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이 말한 것처럼 송민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고은서는 한순간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질투도 원망도 아니었다.어차피 그녀가 민시후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보다 감동이 더 컸으니까 말이다.그녀는 단지 민시후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 모두가 자신에게 이렇게 했다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일지 걱정될 뿐이었다.“어찌 됐든 가족들은 시후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시후라면 이해할 거예요.”송민준은 마치 고은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송민준이 이 이야기를 한 것도 절반은 민씨 가문 사람들의 뜻일 것이다.그녀가 민시후에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품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일 테니까.“저도 참... 사과하려고 식사에 초대한 건데 괜히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제 잘못입니다. 술 대신 차라도 한잔 올리죠.”송민준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고은서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괜찮아요. 이런 건 불편한 이야기도 아니에요. 민시후가 건강을 회복하는 게 제겐 가장 좋은 결과니까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 씨, 시후는 지금 해성에 없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할게요.”고은서는 찻잔을 들어 송민준과 가볍게 부딪쳤다.“사실 오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부탁이라니요. 은서 씨는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감사합니다. 한 사람을 조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업체를 찾기가 어려워서요. 혹시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분이 있을까요?”송민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있네요. 조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관련 정보를 보내주시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고은서는 오미나의 정보를 바로 송민준에게 보냈다.“이 여자가 최근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제 외삼촌에게 접근한 건 아닌지 그리고 그녀가 가진 아이가 정말 제 외삼촌의 아이가 맞는지 알고 싶어요.”그 말을 들은 송민준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고은서가 이런 이야
주인혁이 답했다.“맞아요. 누나, 혹시 조사할 사람 있어요?”“네. KK 연락처 넘겨줘요. 직접 얘기할게요.”주인혁은 더 묻지 않고 연락처를 알려주었다.그 후 주인혁은 자신이 참여한 드라마 촬영이 며칠 내로 끝날 예정이라 곧 해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전했다.고은서는 드라마가 대박 나길 기원한다고 하고는 해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통화를 마친 후 고은서는 바로 KK에게 연락했고 KK는 그녀에게 꽤 친절하게 응대했다.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연예계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사설탐정 사무소를 차렸다고 했다. 음악은 그저 취미로 남겨두었다고 했다.이런 이야기는 이미 주인혁에게 들은 바 있었고 고은서는 KK의 해킹 실력도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고은서는 오미나의 정보를 KK에게 보내고 송민준에게 부탁했던 대로 동일한 요구를 전달했다.사실 고은서가 송민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단순히 조사를 맡기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떠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그날 저녁 고은서가 막 오미나의 아파트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준의 차와 마주했다.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이전 유일 투자은행 오픈 행사 때 송민준이 그녀를 대신해 페인트 공격을 막아준 적이 있었지만 민시후는 그의 의도를 의심하며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했다.또한 그녀의 유산은 송민준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백씨 가문을 견제하며 그녀를 돕기도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송민아의 가정부가 옛정을 생각해서 백유미에게 협조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은 송민준이었다.민시후는 송민준이 평범한 사람처럼 감정 기복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에게 묘한 친밀감을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송민준의 행동과 의도는 충분히 의심해 볼 가치가 있었다.만약 백유미가 의도적으로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진짜 할아버지의 사위였을 때는 이렇게 효심이 깊고 시간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곽승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예전에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앞으로라도 보상하고 싶어서 그래.”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일을 얘기하러 온 터라 곽승재와 말싸움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고은서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할아버지 얼굴도 봤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겠네.”고준석이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은서야, 그렇게 예의 없이 구는 거 아니야. 