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고 했지만 곽승재의 낮은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10살 때 원한을 품은 도우미가 내게 약을 먹인 후 물속에 밀어 넣은 일이 있었어. 그때 백유미가 나를 구해줬어.”“알아. 널 이렇게 오래 좋아했는데 그런 일도 몰랐겠어?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무슨 일이든 이유와 근거가 확실하니까 굳이 상관없는 사람한테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고은서가 비웃듯 말했다.“넌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잖아.”“그만해. 곽승재. 네가 이러는 거 정말 역겨워.”고은서는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끊었다.고은서의 입에서 역겹다는 말이 나오자 곽승재는 상처받은 듯 해 보였고 잘생긴 그의 얼굴에는 은근한 분노가 드러났다.고은서는 곽승재가 늘 우월한 위치에서 칭송받는 데 익숙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누구도 대놓고 역겹다는 말을 한 적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의 이런 행동이 너무나 싫었다.곽승재는 모든 일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며 자신이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되찾아주겠다고 장담했다.하지만 뒤에서 그는 백승엽에게 의사를 찾아주고 백유미가 판주 투자은행으로 복귀하는 것을 용인했다.모든 과정에 곽현수가 개입했다는 걸 알지만 곽승재가 묵인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고은서는 곽승재의 표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손을 피하며 단호히 걸음을 옮겼다....월요일 아침 고은서가 미래 투자은행에 도착했다.송민아는 그녀에게 두 집안 부모님에게 약혼을 깨겠다고 알린 일을 전했다.“부모님들도 동의하신대?”“우리 부모님은 처음에 반대하셨지. 그런데 내가 울고 떼쓰며 애교부리니까 어쩔 수 없이 허락하셨어. 하지만 아저씨는 반대하시며 오빠를 불러 혼내셨어. 심하게 꾸짖으며 나한테 다시는 속상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사과하라고 하셨지. 하지만 오빠는 굴하지 않고 처음부터 약혼을 받아들인 적도 없고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말하며 씁쓸함을 드러낸 송민아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나도 아저씨한테 더 이상 오빠
고은서는 단호히 거절했다.“됐어. 듣고 싶지 않은 것 같아.”“고은서, 이번에는 가야 할 걸?”민시후가 말을 이었다.“송민아가 얘기했을 텐데, 지금 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믿지 않아. 그래서 형을 보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확인해 보라고 했어.”“내가 안 가면?”“민씨 가문 남자는 고집이 세다는 단점이 있지.”민시후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너한테 집착하는 것처럼 네가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널 만나러 오겠지.”고은서는 말문이 막혔다.“걱정하지 마. 내가 있는 이상 널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을 거야.”민시후가 위로했지만 고은서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네 연극에 어울려줄 생각 없어. 네 형이 물어보면 나는 너한테 관심 없다고 바로 얘기할 거야.”민시후가 웃으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대로 해.”“그럼 먼저 임철원 쪽에서 알아낸 정보를 얘기해 봐.”민시후가 혀를 차며 답했다.“듣고 싶지 않다며?”고은서가 화를 내며 말했다.“그럼 밥 먹는 거 포기해! 네 가족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야!”“농담 한 번 못 하겠네.”민시후가 다시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임철원이 해외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게 누구 도움인지 알아?”고은서가 고개를 저었다.“맞혀 봐.”민시후는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리고 일부러 뜸을 들였다.고은서는 참다못해 그의 다리를 발로 찼다.“말할 거면 한 번에 제대로 말해.”“고은서, 애정이 있어야 욕하고 화낸다던데 혹시 나 좋아해? 곽현수야.”고은서가 다시 차기 전에 민시후가 먼저 말했다.그 말을 듣고 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곽현수가 왜 임철원이랑 엮인 거지? 왜 도와준 거야?”고은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민시후가 답했다.“이 일에서 백유미를 빼놓을 수는 없지. 백유미를 해성으로 돌려보낸 사람도 곽현수야.”고은서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백유미의 배후가 곽현수라고? 그때 민시후와의 스캔들도 곽현수가 백유미를 도와 퍼뜨렸던 거네! 임
민시후는 다시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꼰 자세로 앉으며 말했다.“십중팔구 알고 있을 거야. 알면 어때. 자기 눈이 삐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 투자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큰 실수를 한 건 본인이 알아서 책임져야지.”고은서는 잠시 침묵했다.“네가 백씨 가문에 보낸 그 원지훈이라는 사람, 최근에 큰 거래를 성사했던데 네 계획이야?”민시후가 태연히 물었다.고은서는 굳이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나는 받은 대로 돌려주는 것뿐이야.”“받은 대로 돌려주는 고은서라니. 정말 내 맘에 쏙 들어.”민시후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확실히 도와줄 테니까.”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고은서는 원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최근 백씨 가문 산업에 이상이 없는지 물었다.백유미가 민시후까지 조사했다면 분명 고은서가 이 사건에 연관되어 있음을 알았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원지훈까지 의심할 가능성도 있었다.이전에 원지훈과 가깝게 지내고 거래 내역까지 있으니 백유미의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았다.백유미와 원지훈이 서로 물고 뜯는 상황을 고은서는 즐기고 있었다.어차피 원지훈과의 협력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백유미가 원지훈의 배신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그를 처단하려 할 것이고 원지훈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다.여기에 아들 바보인 원지훈의 어머니 범가온까지 가세하면 백유미의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그들끼리 내분이 일어나면 고은서는 그 틈을 타서 그들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세 사람 중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이전 고은서가 원지훈에게 약속했던 건 단지 그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 그녀는 원지훈과 범가온을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그녀의 질문에 원지훈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어요. 새로운 거라도 발견한 거예요?”‘전생의 원지훈은 냉혹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는데 왜 갑자기 겁먹은 듯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뭘 두려워하고 있지?’고은서는 의아했지만 민시후가 알아낸 사실은 말하
