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서는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니면 삼촌 일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승재가 도와준다고 한 번 더 넘어갈 생각이야?”곽현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고은서는 곽현수가 직접 나선 이상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게다가 어제 오미나의 반응을 보아서는 그녀의 배 속의 아이가 십중팔구 고국성의 아이가 맞을 것이다.아이를 지우지 않는다면 시한폭탄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리고 곽현수가 마음만 먹는다면 경찰에 잡힌 강현철을 데리고 나오는 건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어느 날엔가 갑자기 고준석 앞에 나타나거나 또는 고국성을 대하듯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고은서는 차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곽승재는 현재 회사 일을 처리하기도 바쁠 텐데 더는 민폐를 끼쳐서는 안 돼.’시가 가게의 부드러운 불빛이 유독 눈부시게 느껴지는 때이다.사실 곽현수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곽승재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가 자신을 좋아하든 원망하든 그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생각을 마친 고은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곽현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고은서가 떠난 후 곽현수는 VIP룸 뒤에 있는 실내 정원으로 갔다.그곳에는 트위드 자켓을 입은 여시은이 고양이를 그네 위에 앉아 함께 놀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오는 장면이었다.곽현수를 발견한 여시은은 이내 그네에서 내려오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아버님이라고 불렀다.“시은아, 많이 기다렸지?”곽현수가 웃으면서 물었다.“아니에요. 여기 풍경도 좋고 캣닢도 있어서 쿠아랑 엄청 재밌게 놀고 있었어요.”여시은이 달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저기 가서 앉자.”곽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손짓했다.“좋아요!”여시은은 쿠아를 캣닢 옆에 내려놓고 곽현수와 함께 파라솔 아래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직원은 두 사람을 위해 차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여시은은 한 입 맛보고는 이내 똘망똘망한 눈
고은서는 고씨 집안 본가에 들렀다.비록 며칠 전에 고준석을 만났지만 지금도 너무 보고 싶었는지라 가서 함께 앉아 소소한 대화라도 나눌 생각이었다.그날 고은서가 고국성 집에서 나오면서 고준석한테 고국성 일에 관해 다 알린 탓에 그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화를 내긴 했으나 그녀가 유성준과 함께 고국성을 도와 일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 달랜 덕분인지 아니면 나이도 있고 유성준을 굳게 믿어서인지 직접 나서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고국성도 이미 마흔이 넘어갔고 MQ의 현 관리자로서 회사 일에 이미 손을 뗀 고준석이 계속 모든 일을 일일이 신경 써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고은서가 본가에 도착했을 때 고준석은 오춘식과 함께 정자에서 바둑을 하고 있었다.그녀가 고준석을 향해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오춘식은 눈치 있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준석은 다가와 다정하게 자신의 어깨에 기대는 고은서를 보면서 웃으며 물었다.“아이고, 우리 은서 얼마 만에 애교를 부리는 거야? 할아버지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고준석은 고은서를 매우 아꼈는데 그녀가 애교만 부리면 아무리 무리한 요구라도 다 응해 줬었다.그 때문에 고은서는 자신이 모든 걸 쉽사리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점차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전생에 자신이 곽승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고은서는 자신만만하게 전미자한테 곽씨 가문 며느리 직책을 잘 이행하고 꼭 곽승재가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그러나 고은서는 정신병원에서 자살하고서야 이 세상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쉽다고 느낀 건 누군가가 대신 그 대가를 치러줬기 때문이라는 것도 깊게 깨달았다.이번 생만큼은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조심스럽게 살아왔다.그녀는 곽승재랑 이혼만 하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했다.“은서야,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누가 널 괴롭혔어?”
