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토요일 오전, 서진호텔 약혼식』
나는 내려놓은 귀걸이 대신 화장대 모서리를 짚었다.
남자는 문턱 안에서 멈췄다. 어젯밤에는 접혀 있던 셔츠 소매가 재킷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책 상자는 없었다. 나는 넥타이 매듭으로 눈을 내렸다가 다시 얼굴을 봤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이헌입니다.”
나는 화장대에서 손을 뗐다.
“윤나경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끝말이 조금 작았다. 주원 어머니가 내 옆으로 와 어깨에 붙은 실밥을 떼었다.
“주원이한테 얘기는 들었지? 집안 어른들 뵐 때마다 인사 잘하고.”
“네.”
“오늘은 삼촌이라고 해. 실장님, 사장님 할 것 없이.”
나는 남자를 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에는 셋이 함께 비쳤다. 내 왼쪽에는 주원 어머니가, 뒤에는 강이헌이라는 남자가 서 있었다. 어젯밤 내가 이름을 묻지 않았던 사람에게 오늘 쓸 호칭이 생겼다.
“귀걸이는 왜 하나만 했니.”
“마저 하려고요.”
남은 귀걸이를 집었다. 침을 귓불에 댔는데 구멍이 바로 잡히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리고 거울 쪽으로 돌아섰다.
문밖에서 직원이 주원 어머니를 찾았다. 좌석표를 확인해 달라는 말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주원이는 올라오고 있대.”
주원 어머니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나는 귀걸이 침을 다시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한 번에 들어갔다. 뒤꽂이를 끼우고도 손을 내리지 못했다.
남자는 문 옆에 그대로 서 있었다.
화장대와 문 사이에는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서서 귀걸이의 뒷부분을 한 번 더 눌렀다.
벽시계의 초침이 움직였다.
남자는 내 쪽으로 오지 않았다. 문손잡이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나는 거울 속 눈을 피하고 화장대 위의 빗을 가지런히 놓았다.
어젯밤 내가 먼저 한 걸음을 좁혔다. 지금은 의자 하나도 옮길 수 없었다.
복도에서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 앞에서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나는 닫힌 문 아래를 봤다.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남자가 몸을 조금 돌렸다.
손잡이가 내려갔다. 문이 닫힌 뒤 30초가 지나 있었다.
“삼촌 왔어?”
주원이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아침부터 여기까지 인사 돌러 온 거야?”
“네 아버지가 오라고 하셨어.”
“아, 아버지. 나한테는 사진 늦지 말라고 전화하셨는데.”
주원은 검정 휴대폰을 보고 화면을 껐다. 재킷 안쪽에서 흰 휴대폰을 꺼내 이번에는 그쪽 화면을 확인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두 대의 휴대폰을 봤다.
주원은 내 옆에 서서 몸을 숙였다.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무릎에 놓인 치맛자락을 펴며 등을 세웠다.
“잘 어울리네. 수선한 건 괜찮고?”
“네. 맞아요.”
“어제 받아 갔어?”
“대기실로 올려 달라고 했어요.”
“잘했네.”
검정 휴대폰이 울렸다. 주원은 화면을 훑고 옆구리의 버튼을 눌렀다. 흰 휴대폰은 손에 든 채였다.
“아버님은?”
“오고 계세요.”
“내가 로비로 모시러 갈까?”
나는 거울에서 주원을 봤다.
“도착하시면 연락 주신대요.”
“그럼 전화 오면 나한테 알려 줘요.”
주원은 내 어깨 뒤로 손을 올리려다 휴대폰이 다시 울리자 몸을 폈다. 흰색이 아니라 검정 휴대폰이었다.
“네. 지금 대기실인데요.”
짧게 대답한 뒤 문 쪽으로 걸었다. 이헌이 한 걸음 비켜섰다. 두 사람이 문 옆에 나란히 서자 주원이 덧붙였다.
“삼촌도 사진 찍어야 된대. 가지 말고 있어.”
“알았어.”
문이 닫히기 전, 주원이 돌아봤다.
“자기, 물이라도 마셔. 얼굴 너무 굳히고 있지 말고. 오늘 좋은 날이잖아. 그치?”
나는 컵이 놓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네.”
주원은 통화를 하며 나갔다. 이헌도 문밖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혔다.
나는 빈 컵을 잡고 있었다.
◈
직원이 물병을 가져왔을 때 휴대폰을 열었다.
