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오늘 일정: 수요일, 시집 표지 확인』
휴대폰이 울려 나는 풀 묻은 붓을 받침에 내려놓았다. 화면에는 강이헌 실장님이라고 떠 있었다.
전화를 받기 전에 작업대의 시집부터 봤다. 분리한 표지 위에 얇은 종이를 덮어 둔 참이었다.
“네, 실장님.”
“표지에 있던 글자, 사진이 있으면 도움이 됩니까.”
“어떤 사진인데요?”
“어머니가 책을 들고 계신 사진이에요. 앞표지가 보입니다.”
나는 덮어 둔 종이를 들어 올렸다. 제목 아래는 가죽이 벗겨져 글자 일부가 사라져 있었다.
“도움이 돼요. 보내 주실 수 있어요?”
“지금 가진 건 없습니다. 사진이 있는 곳에 가려는데, 같이 가겠어요?”
붓 끝에서 떨어진 풀이 받침에 고였다. 나는 붓을 물통에 담갔다.
“어디로 가는데요?”
“갈월 추모공원이요.”
대답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작업 기록지에 적어 둔 서은숙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오늘이 어머니 기일입니다.”
나는 의자에서 등을 뗐다.
“그럼 다른 날 가도 돼요. 사진은 급하지 않아요.”
“오늘 가는 길이라 물었어요. 불편하면 사진만 찍어 오겠습니다.”
시집 옆에는 어제 적은 의뢰서가 있었다. 원래 형태를 확인하기 전에는 없어진 부분을 만들지 않겠다고 써 뒀다.
“같이 갈게요. 직접 보고 여쭐 것도 있어요.”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요.”
통화가 끊긴 뒤 달력을 확인했다. 오후에 오기로 한 손님은 없었다. 나는 다은에게 외출 시간을 말하고 시집의 치수를 적은 수첩을 꺼냈다.
“그 책 때문에 가?”
다은이 포장 끈을 자르며 물었다.
“응. 원래 표지가 나온 사진이 있대.”
“책은 두고?”
“지금은 움직이면 안 돼.”
나는 표지 위에 종이를 다시 얹었다. 가방에 수첩과 휴대폰을 넣고, 목에 걸린 실이 옷깃 밖으로 나왔는지 확인했다.
다은은 묻지 않고 내 앞치마를 받아 걸었다.
◈
검은 세단은 골목 입구에 서 있었다. 이헌은 차 밖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보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검은 코트 안으로 넥타이가 보였다. 스튜디오 옥상에서 고쳐 줬던 매듭과 달리 가운데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작업 중이었죠.”
“정리하고 나왔어요.”
나는 갈색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이헌이 운전석에 앉은 뒤에도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뭘요?”
“사진 있는 곳이 어딘지요.”
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알고 왔어요.”
이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안전띠를 잡은 손이 잠깐 멈췄다가 내려갔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뒷좌석에는 흰 국화가 놓여 있었다. 포장지 아래에 작은 물주머니가 달려 있어 차가 돌 때마다 물이 기울었다.
“시집은 언제부터 어머님이 갖고 계셨어요?”
“제가 기억할 때부터요.”
“표지는 바꾸신 적 없고요?”
“없을 겁니다. 늘 그 책이었어요.”
“낡으면 다른 걸 사서 읽으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신호가 바뀌어 이헌이 차를 멈췄다.
“누가 그렇게 물은 적 있어요.”
“뭐라고 하셨어요?”
“이 책이어야 한다고요.”
나는 수첩을 펴려다 그만뒀다. 사진을 보고 나서 적어도 될 말이었다.
차 안에는 길을 안내하는 소리만 났다.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공장 담장을 보다가 오른손 검지를 폈다. 아침에 바꿔 붙인 밴드 끝이 조금 들떠 있었다.
이틀 전 주원은 뒤집어 놓은 전화를 끝내 받지 않았다. 신발을 신으면서 내게 아버지께는 아직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 말만 전했다.
“손 다쳤어요?”
이헌의 시선이 신호등으로 돌아갔다.
“판지 자르다가 조금요. 거의 나았어요.”
“일하는 데 불편하겠네요.”
“물 쓸 때만 조심하면 돼요.”
