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준 말처럼 차가 고장 났기에 계속 몰았다가 불의의 사고라도 날까 봐 겁이 난 동시에 송민준한테 할 말도 있었는지라 고은서는 망설임 없이 그의 차에 올랐다.그녀가 차에 오른 후 옆자리에 올랐다.아직 서먹한 탓인지 꽤 멀리 떨어져 앉았다고 해도 약간의 불편함을 느낀 고은서는 슬쩍 차창 쪽으로 붙어 앉았다.반면 송민준은 아주 태연해 보였다.“죄송해요, 은서 씨. 기사님 때문에 은서 씨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네요.”“누구도 사고가 날 거라고 예상치 못했잖아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고은서가 나긋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곧 저녁 시간인데 제가 사과의 의미로 밥 한 끼 사드려도 될까요?”송민준이 손목시계를 보면서 말했다.확실히 곧 저녁 시간이기도 했고 또 차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고은서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송민준은 고은서의 음식 습관에 관해 물은 후 이내 기사에게 맵기로 유명한 중식집으로 가라고 지시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고은서는 약간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민준 씨가 매운 음식을 안 좋아하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평소에도 엄청 담백하게 드시잖아요.”곽승재랑 똑같았는데 그는 생신한 음식이 아니면 입에 대지도 않았고 또 조금이라도 양념 냄새가 심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송민아도 매운 음식을 별로 즐겨 먹지 않는데 송민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아마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 걸 거예요.”송민준이 웃으면서 답했다.그러나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그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고은서는 송민아를 통해 두 사람이 배다른 남매라는 걸 들은 바가 있었는데 아마 갑자기 어머니 얘기에 좋지 일이 떠오른 듯했다.하지만 고은서는 그의 개인적인 사정까지 캐묻는 사람이 아니었다.“민준 씨, 이만 들어가죠.”송민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은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이름난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한 후 웨이터는 나가고 룸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고은서는 송민준을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민준 씨, 전에 민아를
송민준이 말한 것처럼 송민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여자가 있을 것이었다.고은서는 한순간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질투도 원망도 아니었다.어차피 그녀가 민시후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보다 감동이 더 컸으니까 말이다.그녀는 단지 민시후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 모두가 자신에게 이렇게 했다는 걸 알면 어떤 기분일지 걱정될 뿐이었다.“어찌 됐든 가족들은 시후를 해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시후라면 이해할 거예요.”송민준은 마치 고은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고은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송민준이 이 이야기를 한 것도 절반은 민씨 가문 사람들의 뜻일 것이다.그녀가 민시후에게 더 이상 어떤 희망도 품지 않게 만들려는 의도일 테니까.“저도 참... 사과하려고 식사에 초대한 건데 괜히 불편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제 잘못입니다. 술 대신 차라도 한잔 올리죠.”송민준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고은서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괜찮아요. 이런 건 불편한 이야기도 아니에요. 민시후가 건강을 회복하는 게 제겐 가장 좋은 결과니까요.”송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 씨, 시후는 지금 해성에 없어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제가 비록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할게요.”고은서는 찻잔을 들어 송민준과 가볍게 부딪쳤다.“사실 오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부탁이라니요. 은서 씨는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세요.”“감사합니다. 한 사람을 조사하고 싶은데 적당한 업체를 찾기가 어려워서요. 혹시 믿을 만하고 능력 있는 분이 있을까요?”송민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있네요. 조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관련 정보를 보내주시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고은서는 오미나의 정보를 바로 송민준에게 보냈다.“이 여자가 최근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제 외삼촌에게 접근한 건 아닌지 그리고 그녀가 가진 아이가 정말 제 외삼촌의 아이가 맞는지 알고 싶어요.”그 말을 들은 송민준은 놀란 기색을 보였다.고은서가 이런 이야
주인혁이 답했다.“맞아요. 누나, 혹시 조사할 사람 있어요?”“네. KK 연락처 넘겨줘요. 직접 얘기할게요.”주인혁은 더 묻지 않고 연락처를 알려주었다.그 후 주인혁은 자신이 참여한 드라마 촬영이 며칠 내로 끝날 예정이라 곧 해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전했다.고은서는 드라마가 대박 나길 기원한다고 하고는 해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통화를 마친 후 고은서는 바로 KK에게 연락했고 KK는 그녀에게 꽤 친절하게 응대했다.그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연예계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사설탐정 사무소를 차렸다고 했다. 음악은 그저 취미로 남겨두었다고 했다.이런 이야기는 이미 주인혁에게 들은 바 있었고 고은서는 KK의 해킹 실력도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고은서는 오미나의 정보를 KK에게 보내고 송민준에게 부탁했던 대로 동일한 요구를 전달했다.