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씨 집안은 남아 도는 게 돈이니, 강무진이 아무리 막 나가도 망하지 않을겁니다. 다들 더 이상 걱정 마세요.”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카를 괴롭히는 게 눈에 거슬렸던 강운경이 나서서 무진을 비호했다.“운경아, 네 말 참 듣기 거북하구나. 이 자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와 삼촌들 모두 네 아버지, 내 형님을 따라 생사를 함께 했던 형제들이 아니냐? 우리 또한 이 강씨 집안의 일원이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네 말에 삼촌들이 얼마나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겠니?” 강씨 집안 셋째 어른인 강상규가 일어섰다. 그리고 강운경의 시선과 마주했다.입술을 깨문 강운경이 울분에 찬 눈빛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애초에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충성을 다하는 척했던 두 사람이었다.이제 아버지가 안 계시니 본색을 드러낸다.“둘째 서방님, 말씀을 참 잘 하셨습니다. WS그룹은 모두의 것입니다. WS그룹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은 모두의 공로이지요. 그러나 우리 선대 회장님이 살아 계실 때, 여러분께 결코 박하지 않게 해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오늘 이자리에서 강씨 본가를 곤란하게 하는 건 좀 지나치신 것 같군요” 차가운 음성으로 일갈한 안금여가 매서운 시선으로 둘째 시동생을 쳐다보았다.“형수님, 지나치긴요? 능력 있는 이가 자리에 오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 또한 형님이 가르쳐 주셨던 교훈이지요.” 둘째 강상철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냉기를 내뿜었다.회의장에 있는 대부분의 주주들은 모두 강상철과 강상규에게 강요받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세력이 회사에서 점차 강대해지며, 주주들은 자연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주주들은 알아서 두 사람에게 줄을 섰다.그들 말이 틀리진 않다.지금 강씨 본가에는 강무진뿐이다. 그리고 별 도움 안되는 안금여도.줄을 잘못 섰다가, 앞날에 무슨 화가 닥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눈치 빠른 이들은 둘째 강상철과, 셋째 강상규 쪽이 더 가능성 있다고 과감하게 그쪽 라인으로 갈아탔다.그러니 회의장 내
강상철과 강상규는 안금여의 당황한 기색을 보며 내심 통쾌했다.그들은 본가만이 집안의 기업을 장악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다.‘모두들 회사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왜 본가만 권력을 잡고 휘두르려고 하는 건데?’‘일개 아녀자에게 참 오랜 세월 동안 억눌려 지냈었다…….’이건 강상철과 강상규에게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그들도 모두 강씨 집안 사람들이다.게다가 지금의 본가에는 WS 그룹을 이끌만한 인물이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안금여 다음의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마땅한 후계자 역시.본가의 유일한 남자인 무진은 모두에게 병신 취급을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어느 누구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출가외인 강운경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 없는 법.다시 말해 회사를 강상철과 강상규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그리고 그들만이 WS그룹을 더욱 키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회장이 된 뒤로 내내 규정을 들먹이는 안금여는 봉건적 사고방식에 고루하기 그지없었다,지금 앞으로 쭉쭉 뻗어가려는 WS그룹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그런 그들의 눈에 안금여는 자신들의 회장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고 있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일 뿐이다.안금여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얼굴에 혈색을 잃은 상태였지만 등을 곧게 펴고 음성에 힘을 실었다.“네, 몸이 안 좋은 거 인정합니다. 허나 아직 몇 년 더 버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살이있는 한, 회장직에서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하신 것은 잘 알겠는데, 아무리 급하더라도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겁니다. 내가 죽고 우리 집 영감 옆에 누으면, 그 때 다시 회장에서 내려오니 마니 논의하시죠?”그녀의 말에는 한껏 조롱기가 다분했다.‘이것들이! 사람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자리에서 내려오길 학수고대하고 있다니……. 꿈도 야무져! 누가 자리를 내놓는데?’“형수님,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제가 좋은 병원을 알아봐 드릴 테니 안심하고 치료 먼저 받으세
