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의 원지훈은 이전의 가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뭘 원하는 건데요?”고은서는 원지훈의 회사가 파산 직전에 놓여 며칠 사이 끊임없이 악재가 퍼져나가며 파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백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원지훈을 추궁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었겠지. 아니면 원지훈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리 없어.’어차피 협력할 사이라면 더 이상 목적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고은서가 태연하게 말했다.“간단해. 어머니를 백유미 집 가정부로 보내서 그쪽 상황을 언제든지 보고하게 해. 너는 백씨 가문 회사로 출근하며 내가 원하는 대로 협조해 주면 돼.”지난 생에서 백유미는 고은서를 정신병원에 보내 위암에 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원지훈을 시켜 고은혜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조씨 가문을 파산시켰다.이번 생에서 고은서는 백유미가 같은 대가를 치르도록 할 작정이었다.원지훈이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면 그녀와 내외로 힘을 합칠 수 있을 것이다.범가온이 백유미의 가정부가 되면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유미의 풍족한 생활을 지켜보며 분노와 질투심이 일것이다.범가온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왜 백씨 가문은 그렇게 잘나가고 자신은 하찮은 가정부 노릇을 하는가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다.고은서는 자신을 2년 넘게 괴롭혀 온 범가온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원지훈에게 일정한 힘이 있으면 범가온은 어떻게든 원지훈을 통해 백유미가 누리던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전생에 범가온 모자가 괴롭히던 수단을 생각해 보면 백유미가 그들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 생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 분명했다.고은서는 단지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고은서의 요구를 들은 원지훈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당신과 협력하면 백유미와 틀어질 텐데 이런 상황에서 백씨 가문 회사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것 같아요?”고은서도 웃으며 답했다.“그건 지훈 씨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이렇게 작은 일
백유미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미리 말해주면 협조할게.”말을 마친 고은서가 싸늘하게 덧붙였다.“양쪽에서 이득 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날 속이고 양쪽에서 이득을 보려 한다면 지훈 씨는 솟아날 구멍조차 없을 거야.”고은서의 말에 원지훈은 흠칫했다.‘내 생각을 눈치챘나 보네. 내가 고은서를 너무 얕봤어. 돈 많고 외로운 귀부인 타입은 아니야.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이야.’통화를 마친 원지훈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범가온이 물었다.“지훈아, 믿을만한 사람이야? 네가 말했잖아. 회사에 문제 생긴 것도 그 여자 때문이라고. 또 우리를 끌어드리려는 게 결국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야?”원지훈이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이며 답했다.“고은서가 미워하는 건 백유미지 우리가 아니야. 어차피 백유미 밑에서 총알받이 취급을 받으면서 백유미 눈치를 봐야 하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이 기회에 물 흐리면서 고은서랑 백유미가 싸우는 걸 보자고. 나는 그 사이에서 이득을 챙기고. 좋은 기회잖아.”말은 그럴듯했지만 범가온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하지만 백유미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 고은서가 실패하고 백유미가 우리가 도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거야.”원지훈도 백유미의 수완을 잘 알고 있었다.이번 스마트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백유미는 백씨 가문의 자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쉽게 외부 자금을 유치해 프로젝트를 성사했다.만약 고은서가 정말로 백유미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가 바라던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고 그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었다.원지훈은 담배를 비벼 끄며 결심을 굳혔다.“달콤한 보답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지.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어.”고은서 역시 원지훈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백유미를 견제할 가장 좋은 무기였다.그의 결심을 더욱 굳히기 위해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돈을 추가로 송금했다.이내 고은서는 민시후에게 전화를 걸었다.“백유미도 진행하던
