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도 미인에게 홀렸구먼! 그런데 여자가 둘이라면 차라리 둘 다 살려서 우리가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건 어떤가?”이태성의 입에서 상스러운 요구가 튀어나왔다.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산채 대문 앞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김사도를 위해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았다.아직은 김사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 같았다.김사도가 그들 몰래 움직이고 있을 때, 이태성도 몰래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산채에 있던 산적무리들은 몰래 산길을 돌아 김사도를 포위했다.“너희들이 데리고 있어도 되긴 하지. 하지만 너희들에게 그럴만한 용기가 있을까?”김사도가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동생 말을 들어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닌 듯하군. 그런데 방금 전에는 이득이 될 것만 얘기하고 우리한테 주의해야 할 점은 전혀 말해주지 않았지 않나?”그러자 이태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쾌한 어조로 김사도에게 말했다.“망자에게는 당연히 얘기해 줄 필요가 없으니까.”“뭐? 너!”김사도는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머금고 오른손을 들었다. 언제 접근했는지 모를 지네가 순식간에 이태성의 머리를 공격했다.“악!”이태성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형님?”“당장 저 자식 죽여버려!”“죽여!”산적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김사도는 등 뒤에서 쌍검을 꺼내며 냉소를 지었다.“너희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나한테 항복하는 이는 죽이지 않을 거야.”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산적들을 무자비하게 도살하기 시작했다.흑호굴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그렇게 한 시진 후, 흑호굴의 산적의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남은 자들은 김사도에게 항복했다.그들이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이국적인 외모를 가진 이 사내가 너무나 강력했다.김사도는 시작하기 전 말했던 것처럼 항복한 산적들을 죽이지 않고 항복을 거부한 자들의 시신을 토막내는 모습들까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너무나 잔인해서 현장에 있던 산적들마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남은 산적들이 반항을 포기하자 김사도
마침 저녁식사 준비를 마친 고요가 커다란 그릇 두개를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왕야, 성녀 전하, 어서 식사하세요!”온사는 자기 몫의 그릇을 받아들었다. 냄새만 맡아도 흑기군의 요리사가 꽤 실력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성녀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반찬과 국물 모두 채식이었다.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맛이 아주 좋았다.온사는 그릇을 들고 밥을 먹으며 속으로 지금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며칠 전까지 끊임없이 몰려오던 자객들이 오늘에 와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폭풍우 전야의 고요함과 흡사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오?”정신이 다른데 팔린 온사의 모습을 보고 옆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던 북진연이 물었다.“그자들이 오늘 밤 찾아올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오늘 밤에 무조건 올 거요.”북진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고개를 돌린 온사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십니까?”“오늘 밤이 그들이 움직이기 가장 최적의 시기이니까. 오늘 밤이 지나가면 앞으로 우리가 도착할 곳은 활동하기에 꽤 불편할 것이오. 이틀만 지나면 우린 목적지에 도착할거예요.”김사도가 만약 또 암살자를 보낸다면 오늘 밤이 최적이라는 얘기였다.“오늘 밤도 푹 자기는 글렀네요.”온사가 웃으며 말했다.북진연의 예상처럼 군대가 교대로 식사하는 시간에 갑자기 수림에서 놈들이 무리를 지어 나타났다.“저 놈들이다! 죽여라!”“식량이야! 저렇게나 많은 식량을 갖고 있었다니!”“역시 사도 형님 말이 사실이었어! 은화도 있다니!”“그럼 일단 은화부터 빼앗자고!”“한 놈도 빼놓지 말고 다 죽여!”식량과 은화를 담은 차를 알아본 흑호굴 산적들은 광기에 미쳐서 우르르 달려들었다.식사 중이던 흑기군은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에 버리고 검을 빼들었다.“물자를 보호하라!”처음엔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흑기군은 곧 침착하게 검을 빼들고 산적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런데 이때, 화살 하나가 온사를 향해 날아갔다.북진연
