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약혼자의 삼촌 / 19화. 돌아오는 국도

Share

19화. 돌아오는 국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6:34:35

『오늘 일정: 수요일 저녁, 추모공원에서 돌아오는 길』

이헌이 내 앞을 가로막지 않고 옆에 섰다. 석진의 비서는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이헌이 묻자 비서가 화면을 내려다봤다.

“부회장님께 연락드리던 중입니다.”

“여기 온 것도 형님 지시예요?”

“확인할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헌은 더 묻지 않았다. 비서는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비서의 얼굴보다 주머니 밖에 남은 손을 봤다.

“가시죠.”

이헌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나는 타기 전에 비서를 돌아봤다.

“사진 찍으셨어요?”

차 열쇠를 꺼내던 비서의 손이 멈췄다.

“부회장님께 전화드리려던 겁니다.”

찍지 않았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가방을 먼저 좌석에 놓았다.

“저희가 같이 왔다고 전하실 거면, 시집 표지 사진을 확인하러 왔다고도 전해 주세요.”

비서가 이헌을 봤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에 탔다.

문이 닫힌 뒤에도 이헌은 잠시 밖에 서 있었다. 유리 너머로 비서의 입이 움직였지만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헌이 운전석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안전띠를 채우고 있었다.

“제가 말하지 않는 게 나았어요?”

“아니요.”

이헌이 시동을 걸었다.

“윤나경 씨가 설명할 일은 아니었어요.”

“그럼 실장님만 설명하실 거예요?”

이헌은 출발하기 전에 거울을 봤다. 비서는 아직 차 옆에 서 있었다.

“오늘 같이 온 이유는 제가 말할게요.”

나는 가방 손잡이에 걸린 실밥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추모공원 입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이헌은 전화를 걸지 않았다.

◈

국도로 들어서자 길가의 가게들이 드문드문 끊겼다. 유리 아래쪽으로 더운 바람이 나왔다. 나는 코트 단추를 풀고 무릎 위에 가방을 눕혔다.

휴대폰에는 아까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틀 가장자리까지 나온 것과 책만 크게 찍은 것이 나란히 있었다. 책 사진을 열어 흐린 부분이 없는지 확인한 뒤 화면을 껐다.

“사진은 잘 나왔어요.”

“다행이네요.”

“표지 작업은 내일부터 할 수 있겠어요. 오늘 본 선이 있어서 방향을 정할 수 있어요.”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서두르는 건 아니에요. 확인할 게 확인됐으니까 하는 거예요.”

이헌이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지 않고 손에 들고 있었다.

석진에게서 연락이 올까 봐 화면을 다시 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까 그분은 정말 전화만 하려던 걸까요?”

“모릅니다.”

“사진을 안 찍었다고는 안 했어요.”

“네.”

“물어보실 거예요?”

이헌은 앞차와 거리를 벌렸다.

“확인해 볼게요.”

나는 손에 든 휴대폰을 뒤집었다. 이헌이 나를 데려온 일을 잘못이라고 말하면, 시집 사진부터 꺼내 보여 줄 생각이었다. 오늘 내가 한 일을 차례로 설명할 수도 있었다.

“주원 씨한테도 말이 갈까요?”

“갈 수 있어요.”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나는 무릎 위에서 가방을 세웠다.

“그럼 제가 먼저 말할게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듣는 것보다 낫겠어요.”

“지금은 운전 중이니까, 도착해서 이야기해요.”

“알겠어요.”

나는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지퍼를 끝까지 당겼는데 손잡이가 안감에 걸렸다. 천을 빼내려다 멈추고 그대로 두었다.

이헌이 길 가장자리의 표지판을 확인했다. 방향을 안내하는 소리가 났다. 서울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윤나경 씨.”

“네.”

“이제 날 피해요. 그게 당신한테 안전해요.”

나는 지퍼에서 손을 뗐다.

“작업실에 오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제가 안 가야죠.”

“시집은요?”

“조 비서 통해서 주고받으면 됩니다.”

나는 가방 안감을 잡아당겼다. 지퍼가 풀리면서 손잡이가 손등에 부딪혔다.

“수장고 일도 그렇게 하실 거고요?”

“필요한 연락만 하면 돼요.”

“그럼 오늘은 왜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이헌의 손이 운전대 아래쪽으로 옮겨 갔다.

“사진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사진만 보내 주셔도 됐잖아요.”

“그랬어도 됐어요.”

대답을 듣고 나니 다음 말이 더 빨리 나왔다.

“같이 가겠냐고 물으신 건 실장님이잖아요. 내려올 때도 사진 말고 괜찮으냐고 하셨고요.”

“네.”

