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후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하면서 약간 억울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약해졌다.‘송민아와의 약혼을 무효로 하면서 각종 시끄러운 일이 생긴 게 알고 보면 내 탓도 있는데.’“민시후, 나...”“쯧, 고은서, 이거 봐. 끝내는 나랑 말을 걸 거면서.”민시후가 장난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민시후, 너 진짜!”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한때 격투기를 배웠는지라 주먹의 힘이 꽤 셌는데 그녀는 민시후가 당연히 피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민시후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았다.“너 괜찮아?”고은서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아직도 화 안 풀렸어?”민시후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힘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고은서는 약간 어이가 없었다.“제발 이상한 짓 좀 그만해.”“고은서, 왜 자꾸 내가 장난친다고만 생각하는 거야? 편견 버리고 나 좋아해 주면 안 돼?”민시후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은서야!”바로 이때, 곽승재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그는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곽승재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은서는 더는 그를 상대하기 싫었다.“얼른 돌아가.”그녀는 민시후한테 한마디만 남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곽승재가 그녀를 따라가려고 할 때 민시후가 그의 앞에 막아섰다.“곽승재, 고은서가 널 싫어하는 거 몰라서 이러는 거야? 이미 이혼한 주제에 그만 좀 집착해.”“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곽승재의 얼굴빛이 순간 차가워졌다.“적어도 고은서는 날 싫어하지 않고 나와 가까이 지내는 걸 꺼려하지 않...스읍!”민시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의 주먹이 먼저 날려왔다.곽승재는 방금전에 민시후가 룸에서 고은서한테 자신에게 기대라 할 때부터 그를 패고 싶었다.그런데 고은서를 향해 아양을 떠는 것도 모자라 이젠 그한테 시비까지 걸다니.
밖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곽승재였다.고은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딱 봐도 민시후에 관해 물으려고 찾아온 거겠지.’그러나 고은서는 곽승재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일까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모르는 척 그를 무시할 생각이었다.그러나 곽승재는 이내 초인종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웃 사람들이 소음 소리를 참지 못하고 신고를 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관리 인원이 찾아와서 그를 제지했다.그러나 곽승재는 일부러 그들 앞에서 불쌍한 척했다.“제 아내가 저한테 화나서 저를 쫓아냈거든요.”그의 속임수에 넘어간 관리 인원들은 그 대신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사모님, 대화로 푸시고 얼른 문 여세요. 이웃 주민들도 휴식해야지 않겠습니까.”고은서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문밖에는 아파트 관리 인원 두 명과 셔츠만 입은 채 외투를 손에 들고 있는 곽승재가 서 있었다.곽승재는 피곤한 기색을 하고 서 있었는데 턱에 있는 상처까지 더하니 얼핏 보면 진짜 아내랑 싸우다 집에서 쫓겨난 남편 같았다.‘밥 먹을 때까진 괜찮더니 아까 아파트 단지 밑에서 둘이 또 싸운 거야?’“제 남편 아니에요. 일을 처리하기 전에 먼저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 아닌가요? 그리고 보안 좀 강화하세요.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막 들여서 되겠어요?”고은서가 관리 인원들을 향해 말했다.관리 인원 두 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세요. 제가 담당자한테 얘기해 놓을게요.”원래도 곽승재를 보자마자 그의 범상치 않은 기품에 주눅이 들었던 관리 인원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내가 아주 확실하게 말한 것 같은데. 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고은서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고은서, 너 정말 민시후 좋아하는 거야?”곽승재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역시나 또 민시후였어.’“당신이랑 무슨 상관인데?”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우린 이미 이혼한 사이야. 내가 누구랑 결혼하든...우읍!”그러나
곽승재는 순간 절망에 빠졌다.그는 두 사람 사이가 이대로 끝났다는 걸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한테 정말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거야?’곽승재는 고은서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뒤돌아 떠났다....그 후로 거의 두 주일 동안 곽승재는 고은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민시후도 회사 일로 바삐 보내면서 그녀를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그사이 고은서는 송민아를 데리고 제인 제약 투자 계약서를 완성했고 자세한 부분도 여러 담판을 거쳐 수정했다.이젠 정식으로 사인하고 계약을 체결만 하면 됐다.주인혁은 백주 앰버서더에 관한 계약서를 체결하기 위해 명운에 왔다가 그녀와 함께 밥 먹으러 가자고 약속했다.쌍방은 목적이 아주 명확했고 계약도 순리롭게 체결되었다.고은서는 주인혁과 밥 먹으러 가면서 도아름과 주인혁의 매니저까지 함께 가자고 불렀다.밥 먹을 때 매니저는 요즘 들어 주인혁한테 엄청 많은 요청이 들어온다면서 팬덤도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했다.