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 아닌 송민준과 송민아였다.송민아는 예전의 부잣집 아가씨 모습과 달리 간단한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직장 여성의 기품이 느껴졌다.옆에 있는 송민준은 맞춤 제작 정장을 입고 아주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멀리서만 보아도 상위자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고은서를 본 송민아는 약간 의아해하긴 했지만 먼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은서야, 너도 여기 밥 먹으러 온 거야?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그러게 말이야.”고은서가 나긋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반면 민시후는 성가시다는 듯 물었다.“오빠 따라온 거 아니거든요. 우리 오빠가 밥 사준대서 온 것뿐이에요.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요.”송민아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시후야, 내가 고른 곳이야. 민아랑 상관없어.”송민준이 옆에서 설명했다.민시후는 콧방귀를 뀌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랜만이에요, 은서 씨.”송민준이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인사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오랜만입니다, 민준 씨.”“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할까요?”송민준이 먼저 요청을 보냈다.“오빠, 그냥 우리끼리 먹어.”송민아는 민시후가 병원에 있을 때 고은서가 매일 찾아가서 함께 시간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이 가까이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행여나 민시후가 자신이 일부러 쫓아온 거라고 오해라도 할까 봐 황급히 송민준을 막았다.송민아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본 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요. 여기서 만난 데다가 다 서로 아는 사이인데 같이 식사해요.”민시후는 두 사람과 같이 밥 먹기 싫었지만 고은서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레스토랑에 들어간 후 네 사람은 웨이터를 따라 한 룸으로 들어갔다.송민준은 매너 있게 메뉴판을 고은서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은서 씨가 좋아하는 메뉴로 주문하세요.”“저는 다 괜찮으니까 민준 씨가 하세요.”
민시후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날 넘보지 마. 나 당신 매부가 될 생각 없어. 그리고 얼른 고은서한테 나랑 송민아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약혼도 그저 해본 소리라고 설명해줘.”“그만해.”고은서가 민시후를 쏘아보며 말했다.그녀는 단 한 번도 그와 송민아 사이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아마 송민아가 그에게 미련이 남아있을까 봐 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민시후는 고은서의 꾸지람 소리에도 화내지 않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알겠어. 네 말 들을게. 안 말하면 되지?”방금전까지만 해도 껄렁대던 그가 갑자기 처음 보는 온순한 모습으로 변하는 바람에 송민아와 송민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고은서도 할 말을 잃었다.저녁 식사는 예상 밖으로 평화롭게 끝났다.민시후는 시도 때도 없이 남친처럼 고은서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도중에 민시후는 손 씻으러 룸 안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고 송민아도 마침 웨이터를 부르러 밖으로 나가는 바람에 룸 안에 송민준과 고은서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송민준은 웃으면서 고은서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은서 씨, 시후가 여자애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이에요. 은서 씨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 같네요.”고은서는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혹시 민아 때문에 지금까지 사귀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민아가 내려놓겠다고 말한 이상 더는 시후한테 집착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마음씨는 착한 애예요.”“민아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민시후랑 더 깊이 알아가려고 그러는 거예요.”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마침 민시후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송 대표님, 요즘 해성에서 사업한다고 들었는데 이젠 해성으로 들어오려고 결정 내린 거야?”민시후가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그저 괜찮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시도해보려 한 것뿐이야. 해성으로 들어오려거든 아직 너무 이르잖아.”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고
응접실에 있는 곽승재를 본 송민아는 고은서를 힐끗 보았다.그러나 고은서는 그녀의 시선을 뒤로 한 채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민시후가 전에 곽승재가 융자에 관한 일을 직접 책임질 거라고 했는데 사실이었네.’곽승재는 제인 제약 응접실에서도 분망하게 주민기가 건네주는 서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고 매니저님, 오셨어요? 회의실 이미 다 준비되었으니까 먼저 들어가 계세요.”제인 제약의 직원이 고은서한테 인사하며 말했다.곽승재도 고 매니저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그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아직 근무 상태에 빠져 있어서인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차마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모습이었다.고은서를 본 그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녹아내리는 듯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고 매니저님.”주민기가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다시 삼키고 제인 제약 직원을 따라 그녀를 고 매니저라고 불렀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송민아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갔다.