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눈에 렌즈가 달렸어? 얼굴이 이렇게 작게 나왔는데도 그걸 또 봤어?”박지연이 말했다.“잘생긴 얼굴이 떡하니 보이잖아. 거기다가 너를 보는 그 눈빛이, 음, 빛이 나네.”“빛이 나기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고은서는 다시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주인혁은 그녀의 곁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이 절반만 나왔는데도 잘생긴 미모가 돋보였고 그녀에게로 향하는 시선까지 티가 났다. 맑고 순수한 그 시선에는 부드러운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두 번째 사진에 이렇게 푸짐한 해산물과 술은 사진 속 그 남자랑 같이 먹은 거야?”박지연이 물었다.“그 남자랑 아니고 그 사람들이랑, 다섯, 여섯 명 정도 돼.”고은서가 정정했다.“그리고 그 남자는 너도 봤던 사람이야. 저번에 우리 쇼핑하러 갔을 때 슈트를 사는 걸 내가 도와줬던 사람 말이야. 주인혁이라고 해.”“그 사람이라고? 두 사람 정말 인연이네.”박지연이 또 물었다.“그럼 곽승재가 비꼬아서 말했다는 사람이 이 사람이야?”“맞아.”“이혼하는 것도 두 사람이 싸우고 난 다음 곽승재가 동의한 거고?”“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고은서가 되물었다. “내 생각에는 이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어.”박지연이 제 생각을 말했다.“곽승재도 네가 올린 인스타의 사진을 본 거야.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술집으로 간 거지. 그리고 네가 주인혁이랑 같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시원치 않아서 비꼬는 말을 했고 너를 데리고 온 거야. 데리고 와서 네가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너는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또 이혼에 대해서 말하니까 화가 나서 충동적으로 동의한 거지.”박지연의 말을 듣고 고은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다.“일단 첫 번째, 곽승재는 인스타를 보지 않아. 전에 내가 업로드를 많이 하고 가끔 태그도 했지만 한 번도 답장을 한 적이 없어. 어떨 때는 귀찮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들을 볼 여유가 없대. 그리고 두 번째, 곽승재가 술집에 오게 된 것은 술자리가 있었던 거야. 곽승재가 차에서 내릴 때 곁
“네, 도련님은 일찍 회사로 가셨습니다.”고은서는 바로 곽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야?”고은서는 이미숙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이혼합의서에 사인했어? 오전에 접수하러 갈 수 있어?”곽승재는 여전히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바빠, 시간 없어.”“접수하러 갈 시간이 없다고 해도 사인할 시간은 있을 거 아니야?”고은서가 다급하게 말했다.“지금 어디 있어? 내가 찾으러 갈게.”곽승재는 순순히 대답했다.“회사 사무실.”말을 마친 그는 전화를 끊었다. 고은서는 식탁으로 돌아갔고 이미숙이 거기 없는 거로 봐서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저번에 할머니께서 이혼 소식을 알게 된 게 이미숙이 얘기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아무도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고은서는 아침을 먹은 후 차를 몰고 GS 그룹으로 갔다. 그녀는 아무런 방해 없이 대표 사무실까지 갔다. 문을 두드리고 곽승재의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 고은서는 사무실 안에 익숙한 사람이 두 분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녀의 삼촌인 고국성과 외숙모인 단은숙이었다. 고은서의 눈꺼풀이 떨려왔다.설마 곽승재가 그들을 불러서 그녀가 이혼하려는 걸 막으려는 건가? 아니면 외숙모가 지난밤에 있었던 결혼에 대한 안좋은 소식들을 듣고 일부러 삼촌과 함께 와서 상황을 살피려는 걸까? 고은서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듣고 삼촌과 외숙모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은서야, 이 시간에 승재를 찾으러 온 거니?”표정과 말투로 봐서 곽승재가 이혼에 대해 그들에게 얘기를 안 한듯했다. 고은서는 살짝 안도했다.“볼일이 좀 있어서 왔어요.”고은서가 물었다.“삼촌, 외숙모, 왜 여기 있어요?”“우리 조카사위한테 감사 인사를 하려고 왔지.”외숙모가 말했다.“저번에 승재 덕에 FY 그룹의 대표를 만날 수 있었어. 그래서 오늘 승재한테 선물을 주려고 온 거야. 온 김에 점심에
