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5일 목요일, 해윤 공장, 아버지와 점심』
“부지 서류가 움직인다는 게 감정평가도 포함돼요?”
목요일 아침, 작업실 계단을 내려가다 멈췄다. 아버지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참이었다. 오늘 공장에 손님이 오니 점심을 조금 늦게 먹자는 내용이었다.
전화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
“누가 온다고 해요?”
“땅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요. 아버지는 대출 연장에 필요한 절차라고 들으셨대요.”
“서진캐피털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 봐요.”
“가서 물어볼게요.”
“서류에 서명해 달라고 하면 바로 하지는 말고요.”
나는 계단 난간에서 손을 뗐다.
“아버지한테도 말씀드릴게요.”
“혼자 가요?”
“네. 공장 가는 버스 기다리려고요.”
이헌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제가 같이 갈 수 있는 날이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아버지한테 뭐라고 소개해요?”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아래층 가게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서 나는 계단 끝으로 내려갔다.
“주원 씨 삼촌이라고 해야 하잖아요.”
“맞아요.”
이헌은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고쳐 멨다.
“오늘은 제가 보고 올게요. 모르는 건 물어볼 거고요.”
“네. 기다릴게요.”
통화를 끊으려다가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댔다.
“실장님.”
“네.”
“그 말은 괜찮네요.”
“어떤 말이요?”
“기다린다는 말이요.”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왔다.
“그럼 다녀와요.”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
공장 정문 옆에는 승용차가 서 있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서류 가방을 열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담장 끝에 장비를 세웠다.
나는 경비실에서 방문 기록을 썼다. 목요일 날짜 옆에 이름을 적는데 장비를 옮기던 남자가 공장 안쪽을 가리켰다.
“하천 쪽 경계도 확인해야 합니다.”
갈매천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남자의 명찰을 봤다. 감정평가사라는 글씨가 있었다.
공장 문을 여니 기계 소리가 커졌다. 염 반장이 통로 끝에서 손을 들었다.
“왔냐. 거긴 지게차 다녀. 이쪽으로 와.”
나는 벽에 그어진 선 안으로 들어갔다. 염 반장이 내 가방을 보고 턱을 들었다.
“또 책 들고 왔어?”
“아니요. 오늘은 아버지랑 밥 먹으러 왔어요.”
“대표님 손님하고 있어. 좀 걸릴 거다.”
염 반장은 내게 안전모를 건넸다. 턱 끈을 조이자 손가락에 붙인 밴드가 걸렸다. 새것으로 바꿔 붙인 밴드였다.
“손은 왜 그래?”
“작업하다 조금 베였어요.”
“그 손이 밥줄인데 조심해야지.”
염 반장은 잘린 약지를 안으로 굽히고 안전모 끈을 가리켰다. 나는 꼬인 부분을 펴서 다시 잠갔다.
초지기 앞에서는 직원이 종이 폭을 확인하고 있었다. 젖은 종이가 롤러를 지나갔다. 염 반장은 통로에 놓인 빈 통을 발로 밀어 치운 뒤 내게 앞서 걸으라고 했다.
기계 옆 철판에는 볼트 구멍이 남아 있었다. 어릴 때는 그 자리에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이거 아직도 쓰네요.”
“멀쩡한데 뭘 바꿔.”
염 반장이 롤러 아래를 들여다보더니 직원에게 손짓했다.
“낡았어도 저 소리는 괜찮아. 종이 바꿀 때 나는 거야.”
나는 가방을 몸 앞으로 당겼다. 아버지는 이 기계 앞에서 찍은 사진을 사무실에 걸어 뒀다. 그때보다 기계에 칠한 페인트가 많이 벗겨져 있었다.
“밖에 오신 분들은요?”
“땅값 매기러 왔다더라. 대표님이 같이 도는데, 생산동 안까지 보겠대.”
“기계도요?”
“목록 달라고 했어. 어디까지 필요한 건지 모르겠네.”
염 반장의 무전기에서 이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염 반장은 대답한 뒤 휴게실 문을 열어 줬다.
“여기 있어. 금방 올 테니까.”
◈
휴게실 탁자에는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직원 하나가 내 쪽을 보더니 검지를 입술에 댔다.
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탁자 가운데 컵 케이크가 있었다. 포장을 벗긴 초 하나를 직원이 주머니에서 꺼냈다.
“오늘 반장님 생신이세요?”
“알면 자꾸 퇴근하고 하자고 하셔서요. 잠깐 들어오시면 끝내려고요.”