“한창 상승기라서 스캔들만 나지 않는다면 엄청 대박 날 애예요.”고은서는 매니저의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자선 파티 때 주인혁이 그녀를 엄청 많이 챙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준 정장까지 입었는데 매니저도 은근슬쩍 눈치를 챈 모양인 것 같았다.그는 행여나 두 사람에 관한 스캔들이 날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저도 주인혁이 자신의 꿈을 꼭 실현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게다가 머리도 좋아서 사리 분별도 잘할 거예요.”고은서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주인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꼭 정상에 오르겠다고 약속했다.“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게요.”레스토랑에서 나오면서 도아름이 고은서를 보며 장난삼아 입을 열었다.“은서 씨, 저 남자애가 지키고 싶다고 한 사람이 은서 씨 맞죠?”고은서도 주인혁이 자신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전에 한 번 도와줬었는데 그 일로 제 이미지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고은서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미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한 것 같네. 은서야, 승재가 너한테 준 건데 그냥 가져. 아무튼 전에도 선물 한 번 사주지 않았잖아. 그저 너한테 주는 보상이라고 생각해.”그녀의 말에 고은서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아니에요, 할머니. 전에도 많이 받았어요. 액세서리도 포함해서요.”비록 그녀가 직접 산 것들이지만 곽승재의 카드를 긁었으니 어찌 보면 그가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서운에서도 그녀에게 판다 팔찌를 선물한 적이 있다.“하나라도 더 가지면 뭐 어때.”그러나 전미자는 이내 무언갈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물었다.“승재한테 직접 돌려주는 대신 왜 나한테 가져온 거야? 승재가 또 널 화나게 했어?”“아니요. 그저 우리 사이에 이런 귀중한 선물을 받는 게 알맞지 않은 것 같아서요.”고은서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두 사람이 한창 얘기 나누고 있을 때 밖에서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방금 그 엔진 소리 곽승재 차 엔진 소리였어?’그날 저녁 곽승재가 그녀에게 뺨을 맞은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이 시간에 할머니 집엔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곽승재가 거실로 들어왔다.그는 평소처럼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확실히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남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고 고은서를 무시한 채 전미자한테만 인사했다.“할머니.”“너 이 자식! 넌 은서가 안 보여? 인사할 줄도 몰라?”전미가 그를 비난했다.곽승재는 그제서야 고은서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브로치 돌려주러 온 거야. 네 선물 받는 게 난처하대.”전미자가 고은서 대신 대답했다.“넌 선물을 은서한테 직접 줄 것이지 왜 택배를 보내고 난리야.”“저도 잘 몰랐어요. 그냥 경매가 끝난 후 주민기한테 맡겼어요.”전미자는 덤덤한 곽승재를 보면서 순간 말
“그래서 나한테 물어보게 있다던 건 뭔데?”고은서가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전에 네 어머니가 엄청 훌륭한 퍼퓨머라고 하시면서 너도 네 어머니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하시던데 혹시 비슷한 사례를 들어본 적 있냐 해서. 승연이를 안정시킬 향을 제작해줄 수 있을까?”그러나 고은서는 이런 일을 오늘 처음 듣는 것이었다.퍼퓸 제작도 상응한 난도가 있는 법. 보편적인 커스텀 향수라면 고객들이 말해주는 요구에 따라 시도해보겠지만 곽승연의 상황은 어찌 손을 댈래야 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곽승연 씨에 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무얼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약간 곤란할 것 같아.”고은서가 사실대로 말했다.“알겠어.”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재를 보면서 위안해주려고 하다가 이내 타당치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을 도로 삼켰다.“별다른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응.”고은서는 자신의 차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곽승재는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다시 전미자 있는 거실로 들어갔다.“은서는 갔어?”전미자의 물음에 곽승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일부러 시간까지 짜내서 돌아와서는 왜 또 그렇게 덤덤하게 구는 거야? 그리고 브로치는 왜 주민기가 보냈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전미자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할머니, 저한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대요. 심지어 제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싫어해요. 제 모든 행동이 고은서 눈에는 그저 집착일 뿐이라고요.”곽승재가 답했다.“그러니까 전에 잘해주라고 할 때 잘해줄 것이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지금 둘 사이가 이렇게 된 게 알고 보면 다 네 탓...어휴.”전미자는 풀이 죽은 곽승재를 보면서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네 아버지가 며칠 전에 사람도 집안도 다 괜찮은 여자애 한 명이 있다고 나한테 널 대신 설득해 달라고 하던데 진짜 더는 기회가 없다 싶으면 한 번 만나봐.”“저 절대 다른 사람이랑 결혼 안 해요! 정략결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거고요.”곽승재가 결연한 태