위에는 강상철과 강상규의 이름이 적혀있었다.안금여가 보니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이미 본가에 육박할만한 수치였다.모두 강상철과 강상규가 몰래 인수한 것들이었다.주주들로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주식을 이만큼 사 모으는 데까지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을 거다.이번 주총을 위해 회장직을 차지할 계획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철저히 준비해 왔을 터.조금씩 핏기를 잃어가던 안금여의 얼굴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렸다.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집안 사람들 아닌가? 이 정도까지 도가 지나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만약 우리 영감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이 두 놈이 여기서 이처럼 날뛸 수 있었을까?’주식 위임동의서는 안금여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이 상황을 지켜보던 강운경이 얼른 안금여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엄마, 괜찮으세요?”무진도 미간을 한군데로 잔뜩 모았다.“할머니…….”“나, 괜찮다.” 강운경의 품에 안긴 안금여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감싸쥐었다.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최근 몇 년간 본가에서 눈 감고 참아준 게 한 두 번입니까? 뭘 더 원하세요?” 안금여는 숨을 고르며 강상철과 강상규를 향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우리가 뭘 원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회장직을 내놓으시죠? 우리 모두를 위한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강상철의 표정도 싸늘해졌다.주식 위임동의서를 내놓았다는 것은 본가와 등을 돌리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WS그룹이 옛날의 그 WS그룹인 줄 아시나?’큰형님이 돌아가신 후, 본가도 이미 그 힘을 잃었다.큰형이 살이 있을 때는 비위를 맞춰야 했지만, 지금은…… 본가가 자기들에게 빌붙어 살게 할 것이다. 오랫동안 참았던 이 수모도 풀어내면서…….“둘째 숙부님, 우리 아버지 살아 계실 때, 숙부님들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계시잖아요? 그런데 기어이 우리 본가의 숨통을 끊으놓으시려는 겁니까?” 강운경의 눈시울이 옅은 빛으로 붉어졌다.‘참아야 한다.
병원에 호송된 안금여는 곧바로 응급실로 옮겨졌다. 강무진과 강운경도 함께 응급실 입구까지 따라 갔다.성연은 나중에야 안금여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강무진이 전화로 알려준 것이다.선생님께 말씀드린 후, 수업을 빠지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강운경과 강무진이 응급실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다.운경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 붉어진 눈시울, 한숨도 못 잔 듯한 초췌한 얼굴.안금여가 들어간 응급실을 바라보며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이었다. 무진은 그녀보다 좀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서 무진의 마음도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왠지 모르게 성연의 마음도 울컥했다.무진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을 주고자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얹었다. “아저씨, 할머니는 괜찮으실 거예요.”예전에 외할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그녀도 정말 절망적인 심정이었다. 그 당시 누구 한 사람이라도 곁에서 자신을 다독여주기를 진심으로 바랬었다.그러나 그녀는 늘 혼자였다.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런 두려움과 고통을 잘 알았다.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본 무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응급실에 빨간 불이 켜져 있다.그때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남자의 몸에는 오랜 세월의 경험과 진중함이 베어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는 약간의 피곤함도 함께 묻어나왔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운경이 슬픔을 참으며 손수건으로 의사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엄마는 좀 어떠세요?”그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이 남자가 운경의 남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흰 가운의 가슴 부근에 새겨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원장, 조승호.’조승호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썩 좋지 않아.”최근 몇 년간 안금여의 주치의가 되어 최고의 약과 최신 의료장비 등 모든 것들을 사용해가며 치료를 전담해왔었다.하지만 지금 안금여의 몸은 지금 당장 넘어가도 이상하지
