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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다은의 방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8:00:00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

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

“나경아.”

“응.”

“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

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강이헌입니다.”

“서진그룹 실장님이요?”

“네.”

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

“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

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

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이랑 갈게요.”

“알겠어요.”

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

“그건 제가 들게요.”

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장갑은요.”

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

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

“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

“네. 조심히 가세요.”

이헌은 더 붙잡지 않았다. 내가 다은 옆에 서자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돌아서기 전에 입을 열었다.

“실장님도요.”

이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은 인사를 하고 먼저 걸었다. 나는 다은의 팔꿈치에 부딪히지 않게 가방을 고쳐 멨다.

장터 입구를 벗어날 때까지 다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호등 앞에서야 봉투를 내 쪽으로 들었다.

“이것도 같이 산 거야?”

“내가 샀어. 작업실에 달려고.”

다은이 봉투 안을 내려다봤다.

“그래. 별은 잘 골랐네.”

신호가 바뀌었다. 다은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

다은의 방에 들어가자 건조대가 먼저 보였다. 바지 사이로 양말이 걸려 있었다. 검은 양말 옆에는 노란 양말이, 줄무늬 양말 옆에는 회색 양말이 있었다.

다은이 별 봉투를 책상 위에 세우고 보일러를 켰다.

“앉아. 겉옷 벗고.”

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왼손 장갑을 벗자 검지의 굳은살에 털이 붙어 있었다. 손끝으로 떼어 냈다.

다은은 컵을 꺼내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얼마나 됐어?”

나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약혼식 전날부터.”

컵이 싱크대에 닿는 소리가 났다.

“전날?”

“그날 처음 만났어. 누군지 몰랐고.”

“이름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이 컵에 물을 붓고 돌아왔다. 하나를 내 앞에 놓더니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처음부터 말해. 내가 중간에 뭐라고 해도 빼지 말고.”

가방 끈을 내려놓았다.

“호텔에 갔었어. 주원 씨가 다른 여자랑 객실로 들어가는 걸 봤어.”

다은의 손이 컵에서 떨어졌다.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

“말 안 했어. 내가 봤다는 것도 몰랐고. 그냥 올라갔어. 31층 바에.”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다은은 재촉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실장님이 있었어. 책을 들고 있었는데 등이 찢어졌더라. 그걸 보고 내가 말을 걸었어.”

“거기서도 책부터 봤어?”

“응.”

“너는 정말…….”

다은이 이마를 짚었다.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고, 내가 먼저 입을 맞췄어.”

다은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응.”

“술 얼마나 마셨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다 기억해.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러고 싶었어.”

나는 가방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다은은 한동안 나를 보다가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다음 날 약혼식에서 만난 거야?”

“주원 씨가 삼촌이라고 소개했어.”

다은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컵을 들었다가 물은 마시지 않고 내려놨다.

“그날 나한테 전화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그다음 날은? 작업실에서 매일 봤잖아.”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다은이 말을 이었다.

“네가 약혼한 것도 마음 편해서 한 거 아닌 거 알아. 그래서 내가 주원 씨 얘기 함부로 안 했어. 그런데 이건 다르잖아.”

“알아.”

“안다고만 하지 마. 집안 행사에서 계속 봐야 할 사람이고, 나중에 알려지면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어.”

다은은 목소리를 높이다가 벽 쪽을 봤다. 손바닥으로 자기 무릎을 한 번 쓸었다.

“저 사람은 그 집 아들이야. 넌 해윤 때문에 들어간 거고.”

나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얘기하고 싶었어.”

“오늘 나 안 만났어도?”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다은이 컵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건 대답 늦는 거 보니까 알겠다.”

“미안해.”

“나한테 미안할 일이 아니라…….”

다은이 말을 끊었다. 내 목에 걸린 실을 봤다. 코트를 벗으며 셔츠 밖으로 나온 약혼반지가 실 끝에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반지를 셔츠 안으로 넣었다.

◈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벌렸다. 식은 붕어빵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놓고 나머지는 작은 접시에 담았다.

“먹으면서 말해. 저녁도 못 먹었을 거 아냐.”

“따뜻한 거 먹으러 가던 길이었어.”

다은이 접시를 내려놓다가 멈췄다.

“내가 끊었네.”

“네가 안 왔어도 오래 있진 못했을 거야.”

“왜?”

나는 붕어빵 꼬리를 떼었다. 팥이 묻지 않은 부분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사진을 찍힌 적이 있어.”

다은이 앞으로 앉았다.

“무슨 사진.”

“같이 있는 사진. 누가 보냈어. 쪽지도 있었고.”

“그걸 받고도 오늘 손을 잡고 다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많으니까 안 볼 줄 알았어.”

다은은 내 손 옆에 놓인 장갑을 봤다. 나는 먹던 걸 접시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네가 못 봤어도 누군가는 볼 수 있었겠지.”

“쪽지 보낸 사람은 알아?”

“아직 확인 중이야. 실장님이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어. 확인하고 말해 주겠다고.”

“확인도 안 된 일을 너한테 믿으라고 한 거야?”

“믿으라고 하진 않았어. 내가 물었고, 그렇게 답했어.”

다은이 물을 마셨다. 이번에는 컵을 비우고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나경아. 네 편 들어 주는 것하고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해도 괜찮다는 건 다른 말이야.”

“알아.”

“자꾸 안다고 해서 미안한데, 나는 지금 처음 듣잖아. 너 혼자 어디까지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무릎에 얹은 손을 폈다.

“약혼은 끝낼 거야.”

다은의 시선이 내 얼굴로 올라왔다.

“그 사람이 끝내 준대?”

“내 약혼이잖아. 내가 끝내야지.”

“해윤은?”