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로비에 도착했다. 올라가마.』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어젯밤 일을 말하면 아버지는 또 미안하다고 할 터였다.
『천천히 오세요. 아직 준비 중이에요.』
전송하고 나서 물을 따랐다.
직원이 화장대 옆에 선 채 옷을 살폈다.
“등이 뜨지는 않으세요? 어제 수선한 부분이라 확인하려고요.”
나는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직원이 등 쪽의 천을 손끝으로 정리했다.
“괜찮네요. 팔 한번 움직여 보시겠어요?”
어깨를 움직이자 목덜미 아래에서 실이 당겼다.
“여기는 조금 걸려요.”
“위 단추 때문인 것 같아요. 채워진 건 맞는데.”
직원은 단추를 다시 만져 보고 손을 뗐다.
“불편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수선 담당자 불러 드릴게요.”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등의 여밈에는 지퍼 위로 단추 하나가 달려 있었다. 목을 숙일 때만 그 부분이 당겼다.
직원은 갈색 가방을 들어 어디에 둘지 물었다.
“의자 아래 놓아 주세요. 작은 가방은 제가 들고 있을게요.”
가방 안에서 클러치를 꺼냈다. 평소 앞치마 주머니에 넣던 바늘 둘을 아침에 옮겨 왔다. 천 조각에 꽂은 바늘을 확인하고 지퍼를 닫았다.
직원이 나간 뒤 휴대폰 화면에 주원 이름을 띄웠다.
어젯밤 누구와 있었어요.
그 문장을 입력했다가 한 글자씩 지웠다. 문자로 물으면 문자로 답이 올 터였다. 나는 화면을 끄고 클러치 옆에 내려놓았다.
잠시 뒤 아버지가 들어왔다. 새 구두 밑창이 문턱에 걸려 발을 고쳐 디뎠다.
“우리 딸 다 준비했네.”
나는 일어나 아버지의 재킷을 봤다. 뒤쪽 옷깃이 접혀 있었다.
“아빠, 잠깐만요.”
옷깃을 펴 드리자 아버지가 목을 숙였다. 셔츠에는 다림질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목에 붙은 세탁소 종이를 떼어 내 손바닥에 쥐었다.
“아침 드셨어요?”
“먹었다. 너는?”
“조금요.”
“사람 많이 온다더라.”
“아빠 아는 분들도요?”
“공장에서는 염 반장만 오기로 했다. 다 오면 일이 안 되지.”
아버지가 웃었다. 나는 손에 쥔 종이를 접었다.
“아빠.”
“응.”
열린 문 너머로 주원이 보였다. 검정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도 돌아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왜.”
“구두 불편하시면 잠깐 앉아 계세요.”
나는 옆 의자를 빼 드렸다. 아버지는 괜찮다면서도 자리에 앉아 발목을 움직였다.
가방 안쪽 칸에는 반창고가 몇 장 들어 있었다. 나는 하나를 꺼내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구두 뒤축 안에 붙여도 되는지 묻고는 몸을 숙였다.
직원이 문을 두드려 가족사진 촬영을 알렸다. 아버지는 손을 무릎에 짚고 일어났다.
“아빠 먼저 나가 있을게.”
나는 아버지의 구두 뒤축이 접히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문을 열어 드렸다.
◈
가족사진을 찍는 동안 주원은 내 옆에 섰다.
사진사가 조금 붙어 달라고 할 때마다 나는 구두 앞코를 옮겼다. 주원 손이 팔꿈치 뒤에 닿았다. 나는 클러치를 양손으로 들었다.
이헌은 다른 쪽 끝에 섰다. 가운데 선 사람들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재킷 소매만 보였다.
촬영이 끝나자 주원이 손을 뗐다.
“오래 서 있으니까 힘들지?”
“괜찮아요.”
나는 주원이 휴대폰을 꺼내기 전에 불렀다.
“주원 씨.”
“응?”
“어제 회사에 있었다고 했죠.”
검정 휴대폰 위에서 주원 엄지가 멈췄다.
“어제? 아, 저녁에.”
“호텔 로비에서 봤어요.”
주원이 내 얼굴을 봤다. 나는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랬어? 왜 안 불렀어요.”
“누구랑 같이 있길래요.”
복도에서 직원들이 꽃 장식을 옮겼다. 주원은 길을 비켜 주며 벽 쪽으로 섰다.
“아는 사람이야. 일이 일찍 끝나서 잠깐 들렀어.”
