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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해윤제지 사무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6:33:05

『오늘 일정: 월요일 오전, 해윤제지 장부 정리』

문이 닫히자 이헌이 천에서 손을 뗐다.

“제가 열어 둘게요.”

나는 대답 대신 장부 밑으로 천을 밀어 넣었다. 이헌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닫았어.”

“반출할 장부 확인 중입니다.”

이헌은 문을 연 채 돌아왔다. 나는 장부를 감싸고 가방 손잡이를 세웠다. 복도에 선 석진이 비켜서기를 기다렸다가 서재를 나왔다.

◈

월요일 아침, 공장 사무실 문은 열려 있었다.

문 앞에서 앞치마를 꺼내려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책을 고치러 온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책상 뒤에서 손을 들었다.

“밥은 먹었고?”

“먹었어요. 어느 것부터 하면 돼요?”

책상 위에 종이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상자 뚜껑을 접어 밑에 끼웠다.

“날짜대로만 나눠 줘. 거래처에 물어볼 게 있는데 영수증을 못 찾겠어.”

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작업할 때 빼 둔 반지가 실에 꿰인 채 옷 안쪽에 닿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상자부터 당겼다.

사무실 창으로 공장 지붕이 보였다. 예전에는 창을 닫아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복사기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더 컸다.

“오늘은 기계 안 돌려요?”

“오후에 돌릴 거야.”

아버지는 책상 구석에 놓인 식판을 들었다. 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식사 마저 하세요.”

“다 먹었어. 내려놓고 올 테니까 천천히 봐.”

아버지가 나간 뒤 상자를 비웠다. 영수증과 거래명세서가 섞여 있었다. 집게에 눌린 종이는 모서리가 접혔고, 감열지는 글자가 흐려져 있었다.

나는 빈 종이에 달을 적어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날짜를 읽을 수 없는 영수증은 따로 뺐다.

상자 바닥에서 공장 식당 식권이 나왔다. 뒷면에 아버지 글씨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식권까지 버리려다 빈 봉투에 넣었다.

“그거 버려도 돼.”

돌아온 아버지가 봉투를 가리켰다.

“번호 적혀 있어요.”

“옛날 번호야.”

“확인하고 버리세요. 다른 건 제가 나눌게요.”

아버지는 봉투를 받아 책상 서랍에 넣었다. 나는 눌어붙은 영수증을 억지로 떼지 않고 받침 종이째 옮겼다.

◈

점심 전까지 정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책상 아래에도 서류가 있었다.

나는 의자를 뒤로 밀고 묶음을 꺼냈다. 먼지가 묻어 있어 겉을 닦은 뒤 책상에 올렸다. 표지에는 은행 이름 대신 해윤제지 회사명이 적혀 있었다.

“이것도 날짜대로 하면 돼요?”

아버지는 전화를 받느라 고개만 돌렸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끊어진 고무줄을 치웠다.

맨 위는 납품대금 입금표였다. 그 아래로 통장 사본과 대출 서류가 나왔다. 집게 자국이 깊어 종이가 들려 있었다.

펴진 첫 장 아래쪽에 도장이 찍혀 있었다.

『서진캐피털』

나는 종이를 넘기려던 손을 멈췄다.

주원의 집안 회사 이름이 아버지 회사 대출 서류에 찍혀 있었다. 서류 위에는 아버지 이름과 해윤제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거기는 다음 주에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전화를 끊었다. 의자가 바닥에 끌렸다.

“나경아, 그건 놔둬.”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출받은 데가 서진캐피털이에요?”

아버지가 책상 앞으로 왔다. 펼쳐 둔 서류를 받치려 손을 넣기도 전에 아버지가 묶음을 당겼다. 맨 아래 종이 귀퉁이가 집게에 걸렸다.

“잠깐만요. 찢어져요.”

나는 집게를 눌러 벌렸다. 아버지는 풀린 서류를 모아 가슴 쪽으로 들었다.

“그건 따로 볼 거야.”

“날짜대로 넣으라는 줄 알았어요.”

“내가 말 안 했구나.”

아버지는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류를 넣고 닫는데 종이 한 장이 틈에 끼었다. 내가 손을 뻗자 아버지가 먼저 서랍을 다시 열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넣었다.

“주원 씨네 회사잖아요.”

“계열사지.”

“처음부터 거기서 빌린 거예요?”

아버지는 서랍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거래한 지 좀 됐어.”

“약혼 전부터요?”

“응.”

나는 책상 위에 남은 고무줄을 집었다. 늘어난 부분이 손가락 사이에서 끊어졌다.

