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살짝 놀랐다.‘외삼촌이 곽승재에게 직접 연락하다니... 혹시 도움을 청한 걸까?’“일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러나 곽승재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젯밤 주 비서에게 오미나를 조사해 보라고 시켰어.”솔직히 말해 그의 일 처리 속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결과 나왔어?”그녀는 참지 못하고 물었고 곽승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고은서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송민준과 KK 쪽에서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곽승재는 벌써 조사 결과를 가져왔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직접 해결하겠다고 선을 그었는데 이제 와서 결과를 묻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그녀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한 곽승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오미나의 사생활은 비교적 깨끗한 편이야. 외삼촌과 실제로 사업적으로 엮여 있었고 몇 주 전에 같은 호텔에 묵었던 것도 사실이야. 현재로선 그녀가 가진 아이가 외삼촌의 아이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이미 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고은서는 자신의 의문점을 솔직하게 꺼냈다.“오미나 조건도 좋고 외적으로도 괜찮은데 외삼촌을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아이를 지우겠다는 생각도 안 하고 있어.”곽승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오미나의 원래 가정은 형편이 좋지 않았어. 결혼 상대도 별로였고. 이혼했지만 전남편이 마치 기생충처럼 계속 붙어있었지. 지금은 회사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저 높은 직급을 가지고 있는 직장인일 뿐이야. 가족과 전남편 문제를 해결할 만큼의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니 외삼촌에게 접근한 걸 수도 있어. 금전적인 이유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지.”고은서가 미간을 찌푸렸다.“외삼촌과 나는 이미 금전적인 보상을 제안했어. 원하는 조건을 말해도 된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어. 소중한 아이이니 낳아서 혼자 키우겠다고 하더라.”곽승재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MQ는 현재 외삼촌이 운영하고 있고 외삼촌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갔어요.”“은서야, 왜 아직도 승재한테 그런 태도야?”고준석이 타이르듯 말했다.“지난번에 민시후랑 가능성이 없다고 했잖아. 승재 때문 아니었어?”민시후의 이름이 나오자 고은서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하지만 고준석이 더 이상 묻지 않게 하려고 애써 밝은 척하며 답했다.“할아버지, 누가 곽승재 때문이라고 했어요? 곽승재에게 남은 감정이 없다는 걸 왜 믿어주시지 않는 거예요?”“이 할아버지는 당연히 믿지.”고준석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이혼하려고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기억해. 다만 혹시나 쌓인 감정 때문에 네 마음을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뿐이야. 승재도 요즘 많이 변했더구나. 너한테도 정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혹시라도 승재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면 할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을 거야.”“저를 위해 많은 걸 해줬다는 건 알아요. 예전에는 제가 집착해서 그 사람을 귀찮게 했고 그건 제 책임이기도 해요. 심지어 승재가 저를 싫어했던 이유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안다고 해도 제가 받았던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고준석은 고은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은서야, 두 사람 다시 만나라고 하는 말이 아니야. 다만 나는 네가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어. 승재에 대한 사랑이든 원망이든 말이야. 만약 완전히 놓아주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가.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너무 힘들 거야.”고은서가 자신은 힘들지 않다고 말하려던 순간 벨 소리가 울렸다.고은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고준석도 화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희 둘 사이가 꽤 좋아진 것 같구나.”고은서는 고준석을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당연하죠. 애초에 우리가 깊은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고은서는 한쪽으로 걸어가 전화를 받았다.“언니! 아빠한테 또 일이 생겼어!”전화를 받자마자 고은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은서는 고
현장은 고은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고국성의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입가와 눈 주변도 멍투성이였다.그런데도 덩치 크고 흉악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는 여전히 고국성의 목을 거칠게 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다.고은혜는 겁에 질려 단은숙의 옆에 몸을 숨겼고 단은숙 역시 두려움에 떨었지만 돈을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이 인간은 이번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어!”주변에는 몇몇 차주들과 경비원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자극적인 스캔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법이었다.지켜보던 사람들은 사건이 해결되기보다 더 커지길 바라기라도 하는 듯 오히려 슬쩍 핸드폰을 꺼내 촬영하고 있었다.심지어 이 상황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고은혜는 고은서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달려왔다.“언니! 빨리 왔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덩치 큰 남자가 그녀를 쳐다봤다.“무슨 대단한 인물이 오는 줄 알았더니 고작 계집애야?”그는 비웃으며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내 조건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이 남자 그냥 보내진 않을 테니까.”고은서는 그의 무례하고 거친 태도를 신경 쓰지 않고 고은혜에게 물었다.“저 사람이 원하는 조건이 뭔데?”고은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빠가 타고 다니는 이 차를 자기한테 넘기고 4억을 달래.”“안 돼! 절대 못 들어줘!”단은숙이 날카롭게 외쳤다.“오늘은 차랑 돈을 내놓으라 하겠지만 내일은 또 뭐라고 협박할지 어떻게 알아? 난 이딴 협박에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단은숙의 말은 다소 냉정하게 들렸지만 고은서는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런 유형의 인간은 한 번 돈을 받아내면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협박해올 게 뻔했다.끝없는 악순환이 될 뿐이었다.“넌 그 여자의 전남편일 뿐이잖아! 무슨 자격으로 바람났다고 난리야? 피해자는 오히려 우리라고!”단은숙은 남자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진짜 용기 있으면