비관적인 진단 결과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운경이 몸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동작 빠른 성연이 얼른 다가가 자신의 몸으로 운경의 몸을 지탱했다.“고모님, 조심하세요.”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운경이 성연의 목소리를 듣고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성연의 손을 빌려 몸을 바로 세웠다.“고마워, 성연아.”“아니에요.” 무진의 안색도 안 좋았다.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할머니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지금의 안금여는 꺼져가는 불빛 마냥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셈이다.무진의 뒤로 다가간 성연은 생각이 깊어졌다.그녀는 안금여가 좋았다. 아주 많이.마치 자신의 외할머니처럼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성연의 삶에서 따스한 온기를 선사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 안금여였다.외할머니 같으신 분이 자신의 눈앞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차마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강상철과 강상규, 모두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들이 계속 날뛰는 것 또한 보고 싶지 않았다.‘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무진과 운경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끔 해야 한다.’‘그리고 당장 할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봐야겠다.’어느정도는 자신의 의술에 자신이 있었다잠시 생각을 정리한 성연이 무진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아저씨, 회사에 그 사람들 그냥 그렇게 끝내지 않을 것 같은데, 누가 가서 지켜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할머니가 안 계시니, 그들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거야.” 성연이 강상철과 강상규가 강압적 수단을 써서 본가를 공격해 올까 봐 걱정하는 줄 알고 무진이 대답했다.그 문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강상철과 강상규가 인성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른 주주들까지 그렇지는 않았다.안금여가 입원까지 한 상황에서 계속해서 본가를 몰아붙인다면, 여론이 악화되어 뒤집어지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 터였다.따라서 속으로는 간절히 원한다 해도 계속 억지로 강행하지는 못할 것이다.무진은 교활한 두 늙은이가 처리하는 방식을 잘
목석 같은 무진에게는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그럼 강운경 쪽은 더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슬슬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그런데 뜻밖에도 강운경 쪽에서 자신이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다.회사는 현재 난장판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회사의 주축이었던 안금여가 쓰러졌으니 회사 주주들뿐 아니라 직원들도 불안하고 초조해 할 것이다.누군가는 현장을 수습하고 주주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했다.안금여가 쓰러졌으니 지금 회사를 지킬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무진은 아직 최대한 노출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강씨 집안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버텨내야 했다.두 숙부가 어머니의 병세를 폭로하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을 낸 지금, 회사 주주들도 확실한 답변을 듣고 싶어할 게 분명했다.비록 지금 자기들 편에 선 주주들이 많지는 않겠지만.그러나 표면적인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운경이 흩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촉촉해진 눈가를 훔쳤다.“무진아, 여기서 할머니를 잘 보살펴 드려. 난 먼저 가 볼게. 회사 내에 우리 가족이 없어선 안 돼. 고생해라.”비록 출가외인이라고 하지만 그녀 역시 선대회장의 딸이었다. 회사의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생사 고난을 같이한 원로들이기에 분명 어느 정도는 봐줄 것이다.“고모, 제일 힘든 건 고모이지요. 전 아무 도움도 안 돼는 걸요…….” 무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불빛 아래 선 그에게서 외로움과 연약함이 묻어났다.밖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그의 실력이 형편없는 게 아니었지만,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그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예를 들면, 그의 다리 그리고 할머니 안금여의 병세…….무진의 모습을 본 운경은 마음이 아팠다. 요 몇 년 동안 억울한 일을 많이도 당한 무진이었다. 게다가 무거운 짐까지 지고 있으니.운경이 무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였다.“네가 무사한 게 할머니께 가장 큰 효도야. 무진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무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연은
