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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회장 서재

작가: Jino
last update 게시일: 2026-10-18 16:32:58

『오늘 일정: 토요일 오전 10시, 본가 장부 수선』

“주원 씨한테 들었어요. 실장님도 오시는 줄은 몰랐네요.”

나는 열쇠를 쥔 손을 가방 옆으로 내렸다. 이헌은 운전석에 앉은 채 고개를 조금 돌렸다.

“제가 장부를 옮겨야 해서요.”

“많아요?”

“직접 보고 고르시면 됩니다. 한꺼번에 안 맡겨도 돼요.”

집 안에서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났다. 나는 현관 쪽을 봤다가 다시 차 안을 봤다.

“다음에는 문자 주세요. 일정 알려 주시는 거면요.”

이헌은 잠깐 나를 보았다.

“그럴게요.”

창문이 올라갔다. 나는 차가 골목을 나간 뒤에 열쇠를 꽂았다.

토요일 아침, 주원에게서는 호텔에 먼저 나왔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본가로 출발한다고 답했다.

대문에 도착한 건 약속 시각보다 조금 전이었다. 현관에서 코트를 벗어 맡기고 가방을 다시 들었다. 안쪽 복도 끝에서 이헌이 나왔다.

“이쪽입니다.”

셔츠 소매가 두 번 접혀 있었다. 나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고 따라갔다.

◈

서재 문은 열려 있었다. 창가 책상과 마주 보는 자리에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장부가 쌓여 있고, 그 옆으로 자리를 비워 놓았다.

이헌이 의자를 빼다가 손을 놓았다. 나는 직접 의자를 당겨 앉았다.

“회장님은요?”

“잠깐 쉬고 계세요. 먼저 보라고 하셨습니다.”

가방에서 천을 꺼내 탁자에 깔았다. 붓과 접지칼, 얇은 종이를 차례로 놓는 동안 이헌은 맞은편에 서 있었다.

“어느 것부터 볼까요?”

“밑에 있는 게 가장 오래됐다고 하셨습니다.”

이헌이 위에 놓인 장부를 옮겼다. 맨 아래 장부는 표지 한쪽이 떨어져 있었다. 등을 받치고 열자 실이 끊어진 자리가 보였다. 종이 안쪽에는 손때가 남아 있었다.

나는 책받침을 벌려 장부 아래에 넣었다.

“끝까지 눌러 펴시면 안 돼요. 여기 실이 끊어져서 종이가 따로 움직여요.”

“이 정도면 됩니까?”

이헌이 양손 사이를 벌렸다.

“조금만 덜요. 네, 거기요.”

장부를 내려놓은 뒤에도 손이 받침 곁에 남았다. 손목에 시계가 없어서 소매 끝이 바로 보였다.

나는 붓을 집었다.

“먼지부터 걷고 상태를 적을게요. 오늘은 떨어진 부분만 붙잡아 놓는 게 좋겠어요.”

“작업실로 가져가야 합니까?”

“실을 새로 꿰매려면요. 회장님께 먼저 여쭤보고요.”

“필요한 대로 말씀하세요.”

나는 장부 첫 장을 넘겼다. 구석에 연필로 적힌 쪽수가 있었다. 종이가 접힌 곳을 펼치자 아래 숫자가 드러났다.

이헌이 내 옆으로 왔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쪽수 좀 불러 주세요. 빠진 장이 있는지 봐야 해요.”

의자가 내 오른쪽에서 멈췄다. 탁자 아래로 구두 앞부분이 보였다. 나는 장부를 가운데로 조금 옮겼다.

“숫자가 없으면 없다고 말씀해 주세요. 짐작해서 읽지 마시고요.”

“네.”

이헌은 몸을 숙이지 않고 장부가 보일 만큼만 의자를 당겼다.

“1쪽.”

나는 상태표에 숫자를 적었다.

“2쪽.”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났다. 다음 장 가장자리에 찢어진 곳이 있어 손을 멈췄다. 이헌도 숫자를 부르지 않았다.

“여기는 먼저 받쳐야겠어요.”

나는 얇은 종이를 밑에 넣고 떨어지려는 조각을 맞췄다. 이헌은 내가 고개를 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넘기셔도 됩니다.”

나는 상태표의 다음 칸에 표시했다. 연필 끝이 종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손목을 탁자에 붙였다.

◈

장부 사이에서 접힌 종이가 나왔다. 예전에 끼워 둔 계산서였다. 접힌 부분이 검게 닳아 있었다.

“이것도 같이 보관해야 해요. 언제 넣은 건지 모르니까요.”

나는 계산서를 받침 종이에 올려 이헌에게 건넸다. 이헌이 아래를 받치려다 내 손끝에 닿았다.

1초였다.

