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8화

Author: 류한나
고은서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전생에 무려 8년을 목이 빠지라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건 달랑 이혼협의서 한 장, 그리고 백유미와 결혼했다는 소식뿐이지 않은가?

그런 남자가 어찌 단 몇 주 만에 그녀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는 말이다.

“할머니는 만약 승재가 우리 은서의 좋은 점을 발견해서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도 이혼하고 싶냐는 뜻이야.”

전미자가 다시 물었다.

노부인의 잔뜩 기대하는 눈빛 속에서도 고은서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생에는 어떻든 간에 곽승재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사랑 때문에 상처받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곽승재와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맞이할 생각이다.

...

본가 거실을 나서자 고은서는 싸늘한 얼굴로 차에 앉아 있는 곽승재를 발견했다.

이혼한다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아무런 소득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곽승재는 그녀와 전미자가 짜고 치는 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차에 타면 추궁과 모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고은서는 그를 무시하고 택시 타고 가려고 했다.

“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곽승재는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괜찮아, 어차피 가는 길도 아닌데.”

고은서도 매섭게 쏘아 붙었다.

이혼을 못 해서 짜증이 난 건 매한가지라 스스로 제 무덤을 파서 곽승재의 화풀이를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고은서!”

곽승재의 말투에 협박이 담겨 있었다.

“소리는 왜 질러?! 그렇게 능력 있으면 나한테 따지는 시간에 이혼 수속이나 하지?”

고은서가 화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이런 말투로 그를 대한 적은 처음이고, 심지어 반박까지 하다니?

곽승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이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의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고은서는 차에서 내리는 곽승재를 발견했고,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이미 덥석 붙잡히고 말았다.

“이거 놔!”

결국 다급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그의 팔뚝을 콱 물었다.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곽승재는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목덜미를 잡고 차에 쑤셔 넣었다.

“출발해요.”

곧이어 주민기한테 명령했다.

차는 이미 시동이 걸렸고, 어차피 도망치기는 글렀기에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로 곽승재를 찍으며 경고했다.

“나한테 감히 손찌검이라도 한다면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신고?”

곽승재는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콧방귀를 뀌더니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은 태산 같았고, 고은서는 저도 모르게 압박감이 느껴진 탓에 휴대폰을 든 손이 움찔거렸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센 척하더니 긴장하기는?”

곽승재는 피식 웃으며 팔을 번쩍 들었고, 이내 선명한 이빨 자국이 드러났다.

“아주 기를 쓰고 깨물었나 본데? 설령 너한테 손찌검해도 정당방위에 속하지 않겠어?”

이에 고은서는 한시름 놓았다.

전생에 곽승재는 그녀를 아무리 혐오하고 싫어해도 손찌검한 적은 없었기에 여자를 때리는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이때, 한 뼘 거리를 사이에 둔 곽승재의 몸에서 은은한 솔잎 향이 풍겼는데 괜스레 불편한 느낌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확 밀쳤다.

고은서가 다시 손을 댈 거로 예상치도 못한 곽승재는 결국 무방비 상태에서 밀려나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자칫 차창에 부딪힐 뻔했다.

“고은서, 내가 만만해?!”

그가 버럭 외쳤다.

고은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쏘아붙였다.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자기가 약해서 밀려나고는 왜 내 탓 해?”

곽승재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여태껏 강하게 나온 적은 물론 비아냥거리는 말도 해본 적이 없는 고은서인데 눈앞의 여자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잔뜩 서 있었다.

“고은서, 그동안 널 과소평가했네.”

그는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되레 웃음이 나왔다.

“이제 머리 쓸 줄도 아나 본데 이혼 소동이 커지니까 주의력 돌리는 방법은 또 어디서 배웠대?”

“내가 뭘!”

고은서는 곽승재의 말투가 괜히 거슬렸다.

“너보다 이혼이 간절한 사람은 나거든? 할머님이 기어코 생신까지 기다려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곽승재와 결혼하기 전 그녀는 전미자에게 자신만만한 말투로 사모님 노릇을 톡톡히 하고, 결혼생활을 굳건히 지키며 곽승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맹세했다.

그러나 고작 1년 만에 약속을 깨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따라서 방 안에서 전미자는 그녀의 마음을 거듭 확인한 후 속상한 얼굴로 생일날에 손자며느리도 없이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우선 생일이 지난 다음 다시 얘기하자고 부탁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승낙했을 뿐이었다.

“고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양심에 찔리지도 않냐?”

곽승재가 냉소를 지었다.

“만약 정말 이혼하고 싶다면 할머니는 왜 끌어들이는데?”

“그런 적 없어. 할머니가 어떻게 아셨는지 나도 몰라.”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설마 내가 할머니한테 얘기했겠어?”

