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쾅―
현관문이 닫히고 거실에는 다시 탁유환과 도복희 둘만 남았다. 탁유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복희는 ‘이 남자의 유일한 적수는 이 집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심우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갈 데는 있나.”
탁유환이 뱉은 말은 분명 질문이었으나 그는 꼭 다 알고서 말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가야죠, 어디든….”
도복희는 빠르게 대답했으나 말끝을 조금 흐렸다. 거짓말은 못하는 성정이었다. 그러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한 줌 자존심마저 버리는 일이 되는 것 같아 그러기 싫었다.
탁유환은 다른 말이 더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듯 잠시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리고 도복희가 아랫입술을 짓씹는 걸 보고선 별 반응 없이 시선을 돌렸다.
탁유환은 삭막한 남자들의 집의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꿔 놓은 도복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귀찮으니 얼른 회복시켜서 내보내라며 혀를 차던 사람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만 봐도 마음 바꾼 게 티가 났다.
삐리릭―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강은택이 돌아왔다. 거실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강은택은 탁유환과 도복희가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충분히 예상하며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꼴을 직접 목도하니 생각보다 더 황당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순간 잊고 말았다.
도복희는 빤히 자신을 보고만 있는 강은택에게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까. ‘안녕하세요’라고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다녀…,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영 틀린 것은 아니나 정답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탁유환은 그걸 듣고 웃음을 터뜨렸고 강은택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차서 실소했다.
“너, 올라가.”
강은택은 괜히 엄한 목소리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도복희는 ‘넵’ 하고 빠릿하게 대답한 뒤, 허리에 두른 담요를 팔랑거리며 2층에 있는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계단에 꽂힌 시선들이 제각각 흩어졌다.
탁유환은 자신이 그때까지 미소 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는지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강은택이 이제 떠올렸다는 식의 낮은 탄성을 뱉었다.
강은택은 탁유환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짧게 상의할 생각으로 등을 기대지도 않았다.
“쟤 며칠만 여기 있게 하면 안 되나.”
“이유는?”
강은택은 복잡한 표정으로 제 짧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마구 흐트렸다.
“불쌍하잖아, 애가.”
“불쌍해서.”
강은택의 말을 따라하는 탁유환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탁유환은 낮게 ‘흐음’ 하고 입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애매한 그의 반응에 강은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도의적인 책임으로.”
강은택은 그 말을 덧붙이고 곧바로 후회했다. 깡패나 다름없는 흥신소 소장이 도의적 책임을 운운하다니. 심우주가 옆에 있었더라면 배를 잡고 넘어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
탁유환은 피식 웃었으나 흔쾌히 허락했다.
강은택의 생각에 탁유환은 기를 쓰고 반대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도 아니라 여겼기에, 강은택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탁유환은 더 상의할 것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택이 네가 잘 간수하고.”
“…어.”
“집이 시끄럽겠군.”
다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탁유환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 있었다.
한편, 도복희는 강은택이 계단 위를 가리키며 올라가라고 지시한 것에 얌전히 따랐다. 그는 어쩐지 심기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시킨 대로 한다고 꼭 속마음까지 순종적일 수는 없었다. 객식구가 거실 소파를 떡하니 차지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고작 그런 이유로 기분이 상하기도 하나? 도복희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금방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넘겨 버렸다.
임시 거처가 된 2층의 게스트룸으로 돌아온 도복희는 침대 옆 구석진 자리에 자신의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심우주가 마음대로 쏟아 부었던 가방은 그녀가 잠든 사이에 최지호가 다시 정리해서 방 한편에 놔두었다. 딱히 감춰 둔 것은 아니었으나 눈에 잘 띄기를 바란 위치 선정도 아닌 듯했다.
도복희는 자신의 가방을 가져와 방 한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았다. 캔버스 소재인 백팩의 겉은 말라 있었으나 지퍼를 열자 갇혀 있던 습기가 밀려나오며 꿉꿉한 냄새가 났다.
“윽.”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빗물을 머금은 지폐의 냄새가 지독했다. 그렇다고 돈을 버릴 순 없으니, 그녀는 쭈글쭈글한 지폐를 모두 꺼내서 바닥에 잘 펼쳤다. 바짝 말려서 쓰면 그만이다.
여벌 속옷 따위를 담아 둔 파우치는 하필 구멍이 숭숭 뚫린 메쉬 재질이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빗물에 오염되어 있었다. 당장 손빨래라도 할 생각으로 겨드랑이에 통째로 끼웠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얼마 없었다. 더 확인할 것도 없는 것 같아 이제 그만 속옷 빨래를 하러 일어날 참이었다.
“아, 맞다….”
