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 씨, 은서 씨와 시은이 일에 관해서는 정말 유감이에요. 시은이가 사람을 시켜 은서 씨를 상하게 했다고 의심하는 부분에 대해서 저도 정말 그런 줄 알고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보았는데 경찰에서 내놓은 결과처럼 시은이가 한 짓이 아닌 것 같아요.”여재훈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시은이가 그런 나쁜 짓을 할 거라 믿고 싶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만 정말 그 애 잘못이라면 절대 두둔할 생각은 없어요.”여재훈의 딸을 위한 변명에 고은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억울함을 느꼈다. 왜 억울함일까?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여재훈은 그녀의 아버지도 아닌데 자신의 딸을 믿는 여재훈에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여 대표님, 굳이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 여 대표님은 잘못 없으세요.”여시은이 여재훈을 다루는 방법을 아는 것은 당연했다. 필경 두 사람이 부녀지간인데 고은서가 손에 쥔 증거도 없이 자기 편을 들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은서 씨, 지금 바쁘지 않다면 식사라도 같이 하시죠?”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죄송해요. 지금은 시간 내기 어려워요. 곧 회의가 있어서요.”여재훈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럼 너무 무리하지지 말고 건강 챙겨요.”“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고은서가 회의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단은숙이 불쑥 나타났다.“은서야, 방금 누구랑 통화했어?”“아는 분이요.”“누구?” 단은숙이 캐물었다.“왜 그러는데요?”고은서가 반문했다.“그냥 이상해서... 너 예전에 엄마랑 다툴 때 항상 그런 태도였어. 그땐 너희 엄마가 너무 오냐오냐 받아줘서 그런 줄 알았는데 너희 엄마가 그러시더라. 네가 일부러 차갑게 구는 건 사실 자기를 어르고 달래 달라는 신호라고.”고은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여재훈을 존중하는 건 그가 어른답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각별히 친근감을 느꼈던 건데 단은숙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여재훈에게 어리광을 부린 격이 되고 만다. 단은숙이 제멋대로 이해한 것이라 생
고은서는 외숙모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고려 안 해요. 앞으로 저에게 선 볼 사람도 소개하지 말고 누구랑 만나보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저 남자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예전이라면 단은숙은 이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은서가 정말로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은서야, 나도 네 능력을 알아. 하지만 연애랑 사업은 별개잖아? 조건 좋은 상대 만나 둘이 함께하면 더 좋지 않을까?”단은숙은 황급히 덧붙였다. “걱정 마, 다시는 선 자리 안배 안 할게.”하씨 가문 사태가 이렇게 커진 것에 대해 단은숙도 후회가 없진 않았지만 결과가 생각보다 순조로워 그 마음마저 없어졌다.“그래도 좋은 상대라면 생각해 볼 수 있잖아?” 고은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외삼촌을 찾아가 새 향료와 향수 제조 문제를 논의했다.회의 중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 표시를 보고 고은서는 의아해졌다. 여재훈이었다.여시은이 경찰서에서 풀려난 후로 두 사람은 보지 못했다. 여재훈이 몇 번이나 식사 초대를 했지만 고은서는 업무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었다. 회의실 문을 나서며 그녀는 물었다. “여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은서 씨, 지금 어디에 있어요? 괜찮아요?” 여재훈의 목소리에 다급함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별일 없어요.”여재훈은 점심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하씨 가문 사건과 고은서의 이름을 들었다고 했다. 맞선 자리에서 하씨네 모자가 고은서을 모욕했는데 이게 송민준의 분노를 샀다는 것이다.고은서는 한 사건이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 몰랐다. 여재훈까지 알게 되다니. 그런데 여재훈이 왜 전화까지 하면서 그녀의 정황을 묻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시은이 전에 했던 일 때문에 보상이라도 하려고 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은서 씨, 내가 전화한 건 시은이 일 때문이 아니에요. 무슨 보상 같은 거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여재훈은 고은서의 생각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이렇게 알고 지내는 것도 인연
