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 온자신, 너! 진짜 죽여버릴 거야!”맞아서 이성을 잃은 최소택은 재빨리 몸을 피한 후에 반격을 시작했다.다 큰 사내들이 진국공부 대문 앞에서 몸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온장온은 아무리 말리려고 해도 이미 이성을 잃은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에는 시위들을 불러서야 겨우 둘을 떼어놓을 수 있었다.두 사람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온장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한명은 진국공부 둘째 공자에 다른 하나는 충용 후작가 세자가 싸움이 붙다니!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여봐라, 당장 세자를 데리고 나가거라!”시위들이 최소택을 끌고 가기 전, 온장온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고모랑 고모부가 무슨 일이냐고 묻거든 섭정왕 전하에 관한 일이라고만 대답하거라. 그래도 계속 캐물으신다면 나중에 아버지한테 와서 이유를 들으라고 해.”“예.”최소택을 보낸 후, 온장온은 씩씩거리는 동생을 노려보다가 차갑게 말했다.“둘째 공자를 사당에 가두고 아버지의 명 없이는 아무도 풀어주지 마!”“예.”“아니, 형님! 최소택이 잘못한 건데 난 왜 가둡니까?”온자신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다.아쉽게도 장본인이 집으로 끌려갔으니 뭘 할 수가 없는데다가 이제는 사당에 갇히게 된 꼴이라니!온자신은 얼굴에 묻은 피를 쓱 닦고는 억울한 표정으로 큰형을 노려보았다.“그래, 네 말이 맞아! 최소택 그 놈은 그 입이 방정이야. 나도 얄미워! 그런데 애 이빨까지 부러뜨렸으면 됐지, 뭘 더 어쩌려고 그러니?”온장온은 바닥에 떨어진 피묻은 이빨을 가리키며 버럭 화를 냈다.“하, 고작 이빨 두대 가지고!”그는 할 수 있다면 최소택의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고 싶었다.하지만 온장온은 그의 사정을 배려해 주지 않았다.그렇게 온자신은 멍투성이가 된 얼굴로 사당 안에 갇히게 되었다.“안에서 반성 좀 해.”온장온이 떠난 후, 온자신은 홧김에 문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하지만 밖으로 잠겨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사당 안을 둘러보다가 순간 그 자
그날 밤 이후로 온자신은 사당에서 꼬박 10일을 지냈다.그 동안 온모, 온장온, 그리고 아버지인 온권승까지 그를 데리러 왔지만 그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온장온은 자신의 책벌이 너무 심해서 동생이 자존심이 상한 줄 알고 물어봤으나 온자신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형님, 그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제가 그냥 좀 혼자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서요.”그후로 일가족은 더 이상 찾아가서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셋째 날, 온자신에게 기뻐할만한 소식이 전해졌다.최소택이 또 맞았다는 소식이었다.게다가 충용 후작가 저택 안에서 누군가에 의해 머리에 가마니를 쓰고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발견되었을 때, 최소택은 거의 시체처럼 온몸에 부상을 입고 복도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더 웃긴 건 그 강도가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몰라도 최소택의 이빨을 거의 다 부러뜨려서 지금 말할 때마다 발음이 샌다고 했다.충용 후작과 온아려는 사실을 알고 하마터면 온자신을 의심할 뻔했다.그가 최소택의 이빨 두대를 부러뜨린 후에 발생한 사건이니 의심할만도 했다.온권승이 직접 나서서 온자신은 그날 저녁에 사당에 감금당했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말해서야 부부는 반신반의하며 웃음을 거두었다.물론 그 시각 진짜 범인은 섭정왕부에서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탁, 탁, 탁…북진연은 무심한듯 책상을 두드리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정말 웃기지 않아? 충용 후작가에서 물건이 없어졌는데 그걸로 그 어린 것을 모함하다니 말이야.”고요는 전에 온아려가 옥여설화고가 없어졌다고 수월관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리고 온사를 모욕한 사실을 보고하고 있었다.“그러니까요. 저희가 들었을 때도 충용 후작 부인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고요도 잔뜩 화가 나서 말했다.“성녀 전하께서는 사부와 함께 후작가에 다녀온 것뿐인데 그걸 핑계로 사람을 잡지 뭡니까. 그 사람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에요.”온사가 북진연에게 귀한 약초를 준 이후로 섭정왕부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그
