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춘초요?”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 온사를 바라보며 환호를 질렀다.“되죠! 당연히 도움되죠!”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난번에 성녀 전하께서 왕야께 백년 자령지를 선물하셨지요. 이제 왕야의 치료에 필요한 희귀 약재가 두 가지 남았는데 그 중 하나가 회춘초입니다!”‘이런 우연이?’온사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임자부는 계속해서 물었다.“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요? 혹시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신가요?”온사가 말했다.“제게 회춘초가 하나 있기는 합니다. 지난번에 섭정왕께서 저를 금주까지 호송해 주시고 수차례 위험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셨기에 감사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그녀는 나무 상자를 임자부에게 건넸다.임자부는 급급히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니나다를까, 회춘초가 안에 들어 있었다.딱 봐도 백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귀한 약재였다!임자부는 환호를 질렀다.“잘됐어요. 너무 잘됐습니다! 왕야의 처방전에 꼭 필요한 희귀 약재를 또 하나 구했네요! 성녀 전하께서 회춘초를 갖고 계실 줄은 알았습니다. 고요, 내가 뭐랬나? 내 말 맞았지?”온사는 순간 흠칫하며 임자부에게 물었다.“임 의원께서는 내가 회춘초를 갖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셨나요?”임자부는 기쁨에 들떠 온사의 표정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당연히 지난번에 갖고 오신 백년 자령지 때문이죠. 제가 이 코가 아주 개코거든요. 약재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아요. 지난번 백년 자령지를 보고 회춘초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진하고 오래 감도는 향은 백년 회춘초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죠!”임자부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듯 말했다.하지만 정작 온사는 가슴이 철렁했다.강한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고마워서 선물한 약재가 단서를 남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었다.옥패 공간에서 회춘초는 백년 자령지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다.옥패 공간 내부에 영기가 감돌고 있어서 희귀 약재들은 환경을
“전하께 너무 감사하네요. 여러분도 이 많은 걸 찾아오느라 고생하셨어요.”북진연은 그녀가 정원에 심은 약초들을 보고 그녀를 위해 뒷산까지 약초밭으로 개간해 주었다.그리고 약재 씨앗을 찾아봐 주겠다고 하더니 그 약속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존귀하신 섭정왕 전하께서 한낱 승려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하니 온사는 그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비록 북진연에게 회춘초를 선물한 행위가 자신의 정체를 탄로나게 할 위험도 있지만 별채 정원에 가득 채워진 씨앗과 묘목들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괜히 후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섭정왕은 한 번도 그녀에게 과분한 요구나 선 넘는 행위를 한 적 없었다.솔직히 온사의 주변에서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와준 사람은 섭정왕이 유일했다.이런 생각을 하니 온사는 초조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성녀 전하!”임자부는 잔뜩 들뜬 얼굴로 온사에게 달려오더니 말했다.“전하께서 의술을 공부하고 계신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소인의 처방 한번 봐주시겠어요? 아주 신묘하지 않나요?”임자부는 종이 한 장을 온사에게 건넸다.고요가 미처 그를 말릴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온사는 흠칫하더니 이내 침착하게 임자부의 손에서 처방을 받아 위에 쓰인 약재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임 의원의 의술은 참으로 절묘하군요. 심신 안정에 좋은 약재를 아주 잘 배합했어요.”“당연하죠! 저 임자부는 이 나라의 의성입니다. 심신미약 정도야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죠!”임자부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의성이라는 말에 온사는 놀란 눈으로 임자부를 바라봤다.“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그 유명한 의성이 당신이었나요?”“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표정은 좀 과장된 것이긴 합니다만.”임자부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하마터면 저승길 갈 뻔한 녀석을 구해준 적은 있죠. 그 일로 소문이 그렇게 나서 그렇지 죽은 자는 못 살린답니다.”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죽은 사람 살리는 건 신선이나 가능한 거죠. 제가 무슨 수로 그런 능력을 가졌겠습