곽승재는 눈썹을 찌푸렸다. 송민준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교활했다.다음 날, 고은서가 잠이 채 깨기도 전에 송민아의 전화가 걸려왔다.“은서야, 어제 또 정신 나간 것들이 회사 앞에서 난리를 쳤어?” 송민아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송민아가 회사에 가서 들은 줄 알고 아직 이른 시간을 보며 말했다. “너 회사에 이렇게 일찍 갔어? 너무 열심인데?”“회사 갈 필요도 없이 인터넷에 지금 김지숙이 널 따라다니며 욕하는 영상이 퍼졌어!”어제 누군가가 빌딩 앞에서 찍은 영상을 올린 게 분명했다. 고은서는 머리가 아파났다. 어제 퇴근할 때 이미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신속히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영상이 퍼졌다니 참 예상 밖이었다. 다행히 인터넷 뉴스는 하루에도 수십 개가 나오니 이슈는 금방 사그라들 것이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 왜 너를 그렇게 욕하는 거야?” 송민아가 물었다. 고은서는 사건 경위를 설명하며 송민준이 와서 일을 해결했고 마지막에 김지숙이 처리된 결과까지 전했다.“그나마 다행이야. 나는 네가 손해 볼가 봐 걱정했잖아! 그래도 이번엔 우리 오빠가 잘했네.” 송민아가 칭찬을 이었다. “은서야, 너 그 공은 인정해 줘야 돼!”말을 마치자마자 송민아는 고은서가 말할 새도 없이 잽싸게 전화를 끊었다.고은서는 먼저 MQ 사무실로 향했다. 향료 문제를 확인해야 했을 뿐 아니라 삼촌에게 하씨 가문의 사태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외숙모의 성격상 하씨 가문의 불행을 알게 되면 온 세상에 알리며 통쾌해할 테니 조심하라고 당부해 두는 게 좋을 듯했다. 비록 송민준과 곽승재가 하씨 가문이 고씨 가문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보였다.MQ에 도착하자 뜻밖에도 외숙모가 먼저 와 있었다. 인터넷 영상을 통해 김지숙이 행패 부린 사건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그 여자가 뻔뻔하게 왜 너를 찾아와 괴롭히니?” 단은숙이 물었다. 고은서의 상황 설명을 들은 단은숙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곽승재는 기분이 울적했지만 그래도 고은서가 자신을 피하는 것보다는 현재 상황이 퍽 나아 보였다. 적어도 고은서가 아직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곽승재의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곽승재는 고은서와 계속 여시은의 문제를 논의했다. 육현석이 계속 알아보는 중이며 자신도 WOR 게임 회사 주최 개발팀을 조사한 상태라고 말했다. 여시은이 게임을 모방할 의도가 있다면 핵심 데이터가 필수적이므로 그들을 조사하는 게 중요했다. 이 생각은 고은서와도 일치했다.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오자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직 식사 전이던 곽승재도 함께 먹기로 했다. 아주머니가 한 달걀 프라이는 바삭하면서도 촉촉해 정말 맛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던 고은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줌마, 계란프라이 솜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며칠 전 샌드위치에 계란은 태웠어요?”말이 끝나자마자 수프를 마시던 곽승재가 갑자기 사라에 들려 기침을 했다. 아주머니의 표정도 어색해졌다. “불을 제대로 조절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 다음엔 조심할게요. 두 분 천천히 드세요. 저는 부엌 좀 정리할게요.”아주머니는 급히 부엌으로 사라졌다.고은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곽승재에게 물었다.“아줌마 집에 무슨 일 있나 봐. 요즘 아줌마가 이상해.”곽승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래? 난 평소랑 별다른 차이 못 느끼겠는데?”그때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민준이 그녀가 귀가했는지 확인하며 김지숙이 경찰서로 끌려가 구두 경고를 받았고 재차 그녀 앞에 나타나 행패를 부릴 시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서명했다고 알렸다. 고은서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통화를 끊었다.이미 돌아오는 길에 사건 경위를 알고 난 곽승재가 송민준에 대한 불만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송민준이 이렇게 널 위해 나서주는데 감동 안 해?”고은서는 곽승재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심한 척 야채를 짚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너무 감동
고은서는 곽승재의 난처함과 후회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이 곽승재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승재 씨가 꼭 나를 도와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민준 오빠, 식사는 다음에 해요. 오늘 일은 고마웠어요. 저 먼저 가볼게요.”방금 김지숙이 벌인 소동 때문에 대문 앞에 모인 구경꾼들 그리고 휴대폰으로 찍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며 고은서는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송민준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민아 말로는 네가 오후 내내 바빠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던데 가서 간단하게라도 식사하고 가는 게 어때?”곽승재와 여시은의 문제를 논의하고 싶었던 고은서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다음에요.”고은서의 거듭된 거절에 송민준은 더는 고집하지 않았다.고은서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곽승재를 흘깃 쳐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차가 출발하기 직전 뒷문이 열리며 곽승재가 차에 올라탔다.