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오늘 일정: 토요일 낮, 서진호텔 2층 연회장』
나는 클러치를 쥔 손을 내렸다.
“왜요?”
이헌이 대답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직원이 안쪽을 향해 손을 들었고, 박수 소리가 복도로 나왔다.
“두 분, 들어오시면 됩니다.”
주원이 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 팔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헌은 이미 문 옆으로 물러나 있었다.
“자기, 여기.”
주원이 팔을 조금 더 들었다.
나는 클러치를 직원에게 맡기고 주원 팔에 손을 얹었다. 얇은 소매 아래로 팔꿈치가 만져졌다. 이헌은 우리보다 먼저 옆문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남은 직원이 내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천천히 걸으세요.”
안쪽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앞줄의 아버지가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나는 아버지를 보며 첫발을 디뎠다.
주원이 내 손등을 내려다봤다.
“손이 차네. 추워요?”
“괜찮아요.”
“끝나고 따뜻한 거 먹자. 아침도 못 먹었지?”
“조금 먹었어요.”
주원은 속도를 늦춰 줬다. 나는 그 걸음에 맞춰 드레스 자락을 밀었다.
낮은 단상 앞에 도착하자 직원이 손으로 설 자리를 가리켰다. 바닥에 붙인 표시를 밟았다. 고개를 들면 양가 부모님이 먼저 보였다.
그 뒤로 회장과 이헌이 앉아 있었다.
이헌은 회장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무슨 말을 듣고 있었다. 문 앞에서 내게 한 말은 확인할 수도 없게 됐다.
나는 주원 팔에서 손을 뗐다.
◈
사회자가 우리를 단상 옆 의자에 앉힌 뒤 양가 어른들을 소개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채우려다 손이 빗나가자 다시 재킷 앞을 잡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보다가 무릎 위에 포갠 내 손을 폈다.
주원 아버지는 일어나 고개를 숙인 뒤 아버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악수하는 동안 사진사가 앞을 지나갔다.
의자에 앉은 주원이 낮게 말했다.
“아버님 긴장하셨나 봐.”
“이런 자리 익숙하지 않으세요.”
“우리 아버지는 너무 익숙해서 문제인데.”
나는 대답 대신 주원을 봤다. 주원은 입가를 조금 올렸다가 사회자가 부르자 일어났다.
반지를 교환할 차례였다.
직원이 뚜껑을 연 상자를 받쳐 들었다. 백금 반지 가운데 다이아가 박혀 있었다. 고를 때 들었던 1캐럿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주원이 반지를 꺼냈다.
“왼손.”
나는 손을 내밀었다. 주원은 손가락 끝을 받치고 반지를 끼웠다. 마디를 지날 때 잠깐 멈췄다가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끝까지 밀었다.
“맞네.”
사진사가 손을 조금 들어 달라고 했다. 주원은 내 손을 잡은 채 카메라 쪽으로 돌렸다.
나는 반지보다 그 아래 손가락을 봤다. 작업할 때 쓰는 풀은 틈으로 들어가면 닦기 어려웠다. 내일부터는 빼 두어야 했다.
직원이 다른 반지를 내밀었다.
주원 손을 받치고 반지를 끼웠다. 손톱 아래에 남은 종이 가루가 없는지 아침에 몇 번이나 살폈는데, 막상 이 자리에서는 왼손 검지의 굳은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원이 내 손끝을 보고 말했다.
“다쳤어요?”
“실 자국이에요. 오래된 거예요.”
“아.”
사진사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고 정면을 봤다. 주원 손에서 내 손을 빼는 것은 촬영이 끝난 뒤였다.
박수가 났다.
앉기 전에 회장 쪽을 봤다. 이헌이 물병의 뚜껑을 열어 회장 앞에 놓고 있었다. 내 쪽으로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앉았다.
주원 아버지가 마이크 앞에 섰다. 은테 안경을 고쳐 쓰고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웃었다.
“바쁜 날 걸음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익숙한 인사말이 이어졌다. 주원이 의자를 조금 당겼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스치는 소리가 나자 앞줄의 주원 어머니가 돌아봤다.
주원은 곧 허리를 폈다.
“우리 집안은 한번 맺은 인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오늘부터 나경 양도 저희 식구입니다.”
주원 아버지가 나를 봤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윤 대표님과도 오래 좋은 관계를 이어 가려 합니다. 해윤과 서진이 한 땅에서 함께 크길 바랍니다.”
아버지의 웃음이 멎었다.
아버지는 입가를 올린 채 주원 아버지를 보다가, 천천히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재킷 자락이 손을 덮었다.
주원 아버지는 잔을 들어 보였다.
“두 아이의 앞날을 위해 축하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잔을 들었다. 아버지도 테이블 위의 잔을 집었다. 나는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보고 있었다.
“나경 씨.”