유일 투자 은행에 도착한 후, 고은서는 먼저 직원들과 함께 간단한 업무 회의를 열고 곽승재의 스케줄을 알아보기 위해 육현석한테 연락했다.“은서야, 마침 전화하려고 했는데.”육현석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승재 형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도무지 연락이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승재 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어?”정보를 캐내려고 전화했는데 도리어 정보를 알려주는 입장이 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다.“저도 잘 몰라요. 연락이 안 되나요?”고은서가 물었다.육현석은 곽승재가 연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주민기도 연락이 안 되어서 비서실에 전화 해보았는데 비서는 그저 곽승재가 바쁘다고만 했다고 말했다.“은서야, 혹시 승재 형이랑 싸웠어?”고은서는 곽승재가 그녀 대신 스테인리스 철봉 공격을 막아준 그 날 자신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뱉은 탓에 그가 약간 기분 나빠했던 일이 떠올랐다.‘내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건가? 아니면 그날 진짜 다치기라도 한 거야?’고은서는 또 그날 육현석이 곽승재한테 전화했을 때 전화 너머로부터 여자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온 게 떠올랐다.‘그럼 그 여자는 곽승재가 다쳐서 마음 아파서 운 거야?’“은서야, 우리 승재 형 찾으러 같이 GS그룹으로 가보지 않으래?”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지금은 곽현수가 준 임무를 완수해야 했기에 곽승재를 어떻게서든 만나야 했다.그러나 육현석의 의심을 받는 걸 피면하기 위해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는 척하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나 마침 볼 일이 있어서 유일 투자 은행 근처에 있는데 내가 데리러 갈게.”그 말을 들은 고은서가 가방을 들고 내려가려고 할 때 마침 전화가 울렸다.육현석이 까먹은 일이라도 있는가 해서 폰을 들고 확인해 보았는데 낯선 유선전화 번호였다.받아보니 다름 아닌 해성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였다.상대방은 아주 예의 바르게 백유미가 거의 완치 되어서 전에 얘기했던 정신병 위장 사건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끔
육현석은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고은서가 회사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멀리서 그의 차가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고은서가 차에 오르자마자 육현석은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은서야, 무슨 일 있었어? 승재 형이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야?”그의 장난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던 고은서는 방금전에 경찰과 했던 통화내용을 육현석한테 다 알려주었다.그도 듣자마자 약간 의아해했다.“갑자기 진짜 정신병 환자가 되었다고? 전에 갔을 땐 다 연기였잖아.”“전에는 연기지만 그사이에 정신병 환자가 될만한 일을 겪었을 수도 있잖아요.”고은서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신병원에 갇혀서 자유의 몸도 아닌 사람이 무슨 일을 겪겠어?”육현석이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고은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래서 정신병원에 가서 백유미를 만나보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걸 피면하기 위해 특별 병실에 안배해 놓았다고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하네요.”그 말을 들은 육현석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헛된 생각은 그만하고 승재 형 찾으러 가자. 승재 형이라면 알고 있을 수도 있잖아.”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말에 동의했다.백유미가 정말 전문가까지 속일 정도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든 곽승재도 그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곽승재의 생각을 한번 들어봐야겠어.’고은서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육현석과 함께 GS그룹으로 향했다.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고은서를 알아보고 공손하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다가왔다.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약간 불편했던 고은서는 호칭을 바꿔 달라고 당부했다.“죄송하지만 현재 저랑 곽승재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 그냥 은서 씨라고 불러주세요.”프론트 데스크 직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뜻대로 고은서 씨라고 불렀다.그리고 이내 공손하게 물었다.“곽 대표님 찾으러 오신 거죠?”“네. 승재 형 찾으러 왔어요. 위에 있죠?”“요즘 바쁘셔서 지금 회사에 안 계세요. 찾으시려거든 직접 전화하시는 게 더 나을 것