불신과 짜증으로 가득한 곽승재의 얼굴을 보자 고은서는 갑자기 논쟁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금 다시 구청에 가서 이혼해.”

고은서가 쌀쌀맞게 말했다.

“할머니한테는 우선 비밀로 하고, 생신이 지나면 말씀드리자.”

“됐어, 연기 그만 해.”

곽승재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났다.

“설마 모르는 척하는 거야? 할머니께서 진작에 사람을 보내 구청에 가서 우리가 제출한 이혼협의서를 회수했거든? 이제 와서 능청스럽게 이혼한다고? 나만 할머니한테 한 번 더 혼나게 하려고?”

이에 고은서는 넋을 잃고 말았다.

전미자가 이렇게 빨리 움직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사람을 보내 이혼협의서를 회수할 정도면 앞으로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도 감시당하기 마련일 것이다.

몰래 이혼하는 건 더는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고은서도 결국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렇다면 서로 몇 주만 참아. 할머니 생신이 지나면 즉시 이혼할 거로 약속할게.”

곽승재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하려는 찰나 휴대폰 벨 소리가 문득 울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추민수
근데 이혼협의서를 왜 구청에 접수하나요? 가정법원이 아니라...구청은 법원판결이 나면 신고하면 끝
VIEW ALL COMMENTS

Latest chapter

  • 어게인, 비긴   제1316화

    고은서는 처음 이런 곳에 오기도 했고 여재훈이 직접 얘기를 꺼냈기에 거절하지 않았다.“여 대표님, 번거롭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여재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번거롭긴. 하나도 번거롭지 않아.”고은서는 여재훈과 함께 아주 고풍스러운 홀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해 고은서가 초대장을 꺼내려는데 스태프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그녀와 여재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여 대표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여재훈의 파트너로 오인한 스태프를 보며 고은서가 바로잡으려는데 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 씨는 초대를 받고 파티에 참석했습니다. 존중을 표해 이름을 부르는 편이 좋을 듯 싶은데요. 고은서 씨는 혼자서도 충분히 빛나는 게스트이지 누군가의 부속품이 아닙니다.”고은서는 여재훈이 이런 디테일까지 챙기며 대신 나설 줄은 몰랐기에 존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재훈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믿음이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어 스태프는 바로 고은서에게 예의를 갖추며 손을 내밀었다.“고은서 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고은서도 더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여재훈과 함께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많은 서예 작품과 그림이 걸려 있었고 모양이 특별한 분재들도 보였다. 거기에 고풍스러운 의자와 병풍까지, 고은서는 고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홀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티브이에 자주 나오는 업계 선배들도 보였다. 그들은 일반 파티처럼 화려하게 차려입기보다는 대부분 캐주얼한 복장이었고 다가오는 여재훈을 보며 활짝 웃더니 몇 명은 여재훈에게 인사하려고 마중 나오기까지 했다.“여 대표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옆에 계신 분은 따님인가요?”한 사람이 물었다.여재훈이 얼마 전 딸의 회사를 운영 중단하게 했을뿐더러 그 딸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든 이런 장소에서 그런 기분 나쁜 얘기를 꺼낼 사람은 없었다.“따님 참 예쁘네요, 아우라도 뛰어나고. 여 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옆에 있던 사람이 칭찬을 늘어놓자

  • 어게인, 비긴   제1315화

    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마음이 다시금 불안에 휩싸였다.어젯밤 그가 대답을 듣지 않기로 한 이유도 고은서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답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은서야, 나...”“대답해 줄게.” 고은서는 그의 말을 자르며 단호히 말했다.“시후 씨가 정말로 그걸 원한다면 나는 거절하지 않을 거야.”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에 곽승재는 충격을 받은 듯 심장이 곤두박질쳤다.고은서가 용서하든 말든 묵묵히 지켜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이 대답을 듣고 난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컸다.민시후는 송민준과 달랐다. 고은서는 송민준을 경계했지만 민시후는 완전히 신뢰했었다.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곽승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당시 민씨 가문의 강력한 반대만 없었어도 민시후가 다쳤을 때 고은서는 주저 없이 그를 간호했을 것이고 고백도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녀의 거절하지 않겠다는 말은 결코 일시적인 충동적 발언이 아닐 것이다. 진심 같았다.머릿속에 두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이 떠오르자 곽승재는 아무렇지 않은 척조차 할 수 없었다.앞에 선 가냘픈 고은서를 바라보며 곽승재는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이렇게나 두려울 줄 알았다면 성아연이 무슨 말을 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자신의 태도가 조금만 덜 냉랭했더라도 그녀가 이정도로 자신에게 미련 한 점 남지 않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막급이었다.곽승재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걸음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쓸쓸한 뒷모습에 고은서의 마음이 조금은 아팠지만 그를 잡지는 않았다....며칠 후, 고은서는 금융계 정기 회합에 초대받았다.고급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로 유일 투자의 성장 덕에 겨우 초대 권한을 얻은 것이다.파티는 럭셔리호텔이 아닌 고급 프라이빗 관저에서 열렸다.고은서는 단아한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현장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서야.”여재훈이었다.“여 대표님?” 고은서는 다소 놀랐다. 이런 가벼운 행사에 그가 직접 참석

