서지혁이 방으로 들어가자 가정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도련님.”그는 다가가 그릇을 내려다봤다.“별로 안 먹었네요?”가정부가 대답했다.“입맛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빨리 먹이면 또 토할까 봐 조심하고 있습니다.”서지혁이 그릇을 받아들었다.“내가 먹일게요.”그러고는 아이 옆에 앉았다.“정우야.”서정우는 아무 말 없이 하시윤을 빤히 쳐다봤다. 잠깐 생각하던 서지혁이 하시윤을 돌아보며 물었다.“네가 먹일래?”하시윤이 화들짝 놀랐다.“응? 내가?”아이를 안아본 적은 없지만 밥을 먹이는 건 복잡해 보이지 않았기에 망설임 없이 그릇을 받아들었다.“알았어.”아이에게 밥을 먹여본 적이 없어 서툴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내밀었다.서정우는 하시윤이 무서운지, 아니면 원래 순한 성격인지 얌전히 입을 벌려 밥을 받아먹었다.그런데 두어 숟갈 떠먹인 그때 가정부가 들어와 한효진이 서지혁을 찾는다고 했다.서지혁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하시윤에게 말했다.“금방 갔다 올게.”그가 나간 후 서정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모 우리 엄마 맞죠?”그 말에 하시윤은 흠칫 놀랐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혀 쨍그랑 소리가 났다.서정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사람들이 몰래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이모가 우리 엄마라고, 절 살리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이모가 왔으니 제가 살 수 있다고 했어요.”하시윤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이 아이에게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3년 전 아이를 보냈을 때 아이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만약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랐다면 모자지간이라 해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서정우가 물었다.“절 구해줄 거죠?”하시윤은 손에 든 그릇을 내려다보며 낮게 대답했다.“응, 구할 거야. 꼭 살 수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서정우는 그제야 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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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퉤

“그게 아니라...”하시윤은 설명하려다가 도로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내가 실수했어.”정말로 그녀의 잘못이었다.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서지혁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정우랑 함께 있은 적이 없어서 정이 없는 건 이해해. 하지만 정우한테 조금만 신경 썼어도 이런 초보적인 실수는 안 했을 거야.”하시윤이 말했다.“잘못했어. 다음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서지혁은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려 있었고 하시윤은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아직 잠들지 않은 서정우는 서지혁이 다가가자 눈을 뜨고 그를 위로했다.“괜찮아요, 아빠. 걱정하지 말아요.”이토록 다정한 서지혁의 표정을 하시윤은 처음 봤다.“아빠가 옆에 있을게.”하시윤은 마음이 복잡해졌다.4년 전의 서지혁은 고작 20대였다. 갑자기 그녀와 그런 일이 생겼고 10개월 뒤엔 또 아버지가 되었다.하시윤은 아직 어머니라는 역할에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자격 있는 아버지였다.서정우가 불편해하자 서지혁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는 더욱 왜소해 보였다.서지혁이 고개를 숙여 뭐라 말하자 서정우는 웃으면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의 얼굴을 만졌다.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하시윤은 잠시 기다리다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방으로 돌아와 짐 정리를 마친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아침에 조금 먹은 것 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도무지 배고픔을 견딜 수 없었다.아직 이 집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가정부에게 뭘 해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방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주방으로 향했다.주방엔 남은 음식이 없었고 냉장고를 뒤져봤지만 재료도 많지 않았다.이런 집안이라면 아마 냉동식품은 거의 손대지 않고 매일 신선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을 것이다.하시윤은 한참 뒤적이다 소고기 스테이크 한 조각과 계란 두 개를 꺼냈다.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스테이크를 굽고 계란을 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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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알아서 결정할 수 있어요

하시윤은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잠자리가 바뀐 탓도 있었지만 마음이 무거워 잠들고 깨기를 반복했다.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보니 가정부들이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서씨 가문에는 매일 식재료를 조달하는 가정부가 따로 있었다. 이미 재료를 가져와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나머지 가정부들은 청소하고 있었다.어제 하시윤이 왔을 때 가정부들은 그녀에게 무뚝뚝하기만 했다.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호의적이지도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듯 가정부들의 태도가 한결 좋아졌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좋은 아침이에요, 하시윤 씨.”하시윤이 물었다.“어젯밤에 정우가 뭐 좀 먹었나요?”가정부가 대답했다.“네, 먹었어요. 도련님이 밤늦게까지 지키시면서 직접 떠먹여 주셨어요.”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올라가서 정우를 봐도 될까요?”그러자 가정부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위층에 24시간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하시윤은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입구에서 소독을 마친 후 발소리를 죽인 채 서정우의 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아직 자고 있었다. 이불을 덮고 큰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였다.하시윤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아이를 내려다봤다. 안색이 푸르스름했고 잠든 모습조차 편해 보이지 않았다.아이의 작은 손을 만져보았다. 이 나이 아이의 손이라면 통통해야 마땅했지만 서정우의 손은 앙상하기만 했고 손가락도 가늘디가늘었다.하시윤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여기 있었네.”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려 보니 서지혁이었다.그는 정장 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겼다.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을 가진 사람인데 이렇게 엄격한 차림을 하니 더 접근하기 어려워 보였다.하시윤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정우 보러 왔어.”서지혁은 천천히 다가가 아이를 몇 초간 바라봤다.“어젯밤 늦게야 잠들었어. 어쩌다가 이렇게 푹 자고 있으니까 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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