너무 배고파 시비할 힘조차 없어 창가에 기대어 앉은 고은서에게 곽승재가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주었다.“너 초콜릿 안 먹잖아. 왜...”“널 위해 준비한 거야. 네가 저혈당이라고 아주머니가 말씀하셔서 비상용으로 챙겨뒀었어. 그런데 너 내가 초콜릿 안 먹는 거 기억하고 있었구나.”고은서는 초콜릿 한 알을 집어 입에 넣고는 덤덤하게 답했다.“그냥 물어본 거야, 다른 의미 두지 마.”곽승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은서야, 예전엔 정말 너에게 잘해주지 못한 거 같아.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지. 다 내 잘못이야. 전에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할게.”과거에도 공식적인 사과를 받았었지만 곽승재의 이 한마디에 고은서의 가슴 한구석은 또 시큰해났다. “나도 잘못이 있어. 당신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결혼했고 결혼 생활도 너무 너한테만 매달려 널 귀찮게 했어. 바꿔서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런 상대방은 싫을 것 같아.”“아니야! 난 처음부터 너를 좋아했어, 그 마음을 그땐 몰
“민준 오빠, 날 위해 나서준 건 감사하지만 내가 겪은 작은 억울함 때문에 하씨 가문이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해.“그녀의 말에 송민준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은서야, 허씨 가문은 자업자득이야. 그들을 동정할 필요 없어.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멍청한 짓이야.”고은서는 비록 상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약육강식 법칙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송민준의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난 그들을 동정하는 게 아니야. 단지 우리 가문에 안 좋은 영향이 미칠 가봐...”“그건 두려워할 필요 없어.” 송민준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 대표가 판단해서 잘 처리할 거야.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그 집안사람들 아마 다시는 너희 가문의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고은서는 송민준이 평소에 비해 달라 보였다. 냉혹한 기운이 송민준을 감싸는 것이 마치 하씨 가문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짓밟을 것 같은 위압감이 몰려왔다.‘민시후와 곽승재가 말했던 송민준의 수완이 정말이구나.’그녀는 민시후가 자신이 송민준과 거리를 두는 이유를 설명할 때 표정이 떠올랐다. 거기다 오늘 송민준이 김지숙에게 경고할 때의 그 차가운 표정이 떠올라 낯설기만 했다. 만약 C선생이 정말 송민준이라면 정말 상대하기 버거운 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은서야, 밥 안 먹었지? 나랑...”송민준이 같이 식사하자는 말을 꺼내기 전에 곽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괜찮아?”송민준은 곽승재가 잡은 고은서의 손을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곽 대표님, 은서는 괜찮아요. 일도 이미 해결했고요.”“당신이 왜 여기 있죠?” 곽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은서와 식사나 하려고 왔다가 우연히 이 상황을 목격했을 뿐입니다.”“송 대표님은 은서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나타나네요.”곽승재의 불편한 표정에도 송민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송민준, 당신이 뭔데 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집안을 이렇게 몰아붙여! 정말 우리를 만만하게 본 거야?”김지숙이 송민준을 향해 날카롭게 따졌다.송민준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김 여사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군요. 제가 언제 하씨 가문을 얕잡아 보았다는 말씀인지?”“모른 척 작작 해! 북성의 대형 프로젝트에서 우리 남편을 배제한 건 공개적으로 우리 집안이 당신에게 밉보였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고 뭐야?“고은서는 이제야 상황이 이해됐다. 비록 상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 세상이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송민준이 외부에 하씨 가문이 송씨 가문을 건드렸다는 신호만 보내면 송씨 가문의 환심을 사려는 자들이 앞장서 하씨 가문을 공격할 테니 송민준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김 여사님, 저는 단지 그쪽 집안을 진흙탕 같은 존재로 보았을 뿐입니다. 진흙탕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죠.”김지숙의 분노에도 송민준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김지숙은 상상도 못 한 모욕에 경악했다.이때 멀리서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고은서가 아까 신고했던 터라 경찰이 도착한 것이다.김지숙은 남편의 상황이 열악한 데다가 자신 때문에 일이 더 커질까 봐 두렵고 초조해졌다. 그녀는 또다시 머리 숙여 고은서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대표님,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 꼭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겠습니다!”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김 여사님의 협박과 욕설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경고는 필요하겠죠.”고은서는 눈앞에 닥친 일이 너무 많아 더 큰 화를 부르고 싶지도 않았고 누군가와 척지기도 싫었다.고은서의 말에 수긍한 김지숙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송민준을 바라봤다. 왠지 송민준은 쉽게 끝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 대표님께 전해주세요.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면 하씨 가문도 다시 회복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또다시 경솔하게 움직이면 진짜로 파멸이 뭔지 보게