주원이 내 앞에 놓인 잔을 가리켰다.
나는 물이 든 잔을 들었다. 주원이 잔을 가볍게 맞댔다.
“이제 밥 먹으면 돼요.”
“한 땅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주원이 아버지 쪽을 봤다.
“축사잖아. 같이 잘해 보자는 말이지.”
“공장 얘기 같아서요.”
“오늘은 어려운 얘기 안 해도 되는데.”
주원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마음에 걸리면 끝나고 물어봐요. 나도 저 말까지 미리 듣지는 않았어.”
직원이 접시를 내려놓았다. 나는 냅킨을 펴서 무릎에 놓았다.
반지가 접시 가장자리에 닿았다. 작은 소리에 손을 거두자 주원이 물컵을 내 쪽으로 옮겨 줬다.
나는 물을 마시고 다시 앞을 봤다.
회장이 뭐라고 묻자 이헌이 짧게 대답했다. 식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 말라는 말을 한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포크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가락에 낀 반지를 한 번 돌려 자리를 바로잡았다.
◈
인사를 받는 동안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틈은 없었다.
주원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름을 듣고 고개를 숙이면 곧 다음 사람이 왔다. 주원은 내 옆에서 웃으며 악수를 했다.
누군가 내 손의 반지를 보자고 했다. 나는 손등을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일할 때도 끼고 있을 건 아니지?”
주원이 물었다.
“빼야 해요. 종이에 긁힐 수도 있고요.”
“잃어버리지만 마요. 우리 엄마가 찾으실 테니까.”
주원 어머니가 바로 옆에서 이름을 부르자 주원은 웃음을 거뒀다.
나는 주원이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사이에 연회장 안을 봤다. 회장 자리 옆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이헌은 창가에서 회장의 외투를 받아 들고 있었다. 직원이 다가오자 외투를 건넸다.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한 번쯤 이쪽을 볼 수도 있었다.
이헌은 회장이 일어날 때까지 곁에 서 있었다. 회장이 내 쪽으로 걸어오자 그제야 나도 몸을 돌렸다.
“수고했다.”
회장이 말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숙였다. 뒤에 선 이헌의 구두가 보였다.
회장은 주원 어깨를 짚고 몇 마디를 했다. 나는 회장 뒤에 선 이헌에게 인사할 차례를 기다렸다.
“나경아, 여기 좀 와 보렴.”
아버지가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헌은 회장을 따라 옆으로 비켜섰다. 눈이 마주치지 않은 채 사람들이 그 사이로 들어왔다.
“네, 아빠.”
나는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염 반장이 출입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점퍼 대신 재킷을 입고 있었다. 품에 든 종이 가방이 구겨져 있었다.
“축하한다. 우리 대표 딸이라 그런가, 어릴 때 얼굴이 있네.”
“와 주셔서 감사해요.”
염 반장은 종이 가방을 아버지에게 건네고, 공장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내 주겠다며 문밖으로 나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까 축사할 때요.”
“응.”
“공장 땅 얘기였어요?”
아버지는 종이 가방의 손잡이를 모았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다.”
“그럼 언제 해요?”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다가 복도 쪽을 살폈다.
“다음에 하자. 오늘은 네 날이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손잡이를 다시 벌려 가방 안을 확인했다.
“이것부터 받아라.”
안에는 호두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나는 가방 가장자리를 벌렸다. 모서리가 닳았고, 뚜껑 앞에는 놋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엄마 거예요?”
“알아보겠니?”
“공방에서 봤어요. 엄마가 작업대 아래 두던 거잖아요.”
나는 상자를 꺼내 들었다. 바닥을 받친 손에 무게가 실렸다.
“네 할머니가 갖고 계시던 걸 보내 주셨어. 엄마 도구니까 이제 네가 쓰면 좋겠다고.”
뚜껑에는 칼끝이 스친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자를 기울여 경첩을 살폈다. 한쪽 나사가 조금 올라와 있었다.
아버지가 내 손 밑을 받쳤다.
“무겁지?”
“괜찮아요. 안에 도구가 그대로 있나 봐요.”
“그건 나도 못 봤다.”
나는 자물쇠를 잡았다. 손가락으로 고리를 눌러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열쇠는요?”
“없어. 할머니도 못 찾으셨대. 나한테 따로 맡긴 것도 없고.”
아버지가 재킷 주머니를 더듬다가 손을 뺐다.
“찾아보고 보내 주신다고는 했는데, 오래돼서 나올지 모르겠다.”
나는 자물쇠 아래를 봤다. 열쇠 구멍에 먼지가 끼어 있었다. 억지로 벌리면 나무 앞면까지 상할 수 있었다.
“일단 가져갈게요.”
“열쇠 하는 데 맡기면 열 수 있겠지?”