승재는 나 보러 일부러 온 거야. 내가 저녁도 같이 먹고 가라고 했어.”고은서는 고준석의 말을 무시한 채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승재, 갈 거야? 안 갈 거야?”“은서야!”고준석이 다시 고은서를 불렀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태연하게 답했다.“할아버지, 괜찮아요. 오늘은 은서가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괜찮으니 여기서 저녁 먹고 가거라. 벌써 식사 준비도 다 됐어.”고준석이 만류했지만 곽승재는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다음에 다시 올게요.”고준석은 그런 그의 태도에 고은서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승재야, 바쁘면 굳이 나 보러 오지 않아도 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곽승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서가 먼저 고준석에게 다가갔다.“할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너 이 녀석...”“은서야.”고준석이 핀잔을 주려던 순간 곽승재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은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또 뭔데?”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할 말이 있어.”“말해.”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곽승재는 고개를 저었다.“단둘이 얘기하는 게 좋겠어.”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
고은서는 살짝 놀랐다.‘외삼촌이 곽승재에게 직접 연락하다니... 혹시 도움을 청한 걸까?’“일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러나 곽승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젯밤 주 비서에게 오미나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솔직히 말해 그의 일 처리 속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결과 나왔어?”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고 곽승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송민준과 KK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곽승재는 벌써 조사 결과를 가져왔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해결하겠다고 선을 그었는데 이제 와서 결과를 묻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한 곽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미나의 사생활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야. 외삼촌과 실제로 사업적으로 엮여 있었고 몇 주 전에 같은 호텔에 묵었던 것도 사실이야. 현재로선 그녀가 가진 아이가 외삼촌의 아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이미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점을 솔직하게 꺼냈다.“오미나 조건도 좋고 외적으로도 괜찮은데 외삼촌을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아이를 지우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어.”곽승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오미나의 원래 가정은 형편이 좋지 않았어. 결혼 상대도 별로였고. 이혼했지만 전남편이 마치 기생충처럼 계속 붙어있었지. 지금은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저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직장인일 뿐이야. 가족과 전남편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외삼촌에게 접근한 걸 수도 있어. 금전적인 이유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지.”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외삼촌과 나는 이미 금전적인 보상을 제안했어. 원하는 조건을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어. 소중한 아이이니 낳아서 혼자 키우겠다고 하더라.”곽승재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MQ는 현재 외삼촌이 운영하고 있고 외삼촌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갔어요.”“은서야, 왜 아직도 승재한테 그런 태도야?”고준석이 타이르듯 말했다.“지난번에 민시후랑 가능성이 없다고 했잖아. 승재 때문 아니었어?”민시후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하지만 고준석이 더 이상 묻지 않게 하려고 애써 밝은 척하며 답했다.“할아버지, 누가 곽승재 때문이라고 했어요? 곽승재에게 남은 감정이 없다는 걸 왜 믿어주시지 않는 거예요?”“이 할아버지는 당연히 믿지.”고준석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이혼하려고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기억해. 다만 혹시나 쌓인 감정 때문에 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야. 승재도 요즘 많이 변했더구나. 너한테도 정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혹시라도 승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면 할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저를 위해 많은 걸 해줬다는 건 알아요. 예전에는 제가 집착해서 그 사람을 귀찮게 했고 그건 제 책임이기도 해요. 심지어 승재가 저를 싫어했던 이유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안다고 해도 제가 받았던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고준석은 고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은서야, 두 사람 다시 만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다만 나는 네가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어. 승재에 대한 사랑이든 원망이든 말이야. 만약 완전히 놓아주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너무 힘들 거야.”고은서가 자신은 힘들지 않다고 말하려던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고은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고준석도 화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희 둘 사이가 꽤 좋아진 것 같구나.”고은서는 고준석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당연하죠. 애초에 우리가 깊은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고은서는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언니! 아빠한테 또 일이 생겼어!”전화를 받자마자 고은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고