흑호굴 산적들은 흑기군 진영을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김사도가 보낸 암살자가 북진연과 혈투를 벌이는 동안, 김사도는 마차 위로 뛰어올라, 온모를 구해주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바로 그때! 쾅하고 예리한 검이 김사도의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그는 재빨리 쌍검으로 공격을 막은 후에 상대의 머리를 노렸다.하지만 추월이 더 빨랐다. 그녀는 힘껏 김사도의 복부를 걷어차서 마차에서 떨어뜨린 뒤, 마차 지붕 위에 서서 싸늘한 시선으로 김사도를 노려보았다.김사도도 고개를 들고 어둠을 닮은 검은 인영을 노려보았다.여기서 이렇게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수를 만날 줄이야.분명 며칠 전에도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공격하는 초식으로 봤을 때는 그림자 호위가 틀림없었다.‘복명 성녀의 사람인가 보군.’온모는 후회가 사무쳤다.온사의 신변에 그림자 호위가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김사도와 연락을 취할 때는 암호로 간단한 얘기만 주고받았기에 추월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은 것만이 변수였다.김사도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그 역시도 그림자 호위의 존재에 꽤 놀란 눈치였다.‘어떡하지.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습격하기도 어려울 텐데!’온모는 초조함에 몸부림쳤다.마차 안에 대기하고 있는 온사에게 위험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온사는 마차 밖 상황에 귀를 귀울이며 한손에는 독약이 든 약병을, 한손에는 비수를 들었다.누가 마차에 뛰어들기만 하면 바로 독약을 상대의 얼굴에 뿌릴 생각이었다.그런데 차 안으로 침입한 것은 사람이 아닌 검은색의 지네였다.그것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구멍을 파고 안으로 들어와 조용히 온사의 허벅지로 기어올랐다.다리에 간지러움을 느낀 온사가 고개를 떨군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온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그녀는 재빨리 비수의 칼집으로 그것의 머리를 쳤다.쾅!하지만 지네가 너무 딱 달라붙어 있던 탓에 온사는 그것을 쳐낼 수 있기는커녕, 칼집으로 마차 벽을 치고 말았다.마차 안에서 나는 소리는 밖에서 싸우던 추월의
고요 일행이 사람을 잡으러 간 직후, 북진연은 재빨리 마차로 다가갔다.“사태,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차 안에서 난 소리를 들은 사람은 추월뿐만이 아니었다.다급히 가림막을 연 그의 눈에 한 사람의 하얀 종아리가 들어왔다.차 안에서 지네에게 물린 상처가 없는지 온사의 종아리를 검사하던 추월은 재빨리 다시 가림막을 내렸다.온사가 다급하게 말했다.“섭정왕 전하,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방금 지네가 차 안에 들어왔어서 추월이 상처가 없는지 봐주고 있었습니다.”잠시 당황했던 북진연은 지네라는 얘기를 듣고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독성이 있는 것이오? 상처를 제외하고 피부에 바로 닿은 곳은 있소?”온사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뭔가 떠올라서 방금 지네를 만졌던 오른손을 들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 끝에 검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추월의 안색이 급변해서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온사가 재빨리 보따리에서 은침 하나를 꺼내 주저없이 중독된 식지에 찔렀다.독혈이 천천히 스며들었다.곧이어 그녀는 막수가 든 해독제를 입안에 넣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짝 스치긴 했는데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해독제만 먹으면 됩니다.”지네의 몸에도 독이 있을 줄 모르고 방심했기에 생긴 일이었다.물론 방금 전 상황에서 지네를 공간 안에 집어넣지 않고 물렸더라면 상황은 아마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하지만 추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제가 동작이 너무 느렸던 탓입니다. 그 자식을 빨리 처리하고 차 안으로 돌아왔더라면 사태가 그 흉물을 만질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바깥에서 듣고 있던 북진연도 죄책감이 몰려왔다.이국인 중에 이런 사악한 비술을 쓸 줄 아는 자가 많다는 것을 간과한 탓이었다.“왕야!”고요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왔다.북진연은 그를 보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아니나 다를까, 고요가 말했다.“왕야, 소인이 무능한 탓입니다. 그자는 왕야의 화살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었는데 달려가 봤더니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금주에 도착한 이후, 후끈거리는 온도가 모두를 놀라게 했다.분명 타 지역의 온도는 차가워지고 있었는데 금주 지역은 아직도 한여름처럼 덥고 건조했다. 심지어는 세 달째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풍작을 거두었어야 할 논밭은 말라서 쩍쩍 갈라졌고 강까지 말라서 바닥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황무지가 따로없었다.길가에는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구걸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온사와 구제 물자를 실은 대오를 본 그들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다가왔다.하지만 결국 흑기군의 위압감에 감히 선 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대오는 묵묵히 전진했다.난민을 회피하려는 것 뿐만 아니라 왜 금주에서 이렇게 급하게 기우 대전을 치르려고 했는지 이해됐기 때문이었다.지친 민심을 위로해 주지 않는다면 폭동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행군 속도를 좀 더 올려서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무조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예!”흑기군은 침착하고도 빠르게 행군을 이어갔다.그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드디어 금주 현령 저택에 당도할 수 있었다.소식을 들은 왕수안은 관원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섭정왕 전하와 성녀 전하를 뵙습니다!”관원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주변 백성들의 주의를 끌었다.복명 성녀가 왔다는 소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북진연은 싸늘한 시선으로 왕수안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왕수안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너그러이 봐주십시오, 섭정왕 전하. 최근 현령부는 이미 몇번이나 백성들에게 포위당했었습니다. 사실 백성들도 불안해서 저러는 것이겠지요… 다 제가 무능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무리수를 두었습니다.”그는 성안의 백성들이 섭정왕과 복명 성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소란이 좀 잦아들 것이라고 기대했다.북진연도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고는 담담히 시선을 돌렸다.“사태, 이제 내려오시오.”주변 상황을 재차 확인한 후에야 그는 마차로 다가가서 창