곽승재가 대답하기도 전에 단은숙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은서야, 승재한테 무슨 사인을 받는 거야?”조은서는 아무 핑계나 찾아서 둘러댔다.“이 사람 차에 보험을 하나 들어줬어요. 본인이 사인해야 한대요.”“그래?”단은숙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말했다.“지금에 와서 무슨 보험을 든다는 거야, 전에 안 했어?”“자동차 상해 보험을 하나 더 하는 거예요. 저번에 차를 타고 가다가 작은 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보니까 빼먹은 보험이 있더라고요. 보험회사에서 전액 보상을 해주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더 들었어요.”고은서는 표정 변화 없이 술술 말했고 단은숙은 친절한 말투로 곽승재에게 물었다.“조카사위, 얘 말이 맞아?”고은서는 외숙모가 이런 일까지 곽승재에게 확인하려 할 줄 몰랐다. 박지연의 말이 문득 생각 난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곽승재를 쳐다보았다. 곽승재의 검은 눈동자가 쌀쌀하게 그녀를 흘겨보았지만,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네.”고은서는 마음속으로 안도했다. 역시 박지연이 넘겨짚은 것이었다. 곽승재는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조카사위, 차를 운전할 때는 조심해야 해. 보험을 여러 가지 드는 것도 필요하지.”단은숙은 관심 어린 말투로 말하며 웃었다. 외숙모가 완전히 믿는 것을 본 고은서는 마음 놓고 물었다.“사인한 보험서류는 어디 있어?”곽승재는 아무 표정 없이 사무실 책상 쪽으로 눈짓했다. 조은서는 얼른 그쪽으로 다가갔고 책상 위에는 정말 서류 폴더가 놓여있었다. 펼쳐보니 이혼합의서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고은서의 마음속에는 감격의 물결이 요동쳤고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정말 쉽지 않았던 과정이었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드디어 이혼합의서를 손에 넣었다. 고은서는 서류를 품 안에 꼭 안았다.“삼촌, 외숙모, 얘기 계속하세요. 저는 더 시간 뺏지 않을게요.”이렇게 말하고 바로 떠나려던 고은서는 곽승석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삼촌, 외숙모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오전에 회
단은숙은 파일을 등 뒤로 숨기고 말했다.“우리 집 차도 보험 더 들어야 하는데, 네 것도 좀 보게 줘봐."“그러지 말고 제가 좀 있다 차 보험 하시는 분 소개해드릴 테니까 그분이랑 연락해봐요. 외숙모,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고은서가 말도 채 끝내지 못했는데 단은숙은 단번에 그녀를 밀치더니 파일을 열어보았다.고은서는 바로 파일을 빼앗으려 했지만 50킬로도 채 되지 않는 몸으로 외숙모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은숙은 그 틈을 타 단단한 등으로 고은서를 막아내며 빠르게 파일을 열어보았다.그리고 그 문서를 제대로 보고 난 단은숙은 바로 고은서를 향해 소리쳤다.“고은서, 이게 뭐야!”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비서와 비서실 다른 직원들도 그들 쪽으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그러니 당연히 고국성도 이상함을 느끼고 파일을 채갔다.문서를 읽던 고국성은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고은서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손바닥에 고은서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으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그때 언제 왔는지도 모를 곽승재가 고국성의 손을 막아내고 단호하게 말했다.“삼촌, 말로 해요, 손대지 말고.”곽승재의 등장에 고국성은 마지못해 손을 거두고 눈을 번뜩이며 열이 올라 빨개진 얼굴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승재 사무실로 가있어!”고은서가 삼촌과 외숙모에게 이끌려 곽승재 사무실로 가자 곽승재는 나지막하게 옆에 있던 비서한테 분부했다.“회의는 부대표님한테 먼저 진행하라고 해요, 난 좀 있다 갈게요.”“네, 대표님.”비서가 나가자 곽승재도 앞서간 고은서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곽승재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어른답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고은서와 곽승재를 향해 묻고 있었다.“이 이혼서류는 무슨 뜻이야, 누가 이혼하자고 한 거야!”말이 없는 곽승재에 고은서가 담담히 인정했다.“제가 말했어요.”“너!”순간 열 받은 고국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어 올리려 하자 단은숙이 그를 끌어앉혔다.“은서야,
