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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류한나
말투만 들어보면 언제는 사정을 봐준 듯싶었다.

고은서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며, 행여나 이혼을 빌미로 명성이나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이라니, 자랑거리도 아닌데 할 일이 없어서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겠냐는 말이다.

“단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래도 걱정된다면 이것도 조항으로 만들어 협의서에 추가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조롱이 가득한 미소를 짓는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는 대뜸 빈정이 상했다.

“시간 끌지 말고 사인해.”

마치 그녀가 시간을 끌었던 것처럼 말하다니?

곽승재와 굳이 실랑이할 생각이 없는지라 그녀는 펜을 들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 이름을 썼다.

“이제 네 차례야.”

고은서는 펜과 협의서를 테이블 반대쪽에 있는 곽승재 앞까지 쭉 밀어 보냈다.

이미 프린트까지 했는데 미리 사인이나 할 거지, 대체 시간 낭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판이다.

아니꼬운 듯한 고은서의 태도에 곽승재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어차피 곧 끝날 관계라서 조금만 더 참아주기로 했다.

펜을 들고 사인하려던 찰나 별안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연락처를 확인하자 할머니의 개인 간병인 장순이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장순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할머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의사 선생님은 불렀고, 얼른 댁으로 돌아오셔야 할 것 같아요.”

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승재는 긴 다리를 움직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어디 가!”

고운서가 버럭 외쳤다.

“사인 안 해?”

곽승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싸늘한 얼굴로 고은서를 노려보았다.

“네가 꾸민 짓이지?”

고은서는 어리둥절했다.

“내가 뭘? 전화한 사람이 누구였는데?”

일부러 곽승재와 멀리 떨어져 앉은 탓에 상대방이 꽤 급한 상황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을 뿐 통화 내용까지 들리지 않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인지는 몰랐다.

진지한 표정의 고은서를 보자 곽승재도 꼬치꼬치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은서, 우리 할머니 건드리면 죽는 줄 알아.”

말을 마치고 나서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의 반응과 대화에서 전미자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결국 서둘러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장순이한테서 할머님이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자 그녀도 서둘러 구청을 나섰다.

전미자는 항상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곽승재와 결혼하게 된 일등 공신일 뿐만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화풀이해 주기도 했다.

이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전미자가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단지 전생에서는 너무 큰 실망감을 안겨드렸을 뿐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할머니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으나 제 코가 석 자인 지라 더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이번 생에는 비록 더는 손자며느리가 될 수 없지만, 전미자가 베푼 친절은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주차장에 곽승재의 차는 이미 사라졌고, 고은서는 부득이하게 택시를 잡아 최대한 빨리 곽씨 일가 본가로 향했다.

거실로 직행하자 상상 속 의사들이 들락거리고 도우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광경과 전혀 달랐다.

의자에 반듯한 자세로 앉은 전미자는 아픈 기색이란 찾아보기 힘들었고, 화가 난 듯 노기등등한 눈빛으로 곽승재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 겁도 없이 감히 나 몰래 은서와 이혼하려고 해?”

“할머니, 진짜 고은서가...”

곽승재가 입을 떼려는 찰나 전미자가 대뜸 지팡이로 그를 때렸다.

“어디서 가당치도 않은 변명을 해? 은서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혼이 웬 말이야? 아주 내가 화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전미자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기침까지 했다.

“할머니!”

고은서가 급히 뛰어갔다.

그녀를 보자마자 전미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은서, 마침 잘 왔어. 이 할머니한테 얘기해 봐. 저놈이 너한테 이혼하자고 강요한 거지?”

고은서는 곽승재를 흘긋 쳐다보았다. 흑요석처럼 까만 눈동자에는 싸늘한 분노가 언뜻 스쳐 지나갔다.

만약 전미자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이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은서는 왜 노려봐!”

전미자는 또다시 지팡이로 곽승재를 내리치더니 고은서를 향해 말했다.

“은서야, 걱정하지 말고 사실대로 얘기해. 이 할머니만 믿어.”

고은서는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내 노부인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할머니, 오빠가 이혼하자고 한 거 아니에요. 제가 먼저 제안했거든요.”

전미자는 고은서의 손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은서야,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할머니한테 말해. 사과받을 일은 사과받고 매를 맞아야 한다면 할머니가 대신 때려줄게. 다만 이혼 갖고 장난치지 마.”

아직도 자신을 믿지 않는 전미자 때문에 고은서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절 아끼는 거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도 농담 아니에요. 물론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고 충분한 고민을 거쳤거든요. 저 이혼할 거예요.”

단호한 고은서의 표정을 보자 전미자의 안색도 사뭇 진지해졌다.

“은서야, 할머니 따라 방으로 오너라.”

...

30분 후, 고은서는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전미자를 부축하고 거실로 돌아왔다.

노부인은 씩씩거리며 곽승재를 노려보았다.

“은서 데리고 이만 가 봐. 만약 나 몰래 이혼한다는 소리가 또 들린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곽승재는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콧방귀를 뀌더니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이놈이!”

전미자는 대뜸 욕설을 퍼붓더니 안쓰러운 얼굴로 고은서의 손을 잡았다.

“은서야, 할머니랑 약속했다?”

“그럼 할머니도 약속해주세요. 다음 달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이혼을 반대하지 않기로.”

“만약 승재가 너한테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떡할 거야?”

전미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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