탁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고개를 들자 놀란 고은서는 자신을 덮친 사람이 모자와 마스크를 쓴 깡마른 남자임을 알아차렸다.그 옆에는 같은 복장을 한 키가 크고 마른 동료가 서 있었다.무슨 상황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깡마른 남자는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고 키 큰 남자는 빠르게 방문을 닫고 동료와 함께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두 남자의 행동은 빠르고도 다급했다.고은서는 목이 조여 매우 괴로웠지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두 남자를 공격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비상구에 다다랐을 때 고은서는 복도에서 누군가 방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다.“읍! 읍!”고은서가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이미 두 남자는 그녀를 비상구로 끌고 갔다.‘벨은 이미 멈췄고 직원들이 상황을 점검하러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이상함을 눈치챌 때쯤이면 나는 더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겠지.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이 두 사람인가? 대체 누가 보낸 거지?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두 남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고은서를 끌고 가는 것이 불편했는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테이프를 꺼내 그녀의 입을 막았다.양한겸은 그녀를 어깨에 둘러메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고은서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피가 머리로 쏠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입이 막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지난번 서인수 일당에게 납치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1층까지 내려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방법을 찾아야 해. 호텔을 벗어나면 위험해.’고은서가 머물던 층은 높지 않았고 양한겸과 신현준은 생각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구에 도달할 것이다.고은서는 매달려 있는 동안 느껴지는 불편함을 참으며 양한겸이 코너 쪽 난간으로 다가갔을 때 발끝으로 힘껏 난간을 걸었다.방심한 양한겸은 무게에 이끌려 뒤로 무게 중심이 쏠리며 계단에 엉덩방아를 찧었다.고은서는 어지러
그때 온몸에 흰 분말이 묻어 유령 같은 두 남자가 다시 그녀 앞에 다가왔다.“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누가 너희를 보낸 거지?”고은서가 다급하게 물었다.“여기는 호텔이야. 곳곳에 CCTV가 있어 도망치기 힘들 거야. 지금 포기하면 너희 책임을 묻지 않겠어!”“같잖은 말은 집어치워!”양한겸이 사나운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돈을 받았으니 널 놓아줄 수는 없어. 상황 파악이 됐으면 순순히 따라와.”양한겸은 말하며 고은서를 잡으려 다가왔다.“악!”“멈춰!”고은서가 다리를 들어 양한겸을 차는 동시에 위쪽 계단에서 차가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고은서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두 남자도 자연스레 빼어난 옷차림에 차가운 눈빛을 한 곽승재를 발견했다.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하지만 싸움 실력이 있고 두 사람이다 보니 곽승재의 출현에 두 사람은 겁먹고 도망치지 않았다.“쓸데없는 참견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양한겸이 위협하며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자 고은서에게로 주의를 돌렸다.“한 발짝만 더 다가오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신현준이 고은서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고은서도 몇 가지 호신술을 배웠기에 위급한 순간에 재빨리 몸을 아래로 굴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악!”고은서가 몸을 숙이자마자 머리 위에서 신현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곽승재가 그를 발로 차 쓰러뜨린 것이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일으켜 자신 뒤에 숨기고 양한겸을 향해 발을 뻗었다.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양한겸은 곽승재의 공격을 피하며 곽승재에게 손을 뻗어 공격해 왔다.쓰러져있던 신현준도 다시 일어나 싸움에 가세했다.비록 2대 1의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이 우세를 점하지는 못했다.곽승재의 공격은 정교하고 매서웠으며 훈련된 자의 실력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싸우는 모습을 몇 번 봤던 터라 그의 실력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은서가 위층으로 올라가 도움을 청할지 고민하던 중 양한겸이 주머니에서 스프링 나이프를 꺼내 곽승
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그녀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고은서는 곽승재가 자신이 한 말로 자존심이 상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로 했다.엘리베이터가 이내 1층에 도착했다로비에 도착하자 주민기가 일행과 함께 곽승재에게 다가와 말했다.“대표님, 연락받고 바로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괜찮으세요?”곽승재가 쌀쌀하게 대꾸했다.“아직 위층에 있으니 경찰서로 데려가서 철저히 조사해 주세요.”“어깨는 왜 그러십니까?”주민기가 곽승재의 상처를 보고 놀라 물었다.“호텔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어쩌다 이렇게 다치신 거죠?”곽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하기 싫다는 기색을 풍겼다.