사실 고은서가 송민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단순히 조사를 맡기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떠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그날 저녁 고은서가 막 오미나의 아파트에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송민준의 차와 마주했다.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이었다.이전 유일 투자은행 오픈 행사 때 송민준이 그녀를 대신해 페인트 공격을 막아준 적이 있었지만 민시후는 그의 의도를 의심하며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했다.또한 그녀의 유산은 송민준과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고 백씨 가문을 견제하며 그녀를 돕기도 했지만 고은서는 여전히 송민아의 가정부가 옛정을 생각해서 백유미에게 협조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를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은 송민준이었다.민시후는 송민준이 평범한 사람처럼 감정 기복이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지만 고은서는 그가 자신에게 묘한 친밀감을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물론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송민준의 행동과 의도는 충분히 의심해 볼 가치가 있었다.만약 백유미가 의도적으로
곽승재의 말에 고은서는 참지 못하고 콧방귀를 뀌었다.“진짜 할아버지의 사위였을 때는 이렇게 효심이 깊고 시간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곽승재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예전에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앞으로라도 보상하고 싶어서 그래.”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고은서는 그의 말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그녀는 중요한 일을 얘기하러 온 터라 곽승재와 말싸움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고은서는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할아버지 얼굴도 봤으니 이제 돌아가도 되겠네.”고준석이 나무라듯 입을 열었다.“은서야, 그렇게 예의 없이 구는 거 아니야. 승재는 나 보러 일부러 온 거야. 내가 저녁도 같이 먹고 가라고 했어.”고은서는 고준석의 말을 무시한 채 곽승재를 바라보았다.“곽승재, 갈 거야? 안 갈 거야?”“은서야!”고준석이 다시 고은서를 불렀다.하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태연하게 답했다.“할아버지, 괜찮아요. 오늘은 은서가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괜찮으니 여기서 저녁 먹고 가거라. 벌써 식사 준비도 다 됐어.”고준석이 만류했지만 곽승재는 깊은 눈동자로 고은서를 한 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다음에 다시 올게요.”고준석은 그런 그의 태도에 고은서를 한 번 흘깃 쳐다보고는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승재야, 바쁘면 굳이 나 보러 오지 않아도 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곽승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고은서가 먼저 고준석에게 다가갔다.“할아버지, 안으로 들어가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너 이 녀석...”“은서야.”고준석이 핀잔을 주려던 순간 곽승재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은서는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또 뭔데?”곽승재는 입술을 깨물다 말했다.“할 말이 있어.”“말해.”고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만 곽승재는 고개를 저었다.“단둘이 얘기하는 게 좋겠어.”고은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
고은서는 살짝 놀랐다.‘외삼촌이 곽승재에게 직접 연락하다니... 혹시 도움을 청한 걸까?’“일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러나 곽승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젯밤 주 비서에게 오미나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솔직히 말해 그의 일 처리 속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결과 나왔어?”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고 곽승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송민준과 KK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곽승재는 벌써 조사 결과를 가져왔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해결하겠다고 선을 그었는데 이제 와서 결과를 묻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한 곽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미나의 사생활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야. 외삼촌과 실제로 사업적으로 엮여 있었고 몇 주 전에 같은 호텔에 묵었던 것도 사실이야. 현재로선 그녀가 가진 아이가 외삼촌의 아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이미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점을 솔직하게 꺼냈다.“오미나 조건도 좋고 외적으로도 괜찮은데 외삼촌을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아이를 지우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어.”곽승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오미나의 원래 가정은 형편이 좋지 않았어. 결혼 상대도 별로였고. 이혼했지만 전남편이 마치 기생충처럼 계속 붙어있었지. 지금은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저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직장인일 뿐이야. 가족과 전남편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외삼촌에게 접근한 걸 수도 있어. 금전적인 이유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지.”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외삼촌과 나는 이미 금전적인 보상을 제안했어. 