  • 어게인, 비긴   제1314화

    홍두 팔찌의 출처를 잘 알고 있는 곽승재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고은서는 곽승연이 손을 들 때부터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과연 곽승재의 눈빛이 흐려지며 조금 전까지의 미소가 사라졌다.자신의 처사가 적절치 않았음을 인정한 고은서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승연아, 맛있으면 많이 먹어. 오빠는 신경 쓰지 말고.”곽승연은 오빠가 말이 없자 다시 닭 날개를 자신의 그릇으로 되돌렸다.식사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곽승재의 기분만은 가라앉은 듯했다.식후 서연정이 운전기사를 보내 곽승연을 데려갔고 고은서와 곽승재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로비로 내려갔다.곽승연이 떠난 후 고은서가 물었다. “회사 다시 들어가 봐야 돼?”곽승재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준 선물이 그렇게 싫었어? 다른 사람에게 줘버릴 만큼?”고은서는 곽승연이 라이트문 아파트에 오자마자 팔찌를 벗게 못 한 것이 못내 후회됐다.“마구 준 건 아니야. 승연이는 네 동생이고 마음에 들어 하는데 안 줄 수가 없었어.” 고은서가 급히 해명했다.곽승재는 어두워진 눈빛으로 고은서를 응시했다. “승연이는 네 홍두 팔찌를 더 좋아했을 텐데 왜 그건 안 줬어?”“...” 고은서는 곽승재가 그것까지 눈치챌 줄은 몰랐다. 끝없는 질문에 지친 고은서가 단호하게 말했다.“승재 씨, 선물은 받은 순간부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렇게 싫으면 새 걸 사서 승연이한테 준 것과 바꿔올게.”곽승재의 얼굴색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정한 문제는 똑같이 선물했음에도 자신의 것만이 소중하게 대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급한 어투로 변명하던 고은서는 문득 최근 곽승재가 자주 이런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신을 마음 약해지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일 당일 홍두 팔찌가 은소영의 선물이라고 그에게 설명했을 때도, 어제 민시후의 등장이 우연이라고 변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에게 설명할 의무가 전혀 없었다.“승재 씨, 최근 나를 도와 송민준과 그

  • 어게인, 비긴   제1313화

    고은서와 곽승연의 의아한 시선 속에 곽승재는 더 이상 숨기지 않기로 했다.그는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쑥스럽게 고백했다.“은서야, 이 사진은 사실 오래전부터 내 앨범에 있었어.”고은서는 믿을 수 없었다.“어디서 구한 거야? 우리 첫 만남이었던 파티 전에 이미 나를 본 적이 있다는 말이야?”설마 그럴 리가. 설령 봤더라도 곽승재가 몰래 사진을 찍어 저장해 줄 사람은 아니었다.고은서의 질문에 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에 보기 드문 홍조가 물들었다.그는 고은서에게 그들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호텔에서 업무를 보던 중 로비에 걸린 이 사진을 봤다고 설명했다. 잔디밭 파티 홍보용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 사진을 저장해 두었지만 이후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아 잊고 지냈다고 했다. 최근 앨범 정리 중에서야 발견했다는 것이다.“오빠, 거짓말하는 거죠?” 곽승연이 눈을 깜빡이며 의문을 제기했다.“그동안 휴대폰 안 바꾼 거예요? 바꿀 때 예전 자료는 안 봤어요?”곽승재는 침착하게 답했다.“자료는 전부 비서가 옮겼어. 내가 직접 손댄 적 없어.”곽승연은 연애 경험이 없고 어른 세계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만화와 책을 통해 자존심 때문에 가끔은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고 후회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의 오빠가 딱 그런 케이스일 것이다.하지만 곽승연은 말주변이 없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저 속으로 언니를 사랑해 재결합을 원한다면서 왜 지금 와서 사진을 소중히 여겼다는 걸 부정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아주머니가 맛있는 요리 많이 했다면서?” 곽승재는 곽승연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자, 주방에 가보자.”“...”곽승연은 어쩔 수 없이 주방으로 끌려갔다.고은서는 혼자 거실에 남았다.곽승재의 조금 전 반응에서 고은서는 다시금 깨달았다. 그가 말한 ‘오래전부터 자각하지 못한 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하지만 과거의 상처는 이미 깊고도 아팠다. 그가 백유미를 감싸며 그녀의 마음을