나는 손을 가방 아래로 내리지 않았다. 대신 들뜬 밴드 끝을 눌러 붙였다. 이헌은 앞을 보며 차를 출발시켰다.
◈
추모공원 주차장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차에서 내리자 바람에 코트 자락이 벌어졌다. 이헌은 뒷좌석에서 국화를 꺼냈다.
“사진은 어느 쪽이에요?”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해요.”
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헌이 걸음을 멈췄다.
“사진 찍으러 온 거니까 꺼내 둬도 돼요.”
“올라가서 꺼낼게요.”
관리소 앞에서는 할아버지가 화분을 옮기고 있었다. 문 옆에 놓인 받침을 발로 밀려다 이헌을 보고 허리를 폈다.
“왔어?”
“안녕하세요.”
“올해도 혼자 왔네.”
할아버지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벌어졌던 입이 닫혔다. 나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 같이 왔구나. 길에 낙엽이 좀 있어. 내려올 때 조심하고.”
할아버지는 장갑을 벗으려다가 한쪽을 떨어뜨렸다. 화분 밑으로 들어간 장갑을 내가 주워 건넸다.
“이것도 안으로 옮기시는 거예요?”
나는 문턱에 걸린 빈 받침을 가리켰다.
“그것만 들이면 돼. 무거운 건 다 했어.”
받침을 세우자 밑에 고인 물이 신발 쪽으로 흘렀다. 나는 발을 빼고 문 안쪽에 받침을 놓았다. 이헌은 남아 있던 화분을 들어 관리소 안으로 옮겼다.
“그건 내가 해도 되는데.”
“어디 놓을까요?”
“창문 밑. 거기 두면 돼.”
할아버지는 내 손을 보고 수도 쪽을 가리켰다.
“흙 묻었네. 물이 아주 차.”
“닦으면 돼요.”
가방에서 휴지를 찾는데 이헌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나는 흙 묻은 손끝을 한번 보고 휴지를 꺼냈다.
“이걸로 할게요. 그건 빨아야 하잖아요.”
이헌은 손수건을 접어 넣었다. 할아버지가 관리소 문을 열어 두고 우리를 번갈아 봤다.
“물은 위에 받아 놨어. 꽃병도 씻어 뒀고.”
“고맙습니다.”
이헌이 국화를 고쳐 들었다. 나는 사용한 휴지를 쓰레기통에 넣고 뒤따랐다.
계단 앞에서 할아버지가 다시 불렀다.
“내려오면 따뜻한 물 마시고 가.”
이헌이 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네. 내려와서 뵐게요.”
◈
묘 앞에는 돌로 된 꽃병과 사진틀이 놓여 있었다. 이헌은 가져온 꽃을 내려놓고 먼저 사진틀의 유리를 닦았다.
사진 속 여자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시집을 세우고 손가락으로 아랫부분을 잡고 있었다.
나는 바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헌이 꽃의 포장을 풀 때까지 뒤에 서 있었다.
“여기예요.”
이헌이 옆으로 자리를 비켜 줬다.
가까이 가니 사진 속 책의 등이 보였다. 작업대에 놓인 시집보다 색이 짙었고, 등과 표지가 만나는 부분도 붙어 있었다. 아래쪽에 눌린 자국은 지금 남은 것과 같았다.
“같은 책 맞네요.”
나는 수첩을 꺼내 표지 치수를 확인했다.
“제목 아래가 조금 가려져 있어요. 사진틀을 들어 봐도 될까요?”
“네.”
이헌이 사진틀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유리에 손을 대지 않고 가장자리를 잡았다. 빛이 비치는 각도를 피하자 지워진 글자 아래의 선이 보였다.
“찍어도 돼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체를 남긴 뒤 책이 나온 부분을 다시 찍었다. 화면을 넓혀 보니 표지 모서리에 찍힌 무늬도 남아 있었다.
“새 표지로 바꾸지 않아도 되겠어요.”
“지금 걸 살릴 수 있습니까?”
“네. 약해진 부분만 받치면 돼요. 없어진 글자는 억지로 채우지 않을 거예요.”
나는 화면을 이헌 쪽으로 기울였다.
“여기 선이 있었네요. 작업대에서는 끊긴 데까지만 보여서, 무늬인지 흠집인지 몰랐어요.”
