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
『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
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
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
“추웠죠.”
“오래 안 기다렸어요.”
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
“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
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
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회장님 혼자 계세요?”
“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
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
“그 안에 다 들었나.”
“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
“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
“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
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
“앉아서 기다리게.”
나는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지 않고 옆의 작업 탁자를 봤다.
“저쪽을 써도 될까요? 손을 펴고 작업해야 해서요.”
회장이 턱으로 탁자를 가리켰다. 이헌이 탁자 위의 책을 치웠다. 나는 천을 펴고 도구 상자를 올렸다.
회장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헌이 다가가려 하자 손을 들어 막았다.
벽에 걸린 액자 옆으로 금고 문이 열렸다. 나는 도구 상자의 뚜껑을 내려 시선을 가렸다. 금고 안에서 두꺼운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회장은 끈으로 묶은 장부를 꺼내 이헌에게 건넸다.
“이것부터.”
이헌이 탁자에 장부를 놓았다. 끈 아래로 빠져나온 실 한 가닥이 보였다. 나는 끈을 풀기 전에 휴대폰을 꺼냈다.
“원래 묶인 상태부터 찍어 두겠습니다.”
“그런 것도 찍나.”
“다시 묶을 때 눌렸던 자리를 피하려고요.”
회장이 안경을 집어 썼다.
“해 보게.”
◈
표지 모서리는 닳았지만 안쪽 종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문제는 책등이었다. 묶음 하나를 지탱하던 실이 끊어져 가운데 장이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장부를 받침 위에 올리고 조금씩 펼쳤다.
“여길 억지로 누르면 남은 실도 끊어집니다.”
“그럼 못 펴는 건가.”
“받침 높이를 바꾸면 됩니다.”
접은 천을 한 겹 빼자 페이지가 더 열렸다. 회장은 내 손을 보다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헌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손목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서야 나는 다시 장부로 눈을 내렸다.
“회장님이 보실 때 불편했던 자리가 따로 있나요?”
“뒤쪽. 넘기면 종이가 따라 나와.”
나는 손가락을 밑에 받쳐 한 장씩 넘겼다. 중간에 끼운 서류 모서리가 보였다. 장부 종이보다 희고 매끈했다.
서류를 누르던 페이지가 함께 들렸다. 나는 바로 손을 멈췄다.
“안에 낱장이 있습니다.”
“빼 놓게.”
“끼워 둔 순서가 있습니까?”
회장은 잠깐 장부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보던 자리에 넣어 뒀을 테지.”
“그럼 위치를 적고 따로 놓겠습니다. 끝나면 같은 자리에 돌려놓고요.”
나는 기록지에 페이지와 낱장 수를 적었다. 서류를 빼낼 때 이헌이 빈 받침판을 가까이 밀어 줬다.
손끝 사이에 3cm쯤 남았다.
나는 판을 받는 대신 서류를 먼저 내려놓았다. 이헌의 손이 탁자에서 떨어졌다.
“이쪽에 둘까요?”
“네. 끝이 접히지 않게요.”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이헌이 탁자 옆에서 물러났다. 차를 든 가정부 할머니가 문 앞에 섰다.
“차 놓아 드릴까요?”
나는 도구를 안쪽으로 모았다. 이헌은 탁자 반대편의 작은 상을 가리켰다.
“거기 부탁드립니다.”
할머니는 쟁반을 놓고 내 앞에도 잔을 하나 내밀었다.
“손 녹이고 해요. 현관에서 보니 빨갛던데.”
“감사합니다.”
나는 잔을 받았다가 도구와 떨어진 곳에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나가자 회장이 자기 잔을 당겼다.
“일하는 사람은 차도 마음대로 못 마시는군.”
“종이 옆에선 좀 떨어져 마십니다.”
“내가 자리를 잘못 잡았나.”
나는 회장의 잔과 장부 사이를 봤다.
“상만 조금 옮겨도 괜찮겠습니다.”
이헌이 작은 상을 회장 쪽으로 당겼다. 회장은 말없이 의자를 돌렸다.
찻잔 손잡이를 잡은 손이 흔들렸다. 받침에 닿은 잔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회장은 손잡이를 놓고 양손으로 잔을 감쌌다.