내가 손을 빼자 받침 한쪽이 기울었다. 이헌은 계산서가 움직이기 전에 양손으로 바로잡았다.

“어디에 둘까요?”

나는 비워 둔 쟁반을 가리켰다.

“저기요. 접힌 건 펴지 마세요.”

이헌이 종이를 놓는 동안 나는 연필을 고쳐 쥐었다.

이헌이 다시 앉았다. 이번에는 의자를 더 당기지 않았다.

“계속할까요?”

“네.”

쪽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낮았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장부 위에 둔 손을 확인했다. 이헌의 손과는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복도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회장이 문틀을 짚고 서 있었다.

“벌써 뜯고 있나.”

“아직 상태만 보고 있습니다.”

이헌이 일어났다. 나도 의자를 밀고 일어서려는데 회장이 손을 들었다.

“앉아. 끊기면 어디까지 했는지 잊어.”

회장은 탁자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헌이 장부 더미를 옆으로 옮겨 자리를 넓혔다.

“어떻나.”

“종이는 버틸 만해요. 실이 끊어진 데가 있어서 그대로 넘기시면 장이 빠질 수 있어요.”

“오래 봤지.”

“자주 보시는 장부예요?”

“가끔. 숫자보다 적어 놓은 말을 봐.”

나는 회장이 펼친 곳을 보았다. 칸 밖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기계 수리, 지붕 보수. 날짜 아래에 누군가 밑줄을 그어 놓았다.

“글씨가 지워진 곳도 다시 보이게 할 수 있나?”

“남은 흔적을 확인해 볼 수는 있어요. 없는 글씨를 채워 드리지는 못해요.”

회장이 내 손에 들린 연필을 봤다.

“안 되는 것도 있군.”

“잘못 채우면 원래 적힌 말이 달라지니까요.”

회장은 더 묻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장을 넘겼다. 이헌이 쪽수를 읽었다.

회장의 손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장부 모서리로 향하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이쪽은 만져도 되나?”

“잠시만요.”

나는 받침 위치를 바꾸고 찢어진 자리를 가렸다.

“여기를 잡으시면 돼요.”

회장은 내가 짚어 준 곳을 눌렀다. 장부가 움직이지 않자 나는 들뜬 조각 아래로 얇은 받침을 밀어 넣었다.

“손 떼셔도 됩니다.”

회장이 손을 거뒀다. 나는 조각을 잃어버리지 않게 종이 봉투에 넣고 쪽수를 적었다.

이헌이 빈 봉투를 하나 더 내 쪽에 놓았다.

◈

복원할 부분을 표시하는 동안 회장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복도에서 차를 가져왔을 때도 장부를 보고 있었다.

찻잔이 탁자 위로 올라오자 내가 먼저 손을 뻗었다.

“죄송하지만 차는 저쪽에 놓아 주시겠어요?”

회장의 눈이 내 손을 따라갔다.

“쏟을까 봐?”

“네. 종이가 물을 바로 먹어요.”

이헌이 일어나 잔을 창가 책상으로 옮겼다. 회장은 빈 찻잔 받침을 보다가 짧게 웃었다.

“어머니도 그랬어.”

나는 봉투에 쓰던 글씨를 멈췄다.

“저희 엄마요?”

“한연옥 씨 딸이라 했지.”

“네.”

“자네 어머니가 내 결혼 앨범을 고쳤지.”

이헌이 책상 앞에 선 채 돌아봤다. 나는 연필을 내려놓았다.

“저는 처음 듣는 얘기예요.”

“사진 붙인 장이 떨어졌어. 새 앨범으로 옮기라니까 안 된다고 하더군.”

“원래 있던 순서가 바뀔 수 있어서요.”

“자네도 그렇게 말하나?”

“엄마한테 배웠어요. 떨어진 것부터 옮기면 나중에는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모른다고요.”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도 차를 치우라고 했어. 내 책상인데 찻잔 놓을 데가 없더군.”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조금 웃었다. 엄마는 공방에서도 손님 잔을 먼저 옮겼다. 내가 물을 마시다가 작업대에 컵을 놓으면 컵 밑에 손을 받쳐 들고 기다렸다.

“엄마는 말씀보다 손이 먼저 가셨어요.”

“맞아. 앨범을 보다가 내 잔부터 가져갔지.”

“그 앨범, 아직 갖고 계세요?”

“있지.”

“나중에 봐도 될까요? 엄마가 어떤 식으로 고쳤는지 보고 싶어요.”

회장은 나를 잠깐 보았다.

“찾아 두라고 하지.”

“감사합니다.”

이헌은 아무 말 없이 내 앞의 장부 받침을 살폈다. 밀려 있던 받침 끝을 안쪽으로 조금 넣었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얹어 장부를 고정했다.

