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해보면 노주에 역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서부 변경 밖으로 전해졌고 녕원 후작이 역병 구제에 정신이 없는 사이 이족 간첩들이 몰래 변방을 넘어 백성들 틈으로 잠입했다가 경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보였다.그런데 대체 어쩔 작정으로 감히 섭정왕을 암살하려 했을까!그리고 얼굴이 망가진 것도 이상했다. 이족이라면 생김새가 대명 사람들과 달라서 얼굴이 망가진 상태가 아니라면 분별하기 쉬웠을 것이다.고요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자객의 행동은 어딘가 빈틈없이 준비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허술했다.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그렇게 공들여서 경성에 올라왔다면 암살 계획을 철저히 준비했어야 맞았다.하지만 고작 자객 몇 명이 다였고 섭정왕의 옷깃 한번 스치지 못하고 죽었다. 고요는 의심스러운 부분을 북진연에게 이야기했다.그의 말을 듣던 북진연은 담담한 어투로 분문했다.“안비각을 조사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지?”고요는 고개를 저었다.“소인이 무능하여 아직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중서령 나리는 표면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였으나 자세히 조사해 보면 참으로 조심성이 많은 자더라고요. 사소한 결함은 수도 없이 많고 집안도 난장판이지만 과거 북진왕부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고요는 미심쩍은 얼굴로 북진연에게 물었다.“왕야, 애초에 저희가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요? 어쩌면 안란심이 말한 사람이 안비각이 아니라 안씨 가문의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아니, 그 인간 맞아.”안란심이 가장 증오하는 대상은 아버지인 안비각이었다.대외적으로 안 대인은 극도로 부인의 눈치를 보고 서녀가 부인이 낳은 적녀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할 때 찍소리 못하던 나약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조정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 집에서 부인의 눈치를 보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건 모두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형상이라면 그로 인해 고통받은 안란심의 분노는 사무쳤을 것이다.모든 것을 알게 된
“아까 거리에서 만났던 자객들 말이야. 혹시 의심 가는 사람이라도 있어?”온사를 수월관으로 데려다 주는 길, 북진연이 물었다.“제 목숨을 취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굳이 추측할 것도 없지요. 진국공의 사람이거나 온모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겠지요. 저는 후자가 더 가능성이 크다고 봐요.”온모는 추월이 온모의 처소로 갔다가 만났던 그 그림자 호위를 떠올렸다.만약 누군가가 그녀에게 암살을 목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면 분명 그자가 보낸 사람일 것이다.북진연이 말했다.“한 무리가 아니었어.”“예?”온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북진연을 바라보았다.북진연이 말했다.“오늘 우리에게 접근한 자객들 중에 두 사람은 다른 무리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공법을 쓰고 있었어.”온모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제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또 있단 말입니까?”“어쩌면 네가 목적이 아닐 수도 있겠지.”“그럼 혹시….”온사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누군가 전하를 노린단 말씀입니까? 의심이 가는 자들은 있나요?”걱정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북진연은 태연자약한 미소를 지었다.“아직은 몰라.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온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냉정을 되찾았다.수년간 전장에서 수많은 적장의 목을 벤 사람이니 고작 자객 따위에 긴장할 리가 없었다.‘감히 겁도 없이 섭정왕의 암살을 꾀하다니!’잠시 후, 조사를 나갔던 북진연의 부하가 돌아왔다.“왕야, 단서를 찾았습니다.”말을 타고 돌아온 고요가 조용히 보고했다.“말해.”고요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성녀 전하를 암살하려던 무리들을 추격했는데 이미 작정하고 온 놈들 같았습니다.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갑자기 제자리에서 급사하더라고요. 죽기 전에 아주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죽은 시신에서 손가락 굵기의 뱀처럼 보이는 것이 기어나왔습니다. 아주 괴이한 모습이었어요.”온사는 시신에서 뱀이 나왔다는 말을 듣자 상대가 누군지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했다.온모의 뒤에 숨어
북진연은 느긋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몇몇 날파리가 따라붙었는데 이미 제거했으니 걱정 마.”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크게 놀랐다.“괜찮아. 이제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인파에 숨어들었던 자객은 온사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북진연의 사람들에 의해 처치되었다.북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그자들의 행태를 봤을 때 온사를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자객들 중 둘은 곧장 그를 향해 다가왔었다.‘누굴까?’누가 감히 섭정왕과 성녀를 암살할 목적으로 접근했단 말인가!좋은 기분을 망치기 싫었던 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가요. 곧 강변에 도착하네요.”등불 연회가 열리는 거리와 강변은 그리 멀지 않았다.매번 경성에서 등불 연회가 열리는 날이면 사람들은 강변으로 가서 소원을 담은 연등을 강에 띄우고는 했다.강변에 도착했더니 각양각색의 연등이 강가에 떠다니고 있었다.온사와 북진연은 연등을 챙기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북진연은 미리 준비해 온 붓과 종이를 꺼내 온사에게 건넸다.“소원을 적어서 같이 띄워 보내면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온사는 묘한 눈빛으로 북진연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그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전하께서 이런 걸 다 생각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았는데 말이죠.”그녀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전장의 살신으로 불리는 섭정왕이 강변에서 소원을 담은 연등을 띄워 보내는 모습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북진연은 말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원하는 것을 적어서 같이 띄워 보내자.”“예.”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소원을 쓰기로 했다.두 사람의 소원을 담은 자그마한 연등이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뭐라고 적었나요?”고개를 돌린 온사는 멍하니 떠가는 연등을 바라보는 북진연에게 조용히 물었다.그가 무슨 소원을 적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질문을 들은 북진연도 고개를 돌리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온사와 시선을 맞추
