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횡령죄로 경찰 측 조사받으러 갔다고 하던데. GS그룹에서는 명예 훼손을 피면하기 위해 백유미 모든 직무를 정지시켰다 하더라고. 요즘 들어 백씨 가문에 구경할 거리가 많이 생기네. 백승엽 스캔들이 잠잠해지는가 했더니 불구가 된 다리를 고치기도 전에 백유미한테 또 일이 생기다니.”민시후가 말하다가 고개를 돌려 고은서를 쳐다보았다.“고은서, 너 진짜 예상 밖으로 능력 좀 있다?”민시후는 고은서와 백유미 사이의 원한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모든 걸 계획한 사람이 고은서라는 것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그런데 백유미가 경찰 측 조사받으러 갔다는 건 나도 모르고 있었어.”그녀의 말을 민시후는 이내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딱 봐도 알리잖아. 곽승재 그 개자식이 네 환심을 사려고 백유미를 처리하려는 거겠지.”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민시후를 쏘아보았다.곽승재가 그녀와 재혼하려고 애를 쓰는 건 사실이지만 백유미가 했던 일을 그저 눈 감고 넘어가 준 것도 사실이었다.그가 갑자기 백유미를 처리하려는데는 꼭 고은서랑 민시후가 모르는 또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다.“그만 생각해. 무슨 이유든 모든 게 다 네가 소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잖아. 그런데 나 며칠 동안이나 회사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내가 뭐하러 갔는지 궁금하지도 않아?”민시후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민 도련님이 어디에서 뭘 하든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너 진짜 냉정하다.”민시후는 더는 뜸을 들이지 않고 그가 며칠 동안 회사에 나오지 않은 원인을 이실직고했다.“해성에 있는 동물원 하나를 매수했거든. 수속도 거의 다 끝나가고 서운 판다 기지에 연락해서 네가 이름 지어준 아기 판다랑 엄마 판다를 함께 데려오면 돼. 때가 되면 부를게. 같이 수속하러 가면 돼.”고은서는 순간 어안이벙벙해졌다.‘그냥 장난치면서 한 말이 아니었어? 진심이었단 말이야?’“내가 말로만 하는 줄 알았어? 아기 판다한테 이름 지어준 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동물원을 네 이
경찰서 접견실.곽승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백유미를 바라보며 물었다.“날 만나겠다고 한 이유가 뭐야?”“내가 조사받으러 왔는데 GS그룹 대표인 널 불러서 증언해달라고 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백유미는 살면서 처음으로 그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왜 날 업무 횡령죄로 신고한 건데? 난 서인수가 한 짓에 참여한 적이 없어. 그저 회사 업무 때문에 몇 번 연락한 것뿐이야. 판주 투자은행이 명운 프로젝트 때문에 손해를 본 건 사실이지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내가 서인수를 도와 일 처리를 한 것도 서인수한테 속아서 그런 거라고. 난 서인수가 진짜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틀린 판단을 내렸을 뿐이야!”“그럼 사실대로 경찰한테 말하면 되잖아.”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백유미는 헛웃음을 치면서 말을 이어갔다.“승재야, 아무리 내가 책임이 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갑자기 내 죄를 묻는다는 게 맞다고 생각해? 넌 지금 다른 이유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곽승재는 부정하지 않았다.“또 무슨 일을 나한테 덮어씌우려는 거야? 우리 아빠가 고은서한테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젠 너까지 우리 부녀를 망가뜨리려고 해?”“네가 했던 일들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곽승재는 억울해하는 백유미를 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를 납치하게끔 서인수를 교사한 죄. 대체 왜 그런 걸까? 네가 말한 모순만 일으키고 고은서를 해치려 한 적은 절대 없다는 게 바로 이거야?”백유미는 순간 흠칫하더니 이내 진정하고 부정했다.“지금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서인수 대신 일 처리를 해준 것 빼고는 서인수랑 따로 연락한 적이 없어. 서인수가 곧 판결받게 된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어. 죄명도 꽤 크다며? 하지만 도아름 씨랑 은서 씨가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날 일부러 모함하면서 죄책감을 덜려 하거든 난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런 억울한