고은서는 육현석을 막았다.“그래도 곽승재 사무실인데 그냥 들어온 것도 마음에 걸리는데 물건은 함부로 다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그러나 육현석은 괜찮다면서 손짓했다.“괜찮아. 우리가 낯선 사람도 아니고 설마 내가 승재 형 물건을 훔치겠어? 게다가 네 물건을 가지는 건데 뭐가 어때.”“...”고은서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육현석은 이미 사무실 책상 옆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캐비닛을 열고 가지런히 접혀있는 회색 담요 하나를 꺼냈다.“계속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육현석은 이내 담요를 고은서한테 건네주었다.“은서야, 봐봐. 익숙하지 않아?”익숙하다고 느낀 고은서는 문뜩 자신이 예원 별장에 있을 때 귀비 의자에 깔고 발을 덮는데 썼던 담요라는 걸 발견했다.“이 담요가 왜 여기 있는 거죠?”고은서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승재 형이 넣어둔 거겠지.”그러나 육현석은 이내 놀라 하며 물었다.“설마 네가 승재 형한테 준 건 아니지?”‘승재 형이 고은서가 준 담요까지 소장할 정도로 변태적인 사람이었어?’고은서가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부인하려고 할 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예원 별장에 있을 때 이미숙이 한 번 소파에 있는 곽승재한테 관심을 표해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곽승재의 도움을 받은 탓에 어쩔 수 없이 눈에 보이는 담요 하나를 이미숙한테 건네주면서 그에게 덮어주라고 했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발을 놓는데 쓰던 낡은 담요를 아줌마가 이미 처리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곽승재 사무실에 있는 거야?’“진짜 형이 훔친 거야?”육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고은서를 보면서 깜짝 놀라 하며 물었다.고은서는 어색해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부인했다.“그럼 네가 준 거네.”육현석이 이내 흥분해 하며 말했다.“은서야, 형이 이 담요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내가 한 번 우연하게 덮고 있었는데 형이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날 꾸짖기까지 했다니까.
육현석의 관심사는 정말 유별나게 독특했다.고은서가 걱정하는 것이 육현석이 생각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녀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다.‘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곽승재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게 뻔해.’“삼촌 일 때문에 영향 받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곽 회장님께서 곽승재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으니까요.”고은서는 사실대로 말했다.육현석도 고국성의 일에 관해 얼핏 들은 바가 있었다.‘곽현수 성격에 확실히 그럴만 하지.’“그날 삼촌 일이 승재 형 아버님이랑 연관 있다고 했잖아. 나중에 확인해 봤어?”육현석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곽현수는 애초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이걸 그대로 육현석에게 알려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고은서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인했다.“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어요.”“그럼 오늘 나랑 승재 형 찾으러 온 것도 그 얘기를 하기 위해서야?”육현석이 무언 갈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그렇죠.”어이가 없었지만 고은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은 그후로 한참 동안 사무실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곽승재는 나타나지 않았다.고은서는 육현석의 말을 듣고 곽승재한테 연락해 보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고은서는 이내 주민기한테 연락했다.얼마 후, 주민기가 전화를 받았다.“고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고은서는 주민기의 아주 공식적인 말투를 들으면서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주민시 씨, 곽승재 혹시 다쳐서 병원에 있는 건 아니죠?”주민기는 멈칫하다가 이내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등을 다치긴 했으나 지금은 별다른 문제 없습니다.”‘그날 정말 다친 거였어? 그런데 왜 병원도 가지 않고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 거지?’고은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났다.“곽승재 지금 어디 있죠?”주민기는 그녀의 물음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답했다.“지금 GS그룹의 주주분을 만나러 와서
육현석이 입을 열기도 전에 여자가 털썩하고 두 사람 앞에 무릎을 꿇었다.“육 도련님, 저예요. 제발 경호우너을 부르지 말아 주세요.”“한 비서?”고은서가 아직도 겁에 질려 있을 때 육현석은 그 여자를 알아 보았다.삼십 대 좌우로 보였는데 GS그룹의 검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비서들처럼 자랑스럽고 우월한 면을 뽐내는 대신 공포에 질린 듯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대체 무슨 일인데 주차장에 숨어 있는 거야?”육현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그의 말을 들은 한 비서는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면서 갑자기 그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육 도련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는데 용서를 빌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주차한 곳 뒤에는 나무들이 주지어 있었고 차들이 빼곡히 들어선 탓에 사람이 숨어있는 걸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한 비서는 무릎을 꿇은 채 끊임없이 육현석을 향해 사과했다.그녀는 육현석의 차를 알고 있었고 또 그가 이곳으로 오는 걸 알고 일부러 차 뒤에 숨어 그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말해.”“아니요. 그냥 꿇고 말하겠습니다.”한 비서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말했다.