그녀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무심한듯 물었다.“여기 동그라미를 친 약재가 있는데 이건 무슨 의미인가요?”임자부가 말했다.“별거 아니고요. 이것들은 아직 구하지 못한 약재들입니다. 사실 다른 약재들은 그나마 구하기 쉬운데 이 서홍화는 어디 가서 구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더군요.”서홍화 얘기를 꺼내는 임자부의 표정이 제법 무거웠다.온사는 요동치는 감정을 감추려 시선을 내렸다.서홍화를 그녀는 갖고 있었다.그녀는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으로 임자부에게 물었다.“서홍화는 뭐에 쓰이는 약재인가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요.”그러자 임자부의 눈빛에 실망이 스쳤다.그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온사에게 말했다.“사실 저희도 서홍화는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소인은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고대 서적에서 발견했지요. 비록 어디에서 자라는지는 적혀 있지 않지만 그것의 효능에 대해서는 아주 상세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심신 안정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약재이지요. 그리고 제가 처방에 쓴 다른 약재와 결합하면 신기한 효능을 낼 수 있고 왕야의 병을 완치할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들은 온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대 서적에서 본 거였구나. 서홍화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겠네.’그렇다면 서홍화의 향이 어떤지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임자부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하지만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서홍화가 섭정왕 전하의 병을 완치할 수 있다고?’그렇다는 건 그것이 섭정왕에게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는 의미였다.만약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평생 고통받아야 하는 걸까?온사의 머릿속에 고통스러워하는 북진연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녀는 처방전을 손에 꽉 쥐고 서홍화의 이름을 힘주어 빤히 바라보았다.저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백년 자령지와 회춘초도 선물했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고 고대 서적에나 나온 약재를 선물한다면 분명 누군가의 의심을 살 것이다.어디서 났냐고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온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안 돼, 그건 절대 선물할 수
온사는 도박을 할 수 없었다.그녀는 죄책감을 못 이겨 도망을 택했다.“죄송해요.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떠올라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올게요!”온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는 도망치듯 북진연의 옆을 지나쳤다.북진연은 순간 당황해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개를 돌렸을 때 온사는 이미 문밖으로 사라진 뒤였다.“사태?”그는 곧이어 뒤쫓아갔다.온사는 이대로 곧장 수월관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뒤쫓아온 북진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러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왜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는 거요?”“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돌아가야 합니다. 이만 보내주세요!”온사는 그를 지나쳐 도망가려고 했다. 북진연은 그녀의 앞을 재차 가로막고 말했다.“알겠소. 꼭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하지만 그 전에 내 말 좀 들어보겠소?”북진연이 너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순간 온사는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북진연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소. 그건 사태가 나한테 말하고 싶으ㄹ 때 말해주시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괜찮소. 이따가 사람을 붙여줄 테니 마차를 타고 안전하게 수월관으로 돌아가시오. 가서 푹 쉬고 내일 내 다시 보러 가겠소.”온사는 입만 뻐금거렸다.북진연은 정색해서 말을 이었다.“거절은 받지 않겠소.”결국 온사는 입을 꾹 다물고 북진연의 마차에 탔다.마차 안에는 온갖 물품이 들어 있었다. 아까 타고 올 때는 안 보였던 담요와 간식들, 그리고 손난로도 있었다.아직은 초가을이지만 그녀가 감기라도 걸릴까 우려한 북진연이 준비해 준 물건이었다.이런 세심한 배려에 온사는 더더욱 괴로웠다.가는 길, 그녀는 멍하니 손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한편, 북진연은 음침한 얼굴을 하고 내전으로 돌아갔