“저는 괜찮다고 했어요.”

이헌이 내 쪽을 보려다 시선을 길로 돌렸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앞을 봤다. 마주 오는 차의 불빛이 지나갔다.

그 옆에서 아까 비서가 서 있던 자리를 자꾸 떠올렸다. 휴대폰을 든 손, 대답하지 않고 이헌을 보던 얼굴.

“그분이 봐서 그러세요?”

“그것도 이유예요.”

“그분이 없었으면 이런 말씀 안 하셨을 거예요?”

이헌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 커브를 돌아 나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늦게 했을 겁니다.”

나는 가방 위에 놓인 손을 폈다.

“피하라면서 왜 와요.”

말하고 나서 이헌을 봤다.

“스튜디오에서도, 골목에서도요. 책을 맡기러 오신 거면 책만 주고 가셔도 되는데.”

“맞아요.”

“그런 대답 말고요.”

이헌이 방향지시등을 켰다. 나는 앞을 돌아봤다. 국도 옆으로 휴게소 표지판이 보였다. 차가 속도를 줄이고 갓길에서 이어진 진입로로 들어갔다.

자판기가 놓인 건물 앞에는 빈 주차 칸이 있었다. 이헌은 차를 세우고 기어를 바꿨다. 시동은 끄지 않았다.

“운전하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나는 안전띠를 풀지 않았다. 이헌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책만 두고 갔어야 했다는 건 알아요.”

이헌이 운전대에서 손을 내렸다.

“그러려고 갔는데, 윤나경 씨가 내려왔어요.”

“제가 내려오면 안 됐어요?”

“아니요. 반가웠어요.”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이헌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못 갔어요.”

송풍구에서 바람 나오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말을 고르다가 입술을 한번 다물었다.

“오늘도요?”

“같이 와 줬으면 했어요.”

“그런데 이제 오지 말라고요.”

“제가 보고 싶다는 이유로 계속 찾아가면 안 되니까요.”

안전띠가 코트 깃을 누르고 있었다. 나는 끈을 조금 당겼다가 놓았다.

“저는 실장님한테 오라고 한 적 없으니까,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 뜻 아닙니다.”

“저도 내려갔어요. 책을 받고 그냥 올라오지 않았고요.”

이헌이 입을 열려다 멈췄다. 나는 먼저 고개를 숙여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았다. 무릎 위가 비었다.

“따뜻한 거 마실래요?”

이헌이 물었다.

나는 창밖의 자판기를 봤다.

“잠깐만요.”

이헌의 손이 문손잡이 앞에서 멈췄다.

“말을 그만하자는 거예요?”

“아니요. 목이 잠긴 것 같아서요.”

나는 헛기침을 했다. 말이 자꾸 빨라져 목 안쪽이 따가웠다.

“같이 내려요.”

내가 안전띠를 풀자 이헌도 문을 열었다.

◈

자판기 앞에는 종이컵을 버리는 통과 물통이 놓여 있었다. 건물 안쪽에서는 누군가 의자를 옮기는 소리가 났다.

이헌이 자판기 버튼을 봤다.

“뭘로 할래요?”

“율무차요.”

이헌은 지갑을 꺼냈다가 지폐 투입구에 붙은 종이를 확인했다.

『지폐 사용 안 됨』

동전 넣는 곳은 열려 있었다. 이헌이 코트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냈다. 손바닥에 놓인 것을 세고 가격표를 다시 봤다.

“한 잔 먼저 뽑을게요.”

“얼마 모자라는데요?”

“300원이요.”

나는 가방을 차에 두고 내린 것을 떠올렸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작업실 사물함 열쇠와 동전이 만져졌다.

100원짜리 동전 3개를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됐어요.”

“잔돈이 있었네요.”

“가게에서 거슬러 주면 주머니에 넣거든요.”

이헌이 율무차 버튼을 눌렀다. 종이컵이 내려오고 물이 쏟아졌다. 나는 컵을 꺼내 안에 든 가루가 다 풀렸는지 살폈다.

이헌이 다음 잔을 뽑는 동안 컵을 든 손을 바꿨다. 오른손 검지의 밴드 끝이 다시 들떠 있었다.

“손가락에 닿지 않게 잡아요.”

“이쪽으로 잡으면 돼요.”

나는 컵을 왼손으로 옮겼다. 이헌은 자기 컵을 꺼내고 배출구에 남은 동전이 없는지 확인했다.

차로 돌아가려는데 주차장으로 화물차가 들어왔다. 나는 자판기 옆에 멈춰 섰다. 이헌도 곁에 섰지만 내 팔이나 등을 잡지 않았다.