왕수안이 갑자기 큰절을 올릴 줄 예상하지 못했던 온사는 조금 당혹스러워서 다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몸을 일으킨 왕수안에게 그녀는 가장 먼저 궁금했던 얘기를 물었다.“기우 대전 때 쓰일 제천대는 이미 지어졌지요?”왕수안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세요, 성녀 전하. 섭정왕 전하까지 함께 금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 밤을 새워가며 드디어 어제 제천대를 완공했습니다. 오늘 사람을 보내 점검도 마쳤으니 내일 바로 기우 대전을 시작하시면 됩니다.”그러자 옆에 있던 북진연이 말을 덧붙였다.“사태는 일단 돌아가서 쉬시오. 내일 있을 기우 대전을 미리 대비해야지. 내일은 힘든 하루가 될 것이오. 그러니 남은 건 나에게 맡기고 들어가시오.”“예.”온사는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며칠 길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느라 피로가 쌓였기에 지금은 휴식이 절실했다. 왕수안은 미리 준비한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고요 일행은 그녀가 머물 방을 미리 꼼꼼히 검사했다.북진연은 고요를 시켜 온사의 신변을 밀착 호위하게 했고, 추월은 여전히 안 보이는 곳에 숨어서 온사의 안전을 지켜주었다.방 문을 닫은 온사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중간에 추월이 깨워서 저녁을 먹은 후에 다시 드러누워 잠을 잤다.그날 밤은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고 아무도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다음 날이 되자, 온사는 기력을 완전히 회복했다.“성녀 전하, 이것은 저희가 특별히 준비한 기우제 관복입니다. 오늘은 이걸 입고 우리 금주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왕수안은 아침 일찍 방문해서 화려한 붉은색의 관복을 온사에게 건넸다.온사는 그 관복을 힐끗 보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왕수안에게 말했다.“왕 현령, 내 자네가 이번 기우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금주 백성들이 고통받는 지금 내가 이런 화려한 관복을 입고 기우제를 지내면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될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안 그런가?”화려함의 정도가 지나친 관복이었다.그녀는 기우
옷을 갈아입은 온사는 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시종들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고요는 아직도 멍하니 있는 왕수안의 어깨를 툭 쳤다.“왕 현령, 성녀 전하는 이미 멀리 갔는데 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빨리 따라가지 않고?”그제야 정신을 차린 왕수안이 다급히 달려가며 온사를 불렀다.“같이 가요, 성녀님! 제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빨리 가자! 늦으면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간다, 가! 좀만 기다려!”“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자네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것이야?!”금주성 성문 밖, 무수히 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어오고 있었다.세 달째 가뭄에 고통받고 있는 그들은 거의 희망을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금주성 현령이 폐하께서 친히 책봉한 성녀님을 모시고 기우제를 지낸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고, 무려 하룻밤 사이에 그 소식은 금주성 밖까지 퍼졌다.수많은 백성들은 기우 대전에 참석해 복명 성녀의 얼굴을 보려고 모여들었는데, 점점 더 많은 백성들이 금주성 안에 집결되자 성내의 호위가 부족할 정도였다.북진연은 어쩔 수 없이 반 이상의 흑기군을 파견하여 성내 호위를 도와주게 했다.잠시 후, 기우 대전을 진행할 제천대 주변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자칫 잘못하면 심각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제천대가 무너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관원들은 민심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못 오게 막을 수가 없었다.그들은 제발 아무 일 없이 기우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비가 바로 내리지 않더라도 순조롭게 끝나 성녀만 안전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사람들의 목서리 또한 점점 커지고 있었다.모든 호위와 흑기군들이 바쁘게 돌아치고 있을 때, 멀리서 기다렸던 소리가 들려왔다.“성녀 전하 납시오!”왕수안은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크게 질렀다.온사는 마차에 앉아 수치심을 느꼈다.‘왕 현령은 언제 목청이 저렇게 좋아진 거지?’성녀가 왔다는
