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들은 온사는 어이가 없어져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요?”온아려의 성격을 가장 잘 아는 온사는 그녀가 진심으로 사과하러 올 거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온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사저에게 물었다.“사저, 충용 후작 부인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나요?”“있어. 관복을 입은 중년 사내와 젊은 사내가 있었어.”관복을 입고 온아려와 함께 이곳으로 온 사람이라면 온권승 아니면 충용 후작이 틀림없었다.지난번에 온권승이 와서 기분 안 좋게 돌아갔으니 아마 당분간은 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충용 후작이고, 젊은 사내라면 의심할 여지없이 최소택일 것이 분명했다. 온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경서를 내려놓았다.“나가봐야겠군요.”“사매야, 겁낼 거 없다. 내가 같이 갈게.”온사가 나간다는 소리에 최근에 그녀와 부쩍 친해진 무고 사저가 말했다.“걱정하실 것 없어요. 아마 별일은 아닐 거예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안 돼. 그 인간들 올 때마다 널 욕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데 혼자 보낼 수는 없지. 충용 후작 부인은 지난번에도 와서 널 모함하고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우지 않았니.”“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바로 사람 부르게!”열정적인 무고 사저의 말에 온사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알았어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사저.”그렇게 두 사람은 수월관 대문 앞으로 갔다.역시나 온사가 예상했던 것처럼 충용 후작가 일가족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최소택은 충용 후작에 의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옆에는 성인 팔뚝만한 몽둥이가 놓여 있었다.온아려는 안쓰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녀는 밖으로 나온 온사를 보고 눈을 반짝 빛냈다.“온사야, 드디어 나왔구나. 고모랑 고모부가 얼마나 기다렸다고!”온아려는 다급히 다가가서 온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예전에 온사를 대할 때랑은 완전히 다른 말투와 행동이었다.온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충용 후작은 고개를 들어 온사를 바라봤다가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착잡해졌다.“미안하구나, 온사야… 예전에 혼약을 파기한 일도 그렇고 옥여설화고도 그렇고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너무 많이 있었던 같다.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너에게 상처를 주었구나.”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온사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그러자 온사는 순간 당황했다.충용 후작이 같이 온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 어떻게든 온아려에게서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인 사람이 충용 후작 본인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닫힌 마음의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그녀는 잠깐 동요하는 듯하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후작의 사과를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뭐라고? 온사, 너 정도껏 해! 아버지께서 이렇게까지….”최소택은 온사가 주제를 모르고 건방지게 군다고 생각해서 분노에 휩싸였다.이 나라의 충용 후작이 한낱 여승에게 사과를 하는데 저리도 건방을 떨다니!“당장 안 닥쳐?”충용 후작은 눈을 부릅뜨고 아들에게 경고를 주고는 온사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온사야….”“후작, 소인은 이미 진국공부의 딸이 아닙니다. 충용 후작가와는 진작에 혼약을 파기했지요. 그날 성인식에서 소인은 앞으로 충용 후작가와는 연을 끊겠다고 명백히 말씀드렸습니다.”충용 후작이 떨떠름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사이,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관계를 정리하면서 정도 끊어냈는데, 호칭부터 바꾸셔야지요.”온사의 매정함에 충용 후작마저 당황했다.‘이 아이는 진심으로 우리들과 연을 끊을 생각이야.’충용 후작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는 간곡하게 부탁하듯 말했다.“그렇게까지 할 건 없지 않니. 나와 네 어미는 소싯적부터 친구였는데….”“어머니는 이제 없잖아요.”온사는 매몰차게 충용 후작의 입을 틀어막았다.전혀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빛에 충용 후작은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온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온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온아려를 바라보았다.온아려가 제 발로 사과하러 찾아온 것마저 놀라웠기에, 그녀에게 용서를 바라는 게 더 의아했다.이때 온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그녀는 눈앞의 삼인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가 용서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그녀는 자신이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저들의 표정이 궁금했다.아니나 다를까, 온아려는 바로 화가 폭발하더니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사과도 했고 우리 아들이 네 앞에 무릎 꿇고 사과도 했잖니! 대체 뭘 더 바래?”온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버럭버럭 화를 내는 온아려를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했다.‘어디서 협박을 받고 왔구나.’그게 아니라면 평소에 줄곧 그녀를 적대하고 무시하던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고개를 조아릴 이유가 없었다.누구의 협박인지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이 대명왕조에 충용 후작 일가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들 인물은 많지 않았다.온사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사과는 받지 않겠다고요.”“온사, 적당히 해! 너무하잖아, 이건!”