엄마가 만졌던 책이 이 집에 있었다. 나는 상태표 구석에 앨범이라고 쓰려다 멈췄다. 작업 기록에 적을 일은 아니었다.

“계속해. 오늘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

시계를 보니 점심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나는 가장자리의 작은 찢김부터 보강하기로 했다.

“이 부분만 붙여 둘게요. 말리는 동안에는 닫으시면 안 돼요.”

“얼마나 걸리나?”

“오늘 충분히 말리고 확인할게요. 나머지는 작업실에 가져가야 해요.”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닥종이를 꺼내 필요한 만큼만 잘랐다. 종이 결을 맞추고 풀을 얇게 발랐다.

이헌이 작업등을 켰다.

“눈부시면 옮기겠습니다.”

“조금만 왼쪽으로요.”

등이 움직였다. 찢어진 종이 끝이 잘 보였다.

나는 접지칼 끝으로 보강지를 눌렀다. 힘을 빼고 가장자리부터 붙였다. 회장은 안경을 고쳐 쓰고 들여다봤다.

“그 얇은 걸로 잡히나?”

“한꺼번에 두껍게 붙이면 이 부분만 잘 안 휘어요. 넘기다가 옆이 다시 찢어질 수 있어요.”

“튼튼하게만 하면 되는 게 아니군.”

나는 마른 종이를 덮고 그 위에 받침을 놓았다. 그다음 상태표를 확인하고 장부에 끼울 안내지를 썼다.

회장은 그사이 작은 책꽂이에서 종이철을 꺼냈다. 이헌이 받아 탁자 위에 놓았다.

“가져갈 건 적어 둬야지.”

안에는 반출 확인서가 있었다. 나는 장부 표지에 적힌 제목과 묶음 수를 옮겨 썼다. 작업실 주소 아래에 내 이름을 적고 회장 쪽으로 돌렸다.

회장은 윗옷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언제 돌려주나?”

“오늘 살펴본 걸 정리해서 먼저 말씀드릴게요. 급하게 필요하신 건 빼 놓으셔도 돼요.”

“이헌이하고 맞춰.”

회장은 장부 끝에 놓인 확인서를 당겼다. 펜촉이 종이에 닿았다. 이름을 적는 동안 손등이 조금 떨렸지만 획은 끊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획에서 펜이 멎었다. 회장은 끝에 점 하나를 찍었다.

나는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회장이 만년필 뚜껑을 닫고 나서야 종이를 들었다.

“여기는 접지 말고 두겠습니다.”

“번지나?”

“아직 조금 덜 말랐어요.”

회장이 종이를 가까이 봤다. 이름 끝의 점이 다른 획보다 진했다.

나는 확인서를 장부 옆에 펼쳐 놓았다. 이헌은 서류철을 닫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회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헌이 팔을 내밀었지만 회장은 탁자를 짚고 먼저 몸을 세웠다.

“식사하고 가.”

“오후에 손님 약속이 있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 보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회장이 문으로 향했다. 나는 일어나 인사했다. 이헌은 복도까지 따라 나갔다가 돌아왔다.

문이 닫히지 않고 남았다.

◈

나는 마르는 부분에 올린 받침이 기울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이헌이 맞은편에 앉으려다 내가 적은 상태표를 봤다.

“이건 복사해 두면 됩니까?”

“네. 원본은 제가 가져갈게요.”

이헌은 종이를 집지 않고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연필로 끝에 표시를 더하고 건넸다. 이번에는 탁자에 내려놓은 뒤 손을 뗐다.

이헌의 시선이 내 손에 잠깐 머물렀다.

나는 도구를 접시 옆으로 모았다.

“아까 쪽수 불러 주신 것, 도움이 됐어요.”

“다음에도 하겠습니다.”

“계속 옆에 계실 필요는 없어요. 실장님 일도 있으실 텐데.”

이헌은 상태표를 내려놓았다.

“불편하면 나가 있을게요.”

나는 접지칼을 천 위에 놓았다. 대답을 하면 목소리가 복도로 나갈 것 같아 문부터 봤다.

“일하실 때만 계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이헌은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가방에서 장부를 감쌀 천을 꺼냈다. 접힌 부분이 탁자 끝에 걸려 이헌이 한쪽을 잡아 줬다.

둘이 천을 편 사이에 장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있는 손등을 보지 않으려 천의 끝을 맞췄다.

복도에서 구두 굽 소리가 났다가 멎었다.

나는 천을 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서재 문틈은 15cm쯤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은테 안경이 보였다.

석진이 서 있었다.

시선이 탁자에서 이헌의 손으로 옮겨 갔다. 나는 천을 놓지 않았다. 석진이 나와 눈을 맞췄다.

이헌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석진은 웃으며 문을 닫았다.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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