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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 금요일 밤, 서진호텔에서 예복 받기』
주원의 손이 여자의 허리에 놓여 있었다.
나는 서진호텔 로비 기둥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주원의 재킷 소매를 붙잡고 웃었다. 주원이 고개를 숙여 무슨 말을 하자 여자가 팔을 한 번 쳤다. 둘 사이에는 가방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
내 휴대폰에는 조금 전 받은 문자가 떠 있었다.
『아직 회사야. 예복만 받아서 먼저 가요. 내일 보자.』
답장을 쓰던 칸에 알겠다는 말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글자를 지웠다.
객실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원이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 버튼을 누르면 저 사람이 누구인지 물을 수 있었다.
주원은 여자의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화면을 확인했다. 곧 문이 열렸다. 여자가 먼저 들어갔고, 주원이 뒤따랐다.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뒤에서 직원이 나를 불렀다.
“윤나경 고객님 맞으실까요?”
돌아보자 옷 덮개를 든 직원이 서 있었다. 덮개 아래로 내일 입을 원피스 자락이 조금 나와 있었다.
“수선은 다 됐나요?”
“네. 허리 부분만 다시 확인하시면 됩니다.”
“내일 아침에 입어 볼게요. 대기실로 올려 주세요.”
직원이 수령 확인란을 내밀었다. 나는 펜을 받아 이름을 썼다. 마지막 글자를 쓰는데 종이 밑에 받친 전표가 밀렸다. 손끝으로 모서리를 맞추고 펜을 내려놓았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옷을 가지고 돌아갔다.
나는 아버지에게 온 문자를 열었다.
『도착했니. 아빠도 내일 늦지 않게 가마.』
나는 도착했다고만 답했다.
로비 바닥에 서서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돌아가는 문은 오른쪽이었다. 나는 왼쪽 엘리베이터로 갔다. 층별 안내에서 바를 찾고 31층을 눌렀다.
◈
바텐더가 주문을 물었을 때 나는 빈 의자를 먼저 가리켰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네.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창가 자리에는 둘씩 앉은 손님이 많았다. 나는 기다란 바의 끝에 가방을 놓았다. 갈색 가죽 손잡이의 닳은 부분을 안쪽으로 돌려놓고 의자에 올라앉았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가 엎어 놓았다.
“술은 잘 몰라요. 독하지 않은 걸로 주세요.”
바텐더가 몇 가지를 물었다. 단맛이 적은 것으로 골랐다. 잔이 나오자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남는 맛이 낯설어 잔을 내려놓았다.
바텐더가 내 앞에 물 한 잔을 말없이 놓았다.
나는 물부터 마셨다.
바 천장 구석에 작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CCTV였다. 렌즈가 좌석 쪽을 향해 있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었다.
직원이 옆자리의 빈 잔을 치웠다. 한 자리 건너 남자가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매고 있었지만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손목에는 시계가 없었다.
남자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책을 꺼냈다.
나는 잔을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책등 위쪽이 찢어져 있었다. 덧댄 천이 떨어진 자리로 실이 드러났다.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빼면 손상된 부분에 손가락이 걸릴 게 분명했다.
남자는 책을 바 위에 놓지 않았다. 한 손으로 받치고 다른 손으로 표지를 조금 열었다.
“그 책, 그대로 두면 이번 겨울에 등이 다 떨어져요.”
말하고 나서야 남의 물건에 참견했다는 걸 알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직업 때문에 자꾸 보게 돼서요.”
“책 고치는 일 해요?”
“네. 종이도 고치고요.”
남자가 책을 내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표지는 손바닥으로 받치고 있었다. 책장이 벌어지기 전, 손가락으로 앞쪽을 눌렀다. 안쪽 글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더 상했습니까?”
나는 빈 의자를 사이에 두고 몸만 조금 옮겼다.
“여기요. 지금 엄지 닿는 데 말고, 그 위요.”
남자의 엄지가 움직였다. 뜯어진 천 아래로 실 한 가닥이 나왔다.
“잡아당기면 안 돼요.”
손이 바로 멎었다.
“이 실이 끊어지면 안쪽 종이도 빠질 수 있어요.”
“떨어진 부분만 붙이면 됩니까?”
“그렇게 하면 여실 때 다른 데가 찢어져요. 먼저 어떻게 묶였는지 봐야 해요.”
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바의 마른 곳에 폈다.