성연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진이 계속 자리를 안 뜨면 어떻게 할머니에게 침을 놓지?’무진 앞에서 침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자신의 신분이 들통날 수 있으니…….‘내 신분이 노출되어서는 절대 안 돼.’마침 조승호가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밤새 환자를 돌보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고모부.” 무진이 고모부를 불렀다.“할머니를 뵙고 싶어?”조승호가 물었다.무진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들어가봐도 돼. 다만 지금 할머니께선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 외부의 어떤 자극도 더이상 견뎌낼 수 없으셔. 규정상 중환자실은 30분간 한 명만 가능하니, 들어가봐.”조승호는 안금여의 주치의로서 안금여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강씨 집안에 관한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집안 일 어디서부터 관심을 가져야하는지도 모르기에 사무적인 태도를 취했다.그는 조카 무진과의 접촉도 거의 없었다. 무진을 담당하는 주치의 또한 따로 있어서 그가 개입할 입장도 아니었다.“고모부,감사합니다.” 무진은 감사의 말을 전한 뒤, 휠체어를 조종해서 중환자실로 들어갔다.이때 성연이 앞으로 가 무진의 휠체어를 잡았다.휠체어가 움직이지 않자 무진이 고개를 들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성연을 바라보았다.“왜?”“제가 다녀올게요. 할머니도 분명 저를 보고 싶어하실 거예요.”성연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지금이 절호의 기회야.’중환자실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 들어가면 안금여를 치료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속으로 ‘아싸!’하고 외쳤다.“그래도 내가 가야지. 할머니를 뵙고 싶어.” 무진이 승낙하지 않았다.지금 이 상황에서 안금여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자신일 테니까.할머니에게는 속으로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비록 집안 권력다툼에 의해 무너졌지만…….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할머니는 그의 혈육이었다. 천성이 좀 차갑긴 하지만 전혀 감정이 없을 만큼 무정하지는 않았다.무진이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성연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옆에
무진을 설득하느라 성연은 입이 닳는 줄 알았다.무진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연은 바로 중환자실로 향했다.성연이 들어가자 조승호는 중환자실 출입문을 닫았다.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안금여의 몸에는 다양한 의료용 기기와 호스가 꽂혀 있었고, 얼굴에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빈약하고 초췌한 모습에서 지난 날의 활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성연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로 돌아간 듯 심장이 아려왔다.눈을 감은 채 조금씩 떨리는 손을 내밀며 옛날의 가슴 아팠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서서히 냉정을 되찾은 뒤, 안금여 손목에 손을 얹었다.진맥이 끝내고 대략적인 치료 계획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먼저 혈자리를 정확히 찾은 다음, 가방에서 은침을 꺼내 안금여의 혈 자리에 가볍게 찔러 넣았다.안금여는 연세가 많은데다 몸도 허약해서 무진같은 건장한 성인 남성에게 시침할 때처럼 해서는 안 되었다. 침을 놓는 성연의 동작이 하나하나가 가벼운 듯 조심스러웠다.몇 군데에 침을 놓은 후, 옆에서 조용히 그리고 세밀히 관찰해다.몇 분 후 할머니의 손가락이 아주 미미하지만 움직이기 시작했다.할머니가 반응을 보이자 성연이 겨우 후우,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은침을 챙겨 넣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할머니, 빨리 나으세요. 부디 그런 나쁜 사람들이 활개치지 못하게 해주세요.’할머니는 곧 정신이 들 것이다.옆에서 잠시 지켜보다 면회 시간이 다 되어가자, 일어서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중환자실을 나섰다.그날 밤, 무진과 성연은 안금여가 걱정되어 병원에 계속 머무르기로 했다.고모부 조승호가 두 사람에게 할머니를 지켜보며 지낼 수 있도록 병실 하나를 내어 주었다.공간은 널찍하였다.침대에 기대어 앉은 성연은 무심하게 휴대폰을 넘겨보고 있었고, 무진은 소파 옆의 휠체어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할머니의 병세를 알고 난 뒤부터 무진은 줄곧 무표정이었다.할머니에 관한 얘기 외에는 그 누구와의 대화도 거부했다.마치 외부와 차단된 자신만의
‘그런 예민주가 이렇게 몰락할 줄 누가 알았겠어?’‘결국 5년 동안이나 무진 씨 애인 노릇에 만족해 있었다니!’‘심지어는 오늘 같은 이런 악랄한 짓까지 저지를 정도가 되었으니. 스승님이 아시면 얼마나 섭섭하시겠어.’“송성연, 너 지금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예민주가 언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까? 연거푸 따귀를 맞은 데다가, 지금은 또 성연의 냉소와 신랄한 조롱을 들어야 했다.큰 소리로 호통을 치는 예민주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원래의 정돈된 헤어 스타일과 잘 차려 입은 옷차림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온몸에 지금 낭패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회의실. 두 시간의 긴 회의가 마침내 끝났다. 무진이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당황한 표정의 손건호가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왔다.