온사는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예,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북진연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온사는 대화를 통해 두 사람 사이는 한결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꼈다.“등불 연회도 무르익었으니 한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마음껏 놀아 보자꾸나.”두 사람은 연회를 즐기러 나온 인파에 합류하여 축제의 거리 곳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북진연의 손에는 물건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온사와 함께 산 꽃등, 그리고 이따가 강에 띄울 연등과 수수께끼로 딴 경품, 군고구마까지 없는 게 없었다.온사는 미안한 마음에 자신도 같이 들겠다고 했지만 그들의 뒤를 따르던 호위가 북진연의 손에서 짐들을 받아갔다.“마차에 실으면 돼.”분부를 마친 북진연은 고개를 돌려 온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 아직 놀거리가 많아. 저기 뒤쪽 거리로 한번 가볼까?”“예, 전하!”온사는 그제야 활짝 미소를 지었다.그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온사는 어느새 피로감이 찾아왔다.“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거리를 걸어본 것은 오랜만이네요.”오늘 밤 그녀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내려놓고 명절 분위기를 즐기고 있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재밌게 놀았어?”고개를 돌려 묻는 그의 질문에 온사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예, 너무 즐거웠어요.”전생까지 합쳐 지금까지 이렇게 신나 본 적이 거의 없었다.“그럼 됐어….”고개를 끄덕이던 북진연은 뭔가를 느낀 듯, 싸늘한 표정으로 인파를 노려보았다.“왜 그러십니까?”이상함을 느낀 온사도 그의 시선을 따라 인파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북진연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더 돌아볼 테야?”온사는 더 이상 다리를 혹사시키지 않기로 했다.“아닙니다. 강가로 가서 연등을 강에 흘려보내죠. 즐길만큼 즐긴 것 같습니다.”연등만 흘려보내면 돌아갈 시간이었다.“그래.”두 사람은 그렇게 강
두 시진 후, 마차는 드디어 경성에 당도했다.마침 하늘에서 해도 저물고 있었다.성안에 들어서자 만가등화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명절을 맞은 거리에는 등불과 채색 장식이 드리워졌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등불 연회가 주최되는 거리로 가자 각양각색의 꽃등과 수수께끼 놀이 등 수많은 오락거리들이 펼쳐져 있었다. 상한아는 가는 곳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온사도 마차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섞여들었다.“자.”이때 북진연이 상한아에게 돈주머니를 쥐여주었다.“경성의 등불 연회에서는 어린아이들의 놀거리가 참 맞아. 추월과 함께 놀다 오려무나.”“예? 저는 어린아이도 아닌걸요?”상한아는 온사보다 고작 한 살 어렸지만 키가 작아서 어린애처럼 보였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기 싫은지 눈을 부릅뜨고 투덜거렸다.“옆거리의 주루에서 파는 구운 통닭이 그렇게 맛있다던데….”그 말을 들은 상한아는 온사에게 고개를 돌리며 정색해서 말했다.“성녀 전하, 저를 잘 아시잖아요. 통닭 구이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전하께 드리려고 사오려는 거예요.”“아니야, 난 출가인이라 못 먹으니 네가 가서 맛보고 오렴.”온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방해꾼들이 사라지자 북진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그는 챙겨온 보따리에서 하얀색 바탕에 매화가 수놓아진 망토를 꺼내 온사의 어깨에 걸쳐주었다.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옷을 너무 얇게 입고 나왔어. 밤에는 공기가 차니까 나중에 고뿔에 고생하지 말고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온사는 고개를 들고 북진연을 빤히 응시하다가 오후에 한아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라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섭정왕 전하께서는 친구에게 한없이 친절한 분이시네요.”그녀는 과도한 친절이 약간 부담스럽기도 했다.과연 단지 절친이라서 이렇게 챙겨주는 건지 의심스러웠다.북진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입에서 친구라는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그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무심한듯 말했
오히려 며칠 온사를 못 본 날에는 괜히 기분이 울적했다.그래서 오늘은 말을 타고 친히 온사를 데리러 온 것이다.올 때는 급급히 달려왔지만 갈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하는 마음에 느긋하게 걸었다.고개를 돌리자 상한아와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북진연은 한참 그녀를 홀린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차 안에 난로를 두었어. 추위에 고뿔이라도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하고 있어.”온사는 바로 차 안에 고이 놓아둔 난로를 찾아냈다. 하나는 정교한 모양에 손 크기의 난로였는데 딱 봐도 온사를 위해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다른 하나는 한아가 앉은 자리 뒤쪽에 있었는데 비록 온사의 것에 비해 정교하진 않지만 아주 따뜻했다.상한아는 섭정왕이 온사를 챙기는 김에 자신까지 챙겨주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섭정왕께선 참으로 성녀 전하를 아끼시나 봐요. 그러니 시종인 저까지도 챙겨주시는 거죠.”말을 마친 상한아는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한편, 온사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북진연의 자상함은 곳곳에 녹아 있었다.솔직히 그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지 의심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리는 없다고 판단했다.그녀는 어차피 출가인이지 않은가.게다가 친히 그녀를 수월관까지 호송한 사람이 섭정왕이었다.비록 삭발 수행은 아니지만 황명을 받고 출가인이 되었으니 쉽게 속세로 돌아올 수 없는 몸이었다.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섭정왕이니 괜한 마음을 품었을 것 같지 않았다.그녀는 출가인이 된 이후로 성녀로 책봉되었고 어렵게 진국공부를 벗어났다. 성녀의 신분은 그녀가 진국공부에 복수할 수 있는 가장 예리한 무기였다.그녀는 이 신분이 필요하고 되돌아갈 생각도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복수를 위해서는 성녀의 입지를 단단히 해야 하고 그들을 모두 짓밟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전생에 그녀가 겪었던 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