“동물원을 ZY 그룹 새로운 투자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도 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더라고. 내가 조사해봤는데 동물원 규모가 꽤 커. 새로운 장비 추가하고 또 홍보를 제대로 하면 지금 수입 2배 정도는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어.”“널 좋아한다고 준 선물을 갑자기 투자 프로젝트로 만든다고?”박지연이 물었다.“그럼 어떡해? 난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 선물을 받는다는 것도 이상하잖아.”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틀린 말도 아니지.”박지연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거절하니까 민시후는 어떤 반응이었어? 엄청 실망해 할 것 같은데.”방금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선물을 받아달라고 하는 민시후를 고은서가 단호하게 밀어내자마자 그는 약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냥 평범한 사업 파트너로 생각한다고 명확하게 말했어. 실망하든 말든 내가 알 바가 아니잖아.”“너 요즘 남자운 좋은가 봐? 전남편 곽승재랑 널 오랫동안 좋아하면서 널 위해 MQ로 들어간 유성준, 그리고 이젠 민시후까지 널 좋아한다고 하는데 넌 누굴 고를 거야?”박지연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다 싫은데. 난 내 사업을 선택할 거야.”고은서는 고민하는 척하더니 아주 단호하게 다 거절해버렸다.“재미없게 왜 그래. 사업한다고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어제 곽승재랑 왜 그렇게 다정하게 서 있었던 거야? 다시 시작할 생각인 거야?”고은서는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지연을 쏘아보며 답했다.“아니. 그저 사고였을 뿐이야.”“더 자세히 말해 봐봐. 무슨 사고였는데 그렇게 다정하게 가까이 서 있었던 거야?”“미안하지만 거절할게요.”두 사람이 한창 수다 떨고 있을 때 고은서의 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곽승재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박지연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 아래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폰을 꺼버렸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한테서 어제저녁 더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문자가 왔다.전화벨 소리가 또다시 울렸을 때 고은서는
곽승재는 원망과 결연함으로 가득찬 표정을 하고 있는 고은서를 보면서 말했다.“은서야, 네가 생각하는 대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나한테 보상할 기회를 줘.”‘보상?’고은서는 속으로 보상이라는 두 글자를 곱씹으면서 순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생에 백유미가 한 짓을 무시하며 그녀의 편을 들어준 죄, 그리고 이번 생에 고은서를 의심하면서 아이까지 잃게 한 죄.그가 그녀에게 입한 상처는 보상이라는 한 마디로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게다가 그녀는 처음부터 그의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다.“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지나간 상처가 보상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야. 나한테 있어 제일 큰 보상은 당신이 나랑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는 고은서를 보면서 곽승재는 그녀가 일부러 자신의 화를 돋우면서 자신을 쫓으려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그녀의 속셈을 알아차린 곽승재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은서가 그를 무시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다시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곽승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올라가서 쉬어. 난 이만 돌아갈게.”그는 디저트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는 운전석에 올랐다.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해졌다.‘화내면서 다신 날 찾아오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왜 저렇게 담담해 보이는 거야.’...곽승재가 육현석을 찾아갔을 때 그는 열심히 배구시합 해설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그저 간단한 친선 경기일 뿐인데 이렇게 신중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어? 누가 보면 네가 국제대회라도 나가는 줄 알겠어.”곽승재가 덤덤하게 말했다.“친선 경기가 어때서! 나한테는 모든 경기가 다 최선을 다할 만큼 엄청 중요하 거든.”육현석이 불만스러운 말투로 반박했다.“지연 씨가 참가하니까 창피당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러는 거잖아.”곽승재가 육현석
