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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전략기획실

작가: Jino
last update 게시일: 2026-10-20 17:00:00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

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

“그렇게 보면 눈 아파.”

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

“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

“어제 그 서류?”

“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

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

“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

“오늘은 물어보러 가.”

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

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

“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

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

“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

“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

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

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

『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

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

『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

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

◈

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었다.

『복원 견적 협의』

조현석이 안쪽 책상에서 일어났다.

“윤나경 씨죠. 실장님께 말씀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조금 일찍 왔어요.”

“괜찮습니다. 통화만 마치시면 됩니다.”

조현석은 내 겉옷을 받아 걸고 문 옆 의자를 권했다. 앉으려는데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원본 보관처부터 확인해 주세요. 사본을 다시 받자는 게 아닙니다.”

나는 파일을 무릎에 놓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헌의 말이 끊겼다. 곧 전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조현석이 노크했다.

“실장님, 윤나경 씨 오셨습니다.”

문이 열렸다. 이헌은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소매가 두 번 접혀 있었다.

“들어와요.”

나는 조현석에게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서류철이 놓여 있었고 창가에는 회의용 탁자가 있었다. 이헌이 탁자 쪽 의자를 빼 줬다.

“여기 앉아요.”

낯선 방에서 익숙한 손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마지막으로 그 손을 잡았던 곳은 주차장이었다.

나는 의자 등받이를 직접 잡았다.

“이러니까 정말 일하러 온 것 같네요.”

“일하러 왔잖아요.”

이헌이 내 손의 파일을 봤다.

“견적서도 가져왔고.”

나는 파일을 탁자에 놓았다. 이헌은 맞은편이 아니라 모서리를 돌아 옆자리에 앉았다. 의자 사이에 가방 하나가 들어갈 자리가 남았다.

조현석이 물을 놓고 나갔다. 문이 닫히자 나는 견적서부터 꺼냈다.

“표지는 사진으로 확인한 부분만 적었어요. 안쪽은 책을 보고 정해야 해요.”

“기간은요?”

“풀을 걷어 내 보고 말씀드릴게요. 서두르면 종이가 더 상해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방에서 다른 파일을 꺼냈다.

“이건 아버지가 어제 직접 쓴 거예요.”

이헌은 견적서를 옆으로 옮겼다.

◈

납품 확인서와 휴대폰을 나란히 놓았다. 이헌은 먼저 종이를 보고, 내가 띄운 사진을 봤다.

“아버지는 이 동의서를 처음 보셨대요. 감정평가사도 원본은 못 받았고요.”

“현장 확인서는요?”

“안 쓰셨어요. 동의서랑 같이 보관한다고 적혀 있어서 원본 확인하고 하자고 했어요.”

이헌이 휴대폰에서 눈을 들었다.

“잘했어요.”

나는 확인서의 서명 옆에 손가락을 댔다. 잉크에는 닿지 않았다.

“아버지는 여기서 시작해요. 어릴 때 따라 써 봐서 기억해요. 그런데 사진은 반대쪽에서 시작한 자국이 있어요.”

이헌이 의자를 당겼다. 무릎 사이가 10cm쯤 가까워졌다. 나는 휴대폰을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복사된 거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검게 뭉친 게 펜 자국인지 복사하면서 생긴 건지도 봐야 하고요.”

“그래서 원본이 필요하군요.”

“네. 누가 썼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남겨 두려고요.”

이헌이 메모지에 원본이라고 적었다.

“사진 파일은 그대로 보관해요. 표시한 건 따로 저장하고요.”

“확대해서 잘라 둔 것 말고 처음 찍은 것도 있어요.”

나는 전체 사진을 열었다. 탁자 가장자리와 아버지 안경까지 들어간 사진이었다.

“이걸 찍은 시간도 남아 있어요.”

“저한테 보내 줄 수 있어요?”

나는 파일을 골라 전송했다. 이헌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아까 원본 말씀하신 것도 이것 때문이에요?”

“네. 해윤 쪽에서 서명한 적 없다고 연락했다는 건 확인했어요.”

“아버지한테는 담당자가 연락 준다고만 했대요.”