“잠깐 여기에 놓으세요. 손으로 계속 누르고 계시면 그쪽도 눌려요.”
남자는 책을 내려놓기 전에 손수건을 한 번 봤다.
“묻을 수도 있는데.”
“빨면 돼요.”
책이 손수건 위에 놓였다. 시집이었다. 표지의 제목은 닳아 몇 글자만 남아 있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책등만 살폈다.
“많이 읽으셨나 봐요.”
“오래 가지고 다녔어요.”
“오늘은 종이로 감싸기만 해도 괜찮아요. 테이프는 붙이지 마시고요.”
남자가 내 손을 봤다. 왼손 검지의 굳은살에 실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펴서 책 아래 손수건의 접힌 부분을 밀었다.
“테이프 붙인 책이 많이 들어와요. 떼는 데 더 오래 걸려요.”
“기억할게요.”
남자는 책을 덮었다. 표지가 끝까지 내려간 걸 확인한 뒤 손을 뗐다.
나는 그 손을 조금 더 봤다.
이 남자는 상한 곳을 보여 주면서도 더 벌리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면 손을 멈췄다.
바텐더가 다가와 물을 채워 주었다.
“혹시 깨끗한 종이 있을까요? 인쇄 안 된 걸로요.”
내가 묻자 바텐더는 계산대 아래를 살피고 포장용 종이를 가져왔다. 작은 상자까지 함께였다.
“이 정도면 괜찮으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남자가 상자를 받으려다 내 쪽으로 밀었다.
“부탁해도 돼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종이를 폈다. 모서리를 세게 누르지 않고 책을 감쌌다. 뜯어진 등에 종이가 걸리지 않도록 접는 방향을 바꿨다.
평소라면 풀을 바르기 전 상태 사진부터 찍었을 것이다. 지금 내 앞에는 작업대도 도구도 없었다. 나는 종이 끝을 안으로 접어 고정했다.
“됐다.”
남자가 낮게 물었다.
“다 된 겁니까?”
“고친 건 아니에요. 집에 가실 때까지 이렇게만 두세요.”
남자는 상자를 열어 책을 넣었다. 남는 공간에는 바텐더가 가져온 종이를 접어 받쳤다. 내가 손을 대기도 전에 책이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동안 내 앞의 술은 줄지 않았다.
“안 드시네요.”
“맛을 모르겠어요.”
“다 마실 필요 없어요.”
나는 잔을 멀리 밀었다. 바텐더가 시선을 맞추며 잔을 치워도 되는지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엔 주머니 말고 가방에 넣으세요.”
“가방을 안 들고 다녀서요.”
“그럼 오늘은 손에 들고 가세요.”
내가 가방을 열자 예복 수선표가 손잡이에 걸려 나왔다. 약혼식이라고 인쇄된 면을 안으로 접었다. 남자는 상자 뚜껑을 닫고 있었다.
나는 수선표를 가방 안쪽 칸에 밀어 넣었다.
“내일도 일해요?”
남자가 물었다.
“아뇨. 내일은 다른 일이 있어요.”
“좋은 일입니까?”
나는 냅킨 끝을 접었다.
“다들 그렇대요.”
남자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 때문에 내가 한마디를 더 했다.
“하기 싫은 일인데, 오래전부터 준비했으면 해야 할까요?”
남자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준비했는데요?”
“여러 사람이요.”
“본인은요.”
“옷을 맞췄어요.”
입 밖으로 내놓고 보니 내가 한 일은 그것 하나였다. 날짜를 정한 것도, 장소를 고른 것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가방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지금 안 하겠다고 하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말해 봤어요?”
“아뇨.”
“왜요?”
“미안하다고 할 것 같아서요.”
아버지는 약혼 이야기를 꺼낸 날에도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물을 마셨다.
남자가 물었다.
“지금 말하고 싶으면 들어 줄게요.”
나는 컵을 두 손으로 잡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약혼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안 말할래요.”
“네.”
“안 궁금하세요?”
“말 안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나는 컵에서 손을 뗐다.
남자가 넥타이 매듭 아래를 잠깐 만졌다. 느슨하게 풀지는 않았다. 책 상자는 팔꿈치 안쪽에 놓여 있었다.
“그쪽은요?”
“저도 내일 가야 할 곳이 있어요.”
“가기 싫은 곳이요?”
“네.”
“그럼 가지 마세요.”