곽승재의 경고하는 듯한 차가운 눈빛에도 육현석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그만큼 형한테 실망하고 상처받았으니까 그런 끔찍한 꿈을 꾼 거겠지.”곽승재의 눈빛 속의 한기가 순간 사그라들었다.다른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보상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악몽만큼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옆에 있던 육현석은 곽승재가 자신의 말을 듣고 약간 속상해하는 것 같아 보이자 조심스레 그를 위안했다.“그래도 형수님이 형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잖아. 행동으로 형수님의 생각을 바꾸면 되지. 악몽 속에서 있었던 일이 현실에서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고 믿게 만들면 되잖아. 그럼 형수님도 형을 다시 받아들이려고 할 거야.”육현석은 또 요즘 그가 했던 일들에 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백씨 가문을 도와주지 않고 백유미 직무를 정지시킨 것부터 엄청 좋은 스타트야. 형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신분을 막론하고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하면 돼.”...며칠 후.제인 제약에서 반나절 동안 미팅을 한 고은서과 송민아는 ZY 그룹으로 돌아가자마자 또 부문 직원들과 함께 짧은 미팅 하나를 했다.송민아는 점차 자신만의 업무 템포를 찾아가고 있었고 비서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서 날이 갈수록 더 노련해졌다.미팅은 퇴근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고은서가 직원들과 함께 수다 떨면서 회사 문을 나설 때 갑자기 익숙한 사람 한 명이 회사 문밖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민시후였다.그는 흰색 정장에 은색 넥타이를 하고 손에는 아주 큰 장미꽃다발을 들고 회사 문 앞에 서 있었다.고은서는 그를 보자마자 순간 불안감에 휩싸였다.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면서 꽃다발을 내밀었다.“고은서, 선물이야!”직원들의 와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서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민시후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어제 분명히 좋아하지 않는다고 절대 사귈 리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건만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회사에 들어올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가 고개를 돌려보니 곽승재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는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우월한 기럭지와 출중한 미모 덕분에 마치 패션쇼 모델 같은 느낌을 주었다.ZY 그룹 직원들도 자연스레 곽승재를 보게 되었고 심지어 대부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꽃다발을 선물하는 민시후 하나로도 충분히 의아할 만 한데 곽승재까지 찾아오다니.평소와 별다른 바가 없는 퇴근 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목격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 못 했다.흥분해 하는 직원들과 달리 고은서는 머리가 아파왔다. ‘만날 때마다 다투는데 덕분에 또 구설수에 오르게 되겠네.’“곽 대표가 우리 회사엔 무슨 일이야?”아니나 다를까 민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민시후 손에 있는 장미 꽃다발을 본 곽승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은서를 보며 말했다.“은서야, 퇴근했지? 집까지 데려다줄게.”‘또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집까지 왜 데려다주려는 건데?’“필요 없어. 나 차 있어.”고은서가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얼른 밥 먹으러 가자.”민시후가 콧방귀를 뀌면서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곽승재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걸 본 고은서는 두 사람 사이의 모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나 볼 일 있으니까 알아서들 해.”고은서가 말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민시후가 갑자기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곽승재가 따라 오르지 못하게 재빠르게 차 문을 잠갔다.“너...”고은서가 민시후를 쫓으려고 할 때 그녀의 폰이 울렸다.확인해 보니 육현석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전에는 곽승재 일이 아니면 연락 오는 일이 별로 없었는데. 게다가 지금 곽승재가 내 눈앞에 서 있는데 무슨 일로 전화 한 거지?’고은서가 전화를 받고 입을 열기도 전에 육현석의 다급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형수님, 얼른 온 닥터한테 전화해요!”“지연이한테 무슨 일 생겼나요?”고은서는 약간 불안해 났다.