현장은 고은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고국성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가와 눈 주변도 멍투성이였다.그런데도 덩치 크고 흉악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여전히 고국성의 목을 거칠게 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다.고은혜는 겁에 질려 단은숙의 옆에 몸을 숨겼고 단은숙 역시 두려움에 떨었지만 돈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이 인간은 이번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어!”주변에는 몇몇 차주들과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자극적인 스캔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법이었다.지켜보던 사람들은 사건이 해결되기보다 더 커지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슬쩍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고 있었다.심지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달려왔다.“언니! 빨리 왔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쳐다봤다.“무슨 대단한 인물이 오는 줄 알았더니 고작 계집애야?”그는 비웃으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내 조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남자 그냥 보내진 않을 테니까.”고은서는 그의 무례하고 거친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고은혜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원하는 조건이 뭔데?”고은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가 타고 다니는 이 차를 자기한테 넘기고 4억을 달래.”“안 돼! 절대 못 들어줘!”단은숙이 날카롭게 외쳤다.“오늘은 차랑 돈을 내놓으라 하겠지만 내일은 또 뭐라고 협박할지 어떻게 알아? 난 이딴 협박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단은숙의 말은 다소 냉정하게 들렸지만 고은서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런 유형의 인간은 한 번 돈을 받아내면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협박해올 게 뻔했다.끝없는 악순환이 될 뿐이었다.“넌 그 여자의 전남편일 뿐이잖아! 무슨 자격으로 바람났다고 난리야? 피해자는 오히려 우리라고!”단은숙은 남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용기 있으면
고은서는 이런 악질적인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거부하면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일단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고국성을 무사히 구출한 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당신 요구 들어줄게요. 먼저 삼촌부터 풀어줘요.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사람을 시켜 돈을 준비해서 가져올게요.”“내가 바보인 줄 알아?”남자는 고은서를 믿지 않았다.“돈을 손에 넣기 전에는 절대 안 놔. 어차피 쪽팔리는 건 내가 아니거든.”고은서는 이 남자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고은서는 남자 앞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재무팀에 당장 돈을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오미나의 전남편, 강현철이 고은서의 말을 듣고 손아귀에 힘을 풀자 고국성은 그 틈을 타 남자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강현철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고국성은 그를 힘껏 밀치고는 달아났다.남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가는 고국성을 쫓으려 했다.고국성이 강현철에게 잡히면 전보다 더 심하게 당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고은서는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있는 힘껏 강현철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핸드폰은 정통으로 남자의 이마를 가격했다.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이내 살벌한 눈빛을 띠었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즉시 외쳤다.“저 남자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2천만 원 줄게요!”이전까지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단번에 강현철을 향해 덤벼들었다.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강현철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다.고은서와 가까운 곳에 있고 목적도 명확했던 탓에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현철은 이미 고은서 앞까지 다가왔다.고은서는 반사적으로 발을 뻗어 그를 걷어찼지만 덩치도 크고 체력도 월등한 강현철에게 큰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게다가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던 터라 그 위력은 더욱 미미했고 오히려 그를 격분시켰다.강현철