화물차 운전석에서 남자가 내려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컵을 들고 서 있는 이헌을 한번 보고 자판기 앞으로 갔다.

나는 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뒤따라오는 구두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조수석 문 앞에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가루가 남아 입안에 붙었다. 이헌은 반대편으로 가지 않고 차 앞에 서 있었다.

“300원은 안 돌려주셔도 돼요.”

내가 말하자 이헌이 컵에서 입을 뗐다.

“그건 갚아야죠.”

“차 한 잔 마시는 데는 보태도 되잖아요.”

“네.”

나는 컵 가장자리를 내려다봤다.

“그런 건 제가 정해도 되잖아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고 컵을 내렸다. 나는 문을 열어 먼저 탔다.

◈

컵을 거치대에 놓고 밴드 끝을 눌렀다. 접착 부분에 먼지가 붙어 잘 붙지 않았다. 손가락을 굽히면 다시 벌어졌다.

이헌이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았다. 바깥 소리가 줄었다. 앞유리 너머로 자판기의 불빛이 보였다.

“실장님이 안 오시면 저도 안 갈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나는 들뜬 밴드를 더 만지지 않고 손을 내렸다.

“그렇게 해 줬으면 했어요.”

“오늘 본 분 때문에 제가 곤란해질 수 있다는 건 알아요.”

나는 코트 안쪽의 실을 꺼냈다. 백금 반지가 실에 걸려 나왔다. 이헌의 시선이 잠깐 내려갔다가 내 얼굴로 돌아왔다.

“이것도 잊고 나온 거 아니에요.”

손가락에 끼우지 않은 반지를 엄지로 눌렀다.

“당장 이걸 빼면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부터 생각해야 해요. 그런데 실장님을 안 만나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말을 멈추고 실을 옷 안에 넣었다.

“그건 아니에요.”

이헌이 거치대의 컵을 바로 세웠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그럼 제 대답도 물어보세요.”

나는 운전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같이 가겠냐고 물으셨을 때처럼요.”

이헌은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코트 소매 아래로 셔츠 단추가 보였다. 나는 그 손이 운전대로 돌아가는지 보고 있었다.

“윤나경 씨가 감당할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어떤 일이요?”

“형님이 오늘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을 겁니다.”

“실장님한테만 그러시지는 않겠네요.”

“그래서 피하라고 한 겁니다.”

나는 뒤쪽 좌석을 봤다. 국화를 뒀던 자리에 포장지를 담았던 봉투가 접혀 있었다. 이헌은 빈손으로 내려와서도 관리소에 인사를 하느라 걸음을 멈췄다. 그때 나는 다음에도 같이 가겠다고 대답하려고 했다.

비서가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끝냈을 말이었다.

“돌아가면 주원 씨한테 전화할게요.”

이헌이 나를 봤다.

“오늘 어디 갔다 왔는지 제 입으로 말할 거예요. 시집 일도요. 다른 말이 오면 듣고 제가 대답하겠어요.”

“혼자 설명하게 두지는 않아요.”

“저도 실장님만 설명하게 두고 싶지 않아요.”

이헌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굽혀졌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거치대에서 율무차를 꺼냈다. 컵을 잡고 있으면 손을 뻗지 않을 수 있었다.

이헌이 컵을 든 내 손을 봤다.

“오늘 집 앞까지 데려다줘도 되겠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헌이 안전띠를 당겼다. 버클에 끼우는 소리가 났다.

내 쪽 안전띠는 아직 풀려 있었다. 나는 차를 마시지 않고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집까지 가는 것만 물으신 거예요?”

이헌의 손이 시동 버튼 쪽에서 멈췄다.

“지금은요.”

나는 손을 뻗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를 지나 이헌의 손목을 잡았다. 셔츠 끝에 엄지가 닿았다.

이헌은 손을 빼지 않았다. 내 손을 덮거나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나는 잡은 손목을 놓지 않고 이헌을 봤다.

“피하지 않을래요.”

