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고은서가 호텔에 두고 온 폰도 이미 사람 시켜 가져온 상태였다.그녀는 폰을 받아들고 고장 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상처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에 돌아가 있어. 난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고은서는 옆에 있는 곽승재에게 말했다.“내가 다 나을 때까지 날 간병해주기로 했잖아. 어딜 가려는 거야?”“그냥 외상만 입었을 뿐이잖아. 주의하면서 푹 쉬면 곧 나을 거야. 굳이 옆에서 간병해줄 필요 없는 거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고은서는 자신보다 키가 훨씬 큰 곽승재를 올리 쳐다보면서 답했다.“그럼 계속 네 눈앞에 나타나도 된다는 뜻이지?”곽승재의 눈에서 약간의 기대가 보이는 듯했다.“그런 뜻은 아니야. 볼일 보고 병원으로 갈게. 약속대로 오늘 저녁까지는 간병해 줄 거야. 그런데 내일 퇴원하고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땐 혼자 가도록 해. 난 더는 따라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당신도 약속 지켜줬으면 좋겠어.”“고은서!”고은서가 한창 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민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오늘은 직접 운전하지 않았는지 뒷좌석에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그녀도 마침 ZY 그룹으로 가야 했기에 곽승재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하고는 민시후가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기사가 내려 자연스럽게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고은서도 별다른 생각 없이 차에 올랐다.주차장을 나가면서 민시후는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네가 내 차에 오르는 걸 막지 않다니. 인내심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네.”고은서도 그의 말을 듣고 백미러로 곽승재를 보았는데 그는 차 옆에 한참 동안 서 있었는데 다쳐서일까, 약간 외로워 보였다.“경찰서에는 왜 온 거야?”고은서가 시선을 돌리고 민시후에게 물었다.“왜겠니? 당연히 네가 걱정되어서 온 거지.”민시후가 건들건들하게 말했다.고은서는 그의 속셈을 알아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날 곽승재를
“성아연과 백아연이 어떤 사이든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서는 안 돼.”곽승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습니다, 대표님.”주민기가 공손하게 대답했다.곽승재는 방금전 고은서의 무덤덤해 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분명 아무런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인데 저런 깊은 악의를 겪어야 했다니.심지어 그는 전에 성아연을 지시한 사람이 고은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에 고은서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녀를 비난했던 자신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났다.주민기가 떠난 후, 곽승재는 육현석에게 연락했다.“여자들은 보통 어떤 선물을 좋아해?”육현석은 번호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의심하는 말투로 물었다.“승재 형? 승재 형 맞아? 혹시 납치라도 된 건 아니지?”곽승재는 그와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대답이나 해. 전에 여자 마음을 엄청 잘 안다고 잘난체하고 다녔잖아.”그러나 곽승재의 생각과 달리 육현석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전에는 내가 방법을 알려줘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잖아. 한 번 잃은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이번에는 안 알려줄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전에 네 아버지가 나한테 네 결혼 상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셔서 이미 괜찮은 사람 한 분이랑 얘기 나눠봤는데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내일쯤 시간 찾아서 네 아버지랑 얘기해 볼 생각인데, 괜찮겠어?”육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불만을 토로했다.“형, 그거 협박이야! 나한테 지금 부탁하는 입장이잖아. 그러면 부탁하는 사람다운 태도를 보여야지. 왜 나를 협박하고 그러는 거야!”“그럼 내일 아버지랑 얘기 나눠 보도록 할게.”곽승재가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 육현석이 큰소리로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곽승재! 그래 항복할게. 도와주면 될 거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얼른 말해.”육현석은 심호흡을 하면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육현석은 곽승재를 대신해 방법을 생각해주었다.“이름 있는 판다 기지로 가보는 건 어때? 아기 판다도 만져볼 수 있다던데. 비록 소비가 높고 시간제한도 있긴 하지만 형한텐 별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면 형수님도 판다를 보게 되어서 기뻐할 거고 형도 형수님이랑 데이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잖아. 안 그래? 어릴 적에 이루지 못한 소원을 지금 대신 이뤄주는 것과 같은데 형한테 고마워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형한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기게 되는 거지.”곽승재는 육현석의 아이디어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평소에 만나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는 그녀가 그와 함께 나가는 걸 원하는지가 제일 큰 문제였다.“형, 내 아이디어는 여기까지야. 형수님을 어떻게 설득하는가는 형이 생각할 문제고. 그런데 또 자존심 세우면서 명령하는 식으로 말하지 마. 형수님 그런 거 질색하는 거 알지? 부드럽게 같이 가자고 설득해봐. 언젠간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전화를 끊은 후, 육현석은 너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형이 형수님을 관심해주면서 선물까지 준비해주려고 하다니. 너무 대견해.’육현석은 박지연에게 이 희소식을 전하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시후는 고은서와 함께 ZY 그룹으로 돌아가는 대신 단온 별장을 향했다.“여긴 왜 온 거야?”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오늘 집 보러 온다고 어제 약속했잖아. 여기 보안이 좋아서 집주인이 아니고는 거의 들어오지 못해. 미리 이사 왔으면 어제 같은 사고를 당할 일도 없었잖아.”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 말했다.어젯밤에 겪은 일이 이미 결론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은서는 여전히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저도 모르게 무서워 났다.“상대가 날 해치려고 굳게 마음을 먹거든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그녀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어이없다는 듯 툴툴거렸다.“넌 왜 사람 보는 눈이 그렇게도 없냐. 친구를 사귀어도 하필 성아연처럼 종일 상대방 뒤통수를 치는 사람을 사귀냐.”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은서가 성아연에게 당