그녀는 방금전에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을 한 탓에 이마가 빨갛게 부어올랐고 공포 질린 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면 일부러 보여주기 식으로 연기하려는 거야?”육현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니요. 저는 그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한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사과하려거든 조용한 곳에 가서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육현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한 비서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를 본 고은서가 입을 열었다.“현석 씨, 일 봐요. 저는 혼자 차 불러서 가면 돼요.”“안 돼요. 고은서 씨 용서도 받아야 하니까 같이 가요.”육현석이 말을 꺼내기도
육현석의 말을 들은 고은서도 어리둥절해졌다.만약 간단한 스케줄만 알려줬다면 이정도로 겁에 질려 있을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더 큰 일과 엮여 있는 건가?’아니나 다를까 육현석의 엄숙한 모습을 본 한 비서는 얼굴이 방금전보다 더 창백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한 번 커피 가져다 드릴 때 곽 대표님한테 고은서 씨 친구분과 백유미 사이의 조사해보겠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 그걸 백유미한테 알렸어요...”육현석은 그제야 곽승재가 자신더러 성아연과 백유미 사이에 관해 조사해보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그러나 당시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두 사람은 몇 번 만나고 연락한 것 외에는 경제적 래왕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그 일로 백유미가 산장에서 곽승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약을 잘못 복용한 거라고 의심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곽승재로부터 백유미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고은서의 혐의를 씻어줬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육현석은 백유미가 고은서를 해치려거든 왜 고은서를 대신해 진상을 밝힌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그러니까 백유미가 한 비서를 통해 내가 자신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그런 대책을 세웠다는 거야?’고은서도 문뜩 곽승재가 육현석한테 백유미와 성아연 두 사람 사이에 관해 조사하라고 시켰다면서 자신도 백유미를 찾아가 따졌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그런데 그녀는 당시 곽승재가 이 일을 얼버무리고 넘어가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그를 향해 비아냥거렸었다.‘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나랑 곽승재 사이의 모순이 거의 다 백유미 때문에 생긴 거네.’백유미가 현재 정신병원에 갇혀있다고 한들 고은서는 아직도 생각하면 할 수록 공포감이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정말 악독한 여자야.’한 비서는 계속 자신이 했던 행위를 후회한다면서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다.육현석은 이마가 빨개진 한 비서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이익을 탐내는 동시에 그 대가도 따르는 법이야. 백유미한테 몰래 소식을 전달한 건 괘씸하지만 그렇다고 죽
박지연은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내가 보기엔 여시은은 태생이 못돼먹었어!”“이번에 그렇게 크게 당했으니 더더욱 널 원망할 거야. 너 조심 좀 해.”박지연이 걱정스럽게 당부했다.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기에 여시은과 평화롭게 지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앞으로는 여시은을 더 철저히 경계할 것이다.“듣자 하니 곽승재가 내내 널 감싸줬다며? 너한테 점점 마음이 가는 모양이야.”박지연이 코웃음을 쳤다.어젯밤 곽승재가 고은서를 계속 도와줬던 건 사실이었다. 증거를 공개하자고 제안한것도 곽승재의 생각이었고 마지막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곽승재가 고은서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었다.하지만 고은서는 곽승재에 대한 이야기를 박지연과 깊이 나누지 않았다.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박지연이 고은서에게 뜬금없는 소문 하나를 전했다.“우리 과장님한테서 들었는데, 어제 혜린 씨가 다니는 병원에 조 여사님이 찾아가서 난리를 쳤대. 혜린 씨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다른 남자랑 팔짱 낀 사진까지 들고 와서 공개하면서 혜린 씨랑 그 자리에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움 났대!”고은서는 지난번 소동 이후 손자를 중시하는 조수연이 한동안은 조용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또 난리를 친 거였다. 조수연의 전투력은 엄청 대단했다.“아니, 그러다 혜린 씨 혹시라도 애를 지우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고은서가 물었다.박지연은 말했다.“조 여사님 말로는 혜린 씨 뱃속 애가 자기 아들 애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의심해서 혜린 씨를 끌고 가서 친자 확인하자고 했대. 그래서 둘이 몸싸움까지 벌어져서 이미지도 최악이라 혜린 씨는 한 달 정직당했어.”“혜린 씨 배속에 애가 온승준 씨 애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집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거야? 그냥 진짜 애 아빠랑 결혼하면 될걸...”고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소문엔 그 남자가 유부남에 애까지 있다고 하더라. 자세한 건 나도 몰라. 그냥 과장님이 흘린 얘기야.”