이헌이 몸을 조금 숙였다. 휴대폰 양쪽에 놓인 손 사이로 5cm쯤 남았다. 나는 화면을 더 크게 하려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이건 그대로 남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 줘요.”
낮은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사진틀을 제자리에 놓았다.
사진 속 서은숙은 웃고 있었다. 이헌과 눈매가 닮았다는 말을 하려다가, 묘비에 적힌 날짜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날짜였다.
“15번째예요.”
이헌이 말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화면을 끄느라 눌렀던 손가락이 단추 위에 남았다.
이헌은 국화의 포장지를 접었다. 꽃병에서 마른 줄기를 빼고 새 꽃을 꽂았다. 줄기 하나가 길어 끝이 맞지 않자 다시 꺼내 손에 들었다.
“가위가 있으면 좋겠는데.”
“관리소에 빌려 올까요?”
“괜찮아요. 조금 내려 꽂으면 됩니다.”
이헌이 줄기 방향을 바꾸자 꽃 높이가 맞았다. 나는 옆에 놓인 물통을 들어 꽃병에 물을 부었다. 물이 넘치기 전에 이헌이 짧게 말했다.
“됐어요.”
나는 물통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이헌은 접던 포장지의 모서리를 맞췄다.
“교통사고라고 들었어요.”
나는 물통 뚜껑을 쥔 채 이헌을 봤다.
들었어요.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하면서 왜 그렇게 덧붙였을까. 이헌은 포장지에 붙은 테이프를 떼고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실장님은…….”
말을 멈췄다. 내가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헌이 손을 내렸다.
“열아홉이었어요.”
“그랬군요.”
더 묻지 않고 뚜껑을 닫았다. 나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누군가 자꾸 사정을 물으면 대답할 말을 먼저 고르곤 했다.
이헌은 내 쪽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묘비 앞에 남은 잎을 주워 포장지에 얹었다.
나는 돌 위에 놓인 사진틀을 다시 봤다. 사진 아래 모서리가 받침에서 조금 빠져 있었다. 양쪽을 맞춰 끼우자 틀이 기울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이헌이 사진틀을 내려다봤다.
“고마워요.”
바람에 꽃 포장지가 들썩여 이헌이 손바닥으로 눌렀다. 나는 빈 봉투를 벌려 포장지를 받았다.
◈
내려오는 길에는 이헌이 먼저 걷지 않았다. 나란히 걸을 수 없는 계단에서만 한 칸 앞에 섰다.
구두 밑에 낙엽이 끼어 나는 난간을 잡고 발을 들었다. 이헌이 돌아봤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내가 낙엽을 떼고 내려설 때까지 기다렸다.
“이런 날 저를 데려와도 괜찮으셨어요?”
“윤나경 씨는요.”
“제가 먼저 물었는데요.”
이헌이 걸음을 늦췄다.
“괜찮아서 물었어요.”
나는 가방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 이헌의 코트 소매가 가까워졌다가 계단이 끝나며 다시 떨어졌다.
“저도 괜찮아요. 사진도 잘 찍었고요.”
“사진 말고요.”
대답하기 전에 관리소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가 종이컵을 들고 손짓했다.
“뜨겁지 않게 해 놨어. 하나씩 마셔.”
나는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 밴드가 붙은 손가락에 물이 닿지 않게 컵을 돌렸다. 이헌은 빈 물통을 관리소 안에 놓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꽃은 잘 놓았느냐고 묻고는 바닥에 떨어진 잎을 빗자루로 모았다. 이헌이 대답하는 동안 나는 물을 조금 마셨다. 컵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대답하지 않은 말이 남아 있었다.
사진 말고요.
관리소를 떠나 주차장으로 걸었다. 차에 가까워졌을 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음에 사진만 찍으러 가실 때도 물어보세요.”
이헌이 차 열쇠를 쥔 손을 내렸다.
“같이 가 줄 겁니까.”
나는 대답하려다 주차장 건너편을 봤다.
차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약혼식 날 석진의 뒤를 따라다니던 비서였다.
남자는 닫으려던 문을 붙든 채 우리를 봤다.
“실장님.”
내가 부르자 이헌도 고개를 돌렸다.
석진의 비서가 휴대폰을 들어 우리 쪽으로 향했다.
(18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