민시후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민 도련님, 왜 입만 열면 곽승재 얘기예요? 설마 곽승재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죠?”“고은서, 너 지금 날 엿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소리 하는 거지?”민시후가 화를 내면서 고은서를 한 대 살짝 때리려고 했다. 하지만 고은서가 아주 민첩하게 옆으로 피하는 바람에 민시후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는데 갑작스레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 때문에 그는 순간 손을 떼는 걸 잊고 있었다.“저리 비켜!”고은서가 성가시다는 듯 그를 밀어냈다.그러나 민시후가 갑자기 고은서 앞으로 다가가면서 그녀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고은서, 내가 말했지?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선택해 봐. 한 대만 맞을래, 아니면 두 대 맞을래?”민시후는 하인을 농락하는 나쁜 부잣집 도련님처럼 고은서의 턱을 치켜올리며 물었다.“혹은 나한테 키스라도 한 번 해줄래?”“꺼져!”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의 무릎을 발로 차버렸다.민시후가 숨을 길게 들이쉬며 허리 굽혀 아픈 무릎을 어루만질 때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맞아야 할 사람은 너야.”‘진짜 병이라도 있는 건가? 자꾸 날 놀리려고 하네.’“고은서, 너 좀 여자답게 굴면 안 돼?”민시후가 그녀를 쏘아보며 호통쳤다.“나처럼 잘생긴 남자가 너한테 벽치기를 하는데 어떻게 부끄러워하며 좋아하지도 못할망정 날 발로 찰 수가 있어?”고은서는 콧방귀를 뀌면서 답했다.“무릎을 찬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잘생긴 민시후 씨.”“너!”민시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화난 민시후와 달리 고은서는 갑자기 무언갈 떠올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민 도련님의 이런 모습을 송민아 씨가 알게 되면 어떨까요? 민 도련님을 향한 애정의 마음을 접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고은서!”민시후가 또다시 호통을 치면서 화난 얼굴을 하고 그녀를 붙잡으려고 할 때 고은서는 영활하게 문 뒤로 숨으면서 투항했다.“그만 이젠 회사로 가자. 나 할 일이 있어.”민시후는 자신을 피하는 듯한 고은서를
“민시후가 나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날 좋아하겠어? 게다가 곽승재를 엄청 싫어하잖아. 날 미워하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인데 절대 날 좋아할 리가 없어.”박지연이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의 말을 반박했다.“널 좋아하지 않는데 널 지금까지 도와줬다고? 그리고 널 좋아하지 않으면 네가 거절했다고 왜 화를 내는 이유가 뭔데?”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내가 언제 거절했다고 그래? 민시후 나한테 고백한 적도 없어.”“고은서, 너 정말 바보 아니야? 좋아하는 감정이 뭔지는 알고 있는 거야? 민시후가 그러는 게 고백하는 거랑 마찬가지잖아!”민시후가 그녀를 잘 대해준 건 사실이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의미심장한 말을 할 때도 있었으나 전에도 그렇게 장난을 많이 쳐왔기 때문에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고은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지연아, 그만 말해. 나 갑자기 무서워지려고 그래. 소름 돋았어.”“...”박지연은 어이없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야?”고은서가 물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물었다.“어제 하마터면 납치될 뻔했다며? 육현석이 알려줘서 다행이지 나한테는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박지연은 그제야 고은서에게 전화를 건 이유를 말했다.“너무 갑작스레 발생한 일이기도 하고 또 오늘 종일 바쁘게 다니다 보니까 미처 너랑 말하지 못했어.”고은서가 미안해하며 대답했다.“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야? 성아연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꾸민 거고? 육현석도 자세한 건 안 알려주던데.”고은서는 박지연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그러니까 고씨 집안을 망가뜨리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또 그 일 때문에 네 숙모한테 시달림을 받았는데 그게 다 네 탓이라고 생각하고 널 해치려 했다는 거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박지연은 성아연이 고은서의 옛 베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몇 번 마주친 적도 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런데 왜 분명히 백유미랑 손잡고 널 해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