여시은은 여전히 여재훈의 다리를 붙잡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아빠가 생각하시는 해결 방법은 뭐예요?”여재훈은 여시은에게 홍보팀을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개인적으로 고은서에게 직접 진심으로 사과한 뒤 집에서 2주 동안 자숙하라고 말했다.“제 회사는 아직 개업식도 제대로 안 했는데 공개 사과를 하라뇨? 그럼 모든 사람들이 저를 웃음거리로 볼 거 아니에요!”여시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애원했다.“아빠, 저 은서한테 개인적으로 사과만 하면 안 돼요? 저도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사람들을 이끌기 힘든데, 공개적으로 사과하면 앞으로 누가 저를 믿고 따르겠어요?”“안 된다.” 여재훈은 단호하게 말했다.“이 일은 이미 파장이 커졌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확실하게 해명해야 한다.”“시은아, 잘못을 저지른 건 무서운 일이 아니야. 진심으로 뉘우치고 성실하게 사과하면 은서 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너에게 다시 기회를 줄 거다.”여재훈은 계속해서 말했다.“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네가 잘못했는데 내가 덮어주면 그건 너를 망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이렇게 결정된 거다!”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분노가 치밀었다.‘고은서를 그저 연못에 좀 빠지게 했을 뿐인데 이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일을 키운단 말인가?’‘공개 사과라니, 이제 예전처럼 모두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던 모습은 끝이라는 거잖아.비록 인터넷의 영상은 지워지더라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나쁜 인상은 지워지지 않을 거란 말이야!’오늘 밤 그렇게 많은 부유층과 정재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해성에서 쌓아온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가 단번에 무너진 셈이다.예전엔 그녀가 울기만 하면 여재훈은 안쓰러워하며 뭐든지 다 용서해 줬었다.‘지금은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아빠는 고은서 때문에 자신의 딸을 벌하려 한다니, 정말 나를 딸로 생각하긴 하는 걸까?’
