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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수장고 B열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16:33:17

『오늘 일정: 화요일 저녁, 수장고 B열 복원 작업』

문자 아래에 답장을 적었다.

『작업 끝나고 보겠습니다.』

전송한 뒤에야 안전띠를 채웠다. 아버지는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차창을 조금 내렸다.

“아버지, 대출 처음 받은 게 언제예요?”

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3년 전. 왜?”

“정리하다 보니까 궁금해서요.”

“급한 납품이 있었어. 원료 살 돈이 모자랐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손을 들고 돌아설 때까지 창문을 닫지 않았다.

◈

화요일 저녁, 재단 도서관 안내대에서 방문증을 받았다.

가방에는 붓과 받침 종이, 풀어 놓은 실을 넣었다. 회장 장부는 작업실에 그대로 두었다. 오늘은 수장고 책부터 상태를 기록할 참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문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셔츠 소매는 두 번 접혀 있었다. 이헌은 내 가방을 보고 문부터 열었다.

“무거운 건 없습니까?”

“들고 다니는 것들이에요.”

“작업대는 안쪽에 준비했습니다.”

지난번에 없던 제습기가 벽에 붙어 있었다. 습도계 숫자는 내려가 있었다. 나는 외투를 벗기 전에 송풍구부터 확인했다.

“바람이 책으로 바로 안 가서 괜찮네요.”

“시설팀에서 위치를 바꿨습니다.”

이헌이 작업대 끝을 가리켰다. 의뢰 목록과 상태 기록지가 놓여 있었다. 책은 한꺼번에 쌓지 않고 받침 위에 나눠 두었다.

나는 코트를 걸고 가방을 열었다. 약혼반지를 빼서 목에 걸린 실에 꿰었다. 매듭을 묶는 동안 이헌은 목록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어디까지 합니까?”

“뜯기 전에 확인부터요. 먼저 고칠 책도 골라야 하고요.”

“제가 할 일이 있으면 말해요.”

“기록 부탁드릴게요. 손으로 누르거나 책을 억지로 펴지는 마시고요.”

이헌이 펜을 들었다.

“그건 허락받고 하겠습니다.”

나는 빈 기록지를 앞으로 당겼다.

◈

B열에서 꺼낸 첫 책은 실이 끊어져 있었다.

표지를 받치자 책등 안쪽이 보였다. 누군가 덧바른 풀이 굳어 종이를 당기고 있었다. 나는 붓으로 떨어진 가루를 모았다.

“이건 풀부터 걷어야 해요.”

“새로 바르면 안 됩니까?”

“안쪽이 당겨져서 더 찢어져요. 붙이기 전에 남은 걸 빼야 해요.”

이헌이 기록지에 적었다. 글씨가 작고 반듯했다. 책 이름 옆에 내가 말한 손상 부위를 빠뜨리지 않고 옮겼다.

나는 책받침을 고쳐 놓았다. 표지 밑에 끼운 종이가 밀리지 않는지 확인하고, 이미 풀려 나온 종이 묶음부터 따로 눕혔다.

“이건 묶음 순서가 바뀌었네요.”

“쪽수는 이어집니다.”

“여기 실구멍이 안 맞아요. 나중에 끼운 쪽이에요.”

이헌이 몸을 숙였다. 같은 곳을 보려다 팔이 가까워졌다. 나는 핀셋을 내려놓고 받침째 책을 가운데로 밀었다.

“이쪽에서 보시면 돼요.”

이헌은 곧바로 허리를 폈다.

작업대 하나를 두고 마주 서자 셔츠 안주머니가 보였다. 낡은 시집의 모서리가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책에 걸어 둔 추를 옮겼다.

“그 시집도 계속 갖고 다니시네요.”

이헌이 안주머니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두고 오면 다시 찾게 돼서요.”

“등이 더 벌어지면 안쪽까지 상해요.”

“맡겨도 됩니까?”

나는 기록지의 빈칸을 봤다. 재단 책 목록에는 없는 책이었다.

“상태부터 보고요. 다른 책하고 섞지 말고 따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헌은 시집을 꺼내지 않았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몇 장을 더 살핀 뒤 나는 표지가 떨어진 책을 골랐다. 종이 자체는 버틸 만했다. 떨어져 나온 표지 안쪽의 덧댐 종이를 조금 고정해 두면 다음 작업을 하기 편했다.

“이것부터 시작할게요.”

풀 통을 열자 이헌이 기록지를 옆으로 치웠다. 나는 붓 끝에 풀을 묻혀 받침에 덜었다.

“한 번에 붙일 줄 알았습니다.”