그 말을 들은 북진연은 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었다.그는 더욱 싸늘해진 얼굴로 호통쳤다.“내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거늘!”임자부가 다급히 말했다.“억울합니다, 왕야. 제가 먼저 얘기한 거 아닙니다. 성녀 전하께서 마침 회춘초를 가져왔더라고요. 먼저 물어본 것도 성녀 전하입니다.”음침하게 굳은 북진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임자부는 저절로 식은땀이 났다.북진연은 고개를 돌려 고요에게 눈빛을 보냈다.고요는 긴장한듯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성녀 전하께서 먼저 얘기 꺼낸 것은 맞습니다. 오늘 약재를 왕야께 선물한다고 오셨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그 약재가 왕야께 꼭 필요한 회춘초였습니다.”이는 임자부나 그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사실 고요가 어느 정도 방관한 것도 있었다.안 그래도 처음에 성녀가 섭정왕에게 희귀 약초인 백년 자령지를 보냈을 때부터 그들은 혹시 회춘초도 갖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백년 자령지를 보고 임자부는 성녀가 회춘초를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다고 말했었고 고요도 임자부와 같은 마음이었다.하지만 섭정왕은 절대 말 꺼내지 말라고 그들에게 주의를 주었다.성녀가 처음 섭정왕부를 방문하면서 마침 회춘초를 선물로 가져온 것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게다가 희귀하디 희귀한 백년 된 회춘초였다.그들은 오랜 시간 찾아다녔지만 단서조차 찾지 못한 약재 두 가지를 성녀가 선물이라고 가져온 것이다.너무 쉬운 전개에 그들은 참지 못하고 성녀에게 혹시 서홍화도 갖고 계신지 묻고 싶었다.갖고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들어보거나 본 적이 있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임자부도 그냥 정보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너무 지나쳐서 성녀가 도망간 것이다.고요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북진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너희는 성녀가 이런 진귀한 약초를 두 가지나 내놓으면서 한 번도 외부에 판 적 없는 게 왜인지 생각을 안 해봤느냐? 그랬다는 건 성녀는 자신이 희귀 약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북진연은 손을 휘휘 저었다.비록 화는 나지만 임자부와 고요를 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너희도 나를 걱정해서 한 일이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어야 할 것이다.”그는 내일 온사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로 했다.이 두 멍청이를 보낸다면 또 무슨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요와 임자부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북진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오늘 밤 둘 다 가서 약초 씨앗을 포장하도록 해. 다 포장하지 못하면 오늘 밤은 잘 생각하지도 마!”고요와 임자부는 곧바로 기죽은 얼굴로 답했다.“예, 전하.”섭정왕부에서 부랴부랴 약초 씨앗을 포장하고 있을 때, 진국공 저택 역시 부산스러웠다.“찾았어?”“못 찾았어요. 전혀 아무런 단서도 없어요!”“산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아무런 단서도 없다니!”반달 동안 진국공 저택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반달 전 해독제를 먹고 깨어난 온자월은 자신이 평소에 그렇게 아껴주었던 여동생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독을 먹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온모가 압박을 못 이기고 해독제를 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라비를 독살한 죄명은 온사에게 돌아갈 것이고 온자월 자신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이 사실은 온자월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그는 홧김에 허약한 몸을 끌고 온모의 처소로 갔다.왜 오리구이에 독을 넣었으며, 왜 그걸 자신에게 먹였는지, 그리고 왜 온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는지 따질 생각이었다.분명 가장 순수하고 선하다고 생각했던 막내가 이런 악랄한 짓을 벌였다는 것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실망감을 안고 온자월이 온모의 방 문을 열었을 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그렇게 진국공 저택 사람들은 온모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하지만 반달이 지나고 저택 안팎과 충용 후작가, 경성을 다 뒤졌는데도 온모를 찾을 수 없었다.그녀는 단서 하나 안 남기고 사라졌다.온모에게 따지려던 온자월도 시간이 지나자 점차 걱정으로 바뀌었다.“애를 방에
“그럴 가능성도 있는 게 사실이지요. 쿨럭….”옆에 있던 온옥지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온장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이 진국공 저택까지 와서 막내를 납치하겠어?”경성 전체를 뒤져도 그럴만한 인간은 거의 없었다.온옥지가 담담히 말했다.“그거야 모르죠. 반달 전에 흑기군을 이끌고 우리 진국공 저택을 쥐 잡듯이 수색한 사람도 있지 않나요.”북진연을 가리키는 말이었다.하지만 온권승은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은 아닐 거다.”온옥지는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아버지는 그걸 어떻게 확신하세요?”온권승은 병약한 아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섭정왕은 뒤에서 이런 비열한 짓을 할 인간이 아니야. 