여시은은 그 말을 듣자 눈이 시뻘게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빠,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고은서가 일부러 저를 함정에 빠뜨린 거예요. 왜 저를 믿지 않으세요!”“시은아!”여재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난생처음으로 이토록 차가운 눈빛으로 딸에게 화를 냈다.“너는 어쩌다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만 하는 사람이 됐니!”“내가 사람을 시켜서 확인해 봤어. 연회장 CCTV 꺼놓은 거, 그거 네가 시킨 거더라.”여재훈은 딸을 억울하게 만들까 걱정돼 CCTV 관련 내용을 직접 조사했다.그런데 정말로 여시은이 꺼놓았던 것이었다.“네가 정말 은서 씨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왜 CCTV를 미리 꺼놓은 거냐?”여재훈은 냉정한 태도로 물었다.여시은은 자신이 고은서의 계략에 걸려든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고은서는 일부러 도발적인 눈빛으로 여시은을 자극했고 곧바로 테라스로 이끌어냈던 것이다. 모두 여시은한테 엿 먹이려는 행동이었다!여시은은 고은서가 쿠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동적으로 행동해 자신을 밀칠 거라 확신했었다.왜냐하면 고은서는 지난번엔 쿠아를 다치게 한 일로도 크게 충격을 받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엔 반전이 생겼다.고은서는 오히려 침착하게 반격했고 지난번 농장에서의 ‘물에 빠진 사건’ 증거까지 들고나왔다.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이상 여시은은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았다.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여재훈을 향해 소리쳤다.“맞아요! 저 고은서가 너무 꼴 보기 싫었어요! 왜 아빠는 맨날 걔만 칭찬하세요? 이러니깐 제가 질투 나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고은서한테 꼽 주고 싶었어요!”“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후회도 안 해요!”“너!”여재훈은 손을 번쩍 들어 여시은의 뺨을 때리려 했지만, 그녀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보고는 차마 때릴 수가 없었다.“시은아, 아빠가 평소에 너를 어떻게 가르쳤니? 사람은 자기 양심에 떳떳해야 하고 올곧게 살아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너는 어떻게 질투심에 눈이
이미숙은 유튜브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바로 여시은이 고은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연못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그 영상은 누군가가 휴대전화로 촬영해 올린 것 같았고 화질이 너무 좋은 건 아니지만 전반 상황을 알아보는 데에는 충분했다.영상의 끝에는 고은서와 여시은의 얼굴을 비춘 장면도 담겨 있었다.다소 초라해진 고은서는 곽승재의 부축을 받으며 옆에 서 있었다. 여시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엔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했다.그 와중에 영상의 제목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재벌가 아가씨, 두 얼굴의 진실!]“사모님, 저 여자는 어쩜 저리 독하대요.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다니. 누가 폭로해 줘서 다행이지! 이제 세상 사람들 다 그 여자 피해서 다니겠어요!”이미숙은 화가 난 듯 말했다.고은서는 이번 일이 오래 퍼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시은 뒤에는 여재훈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번 일로 여시은이 보기 좋게 망신을 당했고, 여재훈 역시 자신의 딸이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테니, 이번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은서는 이미숙의 휴대전화 영상에 대뜸 ‘좋아요'를 눌렀다.한편, 여씨 가문에서.여시은 역시 유튜브 영상을 확인했다. 분노에 찬 그녀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던졌다.밖에 서 있는 박미화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시은 아가씨, 회장님께서 지금 바로 서재로 오시래요. 할 말씀이 있으시답니다.”이번이 박미화가 세 번째로 말을 전하러 온 것이었다.여시은은 곧바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와 짜증을 숨기고는 일부러 슬프고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박미화는 방안에서 반응이 없자 방문을 열려고 하였다. 때마침 여시은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손을 거두며 사과했다.여시은은 박미화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에 분노로 인해 물어뜯은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살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여시은은 울먹이는 말투로 물었다.“미화 언니, 아빠가 나한테 화 많이 나신 거야? 나 어떻게 해야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기사가 차를 라이트문 아파트 앞에 세웠다.고은서와 곽승재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은서는 샤워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고 곽승재는 거실에 남았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고은서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했다. 곽승재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왜 또 왔어? 할 말 있어?”고은서가 물었다.곽승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논의할 게 있어서. 그전에 이 콜라 생강차부터 마셔. 아주머니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거야.”“사모님, 콜라 생강차는 감기 예방에도 효과적이거든요. 어서 드세요!”이미숙이 차를 가져오며 말했다.