“저한테 말씀 안 하셨네요.”

“네가 신경 쓸까 봐.”

“모르고 있는다고 안 쓰이는 건 아니에요.”

아버지가 나를 봤다. 나는 끊어진 고무줄을 쓰레기통에 넣고 의자를 당겼다.

“이건 아버지가 정리하세요. 제가 섞으면 안 되는 거니까요.”

“그래.”

“대신 납품한 거랑 돈 들어온 건 같이 봐요. 그건 해도 되죠?”

아버지는 잠시 서 있다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첫 번째 입금표를 가운데 놓았다. 아버지가 돋보기를 찾아 썼다.

◈

문밖에서 신발을 터는 소리가 났다.

염 반장이 한 손에 종이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작업복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나경이 왔네.”

“안녕하세요. 점심 드셨어요?”

“아직. 네 아버지 끌고 가려고.”

아버지가 책상 위 시계를 봤다.

“먼저 먹어. 이것만 보고.”

“식당 끝나. 밥 따로 해 달라고 할 거야?”

염 반장이 내 옆에 있던 빈 의자를 빼냈다. 앉으려던 게 아니라 통로에 걸린 의자 다리를 밀어 넣으려던 참이었다.

손잡이를 쥔 오른손에서 약지가 짧게 끝났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손이었다.

염 반장이 봉투를 책상에 놓았다.

“이건 좀 봐 줘야겠어.”

아버지는 봉투를 열지 않고 글씨부터 봤다.

“부품?”

“응. 오늘도 전화 왔어. 벌써 3달째야.”

나는 입금표에서 손을 뗐다.

“어느 기계 부품인데요?”

“종이 눌러 주는 쪽. 갈 때 됐어.”

아버지가 봉투를 안쪽으로 당겼다.

“오후에 내가 통화할게.”

“통화만 하지 말고 날짜를 줘. 저쪽도 물건 떼 오는 데다 돈 줘야 한대.”

염 반장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아버지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봉투에서 견적서를 꺼내더니 계산기 옆에 놓았다.

“이번에 들어오는 대금 확인하고 연락할게.”

나는 정리해 둔 종이에서 같은 거래처 이름을 찾았다. 납품일과 결제일을 짚어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

“여기는 결제일이 지났어요.”

“담당자가 바뀌었어. 확인이 늦는대.”

“제가 전화해도 돼요? 서류 빠진 게 있는지 물어볼게요.”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가 견적서를 봤다.

“그럼 물어만 봐. 재촉은 하지 말고.”

나는 전화번호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염 반장이 그제야 봉투에서 손을 뗐다.

“밥부터 먹어. 전화는 오후에 하고.”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 나는 종이를 덮어 두고 두 사람을 따라나섰다.

◈

식당에서 돌아온 뒤 거래처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는 검수 확인서를 못 받았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가 모아 둔 철에서 확인서를 찾아 보낸 날짜를 읽었다. 수신 부서가 바뀌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소를 다시 받아 서류를 보냈다. 입금일을 확답받지는 못했지만, 이번 주 지급 목록에 넣겠다는 말은 들었다.

나는 통화 내용을 종이에 적어 아버지 앞에 놓았다.

“내일 오전에 한 번 더 확인할게요.”

“작업실 일도 있을 텐데.”

“전화 한 통은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내가 쓴 주소에 밑줄을 그었다. 그러고는 염 반장이 놓고 간 견적서를 펼쳤다.

나는 남은 영수증을 모았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아래 서랍이 보였다.

서진캐피털이라는 이름을 알고 나니, 약혼을 정하던 날 아버지가 내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던 게 걸렸다.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견적서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정리한 묶음마다 날짜를 붙였다.

창문 밖에서 염 반장이 손을 흔들었다. 종이로 감싼 물건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밖에 다녀오겠다고 손짓하고 문을 나섰다.

염 반장은 기계동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 옆에서 나를 기다렸다.

“이거 가져가.”

포장지를 펼치자 종이 한 장이 나왔다. 가장자리가 고르지 않았고, 가운데에 작은 섬유 덩어리가 남아 있었다.

나는 양손으로 밑을 받쳤다.

“이걸 어디서 찾으셨어요?”

“내 사물함. 청소하다 나왔어.”

“계속 갖고 계셨던 거예요?”

“내가 여기 와서 처음 뜬 거니까.”

염 반장이 종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연필로 날짜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31년 됐어. 그때는 저 구석에서 손으로도 떴거든. 기계에 넣기 전에 해 본 거야.”