무진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짜증스러운 표정이었다.‘평소라면 손건호가 절대 이렇게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텐데...’“보스, 예민주 씨가 맞았습니다!”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손건호가 급히 보고했다.“뭐라고?” 무진이 되물었다.“보스, 빨리 사무실로 가 보십시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방금 회의가 끝나갈 때, 손건호는 자료를 찾으러 먼저 회의실에서 나왔다.뜻밖에도 부리나케 달려온 비서실의 비서가 이 일을 알려주었다.무진의 눈동자가 어두워지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무도 막지 않았어?”무진이 왜 아무도 막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손건호도 대답하기가 곤란했다.‘막고 싶어도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지요!’ ‘대표실은 원래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게다가 사모님(!)이 갑자기 뛰어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대비도 하지 못했어요.’‘안에서 예민주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안에서 문을 잠궜기에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그러나 결국 손건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표실 앞으로 다가간 무진의 귀에 울음 소리와 함께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리게 되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아이의 몸에 난 상처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팠다.그리고 이런 상황에 직면하자, 성연은 범인이 바로 예민주라고 생각했다.‘방금 전에도 애들 앞에서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였어. 눈앞에 두 아이만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그런 여자가 뭘 못하겠어?’‘이 순하기만 한 두 녀석은 엉뚱한 짓을 한 적이 여태까지 한 번도 없었어.’‘충분히 사랑을 받았지만, 그걸 믿고 교만했던 적은 없었어.’‘밖에서는 더 영리하고 깜찍해서 누구나 좋아해. 척 봐도 좋아할 수밖에 없어.’‘그런데 여기에 와서 온몸에 멍이 들다니!’성연의 가슴에서 다시 분노가 폭발했다.딸아이를 가볍게 내려 놓은 성연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으로 사무를 보면서 말했다.“동생을 잘 보고 있어. 너희가 당한 억울한 일을 엄마는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야!”“엄마, 저 아줌마는 나쁜 사람이야! 엄마가 반드시 혼내줘!”여전히 품에 안긴 채, 사진은 재빨리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두 눈에 가득한 억울함을 지금 열심히 엄마에게 표현하려고 했다.“걱정 마. 엄마가 저 여자를 혼내줄게!”바로 일어선 성연이 성큼성큼 예민주 쪽으로 걸어갔다.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예민주는 성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서한기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예민주가 어떻게 훈련으로 단련된 남자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놔! 너희들 뭐 하려는 거야?”예민주의 눈빛에는 걱정과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에 가슴은 두근거리면서 발걸음마저 비틀거렸다.짝! 짝!“이건 네게 주는 교훈이자 경고야. 내 아이는 절대 네가 건드릴 수 없어!”“네가 뭔데? 무진 씨 옆에 이미 5년이나 있었지만, 아직도 내 자리를 대신하지 못했지.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겠어!”“이건 첫 번째이자 마지막 경고야! 아이들은 바로 내 마지노선이야. 네가 또 손을 대면 절대 지금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성연은 목소리는 마치 서릿발 같았다. 온몸에서 뿜어내는 싸늘한 기운에 무더운 날씨조차 얼음 세상으로 변하는 듯했
“오빠, 아빠가 정말, 정말로 우리를 안 받아들일까? 우리가 방금 아빠를 찾았는데.”작은 얼굴에 슬픔을 가득 담은 채, 사진은 간절한 시선으로 오빠를 바라보았다.예민주는 지금 자신의 말을 자화자찬하며 한껏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팔짱을 낀 채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승자의 기운이 가득했다.잠시 후 자신에게 벌어질 참상을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못했겠지만...대표 집무실 바깥.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성연은 결연한 눈빛으로 대표실을 향해 다가갔다.쾅-단숨에 집무실 문 앞에 선 성연은 아무런 노크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었다.“너 이 새끼, 정말...”아이 앞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예민주의 말이 성연의 귀에 몹시 거슬렸다.“예민주, 뭐 하는 거야!”자신의 아이들이 눈물 자국이 가득한 채 구석에서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엄마의 본능이 단숨에 뿜어져 나왔다.“내 애들에게 무슨 짓을 했어!”단숨에 앞으로 나아간 성연은 두 손으로 예민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한 손으로 멱살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바로 예민주의 따귀를 때렸다.