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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작업실 소파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8 16:34:21

『오늘 일정: 월요일 저녁, 작업 정리』

“조금 남았어요. 연락하고 오시지.”

나는 앞치마에서 손을 떼고 작업대 옆으로 나왔다. 주원은 코트 단추를 풀며 창가부터 안쪽 방까지 둘러봤다.

“근처에 왔다가. 전화하면 바쁘다고 할 것 같아서.”

“바쁘면 오셔도 똑같아요.”

“앉아는 있어도 되잖아.”

주원이 소파를 가리켰다. 포장용 천과 종이 상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천을 접어 상자 위에 올렸다.

“가방은 바닥 말고 여기 두세요. 종이 가루 묻어요.”

“나보다 가방 걱정부터 하네.”

“가죽에 풀 묻으면 닦기 어려워요.”

주원이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소파 가운데가 꺼지자 무릎 위 코트 자락을 당겼다. 연회장 의자에서는 보지 못한 자세였다.

나는 작업대로 돌아가 시집을 덮었다. 받침은 건드리지 않고 종이만 얹었다. 주원이 등 뒤에서 물었다.

“그건 아직도 고쳐?”

“오늘 시작했어요.”

“다 뜯어 놓은 것 같은데.”

“상태부터 보려고요. 어디가 어떻게 끊어졌는지 알아야 다시 묶죠.”

주원은 대답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나는 작은 가위를 닫고 칼날에 덮개를 씌웠다. 보관함 옆 휴대폰에는 이헌이 보낸 문자가 남아 있었다.

기다리겠다는 말 아래로 답을 쓰지 못했다.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

다은은 문을 팔꿈치로 밀고 들어왔다.

“나경아, 국물 따로 담아 달랬는데…….”

말을 멈춘 다은이 주원과 나를 번갈아 봤다. 봉투 안에서 용기가 기울어 나는 얼른 한쪽을 받았다.

“손님 오신 줄 몰랐어요.”

“갑자기 왔습니다. 강주원입니다.”

“고다은이에요. 나경이 친구고 여기서 같이 일해요.”

주원이 일어나려 하자 다은이 빈손을 들어 말렸다.

“그냥 앉아 계세요. 여긴 식탁도 접어야 나와요.”

나는 벽에 세워 둔 상을 폈다. 다은이 용기를 꺼내는 동안 작업대 쪽 문을 닫았다. 종이를 둔 방과 소파 사이에 문 하나가 놓였다.

“두 분 드세요. 난 잠깐이면 돼.”

주원이 말했지만 다은은 뚜껑을 열고 수저를 셌다.

“나눠 먹으면 돼요. 그릇 하나만 더 꺼내.”

“저녁 안 드셨어요?”

내가 묻자 주원이 소매를 걷었다.

“먹으려다 못 먹었어.”

다은은 주원 앞에 그릇을 놓고 내 쪽으로 물컵을 밀었다. 나는 앞치마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목에 걸어 둔 실이 옷깃 밖으로 나왔다.

반지가 상 모서리에 닿았다.

주원이 내 손 대신 목을 봤다.

“거기 걸고 일해?”

“손에 끼면 종이에 눌린 자국이 남아요.”

“빠뜨리는 것보단 낫네.”

나는 반지를 옷 안으로 넣었다. 주원은 더 묻지 않고 그릇에 음식을 덜었다.

다은이 낮에 다녀간 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계단에서도 가계부를 꺼내려 하셨다는 말에 주원이 닫힌 문을 봤다.

“그런 것도 고쳐요?”

“네. 책으로 묶인 건 웬만하면 봐요. 종이 한 장도 하고요.”

주원은 젓가락으로 남은 음식을 집었다. 다은이 밥을 더 권했지만 빈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

“잘 먹었습니다. 제가 치울게요.”

“분리하는 통이 복잡해요. 봉투만 묶어 주세요.”

◈

다은이 포장 쓰레기를 들고 먼저 퇴근했다. 나는 계단에서 봉투가 난간에 걸리지 않도록 문을 잡아 줬다.

“정리하다 늦지 마.”

“너도 조심히 가.”

문을 닫자 주원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코트를 입으려는 줄 알았는데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거 전해 주려고 왔어.”

봉투에는 스튜디오 이름과 상담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나는 소파 반대쪽에 앉아 종이를 꺼냈다.

옷, 촬영 장소, 앨범 크기. 경란이 고른 항목 옆으로 확인 표시가 붙어 있었다. 내가 받지 못한 종이였다.

“어머니가 내 서명도 받아 두라고 하셔서.”

“촬영 안 하시는 분한테 서명을 받네요.”

“그날은 미안했어. 일이 안 끝나서.”