“지연이 시어머니가 지연이를 강제로 끌고 갔어요. 혼자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유혜린이었다. 조수연도 그녀와 함께 있었다.박지연은 전의 일로 약간 불쾌하긴 했지만 그래도 애써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어머니, 유혜린 씨.”“지연 씨, 제가 아줌마를 너무 오래 못 뵈어서요. 마침 오늘 휴일이라서 아줌마랑 데이트 중이었어요. 저녁 시간이 다 돼서 간단히 요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유혜린이 먼저 입을 열고 설명했다.“승준이는 병원에서 힘들게 일하면서 따뜻한 밥 하나 챙겨 먹기도 힘든데 넌 혼자 부귀영화를 아주 잘 누리며 다닌다.”조수연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시비를 거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박지연은 더는 다투고 싶지 않았다.“우리 다른 곳으로 가자.”육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박지연, 너 지금 무슨 태도야! 이젠 내 말은 듣기 싫다는 거야? 내가 틀린 말을 했어? 요즘 승준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알아? 넌 네가 남편 있는 몸이라는 건 기억이나 하고 다니니?”조수연이 호통쳤다.“아줌마, 화내지 마세요. 지연 씨도 일이 바빠서 그러는 거겠죠.”유혜린이 옆에서 조수연을 달랬다.“바쁘긴 뭐가 바쁘다는 거야! 그까짓 간호사밖에 안 되어서는 월급도 얼마 받지 못하면서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 승준이를 챙겨주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이 시어머니 전화도 받지 않는다니까. 교양 없는 년.”조수연이 씩씩거리며 말했다.“저기요, 여기 공공장소예요. 교양 있는 분이시라면 큰소리로 소란 피워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실 텐데요.”육현석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넌 누구야!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조수연은 육현석의 말을 듣자마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내가 내 며느리를 교육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 아들은 아직도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저년은 기생오라비 같은 너하고 바람이나 피우려 하고. 내가 몇 마디 교육한 게 뭐가 어때서!”“어머니, 말이 지나치신 것 같은데요. 그냥 친구랑 밥 먹으러 나왔을 뿐인데 제가 언제 바람을 피웠다고 그러세요!”
박지연은 고은서를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네가 여긴 어떻게 왔어?”“육현석이 나한테 연락 왔어.”고은서가 말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집 안에는 조수연뿐만 아니라 온승준의 아버지 온범준도 소파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마음먹고 박지연의 죄를 물으려는 것 같았다.고은서는 자연스럽게 박지연 앞에 막아섰다.온승준도 따라 들어오면서 말했다.“어머니,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지연이한테 호되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가족끼리 좋게 얘기하면 될 것을 왜 말도 없이 지연을 강제로 끌고 오면서 난리세요!”박지연 때문에 이미 기가 막힐 정도로 화났던 조수연은 그녀의 조력자들과 자신을 비난하는 아들을 보자 화가 점점 더 치밀어올랐다.분노가 극치에 달한 그녀는 휘청거리면서 하마터면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온범준이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조수연을 부축하면서 자기 아들을 향해 호통쳤다.“온승준, 너 지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우리가 며느리한테 물어볼 게 있으니까 여기로 데려왔겠지. 뭐가 잘못됐다고 그러는 거야!”그의 말을 들은 고은서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온승준 씨, 그쪽 부모님께서 지연이한테 물어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지연이를 거의 범인처럼 심문하는 것 같은데요?”고은서는 애써 예절을 지키며 온승준 부모님을 드러내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승준을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말을 이어갔다.“지연이는 당신 아내예요. 이 집안 도우미나 하인이 아니라고요.”온범준은 명성이 꽤 높은 교수였고 또 고은서가 집안사람도 아닌 데다가 문 쪽에 그녀가 데려온 범상하지 않은 남자까지 서 있어서 내뱉고 싶은 욕을 꾹 참았다.“승준아, 이 사람들 누구야? 우리 집안일을 처리하는데 끼어들지 말고 얼른 나가라고 해!”온범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집안일은 무슨. 우릴 다 쫓아내고 며느리 한 명만 잡고 괴롭히려고 그러는 거잖아요.”민시후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넌 또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