말하고 나서 내가 먼저 웃었다.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네요.”
남자의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
“들어 보니 쉽지 않네요.”
“그렇죠.”
“그래도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겁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봤다. 유리에 내 얼굴과 남자의 어깨가 함께 비쳤다. 나는 빈 의자 쪽으로 옮겼던 몸을 바로 세웠다.
“책을 맡기면 오래 걸립니까?”
“상태를 제대로 봐야 알아요.”
“미리 약속하고 가야겠네요.”
“네. 그냥 오시면 풀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일 수도 있어서요.”
“그때는 못 만나요?”
“만날 수는 있는데, 제가 말이 좀 없어져요.”
“지금은 많이 하는 편입니까?”
나는 남자를 봤다.
“오늘은요.”
그 말 뒤에는 둘 다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상자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손수건을 돌려주려는 걸 보고 내가 손을 내밀었다. 손끝이 닿기 전에 남자는 접힌 천을 바 위에 내려놓았다.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남자의 팔꿈치에서 내 가방까지는 40cm쯤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가방에 넣었다. 휴대폰 화면에 아버지의 답장이 보였다.
『잘 자라.』
시계는 10시 50분을 지나고 있었다.
“가야겠어요.”
남자가 먼저 의자에서 내려왔다. 내가 가방을 들자 뒤로 물러나 길을 비켜 주었다.
우리는 각자 마신 것을 계산했다. 바텐더가 내게 겉옷을 건넸다.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가셔도 되는데.”
“같이 내려가도 됩니까?”
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네.”
◈
엘리베이터에는 우리 둘만 탔다.
남자가 로비 버튼을 눌렀다. 나는 반대편 벽 앞에 섰다. 문이 닫히자 바에서 들리던 음악이 끊겼다.
층 표시가 바뀌었다.
남자는 책 상자를 왼손에 들고 있었다. 오른손은 바지 옆에 내려 두었다. 나는 그 손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름을 안 물으시네요.”
“물어봐도 돼요?”
내가 먼저 꺼낸 말인데 대답은 늦었다.
내일 아침이면 낯선 직원들이 나를 신부라고 부를 터였다. 로비에서 본 일을 주원에게 물을지, 모른 척할지도 정해야 했다.
지금 이름까지 말하면 이 남자 앞에서도 내일 약혼하는 사람이라고 밝혀야 했다.
“아뇨. 오늘은 그냥요.”
“알겠어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나는 가방 끈을 고쳐 잡고 벽에서 등을 뗐다.
남자와 내 사이가 한 걸음으로 줄었다. 남자는 나를 봤다. 웃지도, 손을 뻗지도 않았다.
“잠깐만요.”
내 말에 남자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나는 가방을 쥔 손을 아래로 내리고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가까이서 올려다보자 남자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았다가 돌아왔다.
멈출 시간은 있었다.
나는 발뒤꿈치를 들었다.
입술이 닿자 가방 끈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허리를 잡거나 고개를 더 숙이지도 않았다.
1초, 2초, 3초.
나는 발뒤꿈치를 내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숨을 들이마시는데 가방 끈이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손으로 붙잡지 못하고 팔꿈치에 걸었다.
“술 때문은 아니에요.”
한 모금 마셨다는 말까지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낮게 대답했다.
“알아요.”
“내일 하기 싫은 일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에요.”
남자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다시 어깨에 올렸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요.”
문이 열렸다.
로비에서 기다리던 손님이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몇 걸음 걷고 돌아보니 남자는 문 안에 서 있었다.
책 상자를 든 손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돌아섰다. 호텔을 나갈 때까지 이름을 묻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신부 대기실에서 귀걸이를 끼우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거울 속으로 주원 어머니가 보였다. 나는 남은 귀걸이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인사드려라, 주원이 삼촌이다.”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어젯밤 그 남자였다.