주원이 내 얼굴을 봤다. 나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상담받은 날 옥상에서 고쳐 줬던 넥타이가 떠올랐다. 손을 떼고 얼마 안 돼 열린 옥상 문도.

나는 종이 끝을 엄지로 쓸어 보고 봉투 위에 내려놓았다.

“다음 일정은 직접 오세요. 저 혼자 고를 게 아니잖아요.”

“알았어. 비워 놓을게.”

주원은 검정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열었다. 빈 날짜를 확인하던 손가락이 멈췄다.

“결혼은 내년 5월쯤 할 것 같아.”

“누가요?”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우리.”

“우리가 정한 적은 없잖아요.”

화면이 켜진 휴대폰을 주원이 무릎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그때가 좋겠대.”

“저희 아버지도 아세요?”

“이번 주에 말씀하시겠지.”

“그럼 아직 저희 집에는 말도 안 한 거네요.”

주원이 입술 안쪽을 눌렀다. 나는 봉투에 종이를 넣지 않고 상 위에 펼쳐 뒀다.

“날짜는 아직 아니야. 대충 그쯤으로 생각하라는 거지.”

“저는 그 말도 오늘 처음 들어요.”

“나도 오늘 들었어.”

주원이 검정 휴대폰의 화면을 껐다. 소파 옆에 내려놓으려다 다시 집어 들었다.

“봄이 좋다고 하시더라. 너무 늦어져도 말 나온다고.”

“무슨 말이요?”

“약혼해 놓고 왜 결혼 안 하느냐고.”

“누가 물었는데요?”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다른 휴대폰을 꺼내 검정 휴대폰 옆에 놓았다. 흰색이었다.

나는 두 대 사이에 놓인 주원의 손을 봤다. 약혼식장에서도 들고 다니던 전화였다.

“아직 날짜를 정한 게 아니라면, 저도 제 일정 보고 말씀드릴게요.”

“작업 때문에?”

“그것도 있고요.”

“미룰 수 없는 거야?”

“맡은 건 먼저 끝내야 해요. 결혼 준비한다고 손님 책을 돌려드릴 수는 없잖아요.”

주원이 닫힌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혼하고도 계속 여기 나올 거야?”

“네.”

바로 대답하자 주원이 손을 거뒀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먼저 물어보시면 좋겠어요. 날짜 정하기 전에.”

주원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넥타이 아래로 손가락을 넣었다가 빼고, 상 위의 상담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이건 오늘 안 써도 돼.”

“주원 씨 서명 받으러 온 거라면서요.”

“내 건 해 놨어. 나경 씨도 확인했는지 보라고 하셔서.”

나는 상담서 맨 아래를 봤다. 주원의 이름 옆에 서명이 있었다. 내가 고른 적 없는 옷 아래에는 내 서명 칸도 비어 있었다.

“집에 가서 다시 읽어 볼게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봉투를 옮기려고 일어났다. 내일 쓸 받침 종이를 먼저 재단해 두려던 게 생각났다.

“잠깐만요. 이것만 넣어 둘게요.”

문을 열자 작업등 아래 시집이 그대로 있었다. 나는 덮어 둔 종이가 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받침용 판지를 꺼냈다.

주원은 문밖에 선 채 안을 들여다봤다.

“그건 돈 받고 하는 일이야?”

“책 놓을 받침이에요. 새로 잘라 두려고요.”

“오늘 꼭 해야 해?”

“내일 바로 쓸 거라서요.”

자를 대고 커터를 당겼다. 끝에 남은 부분이 끊어지지 않아 판지를 돌렸다. 자를 옮기던 손가락이 칼날 앞에 있었다.

따끔해서 손을 뺐다.

판지에는 묻지 않았다. 오른손 검지 옆으로 피가 났다.

“베였어?”

“조금요.”

나는 커터를 내려놓고 휴지로 손끝을 눌렀다. 주원이 안으로 들어오려 해서 다치지 않은 손을 들었다.

“거기 계세요. 바닥에 자른 게 있어요.”

“약 어디 있어?”

“서랍에 있는데, 먼저 씻을게요.”

작업대에서 떨어진 세면대에 손을 댔다. 물에 씻고 눌러 보니 깊지는 않았다. 다은이 채워 둔 약 상자가 떠올라 서랍으로 가려는데 주원이 불렀다.

“이리 와 봐.”

주원은 소파 앞에 앉아 지갑을 열고 있었다. 카드 뒤에서 밴드 하나를 꺼냈다.

나는 휴지를 댄 채 다가갔다.

“왜 그게 지갑에 있어요?”

“늘 넣어 다녀.”

카드 칸 안쪽에 밴드가 하나 더 있었다. 주원은 포장지를 뒤집어 날짜를 확인하고 뜯었다.