다행히 이 사건이 폭로된 후 보복이 두려웠던 그 여자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해성을 떠났기에 백유미는 그들에게 닿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그 여자가 퇴사하고 해성을 떠났다고 해서 내가 못 찾을 거로 생각하지 마. 네가 이 일과 연관된 걸 내가 알게 되면 너랑 네 엄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백유미는 협박을 마치고는 원지훈의 가슴을 걷어차고 그제야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이미 심하게 맞아 정신이 없던 원지훈은 백유미의 이어진 발길질에 피를 토하고 말았다.범가온은 계속 몸부림치며 신음하다 백유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백유미는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으며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원지훈은 피를 토하고 나서 애원하기 시작했다.“누나, 제가 잠시 돈에 눈이 멀었어요. 돈 없는 가난한 삶을 더는 살고 싶지 않아서 고은서 말을 들었던 거예요.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요. 누나한테 충성하며 살 테니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범가온도 원지훈과 함께 울며 애원했다.백유미는 그들 모자가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빌도록 내버려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백유미는 사무실에 있던 덩치 큰 남자들에게 나가라고 했다.“고은서와 손잡고 있었다면 고은혜 일도 거짓이었던 거야?”백유미가 물었다.원지훈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그녀에게 건넨 사진과 동영상은 모두 합성된 것이었으며 고은서가 그날 밤 모든 영상을 갖고 있다고 했다.만약 고은혜의 부적절한 영상이 유출되면 고은서는 이를 증거로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백유미의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졌다.그녀는 자신이 길들인 개가 고은서가 던진 유혹에 넘어가 자신을 물어뜯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은서 대단하네. 원지훈을 이용해서 나를 함정에 빠트리다니.’며칠 전 그녀는 전자 프로젝트가 민시후의 함정이었음을 알아냈다.민시후와 고은서의 관계를 떠올리자 백유미는 이 모든 것이 고은서가 자신을 위해 꾸민 함정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오후에 고은서와 송민아가 클라이언트를 만난 후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민시후는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밥 꼭 먹어야겠어?”고은서가 묻자 민시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먹어야 해.”두 사람은 차를 타고 해성에서 이름있는 한식당으로 향했다.이곳은 무조건 예약해야 하고 회원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종업원은 그들을 2층의 별실로 안내했고 민시후의 형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곧 맞이하게 될 청문회를 떠올리자 고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민시후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왜 꼭 집안의 반대로 헤어져야 하는 커플 같지?’민시후는 고은서의 무력함과 긴장감을 알아차리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방어용 스프레이는 미리 준비했으니 상황이 좋지 않으면 바로 사용해.”말을 마친 민시후는 그녀에게 펜처럼 생긴 물건을 건넸다.고은서는 잠시 멈칫했다.“형이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며? 왜 방어용 스프레이가 필요한 거야?”민시후는 드물게 표정을 찡그린 채 진지하게 말했다.“형이 겉으로는 공직에 있지만 사실은 뒤 세계에 있는 조직이랑 결탁해서 무서울 게 없는 사람이야. 평소에도 세 명 이상을 데리고 다니는데 다들 싸움을 잘해. 만약 여기서 얘기가 잘 안 풀려서 난장판이 되면 너도 방어할 만한 물건 하나는 있어야지.”“농담이지?”“푸하하!”민시후는 고은서의 경계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고은서, 너 정말 순진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믿는 거야? 하하하.”“민시후, 정말 돌았어?”고은서는 화가 나서 그의 다리를 차려고 했다.민시후는 민첩하게 한발 물러서며 공격을 피했다.고은서는 화가 나서 샌드백을 치는 자세로 다시 한번 그에게 주먹을 날리려고 했다.하지만 민시후는 빠르게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당기며 농담을 던졌다.“고은서, 그 정도 실력으로 나랑 싸우려고?”“너...”화가 난 고은서가 민시후를 밀어내려 했지만 바로 그때 방문이 열리며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두 분 안으로 드시죠.”고은서가 고개를 돌렸다.문 앞에
직원이 떠나자 그들은 그제야 테이블에 착석했다.테이블은 고급 실목 원탁으로 고풍스러웠으며 과일과 견과류가 놓여있었고 꽃병에 생화도 꽂혀 있고 디퓨저도 놓여 있었는데 매우 우아했다.고은서가 옆자리에 앉자 민시후는 그녀의 오른쪽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과일 한 조각을 건네며 말했다.“과일이라도 먹어. 기절하지 말고.”고은서는 그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지만 민시후는 손을 내리지 않고 과일을 들고 있었다.민시현과 곽승재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 계속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하기는 싫어 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과일을 건네받아 한입 물었다.“달아?”‘나쁜 놈! 나를 부끄럽게 만들려고 작정한 거야!’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아래에서 그에게 발길질했다.아픔을 느낀 민시후가 이를 악물었다.고은서가 정말 화났다는 것을 깨달은 민시후는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았다.