나는 보던 장으로 눈을 내렸다.
◈
낱장은 모두 대출 승인서 사본이었다.
위쪽에 서진캐피털 이름이 찍혀 있었다. 칸을 나눈 선과 글자가 함께 복사돼 있었다. 나는 서류 내용을 읽기보다 접힌 자리와 찢어진 곳부터 확인했다.
장부에 오래 끼워 둔 탓에 한 장의 끝이 말려 있었다. 그 밑에 놓인 서류에는 결재란이 있었다.
『강태수』
나는 서명을 보고 손을 멈췄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회장이 펜을 내려놓던 손이 떠올랐다. 마지막 획을 마친 뒤, 끝에 점 하나를 더 찍었다.
이헌의 사무실에서도 그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받침판을 돌려 창 쪽으로 기울였다. 빛을 바꾸자 검은 선의 가장자리가 더 또렷해졌다. 서명 끝에 점은 없었다.
복사 과정에서 빠졌을 수도 있었다.
나는 바로 아래의 서류를 넘겨 봤다. 같은 위치에 놓인 결재란이었다. 다른 서명의 끝에는 점이 붙어 있었다. 글자보다 작았지만, 빈칸과는 분명히 구별됐다.
“무슨 문제 있나.”
회장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류 끝이 말려 있습니다. 장부를 덮을 때 같이 접히지 않게 펴 두려고요.”
말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회장은 안경 너머로 그 부분을 봤다.
“그건 그냥 눌러 놓으면 되겠지.”
“마른 종이 사이에 넣고 가볍게 눌러 두겠습니다.”
나는 서명을 다시 내려다보지 않았다. 기록지에 종이 상태를 적고 휴대폰을 들었다.
“끼워 둔 서류도 앞뒤를 찍겠습니다. 나중에 순서가 바뀌지 않게요.”
회장은 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전체를 찍었다. 다음에는 접힌 모서리와 위쪽 제목을 찍었다. 마지막 사진에는 결재란이 들어갔다.
화면에서 서명 끝을 확인한 뒤 원래 크기로 돌렸다.
이헌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탁자 너머에서 내가 서류를 내려놓는 것만 봤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고 다음 낱장을 들었다.
나는 순서대로 얇은 종이를 사이에 끼웠다.
“이건 따로 보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장부 실에 계속 걸려요.”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줘 보게.”
나는 받침판째 건넸다. 회장은 서류를 넘기지 않고 맨 위의 종이만 봤다. 엄지가 모서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끝나면 내가 넣어 두지.”
“네.”
회장이 판을 내려놓았다. 점이 없는 서명은 다른 종이 밑으로 가려졌다.
이헌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확인한 이헌이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깐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일 보러 가. 여긴 내가 있네.”
“밖에서 받겠습니다.”
이헌이 나가기 전에 나를 봤다. 나는 작업대의 천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바늘을 꺼냈다.
◈
끊어진 실은 매듭 가까이에서 닳아 있었다. 나는 남은 길이를 재고 같은 구멍으로 새 실을 넣을 자리를 골랐다.
회장이 의자를 가까이 당겼다.
“새로 뚫지는 않는군.”
“구멍을 늘리면 종이가 약해져요. 있던 길로 지나가야 합니다.”
바늘을 밀자 반대편에서 끝이 나왔다. 나는 왼손 검지로 실을 받쳤다. 굳은살이 눌렸지만 손을 바꾸지 않았다.
회장이 손가락을 봤다.
“그것도 일하다 생긴 건가.”
“네. 실을 당길 때 같은 자리가 닿아서요.”
“연옥이도 손이 그랬지.”
나는 당기던 실을 멈췄다.
회장은 내 손에서 시선을 거두고 장부를 봤다.
“자네 어머니.”
“기억하세요?”
“공방에서 봤네. 종이를 넘길 때 손을 꼭 씻고 오더군.”
나는 실의 꼬인 부분을 풀었다.
“할아버지가 엄하게 가르치셨어요. 손에 묻은 게 나중에 남는다고요.”