“네가 뭔데 내 아이를 혼을 내? 너는 그럴 자격이 없어!”성연의 차가운 눈빛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온몸의 분노가 곧 폭발할 듯이!잇달아 따귀를 때렸지만 때리는 소리는 오히려 점점 더 커져갔다.“엄마!” 성연이 다시 손을 들고 예민주의 뺨을 때리려고 할 때, 문득 익숙한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순간 성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잠시 멈칫하던 성연은 계속 두드려 맞느라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예민주를 밀쳐낸 뒤 딸아이를 품에 안았다.“아가,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성연은 두 손으로 사진을 꼭 껴안은 채 자책했다. 지금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방금 전 예민주를 때릴 때의 그 무시무시한 기세도 모두 사라졌다.슬퍼하는 성연을 보면서, 사무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그러나 엄마가 온 뒤에는 그래도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자신이 든든한 후원자가 있기에.성연이
사진은 눈앞의 이 여자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 예민주의 말은 걸러서 생각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역시 어린아이였다.“오빠, 우리 아빠가 정말 우리를 이렇게 싫어해?”눈물이 그렁그렁한 여동생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당신은 어른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어린아이와 말다툼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뭔데, 여기서 우리 아버지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는 겁니까?”지금 예민주 때문에 완전히 분통이 터진 사무는, 온몸에 철갑을 두른 듯한 기세로 똑바로 예민주를 노려보았다.사무의 눈빛에 대해서 예민주는 처음부터 아주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매번 저 자식의 눈을 볼 때마다, 정말 무진 오빠의 눈빛과 너무나도 닮았어. 무진 오빠하고 그야말로 판박이야.’사무가 거기에 서 있을 때는 그야말로 무진의 축소판이었다. 무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에도 성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몇 번 사무 저 새끼와 눈이 마주쳤을 때도 정말 아이러니했어.’‘처음 만났을 때 빨리 도망칠 걸. 정말 후회가 되네.’‘5년 전에 분명히 전혀 상관이 없는 사이가 됐는데, 왜 두 사람 사이에 애가 있는 거야?’‘송성연은 왜 이 두 아이를 낳았지? 무진 씨에게 이미 버림받았는데, 해외에서 편하게 지내면 얼마나 좋아?’‘그 여자의 능력이라면 낯선 나라에서도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어.’‘왜 운성시에 미련이 남은 거야?’“나를 보지 말고 고개를 돌려!” 결국 예민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사무는 아직 그런 내막을 잘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분노한 상태였다.“내 여동생에게 사과하세요!”“이 새끼, 너 지금 나한테 농담하는 거야?”예민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사무를 조롱했다.“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생아 주제에, 아직도 여기서 나한테 이렇게 날뛰다니!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 아니야?”“이 못된 아줌마!”사진은 지금 지쳤지만 이 여자와 오빠가 이렇게 싸우는 소리를 듣자, 화가 나서 큰 소리로 따라서 외쳤다.
예민주는 곧바로 기분이 나빠졌다.원래 길을 잃은 두 아이가 펑펑 울게 만든 다음에, 무진에게 아이들이 그다지 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예상 외로 아이들은 영리한 데다가 일찌감치 철도 들었다. 졸지도 떠들지도 않은 데다가 얌전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 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무진은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점심 휴식 시간이 제한적이었다.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여기에 좀 더 머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예민주도 아직 좋은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두 아이가 이렇게 영리한 핑계를 댈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그들 부자 세 사람만 지낼 기회를 절대 줄 수가 없었기에.결국 세 사람이 대표 집무실에 함께 있게 되었다.“어떻게 된 거야? 이건 그렇게 둘러댈 일이 아니야.”“너 계속 큰소리로 말하지 마! 이렇게 시끄러운 것도 몰라?”이제 세 사람은 이미 오후 내내 함께 있게 되었다. 특히 지금 무진은 회의를 하러 갔기에, 대표실에는 그들 세 사람밖에 없었다. 예민주는 이미 싫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른한 자태로 소파에 기댄 예민주의 얼굴에는 온통 경멸하는 표정만 가득했다.집에서도 이렇게 엄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사진은 정말 억울해서 입을 열었다가 다시 예민주에게 말려들곤 했다.사진이 낮은 소리로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런데 아줌마, 우리는 그냥 게임을 하고 있었어요.”예민주는 이제 숨기지 않고 냉담한 목소리로 바로 호통을 쳤다. “조용히 해! 아무도 너희들 응석을 받아주지 않아!”예민주의 말투는 아주 야박해서 두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전혀 꺼리지 않았다.역시나 예민주의 말이 막 떨어지자, 사진은 이미 엉엉 울기 시작했다.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초롱초롱한 사진의 두 눈은 지금 완전히 눈물에 젖은 가련한 모습이었다.사무는 평소 집에서는 여동생을 싫어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사실은 몹시 마음이 아팠다.한 손으로 여동생을 가볍게 안고 달래면서 말했다.“괜찮아, 괜찮아. 좀 있다가 아