“객실로 가던데요.”
“그 사람이 투숙객이라 데려다준 거고.”
나는 클러치의 잠금쇠를 눌렀다. 열리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고 손을 뗐다.
“회사라고 한 건요?”
“끝나기 전에 보낸 거겠지. 몇 시에 보냈더라.”
주원이 검정 휴대폰을 켰다. 나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지금 찾아보지는 마세요.”
주원이 휴대폰을 내렸다.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도 사라졌다.
“나경 씨.”
“오늘 식 끝나고 얘기해요.”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봤다. 그러다 뒤에서 누군가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이따 얘기하자.”
주원은 검정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반대쪽 주머니에서 흰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화면을 손바닥 안으로 돌렸다.
나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앉으려고 허리를 굽히는 순간 목덜미가 당겼다. 이어 작은 것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났다.
단추가 의자 다리를 맞고 문 쪽으로 굴렀다.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몸을 낮췄다. 문 앞에 선 구두 옆에서 단추가 멈췄다.
이헌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
단추를 주운 손이 내 앞에 왔다. 손바닥 가운데에 옷과 같은 색의 단추가 놓여 있었다. 실이 짧게 붙어 있었다.
나는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과 내 손끝 사이에 3cm쯤 남았을 때 멈췄다. 단추만 집으면 됐다. 어젯밤에도 멈출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나는 단추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직원 부를까요?”
“제가 달면 돼요.”
이헌은 손을 거두고 문 옆으로 비켰다. 나는 문을 잡았다.
“잠깐만 닫을게요.”
“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클러치를 열었다.
거울 앞에서 목덜미를 보려 했지만 단추 자리까지 손이 닿지는 않았다. 나는 옆에 세워 둔 가림막 뒤로 들어갔다. 지퍼를 내리고 옷걸이에 옷을 걸었다.
떨어진 자리에는 실이 매듭째 남아 있었다. 단추 구멍에 걸린 실을 빼내 나란히 놓았다. 천이 찢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침에 챙긴 실타래를 꺼냈다. 바늘귀에 실을 넣고 짧게 잘랐다. 작업대 대신 화장대 끝에 옷걸이를 기대고 단추 자리를 잡았다.
문밖에서 직원이 물었다.
“준비되셨을까요?”
“단추 하나만 달고 나갈게요.”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바늘을 넣고 당겼다. 옷감 뒤를 손가락으로 받쳤다. 실을 너무 조이면 다시 목이 당길 수 있어 여유를 남겼다.
복도에서 주원이 누군가와 웃으며 이야기했다. 낮게 대답하는 다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바늘을 멈추고 문 쪽을 봤다.
이름을 알았고, 부를 말도 정해졌다. 어젯밤 일을 모른 척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 정도면 됐다. 그런데 이헌의 손바닥에서 단추를 집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다시 바늘을 움직였다.
매듭을 안쪽에 숨기고 클러치에 든 작은 가위로 실 끝을 잘랐다. 단추를 당겨 보니 천이 따라 올라오지 않았다.
“됐다.”
바늘 둘을 천에 꽂아 클러치에 넣었다.
가림막 뒤에서 옷을 다시 입었다. 거울을 보며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웠다. 턱을 숙여도 아까처럼 당기지 않았다.
나는 화장대 위의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에 떠 있던 일정 알림을 지웠다.
◈
연회장 앞에는 닫힌 문이 두 짝 있었다.
문 너머에서 마이크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직원이 안쪽을 확인하고 나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먼저 안내를 받아 들어가셨다. 주원은 내 옆에서 소매 끝을 만졌다.
“단추 괜찮아?”
“다시 달았어요.”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흰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누르다가 직원이 안내하자 주머니에 넣었다.
문이 조금 열렸다. 안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가 멎었다.
주원은 직원의 설명을 듣느라 몸을 돌렸다. 나는 클러치를 왼손으로 옮겼다. 단추를 집었던 오른손은 비어 있었다.
옆 복도에서 이헌이 걸어왔다.
나는 인사를 해야 할지 잠깐 망설였다. 남 앞에서는 삼촌이라고 하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입술을 떼기 전에 이헌이 내 옆에서 걸음을 늦췄다.
재킷 소매와 내 팔 사이에 손 하나 들어갈 틈이 있었다.
이헌은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닫힌 문을 보고 있다가 고개만 조금 내 쪽으로 숙였다.
“이 약혼, 하지 마요.”
(2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