“아직 보관처 답을 못 받았어요. 받으면 같이 확인해요.”

나는 메모지 아래에 감정평가사에게 명함을 받은 날짜를 적었다. 이헌이 펜을 잡은 내 손을 보고 물었다.

“손은 괜찮아요?”

검지에 붙였던 밴드는 아침에 뗐다. 나는 손가락을 펴 보였다.

“다 아물었어요. 종이 만질 때만 조심하면 돼요.”

이헌의 손이 탁자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나는 펜 뚜껑을 닫아 그 손 옆에 놓았다.

밖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 다 문을 봤다. 소리는 문 앞을 지나 멀어졌다.

나는 확인서를 내 쪽으로 당겼다.

◈

“회장님 서명 본 적 있죠?”

이헌이 물었다. 나는 장부에서 봤던 이름을 떠올렸다.

“네. 끝에 점이 있었어요.”

“기억하네요.”

“잉크가 튄 건가 했는데 다른 데도 있어서요.”

이헌이 메모지를 돌려 마지막 줄에 점 하나를 찍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획을 쓰고 펜을 뗐다가 다시 찍어요. 서명할 때마다요.”

“일부러 넣는 표시예요?”

“왜 그러는지는 말씀 안 하셨어요. 제가 본 서명에는 늘 있었고요.”

나는 점 옆을 들여다봤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게 있어요. 글자를 따라 쓰면 비슷해도 시작하는 자리는 달라요.”

“모양을 보고 베낄 때 놓치는 게 있어요. 쓰는 사람은 생각 안 하고 하는 것들이요.”

“원본이면 겹친 획도 더 볼 수 있을 텐데.”

나는 사진을 닫고 납품 확인서를 파일에 넣었다.

“아버지 서명이 있는 서류를 몇 개 더 모을게요. 같은 날 쓴 것만 보면 부족하겠어요.”

“제가 확인할 것도 정리해 둘게요. 윤나경 씨가 본 부분은 윤나경 씨 이름으로 남기고요.”

“제 이름으로요?”

“직접 찾았잖아요.”

나는 빈 메모지에 날짜와 확인한 내용을 적었다. 위조라는 말 대신 서명 차이라고 썼다. 이헌은 내가 다 적을 때까지 기다렸다.

노크 소리가 났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조현석이 문을 조금 열었다.

“실장님, 시간 됩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실까요?”

탁자에 놓인 시계는 12시 반을 지나 있었다. 이헌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밥 먹고 가요.”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견적 협의가 길어졌으니까요.”

문 앞의 조현석이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나는 견적서를 바로 놓았다.

“간단히 먹을 수 있으면요.”

◈

조현석은 식사 봉투와 자기 도시락을 함께 가져왔다. 이헌이 의자를 하나 더 빼자 손을 저었다.

“저는 밖에서 먹겠습니다.”

“같이 드세요. 제가 자리를 뺏었잖아요.”

내 말에 조현석이 도시락을 탁자 끝에 놓았다. 뚜껑을 열자 칸마다 다른 반찬이 들어 있었다.

나는 국 뚜껑을 열다가 손을 멈췄다. 봉투 안에 반찬 통이 하나밖에 없었다.

“제 건 국만 왔나 봐요.”

조현석이 주문 내역을 확인했다.

“반찬이 빠졌네요. 다시 가져다 달라고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밥이랑 먹으면 돼요.”

내가 젓가락을 들기 전에 조현석이 도시락을 당겼다.

“멸치볶음 드세요?”

“네.”

“오늘 많이 담았습니다.”

조현석은 새 수저로 멸치볶음을 덜어 작은 뚜껑에 놓았다. 반찬이 탁자에 떨어지지 않게 뚜껑을 받치고 내 앞으로 밀었다.

이헌도 자기 반찬 통을 가운데 놓았다.

“이것도 같이 먹어요.”

“두 분 다 나눠 주시면 제가 더 많이 먹겠는데요.”

“그럼 남기지 마십시오.”

조현석이 물병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나는 멸치볶음을 집어 밥 위에 놓았다.

“직접 만드셨어요?”