그 인간이 온모를 잡아가고 싶었으면 집으로 쳐들어왔겠지. 그때 진국공부와 충용 후작가를 수색했을 때부터 말이야.”비록 섭정왕 북진연과는 정적인 사이지만 그래서 상대의 성격에 대해 잘 알았다.“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죠.”불손한 태도에 온장온이 인상을 찌푸렸다.“넷째야, 말투가 그게 뭐니? 왜 화를 아버지에게 풀어? 지난번 일이 아버지 잘못은 아니지 않니.”온옥지는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그럼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쿨럭….”“아버지는 무려 진국공입니다. 진국공 가문의 일에 어쩌다가 외부인이 참견하게 된 거죠? 쿨럭… 아버지께서 폐하께 고발했다면 섭정왕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손에 쥐고 있어도 그리 쉽게 우리 진국공 저택을 짓밟을 수는 없습니다!”“폐하께서 그 사람이 병권 좀 있다고 우리 집안을 짓밟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온옥지는 홧김에 기침을 하면서까지 분노를 쏟아냈다.챙그랑!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온권승은 그의 발치에 들고 있던 찻잔을 던졌다.찻잔이 깨지며 뜨거운 찻물과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온권승은 음침한 얼굴로 말했다.“온옥지, 어디 아버지한테 불손하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아버지, 넷째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막내가 너무 걱정돼서 순간 충동적으로 하지
그는 아버지와 온자월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맨 먼저 온자월의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 막내가 이미 온자월을 혼내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온자월의 말에 늘 온화하게 모두를 중재하던 온장온마저 인상을 찌푸렸다.그는 굳은 표정으로 온자월의 말에 반박했다.“온사는 잘못 없어. 여기서 걔 얘기가 왜 나와?”온자월과 온옥지는 이 상황에서 온사의 편을 드는 큰 형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형님, 온사가 먼저 독으로 날 통제했어요!”온장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거 잊었어? 애초에 너희가 짜고 수월관으로 찾아가 온사에게 약을 먹여서 강제로 끌고 오려 하지 않았으면 온사가 왜 너에게 독을 먹였겠어?”그 말에 온자월과 온옥지는 입을 다물었다.그들은 진심으로 이 사건의 발단이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온옥지는 여전히 온사에게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녀 때문에 한달을 폐인으로 산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말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그런 느낌을 떠올리면 병이 발작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악몽 같은 그 느낌을 떠올리면 온옥지는 지금 당장 온사를 죽여버리고 싶었다.“우리가 먼저 시작한 건 맞아요. 하지만 애당초 해치려는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당한 사람은 우리예요. 그런데 걔는 막내를 저격했죠. 막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데요!”“온사는 셋째의 입을 통해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온장온은 잔뜩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처음부터 막내의 생일에 문제가 있었어. 걔의 출신부터!”온권승의 침묵을 통해 온장온은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이 얘기가 다시 거론되자 그는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막내의 출신에 문제가 있다고요?”그때 온자월은 혼수상태였기에 온옥지의 방에서 일가족이 나눴던 얘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온장온은 음침한 얼굴로 답했다.“나중에 막내 돌아오면 직접 물어봐.”어쨌거나 그는 이번만큼은 막내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자초지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온사는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며 물었다.매년 동지 때 조정은 대신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푼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허나 지금은 진국공부의 적녀가 아니니 참석할 이유가 없었다.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녀의 의중을 물었으나 그녀는 출가인이 참석하기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거절했다.비록 폐하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황제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싫었다.“연회 다 끝났어. 남은 치들은 공연이나 보고 술이나 즐기겠지. 그런 것들보다는 너와 한잔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왔지.”온사는 눈을 치켜뜨며 새침하게 말했다.“저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몸입니다.”“알아, 그래서 좋은 차를 가져왔어.”북진연은 찻잔을 내보이며 그녀에게 제안했다.“성녀 전하, 나와 한잔하시겠소?”