원하는 조건을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어. 소중한 아이이니 낳아서 혼자 키우겠다고 하더라.”곽승재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MQ는 현재 외삼촌이 운영하고 있고 외삼촌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갔어요.”“은서야, 왜 아직도 승재한테 그런 태도야?”고준석이 타이르듯 말했다.“지난번에 민시후랑 가능성이 없다고 했잖아. 승재 때문 아니었어?”민시후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하지만 고준석이 더 이상 묻지 않게 하려고 애써 밝은 척하며 답했다.“할아버지, 누가 곽승재 때문이라고 했어요? 곽승재에게 남은 감정이 없다는 걸 왜 믿어주시지 않는 거예요?”“이 할아버지는 당연히 믿지.”고준석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이혼하려고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기억해. 다만 혹시나 쌓인 감정 때문에 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야. 승재도 요즘 많이 변했더구나. 너한테도 정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혹시라도 승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면 할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저를 위해 많은 걸 해줬다는 건 알아요. 예전에는 제가 집착해서 그 사람을 귀찮게 했고 그건 제 책임이기도 해요. 심지어 승재가 저를 싫어했던 이유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안다고 해도 제가 받았던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고준석은 고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은서야, 두 사람 다시 만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다만 나는 네가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어. 승재에 대한 사랑이든 원망이든 말이야. 만약 완전히 놓아주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너무 힘들 거야.”고은서가 자신은 힘들지 않다고 말하려던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고은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고준석도 화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희 둘 사이가 꽤 좋아진 것 같구나.”고은서는 고준석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당연하죠. 애초에 우리가 깊은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고은서는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언니! 아빠한테 또 일이 생겼어!”전화를 받자마자 고은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고
현장은 고은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고국성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가와 눈 주변도 멍투성이였다.그런데도 덩치 크고 흉악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여전히 고국성의 목을 거칠게 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다.고은혜는 겁에 질려 단은숙의 옆에 몸을 숨겼고 단은숙 역시 두려움에 떨었지만 돈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이 인간은 이번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어!”주변에는 몇몇 차주들과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자극적인 스캔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법이었다.지켜보던 사람들은 사건이 해결되기보다 더 커지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슬쩍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고 있었다.심지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달려왔다.“언니! 빨리 왔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쳐다봤다.“무슨 대단한 인물이 오는 줄 알았더니 고작 계집애야?”그는 비웃으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내 조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남자 그냥 보내진 않을 테니까.”고은서는 그의 무례하고 거친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고은혜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원하는 조건이 뭔데?”고은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가 타고 다니는 이 차를 자기한테 넘기고 4억을 달래.”“안 돼! 절대 못 들어줘!”단은숙이 날카롭게 외쳤다.“오늘은 차랑 돈을 내놓으라 하겠지만 내일은 또 뭐라고 협박할지 어떻게 알아? 난 이딴 협박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단은숙의 말은 다소 냉정하게 들렸지만 고은서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런 유형의 인간은 한 번 돈을 받아내면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협박해올 게 뻔했다.끝없는 악순환이 될 뿐이었다.“넌 그 여자의 전남편일 뿐이잖아! 무슨 자격으로 바람났다고 난리야? 피해자는 오히려 우리라고!”단은숙은 남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용기 있으면