충용 후작은 순간 표정이 굳어지더니 다급히 말했다.“솜씨랄 것까진 없지요. 며칠 전에 괜찮은 찻잎을 얻어서 맛이 좋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드신다면 사람을 시켜 댁으로 찻잎을 보내드리겠습니다.”차를 보내줄 테니 제발 오지 말라는 의미였다.충용 후작은 섭정왕과 자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진국공부와 북진연은 워낙 사이가 별로 안 좋았기에, 섭정왕이 매번 찾아올 때마다 좋은 일이 생긴 적이 없었다.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아니나다를까,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그건 별로 좋은 제안이 아닌 것 같군.”북진연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무심한듯 말했다.“그랬다가 만약에 자네의 부인이 섭정왕부에 찾아와서 내가 자네의 찻잎을 훔쳤다고 난리를 치면 오해가 커지지 않겠나.”말속에 어떠한 뜻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충용 후작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전하께선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설마 제 부인에게 뭔가 오해를 갖고 계신 게 아닌지요?”“후작, 장난이 심하군. 나와 후작의 부인 사이에 무슨 오해가 생길 수 있겠나?”‘그럼 대체 왜 이러냔 말입니다!’충용 후작은 점점 초조해졌다. 북진연은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무심하게 한마디 했다.“설마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후작이 모른단 말인가?”충용 후작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시종을 불렀다.“가서 부인을 불러오너라.”“예.”잠시 후, 온아려가 급하게 대전으로 들어왔다.그러고는 들어오자마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나리, 무슨 일인데 저를 이리도 급하게 부르신 건가요? 저 지금 소택이에게 약을 발라주던 중이었는데요.”요 며칠 사이 여러 차례나 혹독한 매를 맞은 최소택은 지금 혼자서는 침대를 내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기에 매일 약을 발라주고 시중을 들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온아려는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서 들어오자마자 욕설부터 퍼부었다.“대체 어떤 간덩이
충용 후작이 자신의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다른 사람에게는 그나마 괜찮은데 유일하게 조카에게는 과할 정도로 각박했다.충용 후작도 그것 때문에 골치 아프던 참이었다.전에는 두 아이가 혼약이 있어서 어쨌거나 가족이 될 테니 아내를 말리기도 했었다.하지만 훗날 성인식에서 혼약이 파기되면서 충용 후작도 이 일에서 손을 뗐다.그런데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누군가가 부인을 응징하겠다고 나설 줄이야.게다가 상대는 북진연이었다.정말 문제가 있지 않았다면 공사 다망한 섭정왕 전하께서 친히 여기까지 걸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충용 후작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일단 조용이 좀 해. 옥여설화고를 성녀 전하가 가져갔다는 증거는 있고?”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못한 온아려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그날 걔랑 그 늙은… 아니 걔 사부가 집에 다녀간 뒤로 사라졌는데 걔가 훔친 게 아니면 뭐겠어요?”충용 후작이 경고의 눈빛을 보내서야 온아려는 막수에 대한 호칭을 고쳤다.충용 후작은 어이가 없었다.“성녀께서 집에 한번 다녀갔다고 도둑으로 몰아?”“그게 아니면 뭐 하러 왔겠어요?”온아려는 여전히 자신의 의심에는 일리가 있다고 확신했다.“그 사태는 어머니 병을 고쳐주려고 오신 걸 몰라?”충용 후작도 아는 일을 매일 집에만 있는 온아려가 모를 리 없었다.“저도 알죠. 하…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요? 그 사태가 진짜 의술에 능통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정말 병 치료 때문에 왔다고 해도 그게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순 없죠.”충용 후작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당당한 온아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무기력함을 느꼈다.“충용 후작 부인은 그 옥여설화고를 성녀가 훔쳤다고 확신하는군.”“분명 걔 맞아요!”온아려는 주저 없이 답했다.“걔 사부는 몰라도 개는 예전부터 고모인 날 공경하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나한테 보복하려고 물건을 훔쳤을 수도 있죠.”“좀 닥쳐!”북진연에게서 풍기는 냉랭한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진 충용 후작은 다