“그래서 서류를 보고 있어. 감정 동의서에 아빠 서명이 있는데 아빠는 쓴 적이 없대. 나도 사진으로 봤어. 획이 겹친 순서가 달랐어.”

다은은 내 앞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밝혀내면 약혼 안 해도 되는 거야?”

“그건 더 확인해야 해. 서명 하나로 전부 해결된다고 생각 안 해.”

나는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빠한테도 그냥 믿으라고는 안 할 거야. 내가 본 걸 보여 주고 같이 결정할 거야.”

다은이 빈 컵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얘기는 왜 나한테 안 했어. 서류 보는 건 나도 옆에서 도울 수 있잖아.”

“작업실까지 얽히게 하기 싫었어.”

“나는 이미 거기서 일해.”

다은이 책상 위의 별 봉투를 가리켰다.

“저거 달 때도 나 부를 거잖아. 그런 것만 같이 하려고 친구 하는 건 아니야.”

나는 컵을 내려놓고 손등에 묻은 물을 닦았다.

“다음에는 말할게. 확인 안 된 거면 안 됐다고 하고.”

“응. 네가 뭘 보고 있는지는 알아야지.”

다은이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내려놓았던 붕어빵을 다시 집었다.

◈

물을 더 데우러 일어난 다은이 건조대에 발을 걸렸다. 건조대가 기울어지며 양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옆 기둥을 잡았다.

“안 넘어졌어. 발 괜찮아?”

“응. 이걸 치웠어야 하는데.”

다은이 발등을 문질렀다. 나는 컵을 책상에 올리고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주웠다.

노란 양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줄무늬도 하나였다. 남은 양말을 걷어 바닥에 놓자 다은이 주전자 뚜껑을 닫았다.

“그거 그냥 둬. 내가 할게.”

“다 말랐네.”

나는 검은 양말의 입구를 맞췄다. 발뒤꿈치가 닳은 자리가 달라 다시 풀었다.

“이건 짝 아니야.”

“색 같으면 그냥 신어.”

“길이가 다른데?”

“바지 내리면 몰라.”

나는 긴 것끼리, 짧은 것끼리 나눴다. 다은은 물을 가져와 앉더니 건조대 아래에서 노란 양말을 하나 집어 올렸다.

“찾았다. 너 와서 찾았네.”

나는 받아서 짝을 맞췄다. 발목을 접어 포개 놓자 다은이 그 위에 줄무늬 양말을 얹었다.

“이건 반대쪽 없어.”

“세탁기 안 봤어?”

“봤지.”

“문 고무 사이도?”

다은이 일어나 욕실로 갔다. 잠시 뒤 줄무늬 양말을 손끝으로 집어 들고 나왔다.

“있더라.”

“젖었어?”

“응.”

“그럼 마른 것도 같이 걸어 둬. 다음에 또 찾지 말고.”

다은이 양말을 나란히 걸었다. 나는 남은 양말을 개서 바구니에 담았다. 다은이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그분이랑 있으면 뭐가 좋아?”

나는 접던 양말을 무릎에 놓았다.

“내가 싫다고 하면 멈춰.”

“그건 당연한 거잖아.”

“응. 내가 들겠다고 하면 가방도 돌려주고. 오늘도 나한테 같이 갈 건지 먼저 봤잖아.”

다은은 바구니에 들어간 양말 하나를 펴서 다시 접었다.

“그 집에서는 네가 싫다는 말 할 틈도 안 주나 보다.”

나는 대답 대신 남은 양말을 다은에게 건넸다.

“오늘은 서류를 안 꺼냈어. 책도 없었고. 그냥 걸었어.”

“손잡고?”

“응.”

“장갑은 왜 나눠 꼈는데.”

“둘 다 안 가져와서 샀어. 한 손씩 끼면 되겠다고 했지.”

다은이 장갑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부분을 보더니 내게 돌려줬다.

“그분한테는 작았겠다.”

“손가락을 다 못 펴더라. 그래도 계속 끼고 있었어.”

나는 장갑을 손바닥에 펴 놓았다. 손목의 털실이 조금 늘어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눌러 모양을 고쳤다.

다은이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너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봐.”

나는 입가를 손등으로 눌렀다.

“나 맨날 웃는데.”

“손님 앞에서 말고.”

다은은 무릎에 놓인 양말을 바구니에 넣었다.

“좋은 일 생기면 너부터 말했잖아. 밀린 복원비 받았을 때도 전화했고. 그런데 오늘은 내가 붙잡고 물어야 하니까 화가 났어.”

“앞으로는 말할게.”

“지금 당장 다 말하라는 건 아니야. 일 생겼는데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이 손을 내밀자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비밀 지켜 줄게. 작업실에서 실장님 전화 와도 티 안 낼게.”

다은이 내 손을 놓고 장갑을 가방 옆에 올려놓았다.

“대신 다음에 장터 갈 때는 나 없다고 방심하지 마. 오늘 내가 멀리서도 너 알아봤어.”

“응.”

“사진 찍힌 것도 새로 알게 되는 거 있으면 말하고.”

나는 가방을 열어 장갑을 넣었다. 다은이 별 봉투를 집어 내게 건넸다.

“이건 월요일에 같이 달자. 네가 혼자 달면 꼭 가운데 맞추고 싶어서 계속 고칠 테니까.”

“너는 한쪽으로 기울게 달잖아.”

“그래서 네가 옆에서 봐 줘야지.”

나는 봉투 안의 별을 확인했다. 눌린 데는 없었다.

그때 가방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실장님 이름이 떴다. 다은이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해. 나는 컵 씻을게.”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안 들킨 거 맞죠?』

입력창에 손가락을 올렸다. 다은이 싱크대에서 수도를 틀었다. 나는 다은에게는 말했어요, 하고 적다가 새로 뜬 문자를 읽었다.

『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

(2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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