분노한 최소택이 소리쳤다.“내가 너무해?”그러자 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반박했다.“내가 아무리 너무해도 당신들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거야. 한 사람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찾아와서 나를 모함하고 한 사람은 건방지게 내 결백을 더럽히는 말들을 남발하고 다니는데. 당신들 모자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지.”“너!”“그리고 피해자인 척하지 마. 모함을 당한 건 네가 아니잖아. 그리고 당신들은 딱 봐도 진심에서 사과하러 온 것도 아닐 텐데 나에게도 용서를 거부할 권리가 있지 않나?”말문이 막힌 최소택은 분노에 이를 갈았다.온사는 온아려의 푸르뎅뎅한 표정을 보며 만약에 충용 후작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바로 달려들어 예전처럼 자신을 물어뜯지 않을까 생각했다.“성녀님 말씀이 맞습니다.”이때, 충용 후작이 입을 열었다.“성녀님이 피해자이시니 억울한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니 지금 용서를
“넷째 오라버니께서도 뭔가 눈치채신 거죠?”온옥지의 처소로 찾아온 온모는 수심 가득한 얼굴로 온옥지에게 걱정을 털어놓았다.“온사 언니가 출가한 이후 큰 오라버니랑 둘째 오라버니가 점점 변해가고 있어요.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너무 걱정돼요.”그날 온사의 생일 때문에 수월관에 다녀온 이후로 온자신은 줄곧 사당에서 나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나중에 장남 온장온이 온사의 선물은 준비해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한 덕분에 겨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그날 이후로 온장온과 온자신은 수시로 외출했다.온모는 몇번이나 그들에게 애교를 부리며 같이 나가자고 했지만 두 형제 모두 그 요구를 거절했다.온모의 위기감은 점점 막중해지고 있었다.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온옥지를 찾아갔다.온가의 사형제 중에 가장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은 장남인 온장온이 아니라 줄곧 몸이 안 좋아 바깥 외출을 거의 하지 않는 온옥지였다.물론 온모는 속으로 그런 그를 무시하고 비웃었다.예전의 그녀에게 필요한 건 너무 똑똑한 꼭두각시보다 기가 세고 강한 꼭두각시가 더 필요했다.그런데 지금 보니 진국공부 사형제는 전부 멍청한 존재가 맞았다.온옥지는 그나마 이용할 가치가 있지만 아주 조금일 뿐이었다.진국공부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게 됐을 때, 그들은 그저 그녀에게 짐이 될 뿐이었기에, 그때가 되면 더 강한 지원군을 찾아 기생할 것이다.그리고 그녀에게는 이미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지난번의 실패를 겪은 후, 온모는 진국공부에서의 자신의 입지부터 다지기로 했다. 속으로는 이런 음침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넷째 오라버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요? 큰 오라버니와 둘째 오라버니는 온사 언니가 집에 안 돌아오려고 하니까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아요. 더 이상 오라버니들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나서서 좀 설득해
온옥지가 부탁을 수락하자 온모는 어떻게 할지 그에게 계획을 캐물었다.어쨌거나 그녀는 진심으로 온사가 돌아오길 바라는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구슬려도 온옥지는 그저 웃기만 할 뿐,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자신의 계획을 온모에게 알려줄 수 없다는 의지가 강해보였다.그는 온모의 생각을 훤히 꿰뚫어본 것처럼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막내야,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온사 걔가 네 입지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할게.”뜬금없는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순간 그녀는 온옥지가 진작에 자신의 온갖 술수들을 눈치채고 본모습을 들킨 줄 알았다.온옥지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줘고 나서야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해소가 된 듯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온모는 온옥지의 계획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온모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온옥지는 처음부터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어쨌거나 지금 그는 거동이 몹시 불편한 상황이었기에, 사형제 중에 그와 똑같이 온사를 혐오하는 온자월을 찾았다.“셋째 형님, 돌아오셨어요?”다음 날 아침, 시종에게서 넷째가 자신을 보자고 한다는 소식을 접한 온자월은 곧바로 온옥지의 처소로 향했다.“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해? 몸이 좋지 않으면 좀 가만히 쉬어.”온자월은 그저 걱정해서 한 말이었지만 예민한 온옥지에게는 이 말이 가족들이 자신을 폐인 취급하는 것처럼 느꼈다.온옥지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기온이 차서 몸살이 온 것 같습니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이 화제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바로 화제를 돌리고 본론으로 들어갔다.“아침 일찍 형님을 부른 건 형님께 부탁할 일이 있어서예요.”“응? 무슨 부탁? 네가 나한테 뭘 부탁할 때도 다 있네?”온옥지는 그동안 형제들의 도움을 늘 피해왔었기에 온자월은 부탁이라는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큰 형님과 둘째 형님 때문에 그렇습니다.”“형님들이 왜?”온옥지는 어제 온모