“먼저 닦아 보고요. 경첩도 손봐야겠어요.”
아버지가 상자 뚜껑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오늘 주면 네 엄마도 같이 온 것 같을까 해서 가져왔다.”
나는 상자를 가방에 도로 넣었다. 손잡이가 바닥에서 조금 뜨자 아버지가 손을 보태 줬다.
“아빠, 이쪽 잡아 주세요. 끈이 접혔어요.”
둘이 손잡이를 펴서 세웠다. 나는 가방을 품 쪽으로 당겼다.
“작업실에 둘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빈손으로 재킷 앞을 폈다.
◈
대기실로 돌아와 드레스를 벗었다.
목덜미의 단추를 풀 때 아침에 넣은 매듭이 손끝에 닿았다. 옷걸이에 걸어 직원에게 건네고 평소 옷으로 갈아입었다.
직원이 화장대에 남은 귀걸이 통을 가져다줬다.
“이것도 챙기셔야 해요.”
“감사합니다.”
나는 통을 갈색 가방 안에 넣었다. 클러치에서는 휴대폰과 바늘을 꺼내 옮겼다. 손을 씻으려고 반지를 빼자 직원이 작은 접시를 내밀었다.
“여기에 두세요.”
반지를 내려놓고 세면대로 갔다. 손가락 사이를 헹군 뒤 종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왼손 검지에는 오전에 바늘을 받쳤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돌아와 반지를 다시 꼈다. 비누기가 남지 않았는지 안쪽을 돌려 보고 가방을 들었다.
주원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요?”
“네.”
주원은 넥타이를 조금 풀고 있었다. 내가 바닥의 종이 가방을 들자 먼저 손잡이를 잡았다.
“이건 뭐예요?”
“엄마 도구 상자요. 아빠가 주셨어요.”
“차까지 들어 줄게.”
“무거워요.”
주원이 가방을 한 번 들어 올려 보더니 반대 손으로 바닥을 받쳤다.
“진짜네. 차 어디 댔어요?”
나는 주차 위치를 알려 줬다. 주원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방을 들고 걸었다. 뒤따라온 직원이 주원을 불렀다. 부모님과 손님들 배웅이 남아 있다고 했다.
“아, 맞다.”
주원이 나를 봤다.
“먼저 가도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잠깐만. 직원 불러 줄게.”
“이건 제가 들게요. 나무 상자라 눕히면 안 돼요.”
나는 가방을 받아 바닥부터 받쳤다. 주원이 손잡이를 놓았다.
“도착하면 연락해요. 아까 하던 얘기도 해야 하니까.”
“네. 주원 씨도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발 옆에 내려놓았다. 주원은 문이 닫힐 때까지 서 있었다.
주차장에 내려서는 가방을 양손으로 들었다. 차에 도착해 손잡이를 팔에 걸고 열쇠를 꺼냈다.
운전석 문을 열자 앞유리에 끼워진 종이가 보였다.
와이퍼 아래에 명함 한 장이 있었다.
나는 가방을 좌석에 놓고 앞유리 쪽으로 갔다. 명함의 모서리를 잡아 와이퍼를 조금 들었다.
『서진그룹 전략기획실 강이헌』
연회장에서 한 번도 나를 보지 않던 얼굴을 떠올렸다.
명함을 뒤집었다. 인쇄된 글자와 달리 뒷면에는 펜으로 눌러 쓴 자국이 있었다.
『이유가 궁금하면 화요일 저녁 7시』
(3화 끝)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
『오늘 일정: 12월 5일 목요일, 해윤 공장, 아버지와 점심』“부지 서류가 움직인다는 게 감정평가도 포함돼요?”목요일 아침, 작업실 계단을 내려가다 멈췄다. 아버지가 보낸 문자를 확인한 참이었다. 오늘 공장에 손님이 오니 점심을 조금 늦게 먹자는 내용이었다.전화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누가 온다고 해요?”“땅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요. 아버지는 대출 연장에 필요한 절차라고 들으셨대요.”“서진캐피털에서 보낸 사람인지 확인해 봐요.”“가서 물어볼게요.”“서류에 서명해 달라고 하면 바로 하지는 말고요.”나는 계단 난간에서 손을 뗐다.“아버지한테도 말씀드릴게요.”“혼자 가요?”“네. 공장 가는 버스 기다리려고요.”이헌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제가 같이 갈 수 있는 날이면 좋았을 텐데.”“그러면 아버지한테 뭐라고 소개해요?”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아래층 가게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서 나는 계단 끝으로 내려갔다.“주원 씨 삼촌이라고 해야 하잖아요.”“맞아요.”이헌은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고쳐 멨다.“오늘은 제가 보고 올게요. 모르는 건 물어볼 거고요.”“네. 기다릴게요.”통화를 끊으려다가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댔다.“실장님.”“네.&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