김지숙은 듣자마자 서둘러 부인하며 자신이 집에 돌아간 뒤 이번 일을 깊이 반성했고 고은서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존엄을 버린 처절한 애원에 가까웠다.마침,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왔다. 그는 이쪽 상황을 보고는 급히 차에서 내려 다가왔다.“고 대표님, 괜찮으십니까?”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땅에 무릎 꿇은 김지숙 모자를 보며 말했다.“김 여사님, 단지 사과를 하려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냥 일어나서 정상적으로 얘기하세요.”어제 김지숙의 태도는 분명 거만했고 말도 매우 무례했다. 고은서는 사과를 받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까지 받아들이기는 버거웠다. 하지만 김지숙은 일어나지 못했다. “고 대표님, 오늘 관련 부문에서 우리 그이를 데려갔어요. 누가 그가 중대한 범죄에 연루됐다고 신고했대요. 너무 억울해요. 그는 그런 불법적인 일을 한 적이 없어요...”고은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알고 보니 하씨 가문에 큰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니 김지숙이 이렇게 체면을 버리고 무릎까지 꿇은 것이다.세간의 소문에 따르면 부동산 열풍이 한창일 때 그들은 무자비하게 불법 수단을 동원해 공사권을 따내면서 막대한 자산을 축적하여 오늘날의 하씨 가문으로 거듭났다고 한다.“지금 회사 내부도 난리예요. 별별 소문이 다 퍼지고 있고요. 고 대표님, 넓은 마음으로 저희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실 수 없을까요?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김지숙은 계속 애원했다.“김 여사님, 이 일은 저와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도 전혀 몰라요. 지금 잘못된 사람한테 사정하고 있어요.”고은서는 냉정하게 말했다.“아뇨, 절대 아니에요. 고 대표님, 앞으로는 저희가 고 대표님이 다니는 길에도 나타나지 않을게요.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네?”김지숙은 애원하며 말했다.고은서는 이 일에 송민준이 얽혀 있음을 직감했다. 김지숙은 분명 송민준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
회사 관계자들을 소집한 고은서는 대책 마련 회의를 열었다. 물론 그녀는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불필요한 소문이 퍼지면 회사에 더 큰 타격일 수 있었다.하지만 어떤 위기든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대비해 고은서는 직원들에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사전 대책을 세우라고 당부했다.사실 이미 예비 방안은 준비돼 있어 저작권 분쟁 시 이기는 건 어렵지 않지만 승패와 상관없이 명예와 타이밍을 잃으면 그녀는 패배자일 뿐이었다. 반대로 여시은은 이익을 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고은서를 무너뜨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회의를 마친 고은서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곽승재와 송민준 같은 인물들이 대기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피곤함에 어깨를 주무르며 퇴근하려고 나선 고은서가 밖에 나와 보니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쥔 그녀는 빨리 집에 가서 뭐라도 먹고 싶었다.운전기사에게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던 순간 한 남녀가 달려왔다. 고은서가 알아보기도 전에 두 사람이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누구...?”낯선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고 대표님, 어제는 제가 눈이 멀어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저희를 용서해 주세요!”고은서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만했던 김지숙이 갑자기 이렇게 무릎을 꿇다니?고은서가 멍하니 서있는 사이 김지숙이 아들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며 소리쳤다. “말해! 왜 말이 없어!”아들이 항의했다.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사과해!”김지숙이 다시 때렸다. “멍청한 녀석! 어제 고 대표님께 했던 막말들을 잊었어? 당장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 안 하면 네 카드 전부 정지할 거야!”그 말에 아들이 주저앉으며 사과했다. “고 대표님, 용서해 주세요.”김지숙이 이어 말했다. “고 대표님, 저희가 정말 잘못했어요.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말들을 했죠. 고 대표님 같은 능력 있는 분과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