온사는 진지한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영광이죠, 섭정왕 전하.”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앉았다.북진연은 미리 우려낸 차를 식힌 후에 적당한 온도의 찻물을 그녀의 잔에 부어주었다.온사는 상체를 살짝 비틀고 차 맛을 보았다.그러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청량하면서도 맛이 깔끔한 차였다.“군산은침이라고 차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불리는 차 아닙니까? 어찌 폐하가 마시는 차를 가져오셨어요?”북진연은 웃으며 말했다.“오늘 연회에서 차 맛을 봤는데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폐하께 몇 통 달라고 청을 드렸지.”온사는 북진연이 자신의 취향을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두고 마시지 그걸 다 가져오셨어요?”“난 진한 차를 좋아해서 이건 나랑 안 어울려.”온사는 갑자기 그의 질병이 떠올랐다.“진한 차는 몸에 안 좋습니다. 혹시라도 어디 불편하시거나 하면 언제든 찾아오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북진연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전에 약속했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저를 도와주시고 저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전하를 돕겠다고요. 경을 읊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요즘엔 북진연이 통 오지를 않
“모든 걸 바치겠다라… 네 목숨도 말이냐?”북진연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물론이죠. 성녀 전하는 살육을 할 수 없는 분이지만 소녀는 달라요. 소녀는 전하의 가장 예리한 검이 되어 전하를 위해…”촤르륵!안란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란 장검이 마차의 측면을 찔렀다. 검은 안란심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안란심은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검을 내린 북진연이 말했다.“난 검이 많아. 굳이 너까지 필요하진 않단 얘기야. 그리고 무우를 너 같은 것에 비교하지 마. 다음에 또 이러면 그때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거다.”말을 마친 그는 말에 올라 고요에게 지시했다.“저건 다 태워버리거라.”“예, 왕야!”유혹에 실패한 안란심은 결국 고요에게 쫓겨 마차에서 내렸다.고요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마차를 불태웠다.명백한 혐오에 안란심도 분노가 치밀었다.마음의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섭정왕의 혐오를 살 줄은 몰랐다.물론 너무 쉽게 넘어온다면 오히려 재미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만 천하에 여인을 혐오한다고 이름을 알린 섭정왕 전하인데 온사에게만은 달랐다.누군가는 그가 그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제 할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엉망진창이 된 기분을 추스른 안란심은 심복을 불러 물었다.“오늘 연회에서 무슨 일 있었어?”북진연을 유혹하려고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비웠기에 연회의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심복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아가씨께서도 자리에 계셨어야 했는데, 정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었죠.”“그래? 무슨 일인데?”“음… 그러니까….”심복은 연회에서 황제가 온모를 비로 간택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폐하께서 온모한테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예의법도를 배우라고 했다는 거니?”너무 뜻밖의 일이라 안란심도 적잖이 놀랐다.첫눈에 반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온모의 외모는 평범한 축에 속했고 여린 척하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었다.역시나 예의법도를 가르
어린 황제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좋다.”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에 말을 이었다.“허나 네 아비는 네가 시골 출신이라고 궁중 법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우려하고 있으니, 짐의 비가 되기엔 좀 힘들 것 같구나.”그는 턱을 괴고 미간을 찌푸린 채, 큰 고민에 빠진 시늉을 했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다급히 말했다.“아닙니다! 전혀 힘들지 않아요! 태후마마께 궁중법도를 배우면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열심히 배워서 빨리 폐하의 비가 되고 싶습니다!”그러면서도 온모는 속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폐하께서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는데 좋은 말은 못할 망정! 폐하께서 마음을 접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온모는 황제가 명을 철회할까 봐 조마조마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그래. 참으로 사려 깊은 여인이로구나. 그렇다면 오늘부터 태후궁에서 법도를 배우도록 하거라.”