주변은 곧이어 조용해졌다.높은 제천대에 선 온사는 밑에서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하늘에 제를 올렸으니 이제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할 시간이었다.온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곧이어 그녀의 예쁜 입에서 청아한 기도문이 흘러나와 백성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기도를 듣고 있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여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한마디 한미다 마다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곧이어 제천대 아래에서 북소리가 울리며, 제복을 입은 남녀가 제천대를 둘러싸고 기우제를 위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심금을 울리는 북소리와 성스러운 춤, 그리고 고결한 성녀와 간절한 소망을 가진 백성들이 이 순간 함께 어우러져 가슴 뛰는 장면을 연출했다.온사의 기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한번 해서 비가 내리지 않자 그녀는 다시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대명왕조의 백성 무우, 폐하의 은혜를 입어 복명이라는 호를 받게 되었는 바 있습니다. 금주의 만민을 대신하여 감히 토지의 신과 오곡의 신, 자비로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고 생의 희망을 안겨주시옵소서…!”두번째에도 실패하자 다시 세번째, 세번째도 묵묵부답이자 네번째, 그렇게 온사는 제천대에 서서 같은 기도문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시간이 흐르며 그녀의 목소리도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와 북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제사의 춤도 계속되었다.제천대 아래의 백성들은 고개를 들고 그들의 성녀를 우러러보았다.성녀의 기도문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하늘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누군가가 갑자기 큰소리로 입을 열었다.“부디 단비를 내려주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멈춰주시고 이들의
진국공부 서재.“아버지, 형님, 어찌 막내에게 이러실 수 있어요!”“후궁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시면서, 폐하께서 진국공 가문을 얼마나 견제하는지 아시면서 어떻게 막내를 그곳에 두고 와요!”“막내가 황궁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면 어떡해요? 우리가 옆에 없으면 누가 걔를 지켜줘요?”“왜 다들 대답이 없어요? 아버지랑 형님이 안 가면 제가 가요!”“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를 연회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어떻게 애를 그런 곳에 버려두고 와요! 내가 거기 갔어야 하는 건데!”진국공 가문은 온모가 황궁에 남은 일로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정확히 말하면 온자월이 일방적으로 소란을 부리고 있는 거였다.온옥지는 온자월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매번 온자월이 소란을 피울 때 그는 온자월의 편에 섰다.온권승과 온장온 부자는 처음에는 인내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들이 온모를 버리고 온 게 아니라 온모가 고집을 피워서 황궁에 남은 거라는 말도 했다.하지만 온자월에게는 그런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막내는 순진해서 후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아무리 폐하의 후궁에 아직 사람이 없다지만 앞으로는 누가 보장해요?”“폐하께서 막내한테 질려서 후궁 간택을 또 하면요? 그럼 수많은 여인들이 입궐하게 될 텐데 막내는 거기서 어찌 살아남아요?”이틀째 소란을 피우는 온자월 때문에 온권승은 이미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였다.그는 짜증스러운 어투로 말했다.“폐하께서 우리 진국공가를 견제하는 걸 알면 그분이 막내를 후궁으로 들이지 않을 것도 알지 않니.”“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온자월은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만약에 폐하께서 정말 막내를 후궁으로 들일 생각이면요? 막내를 인질로 잡고 아버지와 우리 진국공 가문을 협박할 생각이라면요?”“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할 말이 없구나.”더 이상 그와 입씨름하기 싫었던 온권승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그리고 이때, 옆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던 온장온이 담담히 말했다.“황비로 간택하여 우리 가문을
양 어멈은 태후의 심복이자, 태후가 온모에게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라고 보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모의 요구를 단박에 거절했다.“죄송합니다, 아씨. 아씨는 아직 시골 촌티가 너무 나요. 빨리 궁중의 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훈련을 다 통과하셔야 합니다.”촌티가 난다는 말에 온모는 금세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이 할망구가 감히 날 모욕해?’온모는 이를 부드득 갈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폐하께선 저에게 한눈에 반했다고 하셨는걸요. 만약 어멈과 예의 법도를 배우다가 얼굴을 다치기라도 하면 어멈도 곤란하지 않을까요?”온모의 뻔한 수작은 양 어멈에게 너무도 하찮은 수로 보였다.어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온모에게 말했다.“아씨, 그건 틀린 말씀이죠.”온모는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어디가 틀렸는데요?”“그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폐하께서 아씨께 한눈에 반하여 아씨를 비로 들이겠다고 하셔서 제가 태후의 명을 받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런데 아씨는 열심히 배우지도 않고 외모만 신경 쓰고 계시니, 폐하를 얼굴만 보는 속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 아닙니까?”양 어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그 말에 온모는 가슴이 철렁했다.“그… 그건 모함이에요! 제가 언제 폐하를 속된 사람으로 말했어요!”“아씨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 늙은 것을 협박할 게 아니라요!”온모는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머리에 이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양 어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며 힘을 주어 온모를 바닥에 무릎 꿇게 했다.“아씨, 진국공 저택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나 보군요. 아씨가 입궁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제 눈에는 성에 차지도 않지만요.”“폐하께서 아씨를 가르치라고 저를 보냈으니 저는 열심히 임할 뿐입니다. 아씨께서 제가 가르쳐 드린대로 아침에 한번,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제가 드린 숙제만 완수하면 빠른 시일 내에 궁중법도를 익히고 폐하의 시침을