남편까지 동의하자 단은숙은 단호하게 고은서를 끌고 나갔다.“승재야, 이혼은 생각도 하지 마. 은서가 충동적으로 한 말일 거야, 우리가 가서 잘 타이를게.”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고국성이 한마디 더 덧붙이자 곽승재는 짜증만 부리는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삼촌, 억지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저도 할머니 아니었으면 이혼 고민할 이유도 없었을 거예요.”“절대 억지 아니지, 억지일 리가 없잖아.”고국성이 다급하게 부정을 했다.“고 여사님이 우리 은서를 얼마나 예뻐하시는데, 여사님을 봐서라도 우리 은서 한 번만 봐줘.”말을 마친 고국성도 발버둥 치는 고은서를 같이 밀며 방을 나섰고 곽승재는 쓰레기통에 던져진 종이 쪼가리를 한번 보더니 주름 하나 없는 정장을 쓸어내리고는 회의실로 들어갔다....차 안의 분위기는 엄숙하기 그지없었다.화를 눌러 참는듯한 얼굴의 고국성과 단은숙은 고은서가 도망가는 걸 막으려고 표정을 굳히고 그녀의 양옆을 지키고 앉았다.한편 고은서는 이혼합의서까지 다 받아냈었는데 반응할 시간도 없이 벌어진 뜻밖의 상황에 모든 일이 수포가 되자 우울해져 있었다.지금 상황을 보니 삼촌과 외숙모는 절대 그녀의 이혼을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고은서는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엄마와 함께 살았고 삼촌은 도시에 따로 살았기에 가끔 만나 밥을 먹을 때도 어른들끼리 일 얘기를 하느라 고국성도 고은서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아서 둘 사이가 그리 가깝진 못했다.하지만 고국성은 어쨌든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또 고 씨 집안의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고은서는 그에게 모르는 사람한테 대하는 것처럼 아무 상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일단은 할아버지도 곧 이혼 사실을 알게 되실 테니 그 관문부터 넘어야 했다.이혼합의서는 어쩔 수 없이 곽승재에게 다시 한번 사인을 받아내야 할 것 같았다.생각 정리를 마친 고은서는 창문에 기대어 잠든 척을 했다.그렇게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차는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고 고은서는 바로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가려 했지만 단은숙에 의해 팔
“이혼?”이혼이란 두 글자에 고준석도 놀라긴 한 건지 손에 든 찻잔마저 미끄러질 뻔했다.“할아버지, 조심해요!”그때 고은서 얼른 그 찻잔을 받아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할아버지의 가슴을 쓸어주어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도와줬다.“뭐 인제 와서 효도하는 척이야. 정말 할아버지 화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이런 바보 같은 짓 좀 그만해!”“조용히 해.”화가 나서 씩씩대는 단은숙의 말을 막은 고국성이 고준석을 향해 말했다.“아버지도 이제 더는 은서 봐주시면 안 돼요.”“오늘 저희들이 마침 승재 찾아갔다가 이 사람이 이혼합의서를 빨리 봤으니까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혼하는 것도 모를 뻔했다니까요.”“은서야, 네 삼촌이랑 외숙모 말이 다 사실이냐?”고준석이 표정을 굳히고 묻자 고은서는 서러웠는지 코를 먹으며 대답했다.“할아버지, 사실 할아버지가 걱정하실까 봐 계속 못 했던 말이었어요...”“왜 이혼을 하고 싶은 거냐?”전에 고은서가 장난스레 이혼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승재와 싸우고 나서 그런 줄로만 알고 그냥 넘겼는데 이혼합의서까지 받아낸 걸 보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고준석은 다시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다들 왜 이혼을 하고 싶냐 물어대는 탓에 대답하는 것도 귀찮기만 했던 고은서지만 존경하는 할아버지께는 그 이유를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다.“할아버지, 저랑 승재 오빠는 결혼 초기부터 행복하지 않았어요. 우리 둘 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냥 결혼에 묶여있는 건 둘에게 다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이만 끝내고 싶은 거예요.”“세상에 천생연분이 어딨어?! 옛날 사람들은 얼굴 한 번 못 봐도 잘만 살잖아!”그때 단은숙이 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그리고 결혼할 때도 네가 울며불며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고 한 거잖아. 그래놓고 인제 와서 힘들다고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그래요, 제가 결혼하자고 한 거 맞아요. 그래서 저는 이 결혼이 불행해도 참고 살아야 하나요? 삼촌이랑 숙모는 잘