온권승은 그 말을 듣자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그가 자리로 돌아오자 온장온은 다급히 아버지의 옷깃을 잡고 말했다.“아버지, 이를 어쩝니까? 폐하께서 막내를 보는 눈빛이 애정하는 비를 보는 눈빛은 아니었어요!”온권승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장남도 눈치챈 일을 온모가 눈치채지 못한 게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지금이 아니라 온가의 여식은 앞으로도 황제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안 그래도 황제는 진국공 가문의 세력을 견제하는데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줄 빌미를 줄리가 없었다.예전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땐 북진연도 전장에 나가 있었고 진국공 가문은 후궁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허나 하필 그때엔 황제가 너무 어렸고 수렴청정 중인 태후는 진국공부를 경계했기에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줄곧 후궁 간택을 미뤄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폐하가 성년이 되자 북진연이 전장에서 승리하고 돌아왔다.황제파인 북진연이 복귀하자 태후는 실권을 내려놓고 조정의 결정권을 전부 황제에게 맡겼다.다만 후궁에 황후의 자리가 비어
이어지는 연회에서 온모는 어딜 가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그녀는 분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둔하고 사지만 발달한 무관 가문 여식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롱과 비난은 서슴지 않으면서도 절대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다.그들은 온모에게 온갖 굴욕감을 주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그리고 또 다른 무리가 온모에게 다가왔다.같은 상황이 수차례 반복된 이후, 온모는 그들이 작정하고 왔다는 것을 드디어 눈치챘다.더 돌아다니다가는 또 비웃음이나 당할 게 뻔했기에 온모는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자리를 지켰다.이곳에는 폐하와 태후, 그리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계시니 아무도 쉽게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에 불과했다.온모가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황제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본 후에 웃으며 온권승에게 말했다.“진국공, 최근에 짐이 고민이 좀 있는데 해결해 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가 아프던 참이었소. 마침 오늘 진국공도 자리했으니 자네가 의견 좀 내주지 않겠나?”온권승은 흠칫하며 다급히 예를 행하고 말했다.“폐하의 고민을 해결해 드리는 건 대신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무슨 일로 고민이십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와드리겠지만 제 능력 밖의 일이라면 괜히 폐하의 시간만 뺏지 않을까 싶습니다만.”“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오. 다만 이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진국공뿐이라 얘기를 꺼낸 거요.”말을 마친 어린 황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아니나다를까, 황제는 고개를 돌려 온모를 바라보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짐이 즉위한 이래로 나이가 어리고 정무가 다망하여 후궁이 줄곧 비어 있었는데 지난번 어마마마의 생신연에서 진국공의 막내딸을 본 이후로 계속 그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구려. 첫눈에 반한 게 아닌가 싶소.”현장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온모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제의 말을 곱씹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
한심하다는 투의 말 속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관 수장인 진국공가의 딸이 무관 가문 아가씨들을 찾아갔으니 당해도 싸다는 어투였다.사실 예전의 진국공 가문은 완전한 문관파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문에 무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온권승이 집권하면서 완전히 문관 쪽으로 돌아섰고 나중에 란씨 가문과 정략혼인까지 하며 문관파에서 꽤 입지가 튼튼한 란씨 가문 덕에 온권승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무관들은 예로부터 문관을 무시하고 혐오했는데 특히나 무관을 배신한 온권승은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래서 진국공 가문이 아무리 잘나가도 무관들은 전혀 그들에게 굽히거나 양보하지 않았다.온권승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무관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하물며 무관파 출신 중에는 대단하신 섭정왕 전하도 있지 않은가.그는 섭정왕의 칭호를 받기 전에도 전장의 신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대권을 잡은 후에도 그는 황실에 충성하며 어린 황제의 가장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그는 무관파의 명예이자 자랑이었다.