고은서는 이런 악질적인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거부하면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일단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고국성을 무사히 구출한 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당신 요구 들어줄게요. 먼저 삼촌부터 풀어줘요.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사람을 시켜 돈을 준비해서 가져올게요.”“내가 바보인 줄 알아?”남자는 고은서를 믿지 않았다.“돈을 손에 넣기 전에는 절대 안 놔. 어차피 쪽팔리는 건 내가 아니거든.”고은서는 이 남자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고은서는 남자 앞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재무팀에 당장 돈을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오미나의 전남편, 강현철이 고은서의 말을 듣고 손아귀에 힘을 풀자 고국성은 그 틈을 타 남자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강현철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고국성은 그를 힘껏 밀치고는 달아났다.남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가는 고국성을 쫓으려 했다.고국성이 강현철에게 잡히면 전보다 더 심하게 당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고은서는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있는 힘껏 강현철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핸드폰은 정통으로 남자의 이마를 가격했다.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이내 살벌한 눈빛을 띠었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즉시 외쳤다.“저 남자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2천만 원 줄게요!”이전까지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단번에 강현철을 향해 덤벼들었다.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강현철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다.고은서와 가까운 곳에 있고 목적도 명확했던 탓에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현철은 이미 고은서 앞까지 다가왔다.고은서는 반사적으로 발을 뻗어 그를 걷어찼지만 덩치도 크고 체력도 월등한 강현철에게 큰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게다가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던 터라 그 위력은 더욱 미미했고 오히려 그를 격분시켰다.강현철
고은서가 누가 사주했는지 밝히면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재경은 아직 경찰서를 떠날 수 없었다.경찰 조사에 협조해야 했고, 명확한 결론이 나온 후에야 책임 감경 가능성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곽승재는 변호사를 불러 진전 상황을 체크하도록 했다. 나머지 일은 경찰에 맡기고 그들은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한바탕 분주히 보낸 후, 곽승재가 변호사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고은서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정문에 도착한 고은서는 마침 경찰서에 온 여시은과 마주쳤다.그녀는 이전과 같은 실내복 차림에 창백한 얼굴로, 집사처럼 보이는 중년 남성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그녀는 고은서를 발견한 순간 분노를 쏟아냈다.“고은서, 아빠를 다치게 한 것도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오히려 나를 모함해?”“허튼소리로 아빠를 현혹시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만들다니!”고은서는 살짝 놀랐다. 물론 여시은의 발악이 아니라 여재훈의 처사 때문이었다.그녀가 마재경의 말을 녹음해 여재훈에게 보내긴 했지만, 여재훈이 직접 여시은을 경찰서에 보낼 만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약간의 존경심이 생겼다.외할아버지라면 이런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고은서, 이번 이간질은 너무 지나쳤어.”여시은이 억울하다는 듯 울분을 토했다.“지난번 리셉션에서도 일부러 나를 모함하고. 대체 무슨 심보야?”이 순간까지도 억울한 척하는 여시은, 그녀를 바라보던 고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잠깐만.”여시은은 곁에 있던 중년 남자에게 뭐라고 말한 뒤, 헐떡이며 고은서를 쫓아왔다.“똑바로 말해봐. 나한테 왜 이러는지?”여시은은 병이 완전히 낫지 않은 상태라 가슴을 움켜잡고 있는 모습이 더 연약하고 무력해 보였다.고은서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매일 이러면 지치지도 않아? 머리에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아. 여기서 미친 사람처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여시은은 여전히 가슴을
이전에는 여시은이 이렇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쫓아가서 좋은 말로 달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치 온몸의 기운이 빠진 듯 소파에 지친 몸을 던졌다.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말을 잘 듣고 사랑스럽던 딸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던 아이가, 먹고 노는 것이 가장 큰 취미였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일을 벌였을까?잠시 후, 여시은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왔다.“어디 가려고?”여재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여시은은 서운하고 답답하고 슬픈 표정이었다.“남의 말 한두 마디로 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을 의미가 없잖아요. 전혜라 아줌마를 찾아갈 거예요.”여재훈은 여전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어디도 갈 수 없어. 내가 널 경찰서로 보낼 거니까.”“아빠, 그게...”여시은은 또 한 번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심지어 몸도 휘청였다.“남의 이간질에 넘어가 저를 의심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경찰서로 보내시겠다고요?”갈라진 목소리, 붉어진 눈시울, 떨리는 입술, 누가 봐도 연약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여재훈은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을 감았다.“시은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해.”여시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쓰러지기라도 할 것처럼.“아빠, 저는 고은서를 습격하라고 사주한 적 없어요. 정말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제발 믿어주시면 안 돼요?”여재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여시은을 외면했다.“나는 증거를 믿어. 네가 아니라면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두지 않을 거야.”“그냥 저를 겁주는 거죠? 사실은 저를 믿는 거 맞죠?”여시은은 그 자리에 선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니에요. 요 며칠 집에만 있었고 어디도 가지 않았어요.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어요...”여재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