“오늘 고정해 두고 말린 뒤에 봐야 해요.”

“기다리는 일도 많겠군요.”

“안 기다리면 다시 해야 하거든요.”

이헌이 펜 뚜껑을 닫았다. 나는 들뜬 종이를 얇게 펴고 마른 붓으로 가장자리를 눌렀다. 이헌은 내가 가리킨 위치에 무게추를 놓았다.

◈

첫 작업을 덮어 둔 뒤 손을 씻으러 나갔다.

문 옆 선반에 종이컵과 보온 주전자가 있었다. 커피 봉지를 꺼내다가 수장고 쪽을 돌아봤다.

“커피 드세요?”

“네. 제가 하겠습니다.”

“손 씻고 오세요. 풀 묻었어요.”

이헌은 손등을 확인하고도 내가 내민 컵부터 받았다. 컵 옆면에 엄지가 붙었다가 떨어졌다. 손가락 자리에 하얀 자국이 남았다.

나는 컵을 보다가 웃었다.

이헌이 손을 멈췄다.

“묻었습니까?”

“손가락 줄까지 찍혔어요.”

이헌이 컵을 돌려 봤다. 엄지로 문지르려는 손을 보고 내가 휴지를 먼저 내밀었다.

“그 손으로 닦으면 더 묻어요.”

“그렇겠네요.”

이헌은 컵을 내려놓았다. 손을 씻고 돌아와서도 컵을 바로 들지 않고 내 쪽을 봤다.

나는 손바닥을 펴 보이라는 뜻으로 손을 들었다. 이헌이 양손을 보여 줬다. 손톱 옆까지 물기가 남아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이헌이 컵을 들었다. 풀 자국은 그대로였다.

“닦아 드릴까요?”

“마른 다음에 떼면 되죠?”

“맞아요.”

내가 웃자 이헌의 입가도 조금 올라갔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컵 가장자리를 내려다봤다.

수장고 안에서는 제습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려 있어도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저녁에 사람이 없네요.”

“직원들은 올라갔습니다. 경비실에 작업 시간은 알려 뒀습니다.”

나는 방문증을 만졌다. 이름 아래에 재단 도서관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다음에는 담당 직원분도 같이 계시면 좋겠어요. 반출할 책도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헌이 컵을 선반에 놓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아 오히려 컵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빈 컵을 포갰다.

◈

작업대에 돌아와 마른 종이로 덮개를 만들었다.

오늘 손댄 부분이 눌리지 않게 받침을 세우고, 다음에 확인할 곳에 표시를 남겼다. 이헌은 기록지를 순서대로 모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내일은 작업실에서 상태표를 보내 드리고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붓을 감싸던 천을 내려놓았다.

이헌이 옆 의자에 둔 서류 가방을 열었다. 그동안 작업대에는 올리지 않았던 가방이었다. 안에서 큰 봉투를 꺼내더니 빈 자리부터 확인했다.

“책은 먼저 치울게요.”

내 말에 이헌이 기다렸다. 나는 받침째 책을 옮기고 손에 남은 풀을 닦았다.

봉투에서 나온 건 접힌 도면 한 장이었다.

이헌은 네 귀퉁이를 펴고 물러섰다. 나는 도면 끝에 적힌 회사명을 읽었다.

『서진건설』

그 아래에는 내부 검토용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선을 따라 내려가던 손가락이 하천 이름에서 멈췄다.

갈매천이었다.

나는 도면을 돌렸다. 공장 진입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넓은 도로가 그어져 있었다. 기계동 자리에는 아파트 동 번호가 붙어 있었다.

“해윤이에요?”

“네.”

나는 도면의 끝을 짚었다. 염 반장이 서서 종이를 건네준 건물도 없었다. 식당과 자재 창고 자리까지 선 하나 안에 들어가 있었다.

표 아래에 면적이 적혀 있었다.

3만 평.

아버지가 공장 이야기마다 붙이던 숫자였다.

“이걸 어디서 보셨어요?”

“전략기획실에 올라온 검토 자료입니다.”

“지금 짓겠다는 거예요?”

“이 도면만으로 정해진 건 없습니다. 다만 검토는 오래전부터 했습니다.”

나는 우측 아래를 봤다. 작성일 옆에 수정일이 있었다. 수정일 아래쪽에는 접힌 자국이 지나갔다.

“잠깐만요.”

가방에서 흰 종이를 꺼내 도면 아래에 받쳤다. 자국을 펴려고 손톱을 쓰는 대신 가장자리부터 눌렀다. 가려졌던 날짜가 드러났다.