그 말을 들은 충용 후작은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감았다.성녀는 공주와 동급이었다.성녀를 모함한다는 건 이 나라의 공주를 모함한 것과 같다는 의미였다.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못 빠져나갈 것을 직감했다.북진연은 바로 행동에 착수했다.그가 대동하고 온 흑기군이 충용 후작가 저택을 포위했다.북진연이 이렇게 대놓고 움직일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온아려는 그제야 당황하며 소리쳤다.“이게 뭐 하시는 거죠? 여기 충용 후작가입니다. 아무리 섭정왕 전하라고 해도 나라의 충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충용 후작가만 억울하게 만들면 안 되지. 공정을 위해 부인의 오라버니인 진국공도 불러오겠나?”북진연이 싸늘한 눈으로 온아려를 바라보며 말했다.온아려는 그 눈빛에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불러오면 되죠. 지금 당장 오라버니를 불러오겠습니다!”충용 후작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충용 후작가가 이대로 망할 수도 있는 상황에 진국공만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충용 후작은 북진연의 사람들이 저택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그리고 북진연의 일 처리 속도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일각도 지나지 않아 진짜 범인이 밝혀졌다.과정도 아주 간단했다.북진연은 먼저 모든 충용 후작가 하인들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옥여설화고가 사라진 날 누가 창고를 지키고 있었는지 확인했다.그리고 그 하인들을 모두 끌어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부터 들었다.이유는 간단했다.근무에 태만한 자들을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그렇게 후작가 하인들은 죽을 고비에 서게 되었다.정원에 온통 피가 튕겼고 맞고 있는 하인들은 물론이고 옆에서 지켜보던 하인들도 겁에 질려 온몸을 떨었다.수많은 살육을 해온 섭정왕 전하라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더욱 컸다.결국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하인이 사실을 털어놓았다.“와… 왕야,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저희가 근무에 태만했던 것이 아니라… 세자께서 아무 말도
한 병도 아니고 무려 세 병이었다.아무리 온모에게 잘보이려고 가져갔다고 해도 어머니를 위해 한병은 남겼어야 했다.온아려는 그 많은 옥여설화고를 자신은 써보지도 못하고 아들이 남한테 갖다줬다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아들이 온모를 무척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한테 어미인 자신의 물건을 훔쳐서 몰래 갖다줬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했다.하지만 아무리 화가 나도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었다.“그 녀석이 범인이었을 줄은 몰랐네요. 섭정왕 전하 덕분에 사건이 빨리 해결되었어요. 결과가 나왔으니 남은 건 저희에게 맡기세요. 제가 그 녀석 제대로 혼낼게요.”북진연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온아려를 힐끗 보고는 물었다.“부인이 혼을 낸다고? 어떻게 혼낼 생각이지?”아들을 아끼는 온아려는 당연히 엄벌을 원하지 않았다.“사당에 무릎 꿇리고 반성하라고 할까요?”“좋지.”예상밖으로 북진연은 흔쾌히 동의했다.온아려의 입가에도 다시 미소가 피어났다.‘아무리 섭정왕이라고 해도 충용 후작가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하물며 그녀의 뒤에는 진국공도 있었다.온아려가 속으로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때, 충용 후작은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는 이대로 쉽게 넘어갈 거였으면 북진연이 흑기군까지 데리고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북진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럼 반달 정도 꿇리면 되겠군. 아마 그 정도면 세자도 반성할 것 같아.”“반달이요?”온아려는 순식간에 언성이 높아졌다.그녀는 분노한 눈으로 북진연을 노려보며 반박했다.“어떻게 그렇게 오래 꿇고 있게 하나요?”반달이면 최소택의 무릎이 나갈 수도 있었다.“싫어?”북진연의 아름다운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온아려의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말했다.“후작 부인은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럼 반달 더 추가하지. 세자는 충용 후작가 사장에서 한달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것이다.”“뭐라고요?”