다른 직원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생산동 쪽 유리창으로 염 반장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가방에서 도시락 보자기를 꺼내 탁자에 고인 물을 닦았다. 직원이 케이크를 마른 자리로 옮기고 초를 꽂았다.
문손잡이가 내려가자 불을 붙였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염 반장은 문을 잡은 채 섰다.
“뭘 이런 걸 해. 불부터 꺼, 여기서.”
“기계 쪽 아니잖아요. 얼른 부세요.”
“소원도 비셔야죠.”
염 반장은 뒤를 한 번 보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전모를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허리를 숙였다.
초가 꺼지자 직원들이 손뼉을 쳤다. 나도 두 손을 마주쳤다. 염 반장은 초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손으로 저었다.
“이거 하나를 몇 명이 먹으라고.”
“반장님 드세요. 저희 건 따로 있어요.”
직원이 의자 아래에서 빵 봉지를 꺼냈다. 염 반장은 그제야 탁자 앞에 앉았다.
“밥 먹기 전에 이런 거 먹으면 못 써.”
말은 그렇게 하고도 포크는 받았다. 나는 케이크의 종이 받침을 벌려 드렸다. 염 반장이 포크 끝으로 크림을 조금 떼더니 내 쪽으로 내밀었다.
“넌 점심 늦는다며. 먼저 먹어.”
“생일 케이크는 반장님이 먼저 드셔야죠.”
직원 하나가 새 포크를 내 손에 쥐여 줬다. 염 반장은 케이크를 조금 떼어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 문이 다시 열렸다. 아버지가 들어오자 직원이 빵 봉지를 들었다.
“대표님도 하나 드세요.”
“동수 씨 생일이지. 내가 정신이 없어서.”
“기억 안 하셔도 돼요. 해마다 오는 건데.”
아버지가 염 반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염 반장은 케이크를 탁자 가운데로 밀어 놓았다.
“해마다 와도 안 빠지고 오네.”
아버지가 웃으며 빵 하나를 집었다. 문밖에서 구두 소리가 나자 빵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나경아, 조금만 기다려.”
나는 포크를 종이컵 안에 넣었다.
“저도 같이 가도 돼요?”
◈
아버지는 나를 사무실로 데려갔다. 감정평가사들은 탁자에 도면을 펼쳐 놓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 옆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벽에는 공장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 현황판에 적힌 직원 수는 64명이었다.
“딸입니다. 무슨 절차인지 같이 들어도 되겠죠?”
아버지 말에 서류 가방을 들었던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이름보다 소속과 연락처를 먼저 읽었다.
“서진캐피털에서 의뢰한 평가인가요?”
“네. 담보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대출 연장 때문에요?”
“의뢰받은 목적은 담보 평가입니다. 대출 조건은 금융사에 확인하셔야 합니다.”
남자는 의자를 조금 뒤로 빼서 내가 도면을 볼 자리를 만들었다. 공장 담장과 갈매천 사이에 선이 그어져 있었다.
“오늘은 경계와 건물 상태를 보고요. 안에 있는 설비도 확인하려고 합니다.”
“기계 목록도 달라고 하셨다고요.”
“토지와 건물에 포함되는 설비인지 구분해야 해서요.”
아버지가 안경을 고쳐 썼다.
“직원들 일하는 데 지장만 없게 해 주세요.”
“반장님 안내받아서 보겠습니다.”
다른 남자가 서류철을 열었다. 집게 아래에 끼워진 종이를 빼서 아버지 앞으로 놓았다.
“이건 저희가 전달받은 감정 동의서입니다. 현장 확인란은 오늘 날짜로 따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아버지는 종이를 당겨 봤다. 나는 옆에서 서류 제목을 읽었다.
『담보물 감정 동의서』
그 아래에는 해윤제지 이름과 공장 주소가 있었다. 아버지의 손이 종이 아래쪽에서 멈췄다.
“이건 어디서 받으셨어요?”
“의뢰 서류에 첨부돼 있었습니다.”
“캐피털에서요?”
“네.”
아버지가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닦으려는 줄 알았는데 안경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나 이거 서명한 적 없다.”
나는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는 서명 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감정평가사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여기 서명이 대표님 서명 아닙니까?”
“내 이름은 맞는데, 이 종이는 본 적이 없어요.”
남자는 서류철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옆에 앉은 남자도 보던 도면을 접었다.
나는 동의서를 다시 우리 쪽으로 돌려 달라고 했다.
“사본인가요?”