아버지가 말한 대출 시기보다 앞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아버지에게 받은 서류 사진을 찾았다. 오전에 거래처 일로 통화할 때 아버지에게 대출 약정서 첫 장을 찍어 달라고 해 두었다. 사진에는 처음 빌린 날짜와 아버지 이름이 찍혀 있었다.

화면을 도면 옆에 놓았다.

둘을 번갈아 확인했다.

“대출받기 전에 그렸네요.”

“맞습니다.”

“그때부터 공장을 없앨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이헌은 도면 안의 경계선을 짚었다. 손가락은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서 멈췄다.

“처음부터 땅이었어요.”

나는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약정서의 채권자 이름이 보였다.

서진캐피털.

“돈을 빌려준 회사도 서진이고, 여길 검토한 회사도 서진이네요.”

“네.”

“아버지는 알고 계실까요?”

“제가 확인한 바로는 이 도면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었다. 검은 화면에 천장 등이 비쳤다.

“그런데 왜 약혼을 시켰을까요. 공장 땅이 필요하면 땅 이야기를 하면 되잖아요.”

이헌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 부분은 확인 중입니다.”

“알고도 말 안 하시는 건 아니고요?”

“아는 것과 짐작하는 걸 나눠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헌은 도면에서 손을 뗐다.

“이 자료만으로 아버님께서 어떤 설명을 들으셨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처음 받은 대출, 부지 도면, 아버지가 받은 설명. 따로 적고 밑줄을 그었다.

“사진 찍어도 돼요?”

“네. 다만 다른 곳에 보내실 때는 먼저 법률 검토를 받는 게 좋겠습니다. 내부 자료라서요.”

“아버지한테는요?”

“윤나경 씨가 판단하세요. 제가 막을 일은 아닙니다.”

나는 도면 전체를 찍고 작성일을 따로 찍었다. 이헌은 손이 화면에 들어가지 않도록 뒤로 물러났다.

사진을 확인한 뒤 아버지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어제 아버지는 피곤하다고 했다. 대출 서류를 가져갈 때는 집게에 걸린 종이도 보지 못했다. 오늘 전화를 하면 도면보다 내가 이헌과 함께 있다는 말부터 해야 했다.

나는 통화 화면을 닫았다.

“직접 가서 물어볼게요. 전화로는 서류도 못 보고요.”

“같이 가 드릴까요?”

“아니요. 먼저 제가요.”

“알겠습니다.”

나는 수첩을 덮었다. 내일 공장에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시간을 물어야 했다.

◈

도면을 접으려다 안쪽에 남은 표를 한 번 더 봤다.

“이 도로, 공장 진입로하고 다르네요.”

“부지 밖 도로와 연결하는 안입니다.”

“옆에 직원들 다니는 길도 없어졌어요.”

공장 정문까지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걸어 다니는 길이었다. 도면에서는 아파트 입구 뒤로 잘려 있었다.

나는 사진을 확대했다. 아버지에게 물을 자리를 손끝으로 짚고 나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이헌이 도면을 접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날 약혼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이것 때문이에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다른 이유도 확인 중이고요?”

“네.”

나는 작업대 끝을 잡았다. 손바닥 아래로 천의 접힌 부분이 눌렸다.

“제가 약혼을 안 했으면요?”

이헌이 내 손 쪽을 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이 자료는 그래도 보여 드렸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가방을 닫았다. 지퍼에 천 끝이 걸려 다시 열어야 했다. 이헌이 도와주려 손을 들었다가 내 손이 움직이자 기다렸다.

천을 빼내고 나서야 지퍼가 닫혔다.

“저 때문에 재단 일을 만드신 건 아니죠?”

“의뢰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건 알아요. 책을 봤으니까.”

말이 끊겼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세웠다.

“다음부터 자료가 있으면 먼저 말씀해 주세요. 제가 준비하고 올 수 있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헌이 도면을 봉투에 넣었다. 나는 작업대에 남은 핀셋을 챙기고 책 위의 덮개를 확인했다.

그때 천장 등이 꺼졌다.

제습기 소리도 멎었다. 나는 손을 멈추고 문 쪽을 봤다. 들어올 때 확인했던 비상등도 바로 켜지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세요. 발 옆에 받침이 있습니다.”

이헌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놓았다. 휴대폰을 둔 자리를 더듬으려다 도면을 펼쳤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실장님?”

“여기 있습니다.”

통로 쪽에서 희미한 불이 들어왔다. 늦게 켜진 비상등 아래, 이헌의 구두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우리 사이는 30cm였다.

(1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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