“예민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 성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차갑게 내뱉었다. 예민주의 모습을 떠올리자, 한바탕 구역질이 났다.클래식한 파텍필립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서, 다음 순간 성연은 이미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빨리 안 따라오고 뭐 해!” 문 앞에 도착한 성연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서한기를 보면서 소리쳤다.10여 분 후, WS그룹 1층.두 손으로 운전대를 꼭 잡은 채, 성연은 아주 멋진 드리프트 솜씨로 차를 건물 입구에 세웠다.주차 도우미 직원과는 불과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만 남았기에, 직원은 이미 쓰러질 지경이었다.“무즌 주차를 이렇게 해요?” 이렇게 거친 주차 방식을 보자, 직원은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무의식적으로 차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한바탕 퍼부으려고 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운전석의 차문이 열리고 성연이 차에서 내렸다.자신에게 다가온 직원의 눈길을 마주하고서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한바탕 퍼부으려던 직원은 성연의 깊은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말문이 막혔다.“차는 주차장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에 그래도 놔 둬요! 만약 내가 돌아왔을 때 차가 다른 곳에 있다면, 당신은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을 겁니다!”“하지만 아가씨, 이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성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거리낌 없이 말했다.“나를 믿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말이 끝나자, 성연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안으로 걸어갔다. 마치 뒤에 천군만마가 있는 것처럼 당당하고 기세 등등한 걸음걸이였다.성연의 곁에는 아무도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1층의 안내 데스크.“대표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데스크의 여직원은 계속 그 자리에 있었기에,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두 한눈에 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억누른 채 최선을 다해 응대할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하셨습니까?”성연은 입술을 오므린 채 가볍게 웃었다.“대표님은 어디 계세요?”“죄송합니다만, 대표
‘그 여자는 분명히 그 다른 쪽이라고 했어. 즉, 그 여자가 알려준 건 잘못된 방향이었어.’‘만약 그 여자가 방향을 몰랐다면, 위치를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자신있게 위치를 말했어.’‘그건 자신이 있다는 말이야!’이렇게 생각하자, 예민주에 대한 사무의 인상은 더욱 좋지 않았다.다음 순간, 턱을 살짝 든 사무가 두 여자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제 여동생이 아직 저쪽에 있어요. 잠깐만요, 제가 가서 여동생을 데리고 올게요.”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자 좀 놀랐지만, 소년이 돌아서는 걸 보자 그제서야 비로소 대답했다.“아, 여동생! 그래, 그래.”화장실에 간 후, 사무와 사진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못된 여자가 혹시 함정이라도 파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기에.하지만 아버지가 아직 거기에 있다는 걸 떠올리자, 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첫 교훈도 얻게 되었다. 이 놀이는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한편 다른 한쪽. 시재 백화점에 갔다가 별장으로 돌아온 성연은 양 손에 큰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온갖 장난감이 가득했다.이것들은 모두 성연이 업무를 마친 뒤에 특별히 아이들을 위해 고른 장난감이다. ‘요 며칠 동안 정말 너무 바빴어. 집에 돌아오면 이미 늦은 밤이거나, 좀 일찍 집에 돌아와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지.’성연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빚을 진 듯한 느낌이었다.집을 열자 거실은 조용했다. 위층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우리 사진이, 사무? 엄마가 돌아왔어!”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성연이 말했지만, 아이들의 열정적인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사진아? 사무야? 너희들 집에 있니?”“사무야?”아래층에서 계속 몇 번이나 소리쳐도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렇게 큰 집에 성연 자신의 목소리만 울릴 뿐.“보스, 아이들은 지금 집에 없습니다.”이때 서한기가 부랴부랴 달려왔다.“집에 없다니?” 성연이 눈썹을 바짝 세웠다. 순간 마음속에