고은서는 이런 악질적인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바로 거부하면 사태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일단 조건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고국성을 무사히 구출한 후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었다.“당신 요구 들어줄게요. 먼저 삼촌부터 풀어줘요. 다른 곳에서 기다리면 사람을 시켜 돈을 준비해서 가져올게요.”“내가 바보인 줄 알아?”남자는 고은서를 믿지 않았다.“돈을 손에 넣기 전에는 절대 안 놔. 어차피 쪽팔리는 건 내가 아니거든.”고은서는 이 남자가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그래서 고은서는 남자 앞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재무팀에 당장 돈을 준비해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오미나의 전남편, 강현철이 고은서의 말을 듣고 손아귀에 힘을 풀자 고국성은 그 틈을 타 남자의 팔을 힘껏 깨물었다.강현철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고국성은 그를 힘껏 밀치고는 달아났다.남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도망가는 고국성을 쫓으려 했다.고국성이 강현철에게 잡히면 전보다 더 심하게 당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고은서는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있는 힘껏 강현철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핸드폰은 정통으로 남자의 이마를 가격했다.남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지르더니 이내 살벌한 눈빛을 띠었다.고은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지만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즉시 외쳤다.“저 남자를 잡아주는 사람에게는 2천만 원 줄게요!”이전까지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단번에 강현철을 향해 덤벼들었다.아무리 신체 능력이 좋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강현철이 고은서를 향해 돌진했다.고은서와 가까운 곳에 있고 목적도 명확했던 탓에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현철은 이미 고은서 앞까지 다가왔다.고은서는 반사적으로 발을 뻗어 그를 걷어찼지만 덩치도 크고 체력도 월등한 강현철에게 큰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게다가 몸이 아직 다 낫지 않았던 터라 그 위력은 더욱 미미했고 오히려 그를 격분시켰다.강현철
고은서의 외침과 함께 곽승재의 경호원들이 재빠르게 달려왔다.“곽 대표가 다쳤어요! 병원으로 가야 합니다!”강현철은 결코 가벼운 힘으로 안내판을 내리친 게 아니었다.곽승재가 온몸으로 받아냈으니 부상이 심각할 것이었다.고은서는 그래도 머리를 맞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곽승재는 의식을 잃지는 않았지만 고통이 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듯 고은서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었다.그때 곽승재의 차가 도착하고 경호원들이 서둘러 고은서와 함께 곽승재를 부축해 조심스럽게 차에 태웠다.그리고 한 명은 남아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차 안에서도 곽승재는 여전히 고은서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두 사람의 팔이 맞닿았고 턱과 이마도 살짝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숨결과 체온이 교차하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곽승재가 그녀 때문에 다친 탓에 고은서는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곽승재는 그녀보다 덩치가 훨씬 컸고 체중 차이도 상당했다.그가 기대고 있으니 고은서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여 창문 쪽으로 자리를 피하려 했다.곽승재는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다시 가까이 다가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은서야, 아까는 날 다급하게 불렀잖아. 걱정한 거 맞지?”‘걱정은. 빚지는 게 싫어서 그런 거지!’고은서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답했다.“몸도 성치 않은데 말 좀 아껴.”“평소에는 날 밀어내기만 하고 제대로 상대해 주지조차 않잖아.”곽승재는 어딘가 씁쓸한 어조로 덧붙였다.‘할 말이 없으니까 말할 의지도 안 생기는 거지.’고은서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곽승재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은서야, 나랑 조금만 이야기해 주면 안 돼?”그의 낮고 쉰 듯한 목소리는 마치 애원하는 듯했다.고은서는 그 목소리를 듣고 이전의 자신이 떠올랐다.‘나도 전에는 이렇게 애원했었지.’[승재 오빠, 메일 그만 보고 나랑 이야기 좀 해주면 안 돼요?][승재 오빠, 나랑 꽃 보러 가요. 온실에 꽃이 너무 예쁘게 피
곽승재는 오랫동안 저자세로 나왔지만 여전히 바뀌지 않는 고은서의 태도를 보고 조금 속상했다.고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아무리 고치겠다고 해도 본성은 여전히 독단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야. 지금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 사라지거나 소위 말하는 호감이 식어버리면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겠지.”곽승재의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네 말은 내가 그동안 해온 모든 행동이 전부 네가 돌아오게 하려는 연기였다는 뜻이야?”“난 그저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당신은 언제나 높은 곳에 있었고 원하는 건 다 가졌지. 한때 당신한테 그렇게 매달렸던 내가 이제는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자존심을 회복하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 오늘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앞으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누군가에게 계속 감시당하는 기분 썩 좋지 않거든.”