“버리지 말고 주세요. 제가 받침 만들어 드릴게요.”

“주려고 가져왔어. 네가 갖고 있어.”

나는 종이 끝을 엄지로 쓸어 봤다. 끝에 남은 섬유가 손끝에 걸렸다. 물이 닿은 얼룩은 없었다. 접힌 자국도 없었다.

“보관 잘하셨네요.”

“축축해질까 봐 가끔 꺼냈지.”

염 반장은 작업복에 손을 문질렀다. 내가 빈 곳을 가리키자 그제야 종이를 살짝 짚었다.

“여기 덩어리 보이지? 그때도 네 아버지가 너무 서두른다고 했어.”

“반장님이요?”

“빨리 건지면 되는 줄 알았지. 저거 한 장 뜨고 혼났어.”

기계동 안에서 누군가 염 반장을 불렀다. 염 반장은 뒤를 보고 손을 들었다.

“가져갈 때 구기지 마라.”

“저한테 하실 말씀이에요?”

“아니, 네 가방이 작아서.”

나는 웃다가 종이를 다시 포장지 위에 놓았다.

“가방에 안 넣을게요.”

염 반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계동으로 들어갔다.

나는 건물 안으로 돌아오기 전에 종이 아래 적힌 이름을 한 번 더 봤다. 힘을 줘 쓴 연필 자국이 뒷면까지 눌려 있었다.

◈

사무실 옆 탕비실에서 종이를 펼칠 자리를 닦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강이헌이라는 이름이 화면에 떴다.

나는 수건을 내려놓고 문 쪽을 봤다.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통화 중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전화를 받았다.

“네, 실장님.”

“통화 괜찮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장부 반출 목록에 회장님 확인을 받았습니다. 작업실로 보내도 될까요?”

“오후에는 다은이가 있어요. 받으면 눕혀 놓으라고 할게요.”

“직접 전달하겠습니다.”

직접이라는 말에 나는 닦아 둔 탁자를 봤다. 종이 위로 휴대폰을 들고 있지 않으려 몸을 돌렸다.

“실장님이 가세요?”

“제 비서 조현석 씨가 갑니다. 포장 풀지 않고 두라고 하겠습니다.”

“아, 네.”

내 대답 뒤로 잠깐 말이 끊겼다. 나는 휴대폰을 반대 손으로 옮겼다.

“따로 확인할 게 있습니까?”

“아니요.”

서진캐피털에 관해 물으면 대답해 줄까. 나는 탕비실 문을 조금 밀었다가 손을 뗐다. 아버지가 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렸다.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장부 받으면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화면을 바로 끄지 못했다. 사무실에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문을 열었다.

“왜요?”

“서류 정리한 거 어디에 두면 되니?”

“책꽂이 아래 칸이요. 날짜 보이게 세워 두세요.”

아버지가 묶음을 들고 책꽂이로 갔다. 나는 탕비실에 펼친 종이 위에 깨끗한 종이를 덮었다.

◈

공장을 나서기 전, 아버지가 차까지 따라왔다.

나는 염 반장이 준 종이를 뒷좌석에 눕혔다. 아버지가 차 문 위에 손을 얹고 들여다봤다.

“그걸 아직 갖고 있었네.”

“반장님이 주셨어요.”

“처음 만든 날 저걸 들고 집에 가더라. 자꾸 접지 말라고 해서 내가 판을 잘라 줬어.”

포장지 안에 들어 있던 판 끝에 톱 자국이 있었다. 나는 종이가 움직이지 않게 가방을 옆에 놓았다.

아버지가 문에서 손을 뗐다.

“오늘 고생했다.”

“아버지.”

나는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돌아봤다.

“아까 그 서류, 제가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아버지는 사무실 쪽을 봤다.

“못 볼 건 없어.”

“그럼 다음에 같이 봐요. 제가 모르면 설명해 주시고요.”

차 지붕에 아버지 손이 다시 올라왔다. 손톱 옆에 종이 가루가 끼어 있었다.

“오늘은 좀 피곤하다.”

“오늘 말고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내 코트 깃이 문에 끼지 않게 안으로 넣어 줬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차에 앉아 거래처에 다시 전화할 시간을 일정에 적었다. 그 아래에 서진캐피털이라고 쓰고 저장했다.

막 안전띠를 당겼을 때 휴대폰에 문자 알림이 떴다. 강이헌이었다.

『윤나경 씨, 내일 저녁 수장고 B열. 보여 줄 게 있습니다.』

(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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