전에는 섭정왕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무관들이 문관들 앞에서 눈치를 많이 봤지만 섭정왕이 돌아온 지금 비실비실한 문관들의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그래서 요즘 무관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특히나 섭정왕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성녀 전하를 호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덩달아 성녀를 옹호하기 시작했다.성녀 전하가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진국공의 딸이긴 하지만 섭정왕의 명이 곧 천명이었다.하물며 온사는 이미 가문과 연을 끊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어쩌면 성녀 전하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비의 가식적인 본모습을 눈치채고 가문을 떠난 걸 수도 있었다.무관들은 그녀의 그런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게다가 며칠 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진국공은 젊은 시절 부인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사생아가 적녀에게 보복한다고 란자군의 시신을 도굴해 훼손까지 시도했다고 한다.그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무관들은 경악해마지 않았다.소문이
온모는 뒷담화 하다가 본인에게 들켰는데도 그들이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홧김에 앙칼진 목소리로 따졌다.“너희 어느 가문 애들이야? 왜 한 번도 본 적 없지? 어디 일반 관료네 딸인가 본데 어딜 감히 내 뒷담화를 하고 있어?”온모는 그제야 여기 있는 아가씨들 모두 못 보던 얼굴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진국공가로 들어온 뒤, 온모가 만난 사람들은 다 온권승의 부하 관원들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다들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어쨌거나 온권승에게 아부하는 입장이기에 그들의 자식들도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주었다.하지만 눈앞의 소녀들은 그들 중에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그래서 온모는 그들이 관직이 낮은 집안 자식들이라 평소에 진국공 가문에 방문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내 아버지 체면을 봐서 너희들에게 사과할 기회를 줄 것이다. 거부할 시, 너희들이 방금 한 말을 모두 아버지한테 알릴 거야. 그럼 너희도 곤란해질 건 물론이고 너희들의 아버지한테까지 피해가 가겠지!”온모는 턱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거만하게 말했다.그러나 그런 협박의 말은 소녀들의 비웃음만 자아낼 뿐이었다.“세상에나, 쟤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역시 비천한 사생아야. 여자들끼리 한 말을 아버지한테 일러바친대.”이소은은 경멸의 눈빛으로 온모를 바라보며 말했다.“일러바쳐서 뭐 하게? 설마 우리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온사였으면 어느 정도 눈치를 봤겠지만 너는… 그럴 가치가 없어.”이소은은 팔짱을 끼고 온모를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혀를 찼다.“너!”이소은의 도발에 넘어간 온모가 도끼눈을 뜨고 상대에게 소리쳤다.“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다른 소녀들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소은아,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애한테 그런 말을 해도 소 귀에 경 읽기야.”온모는 그 말을 듣고 더 부아가 치밀었다.“너희 죽고 싶어? 내 아버지가 진국공이야!”“알아! 우리 다 알아!”“경성에 네
이번 제사에는 성녀가 필요 없었기에 온사와 수월관 사태들은 참석하지 않았다.제사가 끝난 후, 궁중 연회가 시작되었다.관원들은 처자식을 대동하고 입장했다.명절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라 오늘의 연회는 분위기가 비교적 자유로웠다.어린 황제는 태후와 함께 공연을 감상했고 각 집안의 부인, 아가씨들은 떼를 지어 수다를 떨었다.줄곧 방에만 갇혀 있던 온모도 사람들을 만나고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래서 부하와 얘기 중인 온권승의 눈치를 힐끗 보고는 아가씨들이 모인 쪽으로 걸어갔다.“다들 여기서….”온모가 인사를 건네려는데 그녀를 등진 한 아가씨가 말했다.“온사는 왜 오늘 연회에 안 왔지?”“못 온 거겠지. 걔 지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잖아. 우리 어머니 말로는 절 생활이 그렇게 자유롭지 않대. 아무 때나 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그래? 너무 아쉽네. 올해는 어떤 가야금 곡을 연주하려나 듣고 싶었는데.”“우리들 중에 걔가 가야금 연주를 가장 잘하지 않아?”“당연한 소릴. 가야금뿐이겠어? 바둑 좀 못하는 거 말고 서예나 그림 실력 모두 최고라고 할 수 있지.”“아쉽네. 앞으로는 걸작을 감상할 기회가 없겠어.”“진국공부에서 온모라는 애가 왔잖ㅇ라. 뭐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다고 칭찬이 자자해서 귀에 피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어. 요즘은 뭐 다른 소문 없어?”“있지! 최근에 그런 소문이 들리잖아. 걔 진국공 나리의 양녀가 아니라 사생아라고.”“세상에나, 그게 사실이야?”“사실이래!”“설마… 그런데 뻔뻔하게 연회에 왔어?”