(19화 끝)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약혼자의 삼촌   32화. 세탁실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접지칼이에요. 아까 보셨던 거요.”나는 상자를 가방에 넣지 않고 뚜껑을 열었다. 경란의 시선이 흰 손잡이에서 받침 아래로 내려갔다.“밑에는?”“닦는 천이 들어 있어요.”천을 꺼내 펼쳤다. 아무 무늬도 없는 천이었다. 경란은 한쪽 끝을 잡았다가 놓았다.“저런 것까지 챙겨 줬네.”나는 천을 접어 받침 아래에 넣었다.“도구에 묻은 풀을 그대로 두면 다음 종이에 옮거든요. 쓰고 나면 닦아 둬야 해요.”“네가 뭘 쓰는지 이헌이가 어떻게 알았을까.”뚜껑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맞춰 닫았다.“복원 맡기신 책 때문에 작업실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 보셨나 봐요.”“의뢰인한테 그런 것도 보여 줘?”“작업하는 걸 궁금해하시면요.”경란은 내 가방 안을 잠깐 보았다. 선물 포장지 옆으로 평소 쓰던 도구집이 나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지퍼를 조금 열었다. 닳은 접지칼 끝이 보였다.“이건 오래 써서 끝이 얇아졌어요. 오늘 받은 건 두꺼운 종이에도 쓸 수 있겠어요.”경란은 도구집을 들여다보다 몸을 바로 세웠다.“그래. 일에 쓰는 거면 잘 써야지.”“네. 잘 쓰겠습니다.”나는 도구집과 상자를 차례로 넣었다. 경란은 내가 가방을 닫는 것까지 보고 돌아섰다.거실 입구에서 주원이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바닥의 물기를 닦으려 하자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 약혼자의 삼촌   31화. 성탄 모임

    『오늘 일정: 12월 24일 화요일 저녁, 서진 본가 성탄 모임』커튼이 다 내려간 뒤에도 나는 2층 창을 올려다봤다. 이헌이 현관문을 연 채 기다렸다. 그날은 안에서 손만 녹이고 바로 나왔다. 경란에게서는 6일 동안 아무 연락이 없었다.12월 24일 저녁, 나는 같은 현관 앞에 다시 섰다. 2층 창가의 커튼은 걷혀 있었다.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는데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구두 밑창에 붙은 눈이 매트에 떨어졌다.“나경 씨, 손 시려?”주원이 내 뒤에서 문을 닫았다.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괜찮아요.”“장갑 좀 끼고 다녀. 오늘 사진도 찍을 건데 손 빨갛겠다.”주원은 내 가방을 받아 들려다 안에서 종이봉투가 나오자 웃었다.“내 선물?”“회장님 드릴 거예요.”“나는 빈손으로 들어왔는데. 옆에 서 있어야겠다.”거실에서는 접시 놓는 소리가 났다. 경란은 식탁 끝에서 냅킨을 펴고 있었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 있었다.“늦지는 않았네. 외투 벗고 앉아.”인사를 마치고 몸을 돌렸을 때 이헌이 보였다. 식탁 건너 창문 옆이었다. 소매를 두 번 접은 손에 물잔을 들고 있었다.“오셨습니까.”“네, 삼촌.”입안에 남은 호칭을 삼켰다. 이헌은 물잔을 내려놓았다. 우리 사이에는 의자가 여섯 개 놓여 있었다.주원이 내 옆 의자를 빼 주었다.“자기, 오늘은 일 얘기 금지야. 아버지도 약속하셨고.”석진이 금색 시계를 보고 웃었다.“아직 내가 아무 말도 안 했

  • 약혼자의 삼촌   30화. 본가 정원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본가 장부 수선 마무리』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맡기신 건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회장은 책상 위의 장부를 당겼다. 끈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손이 멈췄다.“그럼 됐네.”더 묻지 않았다. 나는 기록지 한쪽에 수선한 자리를 짚어 드린 뒤 서재를 나왔다. 이헌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뗄 때까지 나는 복도에 서 있었다.안에서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났다.“외투 가져올게요.”이헌이 현관으로 갔다. 나는 가방 안쪽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다가 빠졌다. 여기서 화면을 켜면 서재 문이 열려도 못 볼 수 있었다.이헌이 코트를 벌려 주려다 내 가방을 봤다.“놓고 입어요. 제가 들고 있을게요.”“바닥에 안 닿게만 해 주세요.”가방을 건네고 팔을 넣었다. 소매 안에서 옷이 말려 올라가 손목을 당겼다. 이헌은 기다렸다가 가방을 돌려줬다. 검은 외투는 아직 팔에 걸쳐 있었다.“회사로 가세요?”“조금 있다가요.”나는 현관 유리 너머를 봤다. 정원 길에는 눈이 치워져 있었다. 담장 아래에만 군데군데 흰 눈이 남았다.“잠깐 걸어도 될까요?”이헌이 외투를 입었다.“정원으로 나가요.”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가방 밑이 젖어 있었다. 서재에서 천을 걷을 때 묻은 건지, 바닥에 남은 눈이 닿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방을 기울여 바닥의 이음매부터 확인했다.“안까지 들어갔어요?”“겉만

  • 약혼자의 삼촌   29화. 회장 서재 금고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 약혼자의 삼촌   28화. 다은의 방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 약혼자의 삼촌   27화. 성탄 장터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