회장은 자기 손가락을 폈다. 손끝이 조금씩 움직였다. 나는 더 묻지 않고 매듭을 안쪽으로 넣었다.
빈 구멍에 실이 들어가자 들떠 있던 장이 제자리에 붙었다. 나는 페이지를 넘겨 걸리는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회장이 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찻잔이 받침 가장자리에 닿았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다시 흔들렸고, 잔이 기울었다.
나는 장부 밑으로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차가 탁자 끝을 적셨다. 받침판 아래로 흘러온 물이 천에 스몄다. 나는 장부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 빈 의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회장의 손을 봤다.
“손에 닿으셨어요?”
회장은 손등을 내려다봤다.
“식은 차야.”
나는 마른 천을 건넸다. 회장이 받으려다 떨어뜨려서, 손 옆에 펴 놓았다. 문이 열리고 이헌이 들어왔다.
“아버지.”
“내가 쏟았네. 유난 떨지 마.”
이헌은 회장의 손부터 확인했다. 나는 젖은 천을 걷고 서류 받침판을 들었다. 아래쪽 모서리에 물이 조금 묻어 있었다.
문밖에 있던 할머니가 행주를 가져왔다.
“제가 잔을 치울게요.”
나는 할머니가 손을 뻗기 전에 바늘부터 상자에 넣었다. 작은 도구를 모두 확인하고 뚜껑을 닫았다.
이헌은 탁자 옆으로 의자를 옮겨 회장이 앉게 했다.
나는 젖은 서류 밑에 마른 종이를 받쳤다. 누르지 않고 물기가 옮겨가기를 기다렸다. 회장의 눈이 내 손을 따라왔다.
“장부가 먼저더군.”
나는 종이를 갈며 답했다.
“차가 오기 전에 들어야 해서요.”
“사람보다?”
“장부를 내려놓고 회장님 손을 봤습니다.”
회장은 내게 건네받은 천으로 손등을 닦았다.
“그래. 봤지.”
◈
장부에는 물이 닿지 않았다. 나는 마른 탁자에 받침을 다시 놓고 페이지 끝을 확인했다. 이헌이 옆에서 젖은 종이를 받아 치웠다.
“더 할 게 있습니까?”
“깨끗한 종이만 조금 더 주세요.”
이헌은 서재 서랍을 열지 않고 회장을 봤다. 회장이 책상 오른쪽을 가리켰다.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 온 이헌이 내 팔이 닿지 않는 쪽에 놓았다.
말린 서류를 옮기다가 결재란이 다시 드러났다.
나는 다른 종이부터 위에 얹었다. 그러고는 장부의 매듭을 살폈다. 실이 지나간 구멍마다 붓 끝으로 먼지를 털었다.
회장은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헌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받지 않았다.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통화하셔도 돼요.”
내 말에 이헌이 고개를 저었다.
“끝나면 같이 나가요.”
회장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실 끝을 자르지 않은 채 길이를 다시 확인했다.
“설명드릴 게 조금 남았습니다.”
“기다릴게요.”
나는 고개를 숙이고 가위를 들었다. 잘린 실을 손바닥에 받아 빈 봉투에 넣었다.
장부를 덮은 뒤에는 끈을 느슨하게 묶었다. 처음에 찍은 사진과 대조해 눌리던 자리를 피했다.
“오늘은 이대로 두시고, 내일 펼쳐 보시면 됩니다. 낱장은 실 사이에 끼우지 마시고요.”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용은 보내게.”
“수선한 내용도 같이 적겠습니다.”
나는 도구 상자를 가방에 넣었다.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사진 화면이 켜졌다. 방금 찍은 서류의 결재란이었다.
화면을 끄고 가방 안쪽에 넣었다.
회장은 내가 정리한 낱장을 받았다. 위아래를 맞춘 뒤 손가락으로 한쪽 끝을 두드렸다. 나는 기록지를 건네고 인사를 하려 했다.
“잠깐.”
회장이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헌은 문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잡은 채 회장을 봤다. 회장의 시선은 내 가방에서 올라와 얼굴에 멈췄다.
“자네 눈이 좋구먼. 그 눈 조심히 써.”
(29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