곽승재는 차 유리의 파편도 직접 막아주고 운전도 가르쳐주며 민시후에게 납치당할 뻔했을 때도 바로 나타나 고은서를 구해주었다.고은서가 온갖 짜증을 부려댈 때도 곽승재는 참아왔었고 오히려 정상적인 부부처럼 같은 방을 써보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예전의 곽승재라면 전혀 하지 않을 행동들이었다.“은서야, 할아버지가 보기엔 승재가 너를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그날도 승재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네가 전날 밤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서 널 걱정하느라 온 거였어.”“나에게 옛날 벼루를 선물한 것도 네가 기뻐했으면 해서 그랬던 거잖아. 너뿐만 아니라 너의 가족들도 신경 쓴다는 걸 보여주려고.”고준석이 한 이 말들을 예전의 고은서가 들었다면 당연히 감동하고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처량하게만 느껴졌다.고은서가 온 마음을 다해 곽승재를 사랑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제 지쳐서 이혼하려고 하니 또 아쉽다는 듯이 잘해주는 게 달갑지 않았다.“할아버지, 그 정도로 이 결혼을 지속할 수는 없어요. 저는 그냥 그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고 싶어요. 그리고 더 이상 그 사람과 관련된 일에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제 승재 오빠한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거예요.”고은서의 대답에 고준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꼭 같이 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야. 그냥 내가 아는 너는 사람이든 뭐든 네가 확신하는 건 절대 바꾸지 않는 성격이라 하는 말이야.”“어릴 때 갖고 놀던 토끼 인형도 네가 맨날 안고 돌아다니니까 다 해져서 내가 다른 인형들 많이 사줬잖아. 그런데도 넌 그 인형만 고집했지. 그게 낡아서 더는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돼서야 버렸잖아. 하지만 그 뒤로 너는 다른 인형은 원하지 않았지.”“네가 결혼할 때도 나는 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너희들의 결혼을 허락했어. 네가 승재가 아닌 다른 사람은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은서야, 할아버지는 네가 네 마음에
“삼촌 회사의 계약이 하나 성사 안 된 게 있어서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온 거래.”박지연은 고은서가 말한 이유도 그럴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곽승재와 관련된 것 같았다.“아무튼 이혼 못 했으니까 내 말이 맞는 거야!”“상상력이 그렇게 풍부하면 간호사 말고 소설가를 하지 그래?”“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 이라는 소설 쓸까 하는데 어때?”“그런 노골적인 글 쓸 거면 그냥 계속 간호사 해.”박지연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내까지 들어와 있었다.어둠이 깃든 시내를 보던 고은서는 주인혁에게 오늘 헬스장을 가겠다고 약속한 일이 떠올랐다.그래서 고은서는 기사더러 헬스장 근처의 식당에 차를 세우게 하고 간단히 배를 채우고는 바로 헬스장으로 갔다.헬스장 대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바로 전에 운동을 도와줬던 피티쌤을 끌어다 그녀에게 사과했다.이미 다 지난 일이라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던 고은서가 그들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괜찮아요. 앞으로 주인혁 씨 난처하게 만들지만 않으면 돼요.”“주인혁 씨는 당분간 우리 헬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게 됐어요. 사모님이 원하시면 담당 직원을 바꾸던지 환불을 하던지 전부 가능합니다.”“왜 아르바이트를 못하는데요?”어제 밥을 같이 먹을 때도 못 들은 말이었기에 고은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곽승재가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닐 텐데.“본인이 오늘 저한테 직접 한 말입니다. 오디션에 나가야 한다고 하더군요.”대표의 말을 듣고 보니 미래에 있을 오디션이 떠올랐다.고은서는 그 오디션에서 주인혁이 많은 주목을 받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디션이 정확히 언제 시작하는지는 몰랐었다.“은서 씨.”저 앞에서 주인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은서는 바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오늘은 일찍 왔네요.”주인혁은 고은서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했다.“운동 끝나면 같이 나가서 뭐라도 마실래요? 저 할 말 있어요.”그에 고은서는 웃으며 대답했다.“대표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