“어제 저녁에요. 덜 식었을 때 뚜껑 닫으면 눅눅해져서 아침까지 따로 뒀습니다.”

“저도 풀 끓여 놓으면 덮기 전에 기다려요.”

이헌이 수저를 든 채 나를 봤다. 나는 물컵을 당겼다.

“먹는 얘기 하는데 죄송해요.”

“책 얘기 아닌 걸로 알아들었어요.”

조현석이 멸치볶음을 한 번 더 내 뚜껑에 덜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물부터 마셨다.

식사를 마친 뒤 빈 통을 포갰다. 조현석의 도시락 뚜껑은 휴지로 닦아 돌려줬다.

“다음에는 제가 반찬 가져올게요.”

“빈 통만 주셔도 됩니다.”

조현석이 식사 봉투를 들고 나갔다. 문이 닫힌 뒤 이헌이 내 앞의 물컵을 채웠다.

“다음에도 올 거예요?”

“견적서 고치면요.”

“안 고쳐도 와요.”

물병을 놓는 손 가까이 내 손이 있었다. 나는 컵을 바로 잡으며 손끝을 안으로 접었다.

“여기서는 제가 무슨 일로 오는지 다 알잖아요.”

“복원 일로 오면 돼요.”

“그 말을 제가 믿고 자주 오면요?”

이헌은 대답 대신 빈 반찬 통을 봉투에 넣었다. 접은 손잡이를 눌러 놓고 나를 봤다.

“오고 싶을 때 연락해요. 못 만나는 시간이면 그렇게 말할게요.”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을 내려놓을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바닥을 받쳤다.

◈

이헌은 책상으로 가 서류철을 들고 왔다. 내가 내민 견적서를 위에 얹고 확인란을 짚었다.

“표지는 이대로 진행해요. 안쪽은 책 보고 다시 정하고요.”

“책은 작업실 보관함에 잘 있어요. 등 쪽 풀은 다음 주에 걷어 볼게요.”

이헌이 안주머니 쪽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거기 없으니까 아직 어색하네요.”

“다 고치면 다시 넣고 다니세요. 그때는 등이 안 벌어질 거예요.”

“알겠어요.”

이헌은 견적서에 확인 서명을 했다. 나는 마를 때까지 종이를 옮기지 않았다.

탁자에 두 사람의 서명이 나란히 놓였다. 아버지의 서명 사진은 휴대폰 안에 남아 있었다.

“감정 동의서도 이 견적서랑 똑같이 받았어야 했는데요.”

“지금부터 확인하면 돼요.”

“원본을 보여 주기 싫어하면요?”

“누가 보관하고 있는지부터 답을 받아야죠.”

나는 내가 적은 메모를 사진으로 찍어 이헌에게 보냈다. 이헌은 받은 화면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아버지께는 제가 연락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먼저 말씀드릴게요. 오늘 실장님 만난 것도요.”

말하고 나서 파일을 덮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물으면 견적서를 보여 드릴 수 있었다. 그 뒤에 더 묻는다면 어디까지 대답할지 정하지 못했다.

이헌이 내 쪽으로 견적서 사본을 밀었다.

“불편한 말은 만들지 말아요. 서류 확인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하면 돼요.”

나는 사본을 받아 파일 맨 앞에 넣었다. 견적서 아래로 납품 확인서가 보이지 않게 집게를 옮겼다.

이헌이 탁자에 남은 메모지를 모았다. 나는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이제 일어나면 되는데 손잡이를 잡고도 놓지 못했다.

“실장님.”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밥 잘 먹었어요.”

“다음에는 반찬 빠지지 않게 할게요.”

나는 웃으며 가방을 닫았다. 이헌이 내 의자 옆으로 손을 뻗다가 거뒀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멎었다.

이헌이 먼저 몸을 돌렸다. 나는 무릎 위 파일을 눌렀다.

노크 없이 문이 열렸다. 석진이 문손잡이를 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은테 안경 너머로 탁자와 나를 차례로 봤다.

석진은 금색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웃었다.

“제수씨 될 사람이 여긴 웬일이야?”

(2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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