‘전에 은혜를 넘보지 말라고 경고한 이후로 쓸데없는 생각은 이미 접은 줄 알았는데 왜 또 구질구질하게 은혜한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이 난 거야?’고은서는 고은혜를 위안하면서 더는 원지훈이랑 애인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시끄러우면 그저 무시하라고 말했다.전화를 끊은 후, 고은서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최근 원지훈이랑 두 번 정도 통화했는데 별로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백승엽도 해외 전문가한테서 치료를 받는다고 하지만 골든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기나긴 치료료정을 거치고도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백유미는 회사 징벌을 받고 원래 자리는 내놓았지만 여전히 판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범가온 말로는 요즘 별다른 일 없이 조용히 보낸다고 한다.백씨 기업에서 밀고 있는 프로젝트도 아직까지는 흠을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고은서는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원지훈이 예상 밖으로 일을 너무 쉽게 해결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백유미도 자신을 엿먹인 사람이 민시후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있는다고? 원지훈은 그렇다 쳐도 적어도 나한테는 반격해야 하는 거 아니야?’고은서는 원지훈한테 연락해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원지훈은 한참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세요?”고은서는 원지훈이 긴장해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누구한테도 꿀리지 않는 뻔뻔한 성격을 가진 그는 고은서와 대화할 때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지만 그의 말투로부터 항상 거만함을 느낄 수 있었다.얼마 전에 전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왜 긴장하고 있는 거지? 찔리는 곳이라도 있나?’고은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너 은혜한테 고백했다며?”“저도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제가 만나본 여자애 중에서 제일 좋은 거 어떡해요. 그저 기회라고 달라고 그런 거예요. 게다가 누나도 저에 관해 거의 꿰뚫고 있잖아요. 저 은혜한테 진짜 진심이에요. 절대 전처럼 이상한 생각 품고 그러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원지훈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백씨 기업 책임자도 누나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런데 상대방 측에서 계약서를 수정하지 않으면 위약금을 내더라도 계약을 실행하지 않겠다면서 아무튼 손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면서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다니까요.”고은서는 이 계약을 이대로 망치는 걸 원치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어야만 백씨 기업을 제대로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상대방에서는 대체 왜 그러는 거지?’원지훈은 자신도 모른다면서 요즘 이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했다. 또 행여나 백유미한테 들키기라도 할까봐 부사장을 함부로 설득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지금 유일한 방법은 직접 상대방을 찾아가서 이러는 원인을 캐내는 거예요. 그래야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요.”원지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은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내가 더 고려해보고 이틀 후에 정확한 답을 줄게.”“저도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에요. 상대방이 너무 강하게 나와서 저도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요. 게다가 중요한 건 더 끌다가 백유미한테 들킬까 봐 걱정이에요.”원지훈이 조급해하며 말했다.“저 백씨 가문을 빨리 망가뜨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 기회를 잃게 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알겠어.”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정말 이 일 때문에 이상하게 군 거라고?’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민시후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민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고은서, 동물원 수속이 거의 다 완성되었는데 지금 시간 있어? 네 사인이 필요한데 내가 데리러 갈게.”이 일에 관해 고은서는 이미 대책을 생각해냈다.“내가 생각해 봤는데 동물원을 나 혼자 경영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그래서 안전하게 ZY 그룹 명의로 하는 건 어때?”고은서가 진심 어린 말투로 말했다.“그럼 내가 부담 가질 필요도 없잖아. 행여나 망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