음성 파일을 여니 울먹이는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말할게. 다 말할게... 여시은 측 사람들이 너를 습격하라고 시켰어... 그쪽에서 연락이 와서 큰돈을 주겠다며 너를 따끔하게 혼내주라고 했어. 피를 보면 더 높은 보수를 주겠다고...][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해주겠다고도 했어... 그들은 내게 ‘이미 인플루언서로는 살 수 없으니 이 돈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설득햇어...][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그만... 평생 벌어도 손에 쥘 수 없는 금액이었어...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 한 번만 용서해 줘...]음성은 여기서 끊겼다.여재훈이 직접 스피커폰 모드로 음성을 틀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여시은도 모든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음성이 끝나자, 워낙 얼어붙은 모습이던 여시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이 동그래졌다.“아빠, 이건...”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얼굴에 짜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여재훈이 사정없이 따귀를 때린 것이다.“시은아, 네가 언제부터 이렇게 악랄한 아이가 됐어?”여재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친 손에 너무 힘을 줘서인지 그녀를 가리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아빠, 손에...”여시은도 여재훈의 팔에 피가 스며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서러움을 잊은 채 여재훈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가자, 여재훈은 몸을 뒤로 피하며 호통쳤다.“고은서 씨를 모함하고 고양이를 학대하고 도우미를 괴롭힌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살인 청부까지 해? 너 정말 무법천지구나.”여시은의 한쪽 뺨은 빨갛게 부어올랐고, 눈빛은 놀라움에서 두려움으로 갔다가 다시 걱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여재훈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고, 엄하게 꾸짖는 경우조차 드물었다. 손찌검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실망으로 싸늘해진 여재훈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시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아빠,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죠? 다 거짓말로만 들리겠죠?”여시은은
도우미가 여재훈의 질문에 대답하기도 전에 여시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그러네. 미화언니, 손이 왜 그래?”박미화는 손을 살짝 움츠리더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원에서 일하다가 부주의로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어제는 누군가가 할퀸 거라고 했잖아?”옆에 있던 다른 도우미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박미화는 고개를 숙인 채 동료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냈고, 이내 눈치를 알아챈 그 도우미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감지한 여재훈이 엄숙하게 물었다.“집사는? 직원이 다른 사람과 싸워서 상처를 입은 것도 모르고 있단 말이야?”“집사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집사에게 혼날까 봐 겁에 질린 박미화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못했다.“사실 누구랑 싸운 것도, 할큄 당한 것도 아닙니다. 며칠 전, 아가씨를 부르러 올라갔을 때, 부주의로 아가씨 손톱에 긁힌 것입니다.”“아, 미화언니 손등을 그렇게 만든 게 나였어요?”여시은은 급히 일어나 박미화의 상처를 확인하더니 손등을 호호 불어주기까지 했다.“아팠겠다. 정말 내가 그랬어? 나는 왜 기억나지 않지?”박미화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그때 아가씨는 감정이 많이 격해져 있었어요. 무슨 억울한 일이 있는지 줄곧 울고 있었죠. 제가 아가씨의 손을 잡고 달래던 중에 아가씨의 손톱에 긁힌 거예요. 사소한 일이라 아가씨가 걱정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어요.”“그랬구나.”여시은은 머리를 탁 치며 후회스럽게 말했다.“난 정말 몰랐어.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이제야 알게 되니 너무 미안하잖아.”박미화는 고개를 저었다.“아가씨가 요즘 기분이 안 좋고 아프기도 하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여재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다친 지 2~3일이나 지났는데 약을 바르지 않았어?”박미화는 약을 발랐지만 자꾸 일을 하니 상처가 빨리 낫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하지만 여재훈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 어린 눈빛으로