“난 저렇게 밖에서 태어난 애가 제일 싫어. 첩이나 이랑이 낳은 서자, 서녀들보다 더 얄미워!”“걔네 어미와 진국공 어르신은 일찍부터 연인이었대. 그런데 진국공부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인을 버리고 란씨 가문의 아가씨와 혼인한 거지.”“그럼 왜 첩이나 이랑으로 들어오지 않고 굳이 밖에서 애를 낳았을까?”“주제도 모르고 자존심만 센 거지.”“맞아, 밖에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첩이 되길 거부하는 여자들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언제 널 버린다고 했어?”온권승은 홧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최근에 친 사고들을 생각해 봐. 그거 수습해 준 사람이 누구야? 다만 이번에는 선을 넘었어! 계속 이런 식이면 이제 나도 너 못 지켜준다. 네 어미한테 간다는 말로 날 협박할 생각은 하지 마!”말을 마친 그는 차갑게 뒤돌아서 방을 나가버렸다.온모는 다급히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아니… 아니에요, 아버지. 협박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순간 말이 잘못 나온 거예요. 화 푸세요, 아버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그녀는 울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어릴 적 그녀는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그녀는 죽은 어미와 너무 닮았으며 우는 모습까지 닮았다고 사람들이 말해주었다.어린 시절 풋풋한 설렘을 온권승은 잊을 수 없었다. 그녀와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온모를 보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어. 어차피 너도 교훈을 얻었고 잘못을 알면 된 거야….”온권승의 어투가 드디어 누그러지자 온모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이때, 온권승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말했다.“다만 이번 일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만일을 대비해서 당분간은 방에서 나가지 말고 네 어미의 측근들도 만나지 마. 안 그럼 나도 다신 널 돕지 않겠다.”그 말을 들은 온모는 억울한 얼굴로 반박했다.“괜한 걱정이세요, 아버지. 온사의 어머니 시신도 이미 돌려줬잖아요. 걔가 뭘 더 어쩌겠어요?”온권승은 고개를 돌리고 한심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일이 온사랑만 연관된 줄 아니? 란씨 가문이 이미 멸문했지만 조정에는 아직도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만약 걱정해야 할 상대가 온사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였다.안타깝게도 온모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그녀는 온권승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어쩌
온모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세 오라버니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라버니들, 어차피 제 말을 못 믿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제가 한 게 아니에요.”온장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하지만 너와 관련 있는 자들이 우리 어머니의 시신을 관 채로 도굴해서 가져간 걸 봤어. 정말 이 일이 너랑 관련이 없다고?”온모는 이 일에서 완전히 발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말을 바꾸었다.“사실 저와 관련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한 게 아니라고 한 이유는 큰 오라버니께서 본 그 세 사람은 제 친어머니께서 저를 지켜주라고 남겨주고 가신 사람들이에요. 다만 아버지께서 저를 진국공부 양녀로 들이면서 그들은 경성에 같이 따라오지 않은 거고요.”그녀는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거짓말을 이어갔다.“얼마 전에 제가 곤장을 맞은 이후로 너무 서러워서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하소연한 적 있어요. 경성으로 와서 날 좀 지켜달라고요. 그런데 그 일을 듣고 그 사람들이 너무 화가 나서… 저 대신 복수해 주겠다고… 양어머니의 무덤을 도굴한 거예요….”“정말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 믿기 힘든 걸 알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온모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흐느꼈다.겉으로 보기에는 절절하고 진심으로 느껴졌다.처음에는 온모를 탓하던 온장온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싸늘한 얼굴로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그런데 온사는 왜 네가 사람을 시켜서 그 짓을 했다고 하지? 게다가 보복한다고 시신을 훼손한다고까지 했다며?”온모는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그건… 저는 그 일을 알고 당장 양어머니의 시신을 돌려놓으라고 했죠. 그런데 그날 밤에 온사 언니가 저를 납치해 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때리고 독까지 먹이니까 너무 무서워서… 내가 시킨 거라고, 날 안 내보내 주면 다신 어머니를 만날 생각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거래가 성사된 거예요.”“내가 막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