고은서는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듯 물었다.“아줌마, 제가 방금 들어온 걸 보지도 못하셨을 텐데 어떻게 제가 감기 걸릴 줄 아시고 미리 차를 준비하셨어요?”이미숙의 눈가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곽승재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내가 알려줬어. 일단 마셔.”고은서는 고개를 숙여 생강차를 내려다 볼뿐 이미숙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보지 못했다.물론 곽승재의 눈에 비친 기대감도 보지 못했다.생강차의 냄새를 맡아보니 생강 향이 꽤 진했다.고은서는 생강차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콜라의 단맛과 생강의 톡 쏘는 맛이 어우러져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맛이 어때요?”이미숙이 물었다.“좋네요. 그런데 오늘은 생강을 좀 많이 넣으신 것 같네요. 예전에 만드신 것보다 더 매운데요.”이미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급히 대답했다.“생강 양을 조절하지 못했네요. 주의할게요.”고은서는 더는 따지지 않고 다시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곽승재가 말을 건넸다.“맛이 별로면 안 마셔도 돼.”고은서는 그를 흘겨보았다.“누가 맛없다고 했어? 아줌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건데 끝까지 마셔야지.”“사모님, 도련님과 얘기 나누세요. 저는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이미숙은 두 사람의 언쟁을 피하려는 듯 급히 자
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곽승재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녀는 친구에게 부탁해 적절한 시기에 감시 카메라를 끊어놓도록 준비해두었다.하지만 여시은이 먼저 참지 못하고 로비의 카메라를 꺼버린 것이다.고은서가 감히 감시 카메라의 확인을 제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준비를 했을 뿐만 아니라 여시은 역시 감시 카메라를 조작할 것이라는 점까지 예측했다.“만약 여시은이 참고 끝까지 널 찾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작정이었어?”곽승재가 물었다.고은서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개업식이 끝난 후 대형 스크린에 공개할 계획이었어.”곽승재가 눈썹을 추켜세웠다.“네가 앞서 백스테이지 주위를 둘러본 것도 동영상을 공개할 준비를 했던 거야?”고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시은이 일부러 나를 물에 빠뜨리고 향수로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쿠아까지 학대했어. 내가 당연히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리고 시은이가 인내심을 가졌다고 해도 난 개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지. 시은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에서 쿠아의 죽음을 언급하며 나를 자극했고 다시 같은 수법을 쓸 참이었던 거지. 나는 그저 시은이가 파려던 함정을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곽승재는 고은서가 준비를 해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고육지계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펼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녀의 연기는 너무나도 실감 났다.고은서가 바닥에 넘어져 흐트러진 모습을 보는 순간 곽승재는 정말로 여시은의 소행일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은서는 곽승재의 생각을 읽었는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여운 척 한 거 아니야. 백유미와 여시은이라는 고수들 덕분에 나도 한 수 배웠을 뿐이지.”백유미의 과거 행동을 떠올린 곽승재는 가슴을 죄는 듯한 자책감이 밀려왔다.곽승재는 진지하게 사과했다.“은서야, 미안해.”무심코 흘린 말에 곽승재가 사과하는 모습을 본 고은서는 잠시 당황했다.“사과할 필요는 없어. 당신도 백유미 씨에게 속았을 뿐이잖아. 어쨌든 ‘목숨의 은인'
“시은아!”영상 속 장면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재훈은 걱정된 목소리로 딸을 불렀다. 그리고 뒤이어 멀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어서 따라가서 시은이를 보호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해서는 안 돼!”부하들이 여시은의 뒤를 쫓아 나간 뒤 여재훈은 스크린을 힐끗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은서에게 사과했다.“제가 딸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시은에게 직접 확인한 뒤 여은서 씨께 해명해 드리겠습니다.”고은서는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는 그곳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여 대표님, 제가 은서 씨를 모셔다드리겠습니다.”곽승재가 말했다.송민준 역시 함께 가겠다고 전했다.여재훈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개업식에서 이런 소동을 일으킨 이상 누구라도 축하할 마음이 없을 터였다.고은서 일행이 떠나자 여재훈은 참석자들에게 직접 사과하며 홍보팀에 현장 수습을 지시했다.호텔 앞 광장에서 곽승재와 송민준의 운전기사들이 각각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송민준은 고은서를 배웅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곽승재가 고은서를 부축하면서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번거로울 텐데 제가 은서 씨를 모시고 가겠습니다.”송민준은 자기가 고은서의 파트너로 왔기 때문에 그녀를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설득했다.곽승재는 송민준의 이런 친근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고은서를 안아 들어 자신의 차에 태우고 싶었지만 고은서가 화를 낼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입을 오므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택권을 고은서에게 넘겼다.고은서는 당연히 송민준과 함께 갈 생각이 없었다.“오빠, 오늘은 고마웠어. 오늘 승재 오빠의 차를 타고 갈게. 어차피 길도 같으니까. 내일 다시 연락할게.”고은서의 반응에 송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곽승재는 고은서를 차에 태운 뒤 트렁크에서 깨끗한 외투를 꺼냈다.차 안에 앉자 곽승재는 고은서의 어깨