고은서가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저를 도우려다가 범인들의 칼에 베였어요.”“칼까지 썼단 말입니까?”주민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사모님, 기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을 병원으로 모셔주세요. 여기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이 상황에서 고은서도 호칭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곽승재와 함께 로비 출입구로 향하던 고은서는 밖에서 빛나는 스포츠카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고은서!”민시후였다.그는 차에 시동을 끌 여유도 없이 바로 고은서 앞으로 다가왔다.“무슨 일이야?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핸드폰은 어디 갔어?”민시후가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고은서와 통화 중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급히 온 모양이었다.“나는 괜찮아. 핸드폰은 위에 있어.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곽승재가 다쳐서 일단 함께 병원에 가려던 참이야.”민시후는 그제야 곽승재의 존재를 눈치챈 듯했다.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 대표, 우연이네. 여기서 뭐 하는 거야?”그 말을 들은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너랑 무슨 상관인데?”“쯧.”민시후는 곽승재의 다친 어깨를 보고 혀를 찼다.그는 비아냥거리는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바로 고개를 숙여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그녀는 바로 다시 고개를 들며 의심스럽게 물었다.“송민아도 없는데 왜 여기서 연기해?”민시후는 말없이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고은서가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나려 했지만 민시후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를 차 쪽에 몰아붙였다.“고은서, 내가 단순히 연기하는 것 같아?”민시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민시후의 뜬금없는 행동에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민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장난기 섞인 표정이 서려 있었다.평소에는 유혹적인 눈빛이었지만 지금은 얼마간의 온기가 서려 있는 듯했다.“민시후, 너...”고은서가 이제 장난은 그만치라고 하려는 찰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곽승재가 차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곽승재의 운전기사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에 시동을 걸었다.차가 고은서와 민시후의 옆을 지나가는 순간 고은서는 차 뒷좌석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정히 앉아 있는 곽승재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았다.“쯧. 내려서 날 상대하지도 않다니. 곽승재한테 넌 그냥 그 정도밖에 안 되나 보네.”민시후가 약간 실망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비켜!”민시후가 일부러 곽승재를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고은서가 짜증 내며 그의 팔을 밀쳤다.“한가해서 이러는 거지!”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한가하기는? 곽승재가 제 멋대로 먼저 가버린 거지. 나랑 무슨 상관이야?고은서가 그에게 눈을 흘기며 곧바로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가자. 태워준다며?”“팔이 부러진 것도 아니고 병원까지 꼭 가야겠어?”민시후가 옷과 손에 흰색 가루가 묻은 고은서를 불만스럽게 쳐다봤다.“지금 네 꼴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알기나 해?”‘엉망이 아닌 게 이상하지. 두 남자에게 끌려다니고 두 층이나 되는 계단을 기어오르고 소화기로 공격까지 했으니 몸이 성한 게 더 이상하지. 곽승재가 아니었다면 엉망이 아니라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르지.’“됐어. 귀찮게 해서 미안하네. 직접
“민시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비꼬는 거야?”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럼 너는 정상이야?”민시후가 비웃으며 말했다.“곽승재랑 이혼도 했으면서 이렇게 다급하게 따라가고 있잖아. 사람들에게 너희 사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 아니야?”고은서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너는 너 때문에 다친 사람을 두고도 편히 잠들 수 있겠어?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고은서가 민시후를 한 번 훑어보며 물었다.“너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지?”그 말에 민시후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맞아. 널 너무 깊이 사랑해서 헤어 나올 수 없어. 너 아니면 안 되겠어.”낮고 차가운 그의 목소리는 끝부분이 살짝 올라가면서 묘하게 매력적으로 들렸다.고은서는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끼며 팔을 문질렀다.“민 도련님. 그만하지?”민시후는 그녀를 한번 쓱 보고는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누가 너 같은 바보를 좋아해? 날 너무 모욕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어이가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이내 민시후의 차도 가까운 병원에 도착했다.