“직접 할 수 있어요.”

“한 손으로 뜯다 또 피 나. 손 줘 봐.”

나는 잠깐 서 있다가 소파 끝에 앉았다. 주원과 무릎 하나 들어갈 자리를 두고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휴지를 떼지 않고 물었다.

“멎었어?”

손끝을 확인하니 피가 더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젖은 휴지를 접었다. 주원이 새 휴지를 내밀어 물기를 닦게 했다.

“접히는 데라 불편하겠네.”

주원은 밴드 가운데를 상처에 맞췄다. 내 손가락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테이프 끝을 겹쳐 붙이고 나서야 손을 놓았다.

“이렇게 하면 덜 벌어져.”

“해 본 적 많으신가 봐요.”

“호텔에서 종이 베일 일이 꽤 있어. 급하게 넘기면 꼭 다치더라고.”

주원이 포장지를 모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는 검지를 굽혀 봤다. 밴드 끝이 손톱에 닿지 않았다.

“고마워요.”

“오늘은 그만해. 물 닿으면 갈고.”

주원이 지갑에서 남은 밴드까지 꺼내 상 위에 놓았다.

“이건 갖고 있어.”

“주원 씨 건요?”

“다시 넣으면 돼.”

나는 밴드를 약 상자에 넣으려다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손을 씻고 갈아야 했다.

나는 작업대로 가서 칼날부터 넣었다. 시집을 덮은 종이도 확인한 뒤 작업등을 껐다.

◈

소파로 돌아왔을 때 주원은 상담서를 다시 봉투에 넣고 있었다.

“이건 여기 둘까?”

“주세요.”

나는 봉투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주원은 빈손을 무릎에 놓았다가 바지에 한번 문질렀다.

“아버지한테는 내가 말해 볼게.”

“어떤 걸요?”

“5월. 아직 정한 건 아니라고.”

“저희가 먼저 의논하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주원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흰 휴대폰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집지는 않았다.

“그 말이 더 어려운데.”

“왜요?”

“아버지는 의논하라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거든.”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주원은 어깨를 앞으로 숙이고 두 손을 맞잡았다. 엄지로 밴드 포장지를 뜯었던 손톱 끝을 누르고 있었다.

“주원 씨는 언제가 좋은데요?”

주원이 나를 봤다.

“결혼이요. 5월이 좋은지, 다른 때가 좋은지.”

“그걸 생각해 본 적은 없네.”

“날짜가 아니라 결혼을요?”

주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누군가 계단을 오르다 아래층 문을 열었다. 열쇠 부딪치는 소리가 멎을 때까지 주원은 손톱만 보고 있었다.

“나도 아버지 말 거스른 적 없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는 주원의 옆얼굴을 봤다. 웃을 때 접히던 눈가가 펴져 있었다. 주원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싫다고 한 적도 없어요?”

“어릴 때야 있었겠지.”

“지금은요?”

주원은 대답 대신 검정 휴대폰을 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소파 위에 남겨 뒀다.

나는 다친 손가락을 폈다. 붙여 준 밴드 한쪽에 주원이 눌러 접은 자국이 있었다.

“오늘 날짜 이야기 들은 건 아버지께 제가 말씀드릴게요.”

주원이 그제야 내 쪽을 봤다.

“바로 전화하려고?”

“네. 다른 분한테 먼저 들으시면 곤란해요.”

“아직 정해진 거 아니라고 해. 그건 맞으니까.”

나는 앞치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풀자 이헌과 나눈 문자가 다시 보였다. 주원은 내 손에 닿을 거리 밖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화면을 아래로 기울였다.

통화 목록을 누르기 전에 주원이 물었다.

“나경 씨.”

나는 손을 멈췄다.

“다음엔 오기 전에 연락할게. 일하는 데 불편했지?”

“작업 중일 때는 손을 못 뗄 수도 있어요.”

“오늘도 그랬네.”

주원이 내 검지를 봤다. 나는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옮겼다.

“칼에 벤 건 제가 잘못 잡아서예요.”

“그래도 밥은 같이 먹었네. 그치?”

“네. 다음에는 다은이 몫까지 드시지 말고요.”

주원이 짧게 웃었다. 일어나려던 몸을 다시 소파에 붙이고 코트 주머니를 눌러 봤다.

그때 흰 휴대폰이 울렸다.

소파 천 위에서 진동하던 전화가 조금씩 내 쪽으로 밀렸다. 화면에 『아버지』가 떠 있었다.

주원의 손이 전화 앞에서 멈췄다.

나는 통화 목록을 닫고 기다렸다. 벨소리가 다시 처음부터 울렸다.

주원은 받지 않고 흰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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