곽승재의 말을 들은 마재경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하지만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협박하지 마세요. 가벼운 부상에 불과하니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면 기껏해야 3년 감옥에 있고 나올 거예요. 당신들이 주는 기회 따위는 필요 없어요.”마재경은 인정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확실했다. 3년 감옥살이로 거액의 돈을 바꾸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이로 미루어 보면, 마재경은 정말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것이다.고은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3년 청춘을 돈과 바꾸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이 생겨 네가 어디 가든 따라다닐 텐데.”“게다가 그렇게 큰돈이 어디서 생겼는지 출처를 밝히지 못하면 경찰이 가만둘 것 같아? 일단 경찰이 알아내면 너의 공범도 잡히고 너는 비호죄까지 추가될 텐데.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고은서의 말에 마재경은 약간 망설였지만 여전히 자기가 혼자 한 것이라고 고집했다. 돈도 어디서 입금됐는지 모르겠고, 어쩌면 팬 중 한 명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둘러댔다.다소 김빠진 고은서는 곽승재와 함께 밖에 나가 마재경의 약점을 찾아보려 했다.그때 곽승재가 입을 열었다.“죄를 지었다는 것이 너의 고향에 알려지면 돈을 들고 금의환향하려는 생각이 실현될 수 있을까?”이 말에 마재경은 허를 찔린 듯 눈에 공포가 감돌았고 몸도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잠시 후, 곽승재의 얼음장 같은 시선 속에서 마재경은 철저히 무너졌다.“말할게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여씨 저택.여시은이 수액을 다 맞고 여재훈도 약을 먹은 뒤였다.가정의가 떠나자, 여시은은 여재훈의 옆에 앉았다.“아빠, 왜 그러세요? 계속 미간을 찌푸리고 계시는데, 상처 부위가 많이 아프신 거예요?”여재훈은 순하고 사리에 밝은 딸을 바라보며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시은아, 네가 주워 온 길고양이가 너랑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여시은은 순진무구한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
마재경은 잠깐 멍하니 있더니 곧바로 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그냥 미워서 괴롭히고 싶었다고 말했다.그러자 고은서는 코웃음을 쳤다.“변명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너와 곽승재가 단순히 금전적 관계였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심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잘해보고 싶은데 외면당했다고 해도 곽승재한테 화풀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고은서의 질문에 마재경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졌다.“나는 곽 대표님을 존경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어.”“그런데 너는 나와 곽 대표님의 스캔들 때문에 나를 질투했고, 나의 팬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었어. 이런 짓을 한 너에게 복수하면 안 되나?”‘흉기 난동 사건까지 내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고은서는 더욱 어이없었다.“마재경,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나? 내가 곽승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 내가 질투심 때문에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 너를 해칠 이유가 없잖아.”“그리고 정말 나를 의심했다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나를 경찰서에 넘겨서 죄를 묻는 게 더 나았을 텐데.”마재경은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우겼다.“너는 돈도 많고 옆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은데, 내가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겠어?”고은서는 다시 한번 어이없어 웃었다.“증거도 없다는 거네. 그러면 무슨 근거로 나를 의심해? 나한테 피를 뿌린 것도 모자라 잔인하게 죽이려고까지 했잖아.”“‘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내가 칼에 찔려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으니 같은 방식으로 너한테 되갚아주고 싶었어.”마재경은 고은서가 정말 자기를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원한을 쏟아냈다.고은서는 더 이상 그녀와 논쟁을 이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사주한 사람이 없다고 계속 우기면 너의 남은 인생은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 인플루언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물론 자유도 잃게 되겠지.”“너!”“협박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돈도 많고 곁에 힘 있는 남자들도 많아.”이 말을 들은 마재경은
“집에서 모시러 오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경찰서에 상황을 알아보러 가야 해서요.”그녀가 식사 자리에서 여시은을 용서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기 때문에 여재훈은 크게 놀라지 않았고 더 이상 설득도 하지 않았다.“고은서 씨, 이번 일은 저와도 상관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해요.”하지만 고은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아닙니다. 상대가 저를 노린 것이니 제가 가면 됩니다. 다치셨으니 일찍 들어가 쉬십시오.”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여재훈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 다만 소식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고은서가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순간, 여씨 가문의 가정의가 진료실에서 나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여 대표님, 앞으로 이런 무모한 행동은 삼가세요. 이번에는 동맥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혈액형도 특이한데 대량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이 작은 병원에서 혈액을 공급받지 못했을 거예요.”‘혈액형이 특이하다고?’고은서도 희귀한 혈액형이었다. 그녀가 여재훈의 혈액형을 물어보려 할 때 여시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아빠, 몸을 좀 아끼세요. 너무 걱정되고 무서워요...”이 광경을 본 고은서는 말없이 떠나갔다....마재경이 뿌린 피가 그녀의 몸을 명중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저기 피가 튀어 불쾌한 냄새가 났다.