예상대로 눈에 잘 띄는 위치에 곽승재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됐어. 내 임무는 끝났으니 얼른 올라가서 곽승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해 봐. 죽었으면 좋은 소식이니 꼭 나한테 제때 알려 주고.”고은서는 민시후의 쓸데없는 말에 신경 쓰지 않고 차 문을 열었다.차가운 밤공기에 고은서는 자신을 감쌌다.“잠깐만.”민시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또 곽승재에 대해 뭐라 하려는 줄 알고 고은서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민시후, 그렇게 곽승재가 걱정되면 같이 올라가. 비웃지 않을게.”“웩!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민시후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하고는 차창을 통해 외투를 고은서에게 던졌다.“입어. 한밤에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어디서 도망친 난민인 줄 알아. 주머니에 내 다른 폰도 있어. 번호는 저장해 뒀으니까 문제 생기면 연락해.”말을 마친 민시후가 멋지게 자리를 떴
기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고은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기사가 떠난 후, 그녀는 홀로 복도에 앉아 곽승재를 기다렸다.방금전 있었던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는 공포감이 들었다.곽승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녀를 찾으러 계단 쪽으로 오지 않았더라면 어떤 후과가 있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대체 누가 날 해치려는 거지? 주민기와 민시후가 이미 조사하러 갔으니까 내일쯤이면 누가 보낸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얼마나 지났을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곽승재가 걸어 나왔다.그는 외투를 벗고 흰 셔츠 하나만 입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왔는데 어깨 쪽의 핏자국이 유독에 눈에 띄었다.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척 처참해 보였겠지만 곽승재만은 남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병원 복도 불빛 때문에 얼굴과 오관이 더 각져 보였고 차가운 눈빛까지 더하니 마치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듯한 귀족 같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차갑던 눈빛이 약간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쓰고 있는 흰색 외투를 보자마자 이내 눈빛이 다시 차가워졌다.“어깨 괜찮아?”고은서가 일어나서 물었다.곽승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환자분 가족 되시나요? 어깨가 심하게 다쳐서 상처를 꿰맸어요.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는데 혹시 상처에 감염되어서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병원에서 이틀 동안은 관찰해 봐야 할 것 같아요.”곽승재와 함께 나온 의사가 고은서에게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병실.곽승재는 링거를 맞으면서 병상에 누워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다.고은서는 이런 분위기가 약간 어색했는지 그의 피 묻은 셔츠를 보며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차에 갈아입을 옷 있지? 내가 가져다줄게.”그러나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곽승재의 모습은 그녀도 오랜만이었다. 전에도 지금처럼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냉담하게 대했었다.오늘 일은 확실히 고은서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곽승재가 그녀를 구해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
‘분명 넘어뜨렸는데.’고은서는 마재경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고, 가위를 들고 달려들 줄은 더욱 생각지 못했다.피하기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고은서는 다급한 마음에 전기충격기를 꺼내 마재경의 몸에 들이댔다.“조심해요.”고은서와 마재경이 전기충격기와 가위를 손에 들고 서로 공격하려는 순간, 우람한 체구의 남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여재훈이었다.그는 고은서를 확 끌어당기고 마재경을 밀쳐냈다.쨍그랑! 전기충격기가 땅에 떨어지며 마재경의 몸에 닿았고, 감전된 마재경은 비명을 질렀다.잠시 비틀거리던 마재경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다시 가위를 휘두르며 덤벼들었다.고은서가 마재경을 걷어차려고 다리를 뻗는 순간, 여재훈이 자기 팔로 가위를 막아 그녀를 보호했다.그의 넓은 어깨는 웅대한 산처럼 든든해 보였고,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처럼 피난처 같은 안정감을 주었다.짝! 가위가 여재훈의 팔을 찌르며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재훈은 잽싸게 마재경을 발로 걷어찼다.“여재훈 씨, 괜찮으세요?”정신을 차린 고은서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재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괜찮아요.”이때 경비원 몇 명이 달려와 마재경을 제압했다.고은서는 여재훈의 팔을 살펴보았다. 재킷과 셔츠가 찢기고 기다란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은서는 가슴이 아려와 다급히 말했다.“다치셨네요. 빨리 병원 가서 싸매야 해요.”“고은서 씨도 다쳤으니 같이 가요.”여재훈이 고은서의 쇄골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여재훈의 말을 듣고 나니 쇄골 근처 어깨죽지 부위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손으로 만져보니 피는 나지 않는 듯했다. 오늘 카라 없는 캐주얼 셔츠를 입은 까닭에 마재경이 가위를 휘두를 때 살짝 긁힌 듯하다.“저는 연고만 바르면 될 것 같아요. 어서 병원 가요.”고은서는 경비원에게 마재경을 경찰서에 넘기라고 말했다.그러고는 기사를 불러오고 여재훈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여재훈의 팔뚝에 번진 핏자국을 보며 고은서는