  • 어게인, 비긴   제1312화

    슬퍼?고은서도 뒤돌아 민시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휴대폰을 들어 상대방에게 시간 있는지 물으며 바에 가자고 느긋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슬픔의 흔적조차 없었다.“승연이가 잘못 느낀 거야. 가자,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고은서는 곽승연의 손을 잡았다.그 후 고은서는 줄곧 곽승연과 함께했고 식사 후 그녀가 좋아하는 나비관과 희귀 식물원도 찾았다.곽승연은 흥미로운 모양의 나뭇잎들을 수집하고 나비 표본도 몇 점 샀다. 곽승연에게는 너무 알찬 하루였다.해 질 무렵이 되어서야 고은서는 아쉬워하는 곽승연과 함께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왔다.곽승연이 이미숙의 요리를 먹고 싶다 하여 고은서는 그녀를 먼저 여기로 데려왔다.이미숙이 비장의 비법을 총동원해 곽승연이 좋아하는 요리들을 준비했다.바쁜 곽승재가 생각난 고은서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에 함께할 수 있는지 물었다.회의 중이던 곽승재는 꼭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약속했다.곽승재를 기다리는 동안 고은서와 곽승연은 사진첩을 보았다. 곽승재가 선물한 사진첩을 넘기던 중 곽승연이 고은서의 첫 번째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언니, 이 사진 정말 예뻐요. 오빠 휴대폰에서 본 적 있어요.”고은서는 사진첩을 제작할 때 본 줄 알고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응, 최근에 친구들 SNS에서 모은 거야.”곽승연이 고개를 갸웃했다.“최근이 아니고 오래전이에요. 그때 저랑 엄마가 Y 국에 살 때 오빠가 왔었거든요? 제가 오빠 휴대폰에서 우연히 봤어요.”고은서는 깜짝 놀랐다. “승연아, 시간을 착각한 거 아니야?”곽승재가 그녀 사진을 보관하다니? 예전엔 그녀를 보면 냉담하고 불쾌해하던 사람이었다.“제가 착각한 게 절대 아니에요!” 곽승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Y 국에서 분명히 봤단 말이에요! 오빠가 이 사진을 별도 폴더에 넣어뒀는데 제가 실수로 발견한 거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말하기 싫어하더라고요. 오빠가 싫어할까 봐 더 묻지 못했어요.”고은서는 바로 외할아버지 SNS를 열어 확인했다. 외할아

  • 어게인, 비긴   제1311화

    고은서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민시후가 머리를 약간 숙인 채 선글라스를 써서 표정이 읽히지 않았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의 손목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손목에는 은소영 씨가 준 홍두 팔찌가 걸려 있었다.“소영 씨가 준 거예요. 원하신다면 드릴게요. 필경 홍두는 보통 연인끼리 주고받는 거잖아요.”팔찌를 풀려는 순간 민시후가 막았다. “은서 씨한테 선물한 거니까 이제 당신 거지요. 게다가 잘 어울리네요.”민시후 입에서 칭찬이 나오다니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소영 씨의 안목이 뛰어나서 그렇죠.”민시후는 대답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선글라스에 비친 고은서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주변에 발길이 끊긴 순간 공기가 묵직해졌다. 이렇게 나란히 선 지도 오래였다.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진 턱선을 보며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민시후 씨, 재활 과정이 많이 힘들지 않았어요?”낯선 땅에서 온갖 상처, 그리고 시한폭탄 같은 뇌의 혈종…. 모든 게 강한 의지력 없이는 견딜 수 없었을 터였다.고은서의 말에 민시후의 목젖이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려다 삼킨 듯했다.미안함이 밀려온 고은서는 일부러 태연한 척 말했다.“지금 와서 묻는 건 위선적이 돼 보이네요. 재활 과정을 가서 보지도 않고 이런 질문이라니...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민시후 씨, 가족분들의 사랑도 듬뿍 받고 지금은 곁에 좋은 분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고은서는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민시후는 여전히 침묵하다가 손을 뻗어 선글라스를 만졌다.고은서의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 민시후는 선글라스나 모자로 얼굴을 가렸기에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선글라스를 벗으려는 것 같은 그 순간에 멀지 않은 곳에서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고개를 돌리니 곽승연이 찾아오고 있었다.민시후는 선글라스를 집어 올릴 뿐 벗으려는 기색은 없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언니, 이 분 전에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요?” 곽승연이 다가와 물었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