(1화 끝)
『오늘 일정: 12월 18일 수요일 오전, 본가 회장님 장부 원본 수선』『수요일, 회장님 장부 원본 볼 수 있어요.』수요일 아침, 본가 현관 앞에서 문자를 다시 읽고 화면을 껐다. 가방 안에는 얇은 종이와 붓, 실을 나눠 넣은 상자가 있었다. 금속 도구는 천으로 감쌌다.문이 열리자 이헌이 안쪽에 서 있었다.“추웠죠.”“오래 안 기다렸어요.”이헌의 눈이 내 가방으로 내려갔다. 나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도구가 있어서 제가 들게요.”“네. 계단 앞에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현관 바닥에 녹은 눈이 묻어 있었다. 이헌이 발로 매트를 당겨 물기를 가렸다. 나는 그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코트를 벗자 목에 건 실이 옷깃에 걸렸다. 반지가 나오기 전에 손가락으로 눌러 넣었다. 이헌은 외투를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회장님 혼자 계세요?”“지금은요. 서재에 계십니다.”복도 끝에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서재 안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회장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신문 한쪽이 접혀 있었고, 안경은 그 위에 벗어 뒀다. 내 인사를 받은 회장이 가방부터 봤다.“그 안에 다 들었나.”“장부 상태를 보고 더 필요한 건 말씀드리겠습니다.”“뜯어서 새로 만드는 건 싫어.”“기존 실을 살릴 수 있으면 살리겠습니다. 새 종이도 필요한 자리에만 붙이고요.”회장이 신문을 밀어 놓았다.“앉아서 기다리게.”나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성탄 장터』다은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우리 손을 봤다. 나는 이헌의 손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은이 붕어빵 봉투를 접었다.“나경아.”“응.”“이분, 내가 아는 그분 맞아?”이헌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강이헌입니다.”“서진그룹 실장님이요?”“네.”다은이 내 왼손을 봤다. 회색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헌의 오른손에도 같은 장갑이 있었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왔다. 다은이 천막 기둥 옆으로 비켰다. 나도 따라갔다. 이헌은 지나가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우리 옆에 섰다.“나경이랑 할 얘기가 있는데요.”다은이 이헌에게 말했다. 평소 거래처 전화를 받을 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오늘은 제가 데려가도 되죠?”이헌은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다은이랑 갈게요.”“알겠어요.”이헌이 별 장식 봉투를 내밀었다. 받으려는데 다은이 손을 뻗었다.“그건 제가 들게요.”봉투가 다은에게 넘어갔다. 나는 이헌의 오른손을 가리켰다.“장갑은요.”이헌이 장갑을 벗어 내게 줬다. 나는 빈 장갑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손바닥이 닿았던 안쪽이 아직 따뜻했다.다은은 그걸 보고 입술을 눌렀다.“차는 안 타도 돼요. 저희 집 가까워요.”“네. 조심히 가세요.”이헌은
『오늘 일정: 12월 14일 토요일, 오후 작업 마감, 저녁 성탄 장터』코트 소매를 펴다가 작업실 문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주원이 문 앞에서 했던 말이 일주일째 걸렸다.원하는 건 꼭 갖는 사람.나는 가방 안쪽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이 보낸 문자가 떠 있었다.『입구에서 기다릴게요. 늦어도 괜찮아요.』답을 쓰려는데 문자가 하나 더 왔다.『작업 끝내고 와요.』나는 작업실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장터 입구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목도리를 고쳐 매는 동안 앞에 선 아이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아이 어깨 너머로 이헌이 보였다.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내가 손을 들자 바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줄 바깥으로 걸었다.“많이 기다리셨어요?”“방금 왔어요.”“얼마나 방금인데요?”이헌이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8분이요.”“그건 방금 아닌데요.”“그럼 조금 기다렸어요.”이헌이 내 가방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끈을 어깨 위로 당겼다.“제가 들게요. 오늘 도구는 안 가져왔어요.”“알겠어요.”손이 곧 내려갔다. 나는 빈손이 된 이헌의 손등을 보다가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지난번에는 시집을 사이에 두고 앉았고, 그 전에는 서류를 펼쳐 놓았다. 오늘은 꺼낼 종이가 없었다.“어디부터 볼까요?”이헌이 안내판을 봤다.“윤나경 씨 가고 싶은 데요.”“이런 데 자주