“저희가 받은 건 이 출력물입니다. 원본 보관처는 확인해야 합니다.”
종이에는 스테이플러 구멍이 없었다. 위쪽 모서리까지 인쇄된 점들이 있었다. 다른 서류와 함께 복사된 흔적이었다.
나는 종이 끝을 엄지로 쓸어 봤다. 매끈한 복사용지였다.
“여기 적힌 날짜에 공장에 계셨어요?”
아버지가 날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 갈 때도 아니었어.”
“다른 서류하고 같이 서명한 건 아니고요?”
“그랬으면 봤겠지. 감정한다는 얘기도 이번에 처음 들었는데.”
나는 날짜와 서명 사이의 빈칸을 살폈다. 아버지는 내가 종이를 가까이 당기는 동안 말을 멈췄다.
감정평가사가 휴대폰을 꺼냈다.
“일단 의뢰인에게 확인하겠습니다. 저희가 서명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어서요.”
“네. 확인 부탁드려요.”
나는 명함을 가방 안 수첩에 끼웠다.
“저희도 서진캐피털에 물어볼게요. 이 서류를 언제, 누구한테 받으셨는지만 남겨 주세요.”
남자는 수첩에 적은 뒤 아버지에게 보여 줬다.
“그럼 오늘 현장 확인은 어떻게 할까요?”
아버지가 나를 봤다. 나는 도면 옆에 놓인 확인서부터 읽었다. 아래쪽에 동의서와 함께 보관한다는 문장이 있었다.
“아버지, 이건 원본 확인하고 하세요.”
아버지는 펜을 들지 않았다.
“그렇게 합시다. 안쪽은 다음에 보시죠.”
남자는 확인서를 서류철에 도로 넣었다.
◈
감정평가사들이 나간 뒤 아버지는 창가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대답을 듣고 이름과 연락처를 남겼다.
나는 동의서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전체가 들어오게 찍고, 날짜와 서명 칸을 따로 찍었다.
아버지가 창문에서 돌아섰다.
“빌린 돈 서류는 많았어. 그래도 이건 아니야.”
“알아요. 확인부터 해 봐요.”
“네가 괜히 이런 것까지 신경 쓰게 됐네.”
나는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다은이 챙겨 준 반찬 통이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밥부터 드세요. 식었어요.”
아버지는 책상 서랍에서 수저를 꺼냈다. 수저 아래에 공장 봉투가 걸려 나왔다. 아버지가 봉투를 도로 넣으려다 멈췄다.
“내 서명 보려면 이거 봐. 아침에 결재한 거야.”
나는 봉투 안의 납품 확인서를 받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서명한 자리가 있었다. 잉크는 번지지 않았고 종이 뒷면에 펜으로 누른 자국이 남았다.
“이것도 사진 찍을게요.”
“가져가도 돼. 사본 있어.”
나는 확인서를 파일에 넣고 수저를 놓았다. 아버지는 반찬 통을 열다가 문밖을 봤다.
염 반장이 컵 케이크 포장을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아까 못 드셨잖아요.”
케이크는 절반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도시락 옆을 비워 줬다. 나는 염 반장에게도 의자를 내밀었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밥을 한술 떴다.
◈
돌아가는 버스에 앉자 가방에서 납품 확인서를 꺼냈다. 파일 위에 올린 종이가 흔들려 창가 쪽 팔꿈치를 고정했다.
이헌에게 보낼 문자를 쓰다가 멈췄다. 서명한 적이 없다는 아버지 말만 전하기 전에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납품 확인서의 서명과 휴대폰 사진을 나란히 뒀다. 이름의 기울기와 글자 사이는 얼핏 같았다.
아버지는 이름 가운데 둥근 부분을 쓸 때 왼쪽에서 펜을 댔다. 어릴 때 공장 봉투에 서명하는 손을 따라 하다가 자꾸 반대로 돈다고 지적받았다.
확인서에도 그 자리에 잉크가 뭉쳐 있었다. 한 바퀴 돌아온 끝이 시작점을 조금 지나 있었다.
나는 동의서 사진을 확대했다. 복사된 테두리가 깨져 보여 다른 사진을 열었다. 사무실 창가에서 찍은 사진이 더 선명했다.
같은 글자의 오른쪽에 펜을 댄 자국이 있었다. 겹친 끝도 반대쪽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화면을 더 벌렸다가 손을 멈췄다.
동의서에 적힌 이름은 아버지와 획을 쓴 순서가 반대였다.
(23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