곽승재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고은서, 나 배고파.”‘배고픈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고은서였지만 이내 곽승재에게 오늘 병원에서 그를 돌봐주기로 약속한 것이 생각나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사실 고은서 입장에서는 굳이 누군가 옆에서 곽승재를 계속 간호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구해준 걸 빌미로 간호를 요구하니 인간적으로 거절할 수 없었다.하여 고은서가 말했다.“알아서 뭐 좀 시켜 먹어. 난 조금 있다 갈게.”곽승재가 물었다.“넌 뭐 먹고 싶어?”곽승재의 속내를 알아차린 고은서가 바로 답했다.“나는 이미 먹었어.”“고은서, 이 이른 시간에 어디서 먹었는데?”곽승재가 태연하게 물었다.“그게...”“어깨 아파서 혼자 못 먹겠어. 이미 먹었으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도 몇 시간 후 네가 배고플 때 같이 먹을래.”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오늘 나랑 무조건 밥을 먹어야겠다는 건가...’고은서는 예전 별장에 있을 때 매일 곽승재를 위해 한두 가지 요리를 준비했던 나날들이 떠올랐다.그녀는 고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아가씨였다. 하여 요리를 배우는 동안 수없이 칼에 베이고 불에 데며 고생했지만 곽승재가 좋아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면 모든 게 가치 있다고 여긴 시절도 있었다.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요리를 준비하여 곽승재가 집에 돌아와 함께 식사하기를 기다렸지만 음식이 차갑게 식어갈 때까지 곽승재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그런 그가 이제 와서 부상까지 들먹이며 자신과의 식사를 요구하고 있다.‘정말 웃긴 상황이네.’고은서가 답했다.“매운탕, 매운 닭볶음탕, 마라탕 같은 자극적인 음식이 먹고 싶네.”음식에 관해 굉장히 까다로운 곽승재는 강한 맛이나 매운 음식, 냄새나는 음식 그리고 신선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흥! 나랑 같이 밥 먹고 싶다고? 이 음식들 먹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고.’그녀의 주문에 곽승재는 반박하지 않
하지만 빨간 국물과 위에 떠다니는 각종 향신료를 보며 곽승재는 마라탕이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의 망설임과 싫어하는 기색을 알아챈 고은서가 일부러 재촉했다.“먹어 봐. 왜 안 먹어?”곽승재는 고은서의 재촉에 결국 마라탕을 한 젓가락 집어 들었다.입가로 가져가자 강렬한 매운 향이 코끝을 찔렀다. 곽승재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됐어.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이건 네가 좋아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요리가 아니잖아.”고은서는 말하며 또 한 젓가락을 집어 입에 넣고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곽승재는 꾹 참다가 결국 마라탕을 입에 넣었다.순간 낯선 맛들이 입안에 퍼졌고 그는 식사 예절을 유지하려 애쓰며 간신히 뱉지 않고 견뎠다.고은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억지로 몇 번 씹자 음식물 속에 배어있던 고추기름이 흘러나와 그의 목구멍을 자극했다.갑작스러운 자극에 그는 저도 모르게 기침하기 시작했다.고은서가 근처에 있던 휴지통을 가리키며 말했다.“뱉어. 먹지도 못하면서 왜 억지로 먹으려고 그래?”그 말에 곽승재는 오히려 음식을 꿀꺽 삼켰다.“콜록! 콜록!”음식을 삼키자마자 다시 기침이 터져 나왔고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며 귀 끝까지 빨개졌다.그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물병을 열고 급히 물을 들이켰다.물병의 반 이상을 비운 후에야 그는 겨우 기침을 멈췄고 얼굴의 붉은 기운도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목은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었다.고은서가 테이블 위에 놓인 다른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다른 것들도 시도해 볼래? 아마 마라탕보다 더 매울걸?”온몸이 불편했던 곽승재는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게 대체 뭐가 맛있다는 거야? 언제부터 이런 걸 좋아하게 된 거야?”예원 별장에서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음식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그의 말에 고은서는 이해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난 처음부터 이런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어. 하지만 네가 싫어하니까 예원 별장에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차갑게 말했다.“이러는 거 정말 구질구질해 보여.”“은서야, 내가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곽승재의 어두운 눈동자에 깊은 음영이 드리워졌다.“왜 다른 사람들에겐 그렇게 다정하면서 나한텐 이렇게 차가워?”고은서가 답했다.“날 존중한다면 제발 내 앞에 자꾸 나타나지 마.”“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나는 건지는 너도 잘 알잖아.”곽승재의 눈빛은 더 어두워졌다.“은서야, 내가 이혼에 동의했던 건 외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압박 때문은 아니었어. 그저 네가 또다시 위험을 자초할까 봐 걱정돼서였어. 난 이혼 후에 네가 마음의 짐을 덜고 우리의 관계를 좀 더 평온한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길 바랐어. 더 이상 나를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 그런데 넌 왜 여전히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싫어?”곽승재의 눈빛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정을 보며 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곽승재, 내가 이혼을 결심한 건 앞으로 너와 어떤 사이로도 엮이고 싶지 않아서야.”“왜 나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곽승재는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쥐며 물었다.“민시후 때문이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마음이 그렇게 깊어진 거야? 민시후때문에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야?”고은서가 조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곽승재, 네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으니 내가 더 가엾게 느껴진다.”전생에 8년간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가 몇 달 만에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고 믿는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다.‘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믿은 적 없는 건가...’고은서가 곽승재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고 몸부림쳤지만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놔줘. 안 그러면 약속도 지키지 않을 거야.”곽승재는 싸늘한 그녀의 기운을 느꼈다. 또한 화가 난 그녀가 정말로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곽승재는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겨 꽉 껴안으며 낮고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