그리고 그 장면을 본 민시현과 곽승재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민시현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곽승재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곽 대표님, 앉으세요.”민시현이 말했다.“편하게 대해주세요.”곽승재는 시선을 돌리며 고은서의 왼쪽에 앉았다.“자리도 많은데 좀 떨어져서 앉지?”민시후가 바로 말했다.곽승재는 묘한 표정으로 민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여기 앉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시후야, 예의 좀 지켜.”민시현이 엄한 목소리를 내었다.민시후는 반박하려 했지만 고은서가 그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민시후, 과일 더 줘.”고은서의 말에 곽승재의 기운은 한층 더 무겁게 변했다.고은서는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었다.그녀는 단지 민시후와 민시현이 더 이상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지 않게 하려고 했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미 말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이제 곽승재는 남편도 아니니 그의 기분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고은서의 말을 들은 민시후는 민시현과 곽승재와 실랑이하지 않고 과일을 그녀 앞에 놓으며 말했다.“다 먹어.”“고마워.”고은서는 자두 한 알을 골랐다.“밥 먹기
고은서는 민시후와 곽승재가 건넨 음식을 먹는 대신 야채를 집으며 입을 열었다.“내가 알아서 먹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마.”민시후는 살짝 불만을 표했다.“고은서, 처음으로 여자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데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거야?”고은서는 민시후를 향해 눈을 흘겼다.그러자 민시후는 금방 태도를 바꿨다.“알았어. 알았어. 그만할 테니까 많이 먹어.”곽승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민시현은 그 장면을 지켜보며 무표정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식사가 끝날 때까지 민시현은 민시후와 그녀의 사이를 묻지 않았다.고은서는 민시현이 이미 그녀의 상황을 알아보고 민시후와의 관계도 얼마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늘 이 자리는 커플이라고 생각되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게 아니라 우회적으로 민시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경고하는 자리네.’어차피 정말 민시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민시현이 어떤 행동을 하던 고은서는 그다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식사가 끝나자 고은서는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는데 종업원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민시현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은서 씨, 시간도 아직 이른데 차 한 잔 하시면서 입가심하시죠.”“됐어! 그만 해! 저녁 내내 가면 쓰고 있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고은서가 뭐라 하기도 전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민시현,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 그냥 고은서랑 곽승재 사이를 나한테 다시 상기시켜 주고 싶었던 거잖아. 미리 얘기하는데 난 그런 것들 신경 안 써. 나는 고은서가 좋아.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나랑은 상관없어.”“너!”하지만 민시후는 민시현이 뭐라 할 틈도 주지 않고 고은서의 가방을 들고 입을 열었다.“가자.”건물 밖으로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고은서는 숨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이번 식사는 정말 숨 막힐 뻔했다.“배 안 불렀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다시 먹으러 갈까?” 민시후가 차 문을 열며 물었다.“배불러!”고은서가 차에
민시후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약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송민아와의 약혼을 무효로 하면서 각종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내 탓도 있는데.’“민시후, 나...”“쯧, 고은서, 이거 봐. 끝내는 나랑 말을 걸 거면서.”민시후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민시후, 너 진짜!”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한때 격투기를 배웠는지라 주먹의 힘이 꽤 셌는데 그녀는 민시후가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시후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너 괜찮아?”고은서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민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제발 이상한 짓 좀 그만해.”“고은서, 왜 자꾸 내가 장난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편견 버리고 나 좋아해 주면 안 돼?”민시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은서야!”바로 이때, 곽승재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곽승재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더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얼른 돌아가.”그녀는 민시후한테 한마디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민시후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고은서가 널 싫어하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야? 이미 이혼한 주제에 그만 좀 집착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적어도 고은서는 날 싫어하지 않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스읍!”민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의 주먹이 먼저 날려왔다.곽승재는 방금전에 민시후가 룸에서 고은서한테 자신에게 기대라 할 때부터 그를 패고 싶었다.그런데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한테 시비까지 걸다니.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