“고은서, 이게 그렇게 난감해할 문제야?”고은서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민시후가 짜증을 내며 물었다.‘비록 어이없는 요구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야.’“선물 가격에는 요구가 있어?”고은서가 다시 확인했다.‘너무 비싸면 주기 싫은데.’“없어. 성의 없는 선물만 아니면 돼. 고은서, 너도 고씨 집안 아가씨잖아. 왜 이렇게 인색하게 구는 거야?”민시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인색한 게 뭐가 어때서? 전생에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손에 돈만 있었으면 그렇게 하찮게 남은 인생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그녀는 이번 생만큼은 돈을 아끼며 살 생각이었다.그런데 이런 말을 민시후한테 함부로 해서는 안 되었다.“알겠어. 내가 진짜 진심을 다해서 널 위한 선물을 준비할게.”“당연히 그래야지.”민시후가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답했다.고은서는 이 틈을 타 원지훈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의문스러움을 말했다.그녀가 선물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해서일까, 민시후는 아주 흔쾌히 돕겠다고 나섰다.“걱정하지마. 내가 조사해볼게.”고은서는 마음이 한결 놓이는 것 같았다.저녁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지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고은서, 너 민시후한테 남다른 감정 품고 있는 것 같은데.”“남다른 감정?”“문제가 생기면 민시후한테 다 얘기해주잖아. 민시후를 엄청 신임하고 있는 것 같은데.”“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신임하는 게 정상이 아니야?”고은서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곽승재를 이렇게 신임해 본 적 있어? 이 일을 곽승재한테도 알려줄 거야?”“아니!”고은서가 단호하게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말도 안 되는 소리. 곽승재랑 백유미 사이 관계만 생각해도 이런 일을 곽승재한테 얘기할 리가 없잖아. 전에 여러 번 내 편을 들어줬다고 해도 백유미는 여전히 잘살고 있잖아.’“이거 봐. 이렇게 중요한 일을 곽승재한테는 안 알려주면서 민시후 하나만은 엄청 굳게 믿고 있잖아. 이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도 있다는 표현이지.”박
지난번 숙모에게 가방을 선물했을 때, 숙모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그래서 이번엔 삼촌에게도 뭔가를 사서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은서는 노 사장님에게 코담배병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봤다. 그리고 가족에게 드릴 선물로 하나 사고 싶다고 말을 덧붙였다.“이건 친구가 선물한 거라 어디서 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노 사장님은 미안한 듯 말했다.고은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예뻐서 한번 여쭤본 거예요. 나중에 백화점 가서 한번 골라볼게요.”“아가씨는 참 효심이 깊구먼.”노 사장님은 칭찬을 몇 마디 건넨 뒤, 주문한 메뉴를 주방으로 가져갔다.“은서 씨 아버님께서 코담배병을 좋아하시나요? 선물하시려고요?”여재훈이 부드럽게 물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전 아버지가 없어요. 삼촌께 드리려는 거예요.”여재훈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그는 고은서를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다.“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여재훈은 곧바로 사과했다.고은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괜찮아요. 저희 가족끼리도 잘 지내고 있어요.”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여재훈은 고은서의 그 미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때 여재훈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전화번호를 확인한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시은아, 왜 그래... 주사 맞는 게 당연히 좀 아프지. 하지만 주사를 안 맞으면 어떻게 낫겠어... 알겠으니깐 떼쓰지 말고, 의사 말 잘 들어.”전화를 끊고 나서 여재훈은 고은서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시은이가 아픈데 주사 맞기 싫다고 하네요.”고은서는 여시은의 이름에 반응이 컸다. 예전에 여시은에게 학대받다 죽은 쿠아가 떠올랐다. 그 기억 때문에 속이 불쾌해지고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말없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여재훈은 고은서의 반감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그는 조심
여재훈의 말을 들은 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아픈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밖의 여론이 여시은에게 불리해서 고은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일 것이다.요 며칠, 인터넷에서는 여시은과 관련된 뉴스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은서가 KK한테 도움을 요청한 것 외에도, 아마 곽승재도 뒤에서 힘을 써준 것 같았다.“원래 연회 다음 날에 시은이를 데리고 직접 사과드리려고 했는데, 며칠간 일이 좀 많아서 오늘로 미뤄졌어요.”여재훈은 이어 말했다.“오늘 아침에 갑자기 시은이가 열이 나서, 제가 혼자 찾아오게 됐습니다.”“은서 씨, 지난 일은 전부 시은이의 잘못입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여재훈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고은서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재훈 씨의 사과는 저한테 너무 과분해요. 다만 저를 나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고은서가 지난번 여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여재훈은 마음이 더욱 불편해져났다.“제가 도우미와 시은이의 말만 믿었네요. 시은이에게는 그 일에 대해 이미 훈계했고, 요 며칠 집에서 반성하고 있습니다.”고은서는 여시은이 그저 여재훈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하는 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여재훈은 여시은을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고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했다.