곽승재가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기 때문에 고은서는 먼저 라이트문 아파트로 돌아가 꼼꼼히 씻은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곽승재는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고은서가 대충 차려입고 경찰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곽승재는 얇은 미디엄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매끈한 핏 덕분에 더 훤칠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살짝 감돌았다.그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상처부터 확인했다.곽승재의 따뜻한 손이 피부에 닿자, 고은서는 약간 불편한 듯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정말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고, 이미 약도 발랐어.”곽승재는 손을 거두어들였지만 눈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말쑥
지난번 여씨 저택에서 여시은이 쿠아에게 할퀴어 상처를 입었을 때 이 의사를 본 적이 있었다.여시은은 아버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 상태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병원으로 달려온 모양이다. 가정의도 걱정돼서 따라나섰을 것이다.“시은아, 왜 여기까지 왔어? 괜찮다고, 금방 돌아갈 거라고 말했잖아.”여재훈이 나무라듯 말했다.“아가씨께서는 대표님이 병원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수액을 뽑아버리고 운전기사에게 빨리 병원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셨어요.”가정의가 설명을 보탰다.역시 그랬다. 여시은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예쁜 얼굴에 긴장과 걱정이 가득했다.“아빠,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 다치셨어요?”여재훈은 고은서의 말을 듣고 딸에 대한 의심이 생겼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추궁하지는 않았다.여재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작은 사고가 있었어. 이제 괜찮아.”여시은은 조금 안심된 듯했다. 그제야 진료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에게 인사한 뒤 고은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리셉션이 끝난 지 며칠 지났지만 두 사람의 대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리셉션 때보다 여시은은 확연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었고, 입술에도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게다가 여재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살짝 건드리면 깨지는 도자기 인형처럼 취약해 보였다.도대체 어떻게 이런 완벽한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건지?민시후의 부하들이 여시은에게 조현병이 없다는 걸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여시은이 이중인격을 가진 게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순진무구한 인격과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격 말이다.하지만 여시은은 조현병 환자가 아닌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눈가에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비록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이었지만 고은서는 정확히 포착했다.“고은서, 너 때문에 아빠가 다치신 거야?”여시은은 예전처럼 친한 척하지 않고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고은서가
의사가 여재훈의 상처를 처치하는 사이, 고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번호를 보니 곽승재였다.고은서는 여재훈에게 말하고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은서야, 너 사고를 당했다며? 너와 여 대표님이 모두 다쳤다고?”곽승재가 다급히 물었다.임신 오해 사건 이후,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터놓고 얘기한 뒤로 그녀를 몰래 보호하던 인원을 철수한 상태였다.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주민기가 배치한 인원이어서 고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었다.고은서는 어디서 들었는지 캐묻지 않았다.“괜찮아. 마재경이 갑자기 유일 투자은행 주차장에서 나를 습격했어. 여재훈 씨가 막아주다가 팔을 다치셨고.”“나는 지금 출장 중이라 경찰서 쪽에 다른 사람을 보냈어.”곽승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해성으로 돌아갈게.”고은서는 급히 돌아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까 일에 집중해. 여재훈 씨의 상처 처치가 끝나면 경찰서로 가서 마재경을 만날 거야.”“이쪽 일은 거의 마무리됐어. 내가 돌아가면 같이 경찰서에 가자.”곽승재는 설명을 이어갔다.“지난번 마재경이 다쳤을 때 병원을 방문해 더 이상 협조가 필요 없다고 통보하고 충분한 보상금도 지급했어.”“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 존재감을 과시하지 말라고 몇 번 경고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배후에 조종자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워.”곽승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분석을 이어갔고, 고은서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따져보면, 마재경은 돈 때문에 곽승재와 손잡은 것이고 그녀와 깊은 원한이 없었다.협력 관계가 끝났으면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야 정상이지, 이렇게 위험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복수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하지만 마재경이 진심으로 곽승재를 좋아하게 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천히 사랑을 키워나가고 싶었는데 곽승재가 갑자기 관계를 끊자고 하니 그 분노를 고은서에게 쏟아냈을 수도 있다.고은서가 이 가능성을 말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안에 있는 환자분의 부탁이라며 그녀의 상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