여재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은서 씨를 회사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이 식사는 여재훈이 초대한 자리였으니 끝까지 책임지고 고은서를 안전하게 회사까지 돌려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아 분위기가 조금 무거웠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자기 딸이 고양이를 학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줬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유일 투자은행의 주차장에 도착했다.“은서 씨, 곽승재 씨랑 현재 무슨 사이이신가요?”여재훈이 물었다.고은서는 사실대로 답했다.“그냥 평범한 친구 사이예요.”여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승재 씨는 은서 씨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연회 때 곽승재가 고은서를 적극적으로 감싸는 모습을 모두가 똑똑히 봤다.이에 대해 고은서도 부정하지 않았다.“그건 곽승재 씨의 일방적인 감정이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이성적인 감정은 없어요.”“시은이가 승재 씨를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요. 저한테도 말한 적 있어요. 그와 결혼하고 싶다고.”여재훈은 말을 이었다.“아마 시은이의 질투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아요. 그래서 은서 씨를 해하려 했던 걸지도 모르죠. 하지만 쿠아는 시은이가 가장 아끼던 반려동물이에요. 시은이가 이유 없이 해칠 리는 없을 겁니다.”고은서는 그 말의 속뜻을 곧바로 이해했다.여재훈의 말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향한 질투 때문에 공격적으로 나왔을 수는 있어도, 쿠아는 여시은이 키우는 반려동물이기에 쿠아를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가족이라는 필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여재훈도 여시은의 본모습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고은서는 더 말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기에 여재훈한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차에서 내린 고은서는 어디선가 여자 하나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고, 공기 중에서 약간의 피비린내도 느꼈다.그녀는 주
여재훈은 고은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물었다.“시은이가 또 무슨 일을 했다는 거죠?”마침 노 사장님이 식전 반찬을 가져다주며 주문한 대표 요리도 곧 준비된다고 알렸다.고은서는 계속해서 말했다.“재훈 씨, 저희 먼저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할까요?”고은서는 몹시 배가 고팠다. 만약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면 두 사람 모두 식사할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제안에 동의했다.이 개인 요리 식당의 음식은 색다른 풍미가 있었고, 고은서는 배부르게 먹었다.반면, 여재훈은 거의 먹지 않았다. 마치 그는 고은서를 동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한 것처럼 보였다.식사 중에는 가끔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약 삼십 분 후, 고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배가 너무 부르다고 말했다.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있지만, 여재훈은 배부른 고은서를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여재훈은 그녀가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뻤다.여재훈은 고은서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며 물었다.“우리 시은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거죠?”고은서는 찻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여시은이 고양이를 학대한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저번에 제가 쿠아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했었잖아요?”고은서가 말했다.“전 정말 시은이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에요. 여시은이 제 눈앞에서 쿠아의 입술을 다치게 했어요. 그리고 평소에도 쿠아를 자주 괴롭혔어요.”고은서의 말을 들은 여재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시은이는 쿠아를 그렇게 아꼈어요. 집에서도 항상 품에 안고 다녔고, 쿠아가 뭐라도 먹고 싶어 하면 직접 손으로 먹여줬다니까요. 시은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겠어요?”여재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은서 씨, 혹시 오해가 있는 건 아니에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닐까요?”평소 여시은은 얌전한 딸의 이미지를 잘 연기해 왔기에 여재훈은 그녀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재훈 씨가 믿기 힘든 거 알아요. 아버지 입장에서야 딸이 그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