고은서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자, 운전 중이던 여재훈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한적한 곳에 있는 개인 요리 식당에 도착했다.그 식당은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는 엄청 좋았다.정원에는 다양한 희귀한 꽃들과 식물들이 놓여 있었고 작은 인공 폭포와 휴식용 테이블과 의자들도 마련되어 있었다.입구 쪽의 돌 테이블 위에는 하얀색의 통통한 고양이 두 마리가 게으르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니 고은서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송민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저번에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길래, 나 진짜 겁먹었잖아.”고은서가 다시 한번 웃으며 잡담하듯 물었다.“민아야, 너 예전에 말했잖아. 너랑 네 오빠는 엄마가 다르다고. 그럼 네 아빠랑 네 오빠 엄마는 이혼하신 거야?”송민아는 사무실 밖을 슬쩍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말했다.“몰래 엄마한테 물어봤는데, 우리 오빠 엄마는 아빠랑 혼인신고도 안 했대. 둘이 약혼까진 했는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오빠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길 거절했대.”고은서는 눈썹을 찌푸렸다.‘설마 송민준의 엄마도 결혼 안 하고 그를 낳은 걸까?’지난번 고은서가 송민준과 함께 바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송민준은 어릴 때부터 보호만 받고 자라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고 고은서한테 말한 기억이 있다.그때 그의 말투는 평소의 부드러운 말투가 아니라 약간의 조롱 섞인 느낌이었다. 마치 그의 어린 시절이 순탄치 않았다는 듯이.‘혹시 송민준의 어머니가 결혼도 안 하고 그를 낳아서 상처를 받은 탓일까?’“은서야, 이건 진짜 너한테만 말한 거니까, 절대 우리 오빠한테 묻지 마!”송민아가 신신당부하면서 말했다.“오빠는 이 얘기를 누구한테도 한 적 없어. 분명히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 우리 엄마가 말하는 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더래.”“오빠는 혼자 살긴 해도 우리 엄마한테는 되게 예의 바른 거 있지. 나도 이 비밀 듣기 전까진 우리 둘이 같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난 줄 알았어.”고은서는 절대 이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송민준에게 묻지도 않겠다고 약속했다.“민아야, 혹시 너희 엄마가 네 아빠의 다른 연애 상대에 대해 말한 적 있어?”고은서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고 묻는 성격이었다.혹시라도 송민아의 어머니가 송민준 부모의 관계에 끼어든 거라면 송민아의 어머니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냥 어른들 옛날 연애사에 호기심이 생긴 거야. 만약 불쾌했
송민준의 단어 사용은 꽤 신박했다.그는 “어젯밤 그 일은, 네가 의도한 거야?”라고 물었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가 아니라.그러니까 송민준의 말뜻은 그가 어젯밤 일이 여시은을 고의로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고은서의 계획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건가?하지만 그 테라스는 비교적 한적했고 로마식 기둥이 시야를 가려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잘 알아채기 어려운 장소였다.고은서가 로비에서 넘어졌을 때 여시은은 빈 와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황을 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시은이 고은서를 민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그런데 어떻게 송민준은 고은서가 여시은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계를 쓴 걸 알아챈 걸까?고은서는 아예 직설적으로 물었다.“민준 오빠, 왜 그렇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어젯밤 내가 넘어졌던 게 자작극이라고 생각한 거야?”그 말을 듣자 송민준은 웃으며 물었다.“은서야,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냥 그 농장 영상 말이야, 그걸 일부러 어젯밤 그 시점에 터뜨린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알고 보니 송민준은 농장 영상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그날 송민준의 컴퓨터에서 영상을 확인하고 난 후, 송민아가 고은서에게 이 영상을 바로 여재훈에게 전달할 거냐고 물었을 때,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해 일부러 연회 이후에 결정하겠다고 말했었다.하지만 실제로는 연회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영상을 공개해 버렸다.송민준이 의심하는 것도 정상이다.“맞아.”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원래는 어젯밤이 지나고 여재훈 씨를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그 상황에서는 여시은이 그런 행동을 할 만한 동기를 증명하려면 그걸 꺼낼 수밖에 없었어.”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뜻은 없었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네 선택이 맞아, 난 항상 널 지지할 거니깐.”그의 표정을 본 고은서는 확신했다. 송민준은 고은서가 아직 그를 경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그의 성격상, 어젯밤 그녀가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송민준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