“고은서 씨!”문을 들어서려던 순간 여시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의실로 들여보내고 의아해하며 여시은을 향해 물었다.“시은 씨도 제인 제약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여시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저 이런 방면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아빠가 곧 GS그룹이랑 협력하게 되는데 미리 곽 대표님 곁에서 회사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해서 따라온 것뿐이에요.”여시은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저도 어쩔 수 없이 서류를 작성해서 곽 대표님한테 봐달라고 했는데 오후에 시간이 없으시다고 하는 바람에 직접 이곳으로 가져온 거예요.”‘민시후가 전에 여씨 가문이랑 GS그룹이 협력한다고 알려줬었는데 순리롭게 진행된 모양이네.’“곽승재 저기 있으니까 얼른 가봐요.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고은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은서 씨, 혹시 토요일에 시간 되나요? 제가 해성에서 집을 마련해서 토요일에 집들이하려고 하는데 은서 씨도 초대하고
그러나 바로 그때, 서연정이 곽승연이 고은서를 보고싶어 한다면서 본가로 와줄 수 없냐면서 연락이 왔다.그날 이후로 곽승연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 했는데 모처럼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그녀를 거절할 리가 없었다.곽승재는 의외로 고은서가 제인 제약에서 나올 때까지 그녀한테 말을 걸지도 않았고 미팅이 끝난 이후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아직 시간이 많았기에 고은서는 송민아를 먼저 회사로 데려다주기로 했다.“고은서, 곽승재가 아직도 너한테 미련 남아 있어 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고서야 제인 제약 같은 프로젝트에 직접 나설 필요가 없잖아.”송민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그래?”“그렇다니까.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으면서도 네가 발언하러 올라갈 때부터 너한테서 시선을 뗀 적이 없다니까. 엄청 미련 담긴 눈빛으로 널 바라보고 있었어. 엄숙한 자리만 아니었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서 민시후한테 보내주는 건데.”고은서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두 사람 사이 안 좋은 거 알잖아. 그만 약 올려.”“약 올리다니? 민시후한테 약간의 압력을 주려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으면 종일 자신밖에 모르면서 거만하게 군다니까. 잠깐만. 그러니까 너 지금 두 사람 사이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야?”고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전에 함께 어머니 묘에 다녀왔어.”송민아는 멈칫하더니 자세를 바꾸며 등을 좌석에 붙이면서 말을 이어갔다.“아줌마가 거의 사십 세가 되어서 민시후를 낳아서 엄청 이뻐했거든. 아줌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나도 장례식에 갔었어. 그리고 그곳에서 민시후가 슬퍼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전엔 누구한테도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 너한테 주동적으로 알려줬다는 건 널 신임하고 있다는 뜻일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너처럼 힘든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얘길 다 하고 그러는 거야?”송민아는 피식 웃으면서 답
이어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곽 회장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고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곽현수가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지?’그녀는 본가에서 곽현수와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서연정과 사이가 안 좋아서 본가로 안 오나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언니, 우리 사진 찍자.”곽승연이 좋아하며 그녀를 불렀다.고은서는 곽승연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반 시간 후, 서연정이 곽승연에게 먹일 약과 물을 들고 정원으로 찾아왔다.곽승연은 별다른 불만 없이 약을 먹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기뻐하며 고은서한테 함께 숨바꼭질을 놀자고 졸랐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이리도 유치한 유희를 놀자고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필경 그녀에게 있어서는 초등학교 때까지만 놀던 유희였으니까 말이다.“집에 있는 하인들이 승연이를 어린아이로 대하면서 함께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는데 아마 재미를 들인 모양이야.”서연정이 대신 설명해줬다.고은서는 곽승연과 놀아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곽현수와 마주치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서연정이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승연이 아빠는 어머니한테 불리워 가서 마주칠 일 없을 거야.”고은서는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본가 안으로 돌아갔을 때 서연정 말대로 곽현수와 전미자가 보이지 않았다.곽승연이 평소에 이 층에서 지내면서 이 층과 삼 층에서 많이 놀곤 해서 고은서는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숨바꼭질을 할 방과 범위를 정한 다음 그들은 함께 게임을 할 하인 몇 명을 더 불렀다.“승연이를 너무 얕보지 마. 사람 찾는데 엄청 능해.”게임 시작 전에 서연정이 고은서에게 미리 말해줬다.고은서는 처음에 서연정의 말을 별로 새겨듣지 않았는데 곽승연한테 여러 번 잡힌 이후로 서연정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믿게 되었다.승부욕이 생긴 고은서는 이번엔 확실하게 꽁꽁 숨겠다고 마음먹었다.이 층에 있는 방들