고은서의 말을 들은 곽승재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그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고은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듯했다.고은서도 전혀 물러서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겉으로 보기엔 고은서가 은혜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그녀를 도와줬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기색조차 없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곽현수처럼 사람을 시켜 감시하지 않으면 그녀의 상황을 제때 알 수도 없었고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두 사람은 몇십 초간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던 중 곽승재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눈에 띄게 표정을 굳혔다.속도를 줄인 운전기사는 병원에 도착했음을 알렸다.“차 돌려서 본사로 가죠.”막 차 문을 열려던 고은서는 싸늘하게 기사를 향해 명령하는 곽승재의 목소리를 들었다.“너 많이 다쳤...”“거짓말이야.”고은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곽승재는 무표정하게 답했다.그녀는 말문이 막혔다.“어디로 데려다줄까?”고은서는 이미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디딘 상태였다.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기사 불러서 알아서 갈게.”말을 마친 그녀는
‘억울하게 오해했더라도 곽승재도 나를 속였으니 사과하지 않을 거야!’고은서는 고은혜에게 앞으로 절대 곽승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둔 뒤 강현철의 상황을 물었다.“그 사람은 곽 대표님 경호원에 의해 경찰서로 넘겨졌어. 그런데 아빠는 일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처벌을 원치 않으신대.”“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다음엔 더 심해질 거야! 절대 가만둬선 안 돼!”고은혜는 난감해하며 답했다.“그 사람이 와서 난리 칠 때 그러더라. 무슨 일을 당한다면 자기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아빠의 추문을 전부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어.”고은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숨길 수도 없었다.고은서는 직접 고국성을 찾아가 이번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비록 명예가 다소 손상될지는 몰라도 약점을 잡혀 협박받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차를 부르려던 고은서는 곽승재의 차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차창이 내려졌지만 뒷좌석에서 곽승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아가씨, 타시죠. 곽 대표님께서 바래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운전기사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곽승재의 상태를 묻기도 귀찮았던 고은서는 그냥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고은서는 바로 고국성의 집으로 향해 제안했지만 고국성은 단호하게 반대했다.“나는 누명을 쓴 거야! 내가 왜 잘못을 인정해야 해? 그럼 내 체면은? 직원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난 절대 동의 못 해!”“삼촌, 누명을 썼다면 더더욱 공개적으로 해명해야 해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끌려다녀서는 안 돼요.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하게 하면 되잖아요. 결과가 나오면 사람들도 이해할 거고요.”고국성이 망설이는 사이 단은숙이 격앙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모든 사람이 네 삼촌이 바람피우고 사생아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다른 사모들이 나를 얼마나 비웃겠어!”고은서는 지금 이 상황이 피곤했다.단순히 고국성 개인의 문제였다면 협박을 당하든 망신을 당하든 신
“민준 씨,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고은서가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송민준은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별말씀을요.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알겠습니다.”말을 마친 고은서는 전화를 끊었다.‘오미나에 대한 일을 숨기지 않은 걸 보면 삼촌과 관련이 없겠어. 민시후가 나를 좋아해서 송민아와 파혼한 일 외에는 특별한 갈등도 없잖아. 처음 만났을 때 싸늘한 시선은 동생의 파혼 때문이었나 보다. 이후에 조금 친절해진 것도 송민아와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애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관대한 편이라고 했으니까.’송민준에 대한 의심을 거둔 고은서는 컴퓨터 속 자료를 바라보았다.‘오미나와 곽현수의 비서가 만난 적 있다고? 우연일까? 백승엽의 청부 폭행 사건에서 곽현수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백유미를 귀국시키고 원지훈과 함께 회사를 차리도록 지원한 것도 곽현수야. 이혼하긴 했지만 곽승재는 여전히 나를 잡으려고 하고 있어. 그것 때문에 삼촌한테 손댄 건가?’고은서는 곽현수가 대체 왜 이런 일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한동안 전미자를 찾아뵙지 못한 게 떠오른 고은서는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혹시 그녀에게서 무언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전화를 걸어 전미자가 시간이 된다는 걸 확인한 후 고은서는 전미자의 집으로 향했다.전미자는 그녀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여전히 다정하게 맞아주었다.“왜 이렇게 말랐어!”그녀는 걱정스럽게 고은서를 바라보며 주방에 더 많은 음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은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비록 곽승재와 이혼했지만 전미자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녀를 아껴주고 있었다.식사 후 고은서는 전미자와 담소를 나누고 소파에 함께 앉아 오래된 사진 앨범을 넘겼다.고은서는 젊은 시절의 곽현수를 보고는 무심코 말했다.“할머니, 아저씨 젊었을 때 정말 잘생기셨네요. 분명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혹시 감정적인 문제는 없었나요?”전미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 고집불통이 무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