온장온은 순간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녹두과자 아니었어? 그럼 계화떡인가?”온사의 목소리가 더욱 싸늘해졌다.“계화떡이요? 확실한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맞혀보세요. 어쩌면 매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걸 말씀하시는지, 그것도 재능 아닌가요? 그만큼 제가 싫었고 관심이 없었던 거겠죠.”온장온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됐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든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잖아요. 이런 사소한 일을 기억 못하는 것도 이해해요.”온사의 어투에는 진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난 싫어하지만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나요. 그러니 얼른 그거 갖고 식기 전에 오라버니가 가장 총애하는 동생한테 갖다주세요.”“아니야, 온사야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일부러 네가 싫어하는 녹두과자를 사온 게 아니야. 그냥 저도 모르게… 이걸….”온장온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점점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다시 생각해 보니 녹두과자와 계화떡은 막내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분명 온사를 찾아온다고 왔는데 온사에게 막내가 가장 좋아하지만 온사는 가장 싫어하는 걸 가져왔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온사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됐다.온장온은 손에 들린 녹두과자를 멍하니 바라보며 죄책감에 견딜 수 없었다.“온사야, 화내지 마.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가서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걸 사올게!”온사는 싸늘한 시선으로 온장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큰 오라버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기억이 나요?”“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네가 가장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건… 오리구이, 맞지?”온장온은 기대에 찬 얼굴로 온사를 바라보며 그녀의 입에서 긍정의 답을 기다렸다.하지만 온사는 말없이 한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온장온은 그제야 알아차렸다.‘녹두과자도 아니고, 계화떡도 아니고, 오리구이는….’‘그래, 오리구이는 셋째가 좋아하는 거잖아!’어쩌다가 그것들을 온사가 좋아한다고 인지하게 된 걸까?온장온은 손에 들고 있던 녹두과자를 툭 하고
“제가 정말 그런 불경한 짓을 저지른다면 저는 사람도 아닙니다. 벼락 맞아 죽어도 불만이 없어요!”온장온은 수월관 밖에서 장장 한 시진을 기다리며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사태들에게 사정했다.보다못한 사태가 와서 말을 전했지만 온사의 반응은 냉담했다.“안 가요.”그 말은 그대로 온장온에게 전해졌다.하지만 그는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제발 동생 좀 설득해 주세요. 꼭 만나야 합니다.”“안 돼요. 성녀 전하께서 안 만나신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세요.”안 그래도 진국공 가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사태들은 말만 전하고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그렇게 그 뒤로 매일 온장온은 수월관을 찾아왔다.그는 오후 업무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바로 수월관으로 왔다.그가 매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니 사태들도 수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무고 사저는 난감한 얼굴로 또 온사를 찾았다.“정말 끈질긴 사람이야. 강제로 침입한 건 아니지만 매일 찾아와서 꼭 널 만나야 돌아간다잖아.”막수와 함께 새로운 독약을 연구해낸 온사는 손을 씻고 돌아와서 말했다.“알겠어요, 사저들은 일단 돌아가 계세요. 제가 해결할게요.”그 말을 들은 무고 사저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사매야, 흥분하면 안 돼. 비록 짜증나게 굴긴 하지만 전에 왔던 그 녀석들과 비교하면 양반이잖아. 시비를 걸려고 온 건 같지 않았어. 그냥 몇 마디 해서 좋게 돌려보내.”온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 제가 알아서 할게요.”온장온이 온 이유는 뻔했다.온씨 가문 인간들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면 분명 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서일 것이다.이미 어머니를 묻어드렸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절대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그러니 온장온이 매일 찾아와도 헛수고였다.사저와 사태들의 수련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싶었다.“온사야!”드디어 온사를 마주한 온장온은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드디어 나와줬구나. 오라비가 오늘 정성루에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