다행히도 넘어지진 않았지만 고은서는 순간 자신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굳이 숨바꼭질을 하나 이기겠다고 이럴 필요가 있나? 행여나 다치기라도 하면 완전 웃음거리가 되는 거잖아. 그래도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야.’고은서가 한숨을 내쉬면서 서랍을 닫으려고 할 때 서랍 안에 있던 나무 상자 하나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 안에는 아주 익숙한 물건 하나가 있었다.보라색 크리스탈로 만든 반달 모양의 머리핀이었는데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머리핀 같은 액세서리를 하도 좋아해서 열여덟 살 생일 때 고준석이 여러 가지 크리스탈 머리핀들을 그녀에게 선물해주기 위해 특별히 디자이너를 찾기까지 했는데 그 머리핀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런데 이것저것 바꿔 쓰면서 잃어버린 것도 많았는데 특히 반달 모양의 액세서리는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몇 년이 되었다.‘내 머리핀인가? 아니면 누가 똑같은 걸 사서 여기에 놔둔 건가? 어머니랑 할머니는 이런 색깔 모양의 액세서리를 별로 쓰지 않는데. 그리고 곽승연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해외로 가는 바람에 이런 낡은 물건을 여기에 둘 리가 없고. 하인이 머리핀을 나무 상자에 넣어서 여기에 두었다는 건 더 불가능할 텐데.’호기심이 생긴 고은서가 머리핀을 들고 확인해 봤는데 끝부분에 대문자 Q라는 문양이 박혀 있었는데 당시 디자이너한테 특별히 부탁한 것이었다.‘진짜 내 머리핀이잖아.’“고은서 씨, 여기 계셨어요?”고은서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승연이가 은서 씨를 찾고 있어요. 책상 아래 있는 작은 찬장 안에 숨으셨구나. 그래서 승연이가 찾지 못했던 거네요.”하인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은서 씨, 왜 그러세요? 뭘 보고 계시는 거예요?”‘본가에서 오랫동안 일 한 하인이라면 알지도.’고은서가 책상을 가리키며 물었다.“이 책상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도련님 책상인데요. 여기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 다 도련님 물건들이에요. 어르신께서 버리기
고은서는 순간 흠칫했다.‘곽승재랑 여시은을 결혼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아주 마땅한 일이긴 하지. 여씨 가문이 가지고 있는 힘과 배경으로 두 가문이 사돈을 맺게 되면 서로 아주 큰 이익을 얻게 될 거야.’“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직 고은서뿐이에요.”곽승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단순한 협력이라면 저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어요. 하지만 사돈을 맺으려 하거든 꿈 깨세요.”“곽승재, 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감히 나랑 대들어?”곽현수가 단단히 화난 모양이다.“사내애가 각종 기회를 이용해서 가문 기업을 더 크게 이끌어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일 사랑에 빠져있다는 게 말이 돼? 대체 언제쯤 철이 들 거야?”“철이 든다는 게 아버지께서 제안하신 결혼을 받아들이는 건가요? 결혼을 무기로 이용하려 한다는 게 하찮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곽승재가 반박했다.“너!”곽현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젠 아버지까지 무시하려 드는 거야? 네가 백씨 부녀한테 한 짓들은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줬잖아. 다 널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자꾸 나랑 맞서지 못해서 안달이나 하는 건데!”“정말 저를 위해서 생각하신다면 다신 저한테 아무와 결혼하라는 소리 하지 마세요.”곽승재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백유미가 왜 그렇게 겁도 없이 흉악 무독한 짓을 저질렀겠어요.”“내가 도와준 게 뭐 어때서! 네 승엽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해준 일이 얼만데. 큰 공로는 없어도 고생만은 수없이 많이 했어. 내가 도와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진짜 아저씨만 도와주신 거예요?”곽승재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느껴졌다.“백유미를 해성으로 들이고 돈까지 주면서 저와 고은서 사이를 이간질하게 했잖아요. 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고은서도 곽현수가 왜 자신을 싫어하는지 왜 백유미를 도와 자신을 해치려 하는 건지 너무 궁금해서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고씨 가문이 뭐가 볼 데가 있다고. 그리고 고은서한테 별 감정도 없으면서
고은서는 곽승재의 품에 나오면서 고개를 저었다.“괜찮아.”곽승재는 품이 갑자기 허전해 나면서 약간 속상하긴 했으나 티 내지 않았다.“내려가자.”소란 소리를 들은 서연정과 전미자도 계단 쪽으로 다가왔다.“승재야, 무슨 일이니? 네 아버지랑 회사 일에 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니 왜 갑자기 다투기 시작한 거야?”“의견이 맞지 않아서 말다툼 좀 한 것뿐이에요.”전미자한테 걱정 끼치기 싫었던 곽승재는 아주 간결하게 답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서연정이 걱정하면서 물었다.“없어요.”곽승재는 약간 어색해하며 답하고는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먼저 은서를 데려다주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나 차 가지고 왔어. 힘들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 할머니와 어머니랑 얘기 나눠.”고은서는 그와 거리를 두며 거절했다.“은서야, 시간도 늦었고 한데 네 차는 본가에 두고 그냥 승재 차에 가. 내일 기사한테 네 차를 가져다주라고 할게. 금방 아버지랑 싸웠는데 널 데려다주면서 바람이라도 쐬게 해.”전미자가 고은서를 달랬다.“걱정하지마. 나도 예원 별장으로 돌아갈 건데 그저 가는 김에 널 데려다주는 것뿐이야.”곽승재가 말하면서 먼저 밖으로 나갔다.“저 자식이. 고집 하나는 세 가지고.”전미자가 혀를 끌끌 차며 고은서에게 말했다.“은서야, 얼른 가 봐. 사실 승재도 네가 본가로 온 걸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꺼려할까 봐 참고 돌아오지 않았던 거야.”고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미자와 서연정에게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곽승재는 이미 차를 문 앞에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도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그는 약속한 대로 가는 길에 그녀한테 말을 걸지 않고 운전만 했다.고은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차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했다.종일 바쁘게 보낸 탓인지 아니면 차 안의 노래가 너무 유유한 탓인지 그저 눈만 감고 휴식하려던 고은서는 어느새 진짜 잠들어버렸다.깨어났을 때 그녀는 은은한 설송향이 나는 검은 외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