고은서의 외침과 함께 곽승재의 경호원들이 재빠르게 달려왔다.“곽 대표가 다쳤어요!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강현철은 결코 가벼운 힘으로 안내판을 내리친 게 아니었다.곽승재가 온몸으로 받아냈으니 부상이 심각할 것이었다.고은서는 그래도 머리를 맞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곽승재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듯 고은서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었다.그때 곽승재의 차가 도착하고 경호원들이 서둘러 고은서와 함께 곽승재를 부축해 조심스럽게 차에 태웠다.그리고 한 명은 남아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차 안에서도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두 사람의 팔이 맞닿았고 턱과 이마도 살짝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숨결과 체온이 교차하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곽승재가 그녀 때문에 다친 탓에 고은서는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녀보다 덩치가 훨씬 컸고 체중 차이도 상당했다.그가 기대고 있으니 고은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여 창문 쪽으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곽승재는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아까는 날 다급하게 불렀잖아. 걱정한 거 맞지?”‘걱정은. 빚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지!’고은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몸도 성치 않은데 말 좀 아껴.”“평소에는 날 밀어내기만 하고 제대로 상대해 주지조차 않잖아.”곽승재는 어딘가 씁쓸한 어조로 덧붙였다.‘할 말이 없으니까 말할 의지도 안 생기는 거지.’고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곽승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은서야, 나랑 조금만 이야기해 주면 안 돼?”그의 낮고 쉰 듯한 목소리는 마치 애원하는 듯했다.고은서는 그 목소리를 듣고 이전의 자신이 떠올랐다.‘나도 전에는 이렇게 애원했었지.’[승재 오빠, 메일 그만 보고 나랑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돼요?][승재 오빠, 나랑 꽃 보러 가요. 온실에 꽃이 너무 예쁘게 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
고은서는 얼굴과 몸이 온통 와인으로 범벅이 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와인은 그녀의 얼굴 결을 따라 드레스 위로 떨어졌고 머리카락에도 많이 튀었다. 그리고 젖은 앞머리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고은서를 더욱 가여워 보이게 했다.고은서는 놀란 듯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괜찮아요?”그 순간 곽승재와 송민준이 동시에 고은서를 향해 급히 다가왔다.곽승재가 송민준보다 한발 앞서 도착해 고은서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물었다.고은서는 몸을 살짝 떨면서 두려움을 겨우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괜찮아요.”누군가 물티슈를 건네자 곽승재는 서둘러 고은서의 얼굴을 닦아주었다.여시은은 텅 빈 와인 잔을 들고 테라스에서 고은서와 멀지 않은 곳에 떡하니 서 있었다.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평소 감정을 잘 숨기던 여시은도 고은서의 이런 행동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사이 로비의 음악은 멈췄고 상황을 보려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었다.“은서야, 괜찮아? 어떻게 넘어진 거야?”여시은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고은서의 앞에 다가가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하지만 고은서는 여시은을 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고 몸까지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곽승재는 고은서를 안정시키듯 감싸며 여시은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여시은 씨, 대체 무슨 일이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송민준이 곽승재보다 먼저 여시은에게 질문하고는 자신의 재킷을 벗어 고은서에게 걸쳐주려 했다.그러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곽승재가 재킷을 받아 고은서에게 걸쳐주었다.“시은아!”소식을 접한 여재훈이 급히 달려왔다.“아빠!”여재훈을 본 여시은은 든든한 빽이라도 생긴 듯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으윽...”여재훈이 여시은을 달래기도 전에 고은서가 타이밍 좋게 아픔을 참는 소리를 냈다.“왜요? 아파요?”고은서에게 재킷을 걸쳐주던 곽승재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 팔꿈치를 문지르는 동작을 했다.곽승재가 고은서의 팔을 살펴
이런 수법은 백유미도 쓴 적이 있었다.안타깝게도 여시은은 백유미처럼 곽승재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작은 곽승재에게 통하지 않았다.아마 고은서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탓인지 여시은의 시선이 마침 고은서에게로 향했다.고은서는 입가의 비웃음을 다 감추지도 못한 채 여시은과 눈을 마주쳤다.여시은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고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여시은에게 잔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기분 좋게 앞쪽 테라스로 걸어갔다.고은서는 여시은이 이런 식으로 도발을 당한 적이 없었기에 참지 못하고 따라올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고은서가 테라스에 도착지 얼마 되지 않아 뒤에서 여시은의 목소리를 들려왔다.“은서야, 왜 혼자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송 대표님은?”여시은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콤했다.고은서는 잔을 내려놓으며 씨익 웃으며 말했다.