온자월이 재빠르게 온사의 방문 앞으로 접근했을 때, 순간 목덜미가 서늘하면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그는 서둘러 몸을 피하고는 후방으로 주먹을 날렸다.쾅!두 주먹이 맞닿은 순간 온자월은 뒤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자와 마주했다.밤중이고 상대는 야행복을 입고 있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넌 누구지?”온자월이 날 선 목소리로 묻자, 추월은 식지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조용히 해. 안에 있는 분을 깨우긴 싫으니까.”말을 마친 그녀는 재빨리 손에서 검을 빼들어 온자월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온자월은 순간 분노가 폭발했다.“내 말에 대답 안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그는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추월의 장검을 막아냈다.둘은 온사의 정원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다음 날, 잠에서 깬 온사는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에 놀라서 표정이 싹 굳었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처소는 맹수가 헤집고 간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아끼던 약초 밭도 다 뭉개져서 볼품없이 되었다.“죄송해요, 무우 사태. 어젯밤에 바로 이놈을 제압했어야 했는데 좀 늦어서 마당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네요.”온사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온몸이 밧줄에 묶인 온자월과 그를 단단히 제압하고 있는 추월이 보였다.온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어젯밤 내 처소에 몰래 들어와서 뭘 하려고 했던 거지?”온자월은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추월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이자의 몸을 수색하다 찾은 겁니다.”그것은 바로 단도 하나와 약병 하나였다.온사는 단도를 힐끗 바라보고는, 딱 봐도 문제가 있어 보이는 약병으로 시선을 옮겼다.그녀는 바로 열어보지 않고 싸늘한 눈빛으로 온자월을 쏘아보고는 추월에게 말했다.“괜찮아, 죄책감 가질 거 없어.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겠구나. 어젯밤 너 아니었으면 난 무슨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일단 여기서 이자를
“독살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건 용서받아도 되는 짓이야?”온사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온자월을 노려보며 물었다.“정말 궁금하네. 날 독살하려던 게 아니면 대체 뭘 하려고 했었지? 말해!”“나한테 이 약을 먹이고 나를 진국공부로 끌고 가려고 했었어? 그리고 날 거기 가두고 네가 그렇게도 아끼는 막냇동생의 손에 피 말려 죽일 생각이었어? 아니면 내 배라도 가르려고?!”온사는 점점 감정을 통제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오랜 시간 가슴에 맺혀 있던 분노가 완전히 폭발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이후에 경악한 세 사람의 눈빛을 보고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고 눈을 감았다.“사부님, 저 좀 나가서 진정 좀 하고 싶으니… 이자는 사부님께서 대신 심문해 주세요.”온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쾅 하고 방 문을 잠갔다.그녀가 남기고 떠난 말은 남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경악을 가져다주었다.막수와 추월은 굳게 닫힌 방 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온자월은 잠깐의 놀람 후에 분노가 폭발했다.“우리 막내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리고 무슨 배를 갈라?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날 모함하려면 그럴싸한 이유라도 댔어야지!”“넌 닥쳐!”막수 사태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네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알겠지. 어쨌거나 그 약은 잘 가져왔어.”막수가 추월에게 눈빛을 보내자 추월은 곧바로 온자월을 제압했다.막수 사태는 약병을 열고 물도 없이 그대로 온자월의 입을 열고 약가루를 그의 입에 반절 털어넣었다.“쿨럭, 쿨럭!”온자월은 사레가 들려서 연신 거세게 기침을 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약가루를 토해내려고 헛구역질을 해야만 했다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막수 사태가 많은 양을 먹였기에 얼마 안 지나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점차 두 눈에 초점을 잃어가는 온자월을 바라보며 막수 사태는 가장 궁금했던
막수 사태는 순간 당황했다.온자월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끼익!등 뒤에 있던 문이 열리자, 온사가 문밖에 서 있었다.“무우야….”막수 사태의 걱정스런 눈빛에 온사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사부님. 저 이미 진정했어요.”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런 답을 들을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온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온자월의 앞으로 다가가 싸늘하게 물었다.“내가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다고?”“그래, 너가!”온자월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지만 감정은 매우 격한 상태였다.“어머니가 널 낳지 않았다면 난산으로 몸이 상해 심각한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도 않았겠지!”그러자 온자월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멍한 눈빛에 가득 찬 증오심은 아마 온사를 향한 것일 것이다.하지만 온사는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어머니는 우리랑 약속하셨단 말이야. 우리의 성장을 항상 뒤에서 지켜봐 주신다고. 그런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어. 딸이 좋다면서,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낳아주고 싶다면서 너를 낳으셨어. 그런데 그 여동생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야!”온자월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 내렸다.“그래서 난 온사가 싫어. 걘 어머니를 죽인 살인범이니까! 걔만 아니었으면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나와 형님들도 어머니를 잃지 않았을 거라고!”막수 사태는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온자월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온사가 이내 그녀를 막았다.그녀는 온자월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었다.이건 전생의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이었다.너무 허무하고 우스워서 헛웃음만 나왔다.온사는 싸늘한 눈으로 온자월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만약 너와 다른 형제들이 다 그것 때문에 나를 싫어한다면 너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들이야.”상처입은 온사를 위로하려던 막수는 뜻밖에 온사의 말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