여시은은 고은서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해졌다.‘갑자기 왜 또 농장 일을 다시 꺼내는 거지?’여시은은 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할수록 점점 더 억울하고 분했다.“은서야, 왜 나를 이렇게 모함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너를 물에 빠뜨렸다고 그래? 네가 나를 밀었잖아! 내가 우리 아빠를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 와서 또 나에게 뒤집어씌우다니!”여시은은 여재훈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빠, 저는 항상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것 같아요... 은서가 이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너무 속상해요...”여시은의 슬프고 안쓰러운 모습에 여재훈은 점차 진지해졌고 고은서를 보며 물었다.“고은서 씨, 시은이가 은서 씨를 물에 빠뜨렸다는 증거라도 있어요?”“물론 있죠.”고은서는 이미 곽승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난 상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송민준이 보낸 영상을 찾았다.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은서가 진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더니 그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했다.이때 곽승재가 제안했다.“여 대표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영상을 공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직접 보면 진실이 명백해질 테니 나중에 왜곡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여시은은 고은서가 미리 준비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고은서가 이렇게 계획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증거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른다.여시은이 고은서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여시은은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에요! 이미 개업식 시간이 다 됐는데 계속 이러쿵저러쿵하며 일을 벌이다니! 고의로 우리 개업식을 방해하는 거 아니에요?”“아빠, 오늘 이분들은 분명히 좋은 의도로 온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냥 쫓아내는 게 낫겠어요!”“여시은 씨, 말씀이 참 지나치군요. 우리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입니다.”송민준이 여재훈보다 먼저 입을 열
구경하는 사람들도 송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의 여자 파트너가 곽승재의 품에 안겨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송민준은 사람들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었지만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여시은 씨, 저는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은서와 여시은 씨의 사이에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은서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아빠,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같은 편이라서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는 거예요!”여시은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여재훈은 눈물 글썽이는 딸을 바라보더니 온몸이 흐트러진 고은서를 향해 물었다.“고은서 씨, 사실대로 말해보세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고은서는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렸지만 이런 일을 당하면 당연히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여 대표님, 제가 뭘 말해도 소용없을 겁니다. 시은이와 저는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도 판단하기 어려울 겁니다.”고은서는 로비 주위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여기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직원들을 시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진실도 드러나겠죠.”이 말을 듣자 여시은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고은서가 여시은보다 먼저 바닥에 넘어졌는데 감시 카메라의 확인까지 제안하다니!‘설마 은서가 이 시간대에 감시 카메라를 꺼뒀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시은아, 너의 생각은 어때?”고은서는 고개를 들어 여시은에게 물었다.여시은은 분노를 꾹 참고는 여전히 억울하고 순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좋아! 하지만 개업식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감시 카메라는 확인하는 동안 내가 먼저 개업식을 진행하고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게 어때?”“안 돼.”고은서의 작은 얼굴에는 단호한 표정이 담겨있었다.“이 사건은 반드시 바로 조사되어야 한다고 봐.”고은서는 다시 여재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여 대표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가 시은이 만큼 귀하지는 않지만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