『오늘 일정: 12월 7일 토요일, 주원 씨 집에서 신년 행사 준비』현관 앞에서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초인종 옆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나는 손을 들었다가 코트 소매부터 내렸다.어제 석진 앞에서 접어 쥐었던 손수건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빨았는데도 다림질할 틈이 없었다. 손수건 모서리를 밀어 넣고 초인종을 눌렀다.안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잠깐만요.”주원이 문을 열었다. 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끈 한쪽이 풀려 무릎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생각보다 일찍 왔네.”“약속한 시간인데요.”주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봤다.“그러네. 들어와요. 슬리퍼는 거기.”현관에 여자 구두는 없었다. 신발장 위에는 검정 휴대폰과 열쇠가 놓여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어 나란히 붙이고 갈색 가방을 들었다.“코트 줘요.”“제가 걸게요.”주원이 옷장 문을 열어 줬다. 빈 옷걸이에 코트를 걸고 돌아서자 탄 냄새가 났다.주원도 코를 찡그렸다.“아, 불.”주원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가방을 식탁 의자에 놓고 따라갔다.◈프라이팬 한쪽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주원은 불을 끄고 뒤집개로 계란을 들어 올렸다. 밑면이 검게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이거 원래 이렇게 빨리 타요?”“불이 너무 셌어요.”“영상에서는 센 불로 시작하던데.”“계란 붓기 전에 줄여야 해요.”주원은 싱크대 옆에 세워 둔 휴대폰을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이헌이 내 의자 옆에서 손을 내렸다.“주원이 약혼녀입니다, 형님.”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무릎 위 파일이 기울어 견적서 모서리가 밖으로 나왔다. 집게를 눌러 종이를 밀어 넣었다.석진은 이헌을 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금색 손목시계 위로 셔츠 끝을 당겼다.“알지.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식사 중이었니?”“마쳤습니다.”나는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이헌은 탁자에 남은 서류를 모았다. 내 휴대폰은 화면을 아래로 향한 채 놓여 있었다.석진이 문 쪽으로 비켜섰다.“나가는 길이면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주원이한테 듣는 것보다 직접 듣고 싶은 게 있어서.”“여기서 하셔도 됩니다.”이헌이 말했다.석진은 손목을 내린 채 웃었다. 열린 문 밖으로 조현석의 책상이 보였다.나는 휴대폰을 집어 가방에 넣었다.“괜찮아요. 말씀 듣고 갈게요.”이헌이 나를 봤다. 나는 가방 안에 파일을 세워 넣고 지퍼를 끝까지 닫았다.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빠져나오려는데 이헌이 길을 비켜 줬다.손등 사이가 10cm쯤 남았다. 나는 그 손을 지나 문으로 갔다.◈조현석이 옷걸이에서 내 겉옷을 꺼냈다.“견적서는 받으셨습니까?”“네. 감사합니다.”나는 겉옷을 입고 가방끈을 어깨에 걸었다. 조현석은 내 방문증을 보고는 회수함 쪽을 가리켰다.“내려가실 때 저기에 넣으시면 됩니다.”“잠깐 이야기하고 내려갈게요
『오늘 일정: 12월 6일 금요일, 전략기획실 시집 견적서 전달』사진을 더 키우자 서명의 테두리가 깨졌다. 나는 화면을 원래 크기로 돌리고 납품 확인서를 옆에 놓았다. 창가에서 다시 봐도 펜이 들어간 자리는 달랐다.“그렇게 보면 눈 아파.”다은이 작업대에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휴대폰을 거치대에 세웠다.“원본을 봐야겠어. 복사하면서 없어진 부분도 있을 테니까.”“어제 그 서류?”“응. 아버지가 안 썼다는 거.”다은은 확인서가 구겨지지 않게 찻잔을 멀리 옮겼다.“혼자 가서 따지지는 말고.”“오늘은 물어보러 가.”나는 시집 견적서를 출력했다. 표지 보강과 책등 수선, 본문 세척을 나눠 적은 종이였다. 아래쪽에 작업 전 확인이 필요하다는 문장을 넣고 서명했다.다은이 출력물을 보다가 내 가방을 봤다.“그런데 견적서는 보내도 되잖아.”파일 집게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사진을 직접 보여 주려고.”“사진도 보낼 수는 있고.”나는 집게를 닫았다. 다은은 더 묻지 않고 파일 모서리를 맞춰 줬다.휴대폰에는 아침에 받은 이헌의 답장이 있었다.『점심 무렵에 오면 됩니다. 조 비서에게 말해 둘게요.』그 아래에 내가 보낸 답이 붙어 있었다.『시집 견적서 가지고 갈게요.』나는 화면을 끄고 납품 확인서를 별도 파일에 넣었다. 견적서와 섞이지 않게 가방 안쪽에 세워 넣은 뒤 앞치마를 벗었다.◈전략기획실 앞에서 방문증을 다시 확인했다. 이름 아래에 방문 목적이 적혀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