“그 여자는 이전에 엄마하고 알고 지냈던 것 같아. 다만 아직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르겠어.”“그럼 이따가 우리 어떡하지?” 사진이 약간 지친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오전 내내 이곳을 왔다갔다했으니 아이에게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그리고 방금 위층으로 올라갈 때, 아이들은 여전히 아주 자신있게 서한기보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감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후회막심’이다.‘지금 아직 한기 아저씨가 있다면. 바로 집에 가서 편하게 누워서 쉴 텐데.’“일단은 우리 계획대로 그 여자한테 엄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우리가 아빠를 찾으러 온 건 그 여자하고 상관이 없어.”원래 신중한 사무지만, 지금 사무의 말은 오빠라는 사무의 입장과 아주 딱 맞게 진지했다.두 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에 화장실에 가겠다고 한 건 핑계였지만, 막상 바깥에 나오자 화장실에 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한참을 가도 식당 창문이나 작은 방은 곳곳에 있는데, 예민주가 말한 화장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가 우리를 속인 건 아니겠지?”억울한 듯이 분홍색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사진은 움직이기도 귀찮았다.여동생의 이런 모습을 보자, 사무는 그 자리에 선 채 눈을 반짝이며 한 바퀴 둘러보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딴 데 가지 말고. 알았지?”말을 마친 사무는 왔던 길을 다시 달려갔다.“오늘 가지는 좀 맛이 없어.”“그래도 괜찮은데. 먹기 싫으면 나한테 줘.”사무는 식사 중이던 두 아가씨의 앞으로 갔다.“누나, 실례합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에 있어요?”목소리는 여리지만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밥을 먹고 있던 두 아가씨는 그 말을 듣자 먹던 동작을 멈췄다. 사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갑자기 눈빛을 반짝였다.‘어디서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온 거야?’ ‘뚜렷한 이목구비에 심플한 검은색 스웨터만 입었는데도 잘 어울리는 걸.’‘얼굴의 통통한 젖살이 큐티 작살인데!’‘그야말로 너무나 귀여운 아이야!’사무는
두 아이를 보면서 예민주는 더욱 초조했다.마음속에 잘 기억해 놓은 뒤, 예민주의 노기는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다시 아이들을 바라볼 때는 이미 이전의 온화한 모습을 회복했다.“사진아, 너희들은 이전에 외국에서 잘 살았다면서? 그런데 왜 갑자기 귀국한 거야?”마치 큰 언니가 아이들을 배려하는 듯 예민주는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나 지금 두 아이는 이미 이 여자의 목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당연히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엄마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엄마가 한번 가보자고 해서 돌아왔어요.”목소리는 아직 어린 티가 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해맑은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또박또박 말하는 사진의 대답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아까까지만 해도 술술 잘 말하더니, 갑자기 왜 이렇게 빈틈이 없어진 거야?’예민주는 기분이 좀 꿀꿀했지만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이번에 돌아와서 낯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니? 너희들이 오늘 이곳에 와서 아빠를 찾는 것 같은데, 누가 너희들에게 뭔가 말한 거 아니야?”예민주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집요하게 물었다. 무진이 자신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진에게 등을 진 채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사진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눈썹을 찌푸린 채 예민주를 쳐다보았다.“아줌마, 우리하고 함께 여기서 논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계속 그런 거만 물어봐요?”“맞다. 아줌마, 우리 엄마 알지요? 우리 엄마한테 지금 데리러 오라고 하면 안 돼요?” “오늘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을 엄마가 꼭 혼내 주게요!”“맞아요, 맞아요! 누가 우리를 괴롭힌 걸 알면, 엄마가 반드시 호되게 혼을 내줄 거예요.”두 아이가 서로 주고받으면서 한 마디씩 하는데, 호흡이 기가 막히게 잘 맞았다. 예민주는 표정이 붉어졌다는 것도, 심지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이 두 녀석의 말을 들으니, 송성연이 이 두 녀석을 아주 진지하게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