“오라버니, 드디어 오셨네요!”온아려는 온권승을 보자마자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조금만 늦게 오셨더라면 저와 소택이 둘 다 최양봉 저 망할 놈한테 팔려갈 뻔했어요!”“무슨 헛소리야?”온권승은 온아려에게 호통쳤다.“부군한테 망할 놈이 뭐야? 충용 후작 부인으로 산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성깔을 못 고쳤어?”“오라버니, 저 도와주러 오신 거 아니에요?”온권승이 담담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온아려는 순간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렸다.“널 도와주러 온 건 맞다만 그렇다고 예의 없이 구는 건 용납못해.”말을 마친 온권승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충용 후작에게 말했다.“처남, 내 동생이 어릴 때부터 진국공부에서 곱게만 자라 철이 없어. 자네도 혼인한지 오래되었고 그동안 잘 받아주더니 왜 오늘은 못 참고 폭발한 거야? 게다가 충용 후작 부인더러 남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라고 하다니.”충용 후작은 냉소를 지었다.평소였다면 진국공의 체면을 봐줬을 것이다.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남이요? 형님 동생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이 여편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입니다!”온권승은 인상을 찌푸리며 온아려에게 시선을 돌렸다.온아려는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하듯 말했다.“별로 큰일은 아니에요. 그냥… 온사 그 계집애를 좀 오해해서 생긴 일인데 섭정왕이 찾아오시더니, 고모인 나한테 그 계집애 찾아가서 사과하라지 뭐예요….”“그래요, 외삼촌! 섭정왕은 대체 왜 그런대요? 왜 그렇게까지 온사 편만 드냐고요!”속박이 풀린 최소택은 재빨리 일어나서 맞장구를 쳤다.“이 불효자식이 그 입 다물지 못해!”충용 후작은 힘주어 아들을 노려보며 호통쳤다.“네가 몰래 네 어미의 옥여설화구를 훔쳐서 온모에게 갖다주지 않았으면 이 사단이 났겠어?”“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다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충용 후작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아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온권승은 온모까지 엮였다는 얘기에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온아려를 싸늘히 노려보며 재촉했다.“대체 무슨 일이
온권승은 불쾌한 표정으로 충용 후작을 노려보았다.충용 후작은 지금 온사가 안타까울 뿐이었다.“만약에 형님께서 평소에 방관하지 않았더라면 온사가 지금 이 지경이 됐겠어요?”“걔 형님 친딸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언제 그 아이를 친딸처럼 품어줬나요? 한낱 양녀에 불과한 애가 적녀보다 더 총애를 받는데, 참으로 편애가 심하십니다. 혹시 우리에게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나요?”“아버지!”“최양봉!”온아려와 최소택 모자는 후작이 이렇게까지 온권승의 앞에서 대놓고 반발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평소였다면 충용 후작도 진국공부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온아려는 오라버니가 와서 자신을 도와주길 바랐지만 그렇다고 부군과 오라버니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그녀는 다급히 후작을 말렸다.“부군, 그만하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오라버니는 한 번도 누굴 편애하지 않았어요. 제가 온사를 싫어해서 그런 거니 오라버니한테 뭐라하지 마세요!”“온아려, 나도 눈 있어.”충용 후작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람을 바보로 알지 마. 다른 사람은 온사 생일을 몰라도 시아버지가 될 뻔한 나는 잘 알아.”충용 후작의 말에 온권승은 순간 당황했다.“그 아이의 생일은 아마 며칠 전이었을 거야. 그런데 진국공부는 굳이 그 아이의 생일과 성인식을 두 달 앞당기고 양녀의 생일에 맞춰서 둘이 같은 날 성인식을 치르게 했지. 형님, 온사보다 두 달이나 먼저 태어난 딸을 온사의 동생으로 만들다니.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겁니까?”“최양봉!”이번에는 온권승이 소리를 질렀다.그는 섬뜩한 표정을 하고 최양봉을 노려보며 되물었다.“지금 날 의심한는 건가?”“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충용 후작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늘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진국공부를 떠났다고 해서 아무도 그 아이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예요. 걔 혼자가 아닙니다. 걔의 등 뒤에는 란씨 가문이 있어요.”란씨 가문은 과거 경성의 귀족 가문이었다.조상 삼대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