“여시은 씨, 매일 이렇게 연기하느라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여시은 씨처럼 건망증이 심한 줄 아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이런 태도를 보일 줄 몰랐는지 환했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은서야, 지난번에 아버지께서 우리 둘 사람을 불러 화해시켜줬잖아. 왜 아직도 화를 내고 있어?”여시은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슬픈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은서야, 너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쿠아가 사고를 당해서 이미 하늘나라로 갔어.”고은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쿠아가 죽었다고?’여시은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쿠아가 연못에 빠져 사고를 당했어. 연못에 금붕어들이 많이 있었는데 쿠아가가 놀면서 잡으려다가 빠진 모양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쿠아가 이미 물 위에 떠 있는 상태였어. 내가 직접 건져 올렸지만 쿠아의 몸이 이미 굳어버린 거 있지. 눈도 뜨인 채로 털은 전부 젖어서 몸에 붙어 있었어. 정말 안됐지...”고은서는 알고 있었다. 여시은이 일부러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을.그리고 쿠아가 물고기를 잡다가
곽승재는 현재 판주 투자은행에 있지만 감히 그를 얕보는 사람은 없었다.그는 곽씨 가문의 장손이자 곽씨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판주 투자은행에 간 것도 일종의 시련으로 여겨질 뿐이다.앞으로의 곽씨 그룹은 여전히 곽승재가 이어받게 된다는 것도 모두가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람들 속에 둘러싸인 곽승재는 평소처럼 검은색의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체구에 빼어난 외모는 마치 이곳이 그의 무대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여시은과 여재훈 역시 그에게 다가가 친근하고 허물없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주변에서는 곧장 수군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왔다.“곽씨 가문과 여씨 가문이 혹시 좋은 일이라도 생기는 거 아니에요? 저렇게 친밀하게 대화하는 걸 보면 마치 한 가족 같잖아요.”“아직도 모르셨어요? 여씨 가문이 이번 투자은행의 개업을 순조롭게 하게 된 것도 곽 대표님이 뛰어다니며 큰 도움을 줬다잖아요!”“얼마 전까지 곽 대표님이 연예인과 스캔들 난 거 아니었어? 요즘은 소식이 뚝 끊겼던데... 아마도 정략결혼 얘기가 오가면서 그런 여자들은 정리한 모양이네.”“솔직히 곽 대표님과 여시은 씨는 그야말로 천생연분이죠. 진짜 결혼하면 주가가 어디까지 치솟을지 가늠이 안 가네요!”“그러게 말이야. 얼른 주식 좀 사둬야겠다...”주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은서는 담담한 미소만 지었다.여시은이 곽승재와 결혼할 마음이 굉장히 확고한 모양이었다. 곽승재에게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여론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고은서는 그런 것에 한 치도 관심이 없었다. 오늘은 따로 할 일이 있었다.KK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확인한 고은서는 홀로 로비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찾아온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곽승재 역시 고은서를 발견했지만 이런 자리에서 두 사람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만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여시은이 눈치채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여시은은 몇몇 귀부인들에게 고은서를 소개했다.고은서도 예의 바르게 그녀들에게 인사를 나눴다.“시은아, 이분이 바로 네가 말했던 요즘 사업을 크게 성공시키고 관청에서 상까지 받은 그 친구야?”화려한 옷을 입은 한 귀부인이 물었다.“네, 언니. 은서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 제가 본받을 만한 점이 많아요. 우리 회사도 은서 회사처럼 잘 운영될 수만 있다면 너무 만족할 것 같아요!”여시은은 과장된 어조로 대답했다.“고은서 씨가 뛰어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굴은 참 예쁘네.”이혜화로 불리는 사람이 이렇게 평가했다.“요즘 젊은이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니까. 자기 장점을 잘 파악하고 이용하다니! 우리 세대는 따라갈 수 없는 것 같아.”다른 한 귀부인이 감탄했다.고은서는 눈앞의 여자들의 말하고 있는 의도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과가 얼굴 덕분이라는 얘기였다.고은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언니들이 이루신 지위와 성과에 비하면 제가 이 얼굴로 얻은 작은 성과는 비교도 안 되죠. 앞으로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언니들에게 많이 배워야겠어요.”고은서의 자기 비하와 아첨이 섞인 말을 들은 이혜화 일행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이때 여시은이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언니들, 은서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말재주도 좋고! 제가 이렇게 훌륭한 분을 언니들에게 소개해 드리길 잘했죠?”고은서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제 생각에 더 대단한 분은 시은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하지만 시은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성공한 삶을 살고 있잖아요. 예를 들어 제가 투자은행에서 오래 일하면서 크고 작은 만찬회도 많이 참석했지만 언니분들과 같은 귀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시은의 개업식에서 이렇게 많은 언니를 한자리에 모이게 하다니 시은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는걸요.”고은서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래서 시은이가 저를 부러워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