도복희는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다시 앉았다. 자신이 정신 못 차리고 앓아 누운 동안에 가방을 열어 봤고, 신분증을 확인해서 이름을 알았다는 최지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방 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카드지갑을 집어들었다. 신원을 확인했다면 당연히 운전면허증도 도로 끼워 뒀을 터였다. 지갑을 꺼내 든 건, 거기도 물기가 분명 남았을 테니 지폐와 함께 바닥에 널어 놓을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도복희는 제 낡은 카드지갑에 신분증은 온데간데 없고 딸랑 도서 대출 카드만 남아 있는 걸 보고서 크게 당황했다.
“어…, 어디 갔지?”
도복희는 황급히 가방을 활짝 열어 헤집듯 마구 뒤적거렸다. 납작하고 네모난 플라스틱이 잡화들 사이에 섞여 있어야 했다.
없다.
그러고 보니, 도복희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인 핸드폰도 없었다. 그래봤자 이미 2년이나 쓴 것이라 팔아 먹어도 딱히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신분증도 사실 그랬다. 가져가 봤자 어디 쓸 데도 없을 텐데.
그제서야 도복희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들이 남의 가방을 열어 본 것은 보호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해서 였다고. 그런 이유에서라면, 제 운전면허증과 휴대폰을 가져 갔다가 도로 넣는 걸 깜빡 잊었을지도 모른다. 덜렁거리는 제 성격을 생각하면, 남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은택이 자신에게 방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한 것이 몇 분 되지도 않았다. 도복희는 누군가 ‘방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알려주기 전까지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원래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 도복희는 사라진 소지품의 행방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녀는 잠시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심우주의 외모를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보통 그를 ‘아, 그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했고, 남자들 중엔 가끔 ‘제비’라든지 ‘호스트바 선수’와 같은 단어로 공연히 비아냥거리는 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심우주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에 속한다는 걸 뜻하는 방증이었다.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렵했다. 자칫하면 날카롭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남성 평균보다 약간 밝은 피부톤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심우주는 늘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여 그 분위기를 상당히 중화시킨 편이었다.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에서는 중간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왔으니,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완성된 심우주의 외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가벼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었다.심우주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꽤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심우주가 당연히 그런 가벼운 사람이기를 기대했기에 그렇게 자라났는지도 모른다.엄마는 젊은 시절에 나름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는 아닌 듯했고, 오전 늦게 주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왕왕 출연하여 식당에 가면 사인 한 장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다. 그마저도 심우주가 초등 저학년이 됐을 무렵엔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사라진 까닭에 그녀의 전성기엔 얼마나 위세를 떨 수 있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미혼의 여배우와 재벌가 사내에서 난 아이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으니 없는 것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다. 대신 용돈이 부족해서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또래와는 다르게 심우주의 지갑은 늘 두터웠다. 친구 중 누구도, 심지어 선생조차도 심우주의 부모를 본 적이 없는데, 심우주는 그 미스터리한 부모에게서 늘 이상할 정도로 용돈을 많이 받는 애였다. 그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 여유 덕
“어딜 간다고 그래, 돈도 없는 게.”최지호는 꼭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가로막듯 심우주와 도복희의 사이에 비집고 섰다. 심우주도 키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호리호리한 편인 그와 다르게 최지호는 덩치까지 훨씬 컸으므로 도복희는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지,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비켜.”“형, 그만해.”“내가 뭘 했다고 그만하래. 너나 그만하고 비켜, 나 복희랑 얘기 중이잖아.”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남자가 대치 중인 거실의 공기가 변했다.도복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남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티를 내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네 명 중 누구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로 살기로 했다’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은 그들이기에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형제로 봐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복희도 그걸 느꼈다.그런데 지금, 도복희의 거처 문제를 두고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 때문에 흔들릴 신의라면 애초에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구미호는 사람을 홀려서 간을 빼 먹는다.’그런 말들은 세상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실은 도복희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연구된 적 없는 숨은 존재였고 구미호족은 이미 절멸했으니까.‘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사람을 해하는 존재가 아니야.’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육류, 특히 육회나 선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게 인간의 피와 간을 탐하는
“아기 이 집에서 내보낸다.”탁유환의 발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지내는 네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큰형 노릇을 하는 탁유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성정도 아니었으므로 강은택은 그가 이미 뱉은 말을 쉽게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탁유환은 흥신소에 들이닥친 양아치들이 도복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일은 없고 아마 급하게 숨다 다친 모양이다’라고 둘러댄다고 한들 좋은 수가 될까. 아마 그 정도로는 그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이다.탁유환은 등을 돌려 제 뒤에 서 있던 도복희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접어서 마치 작은 아가씨 앞의 기사가 된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유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도복희에게는 좀 낯설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아가.”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전 강은택을 질책하던 그에게서 풍기던 싸늘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네.”그래도 도복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이런 곳에 있지 마라. 응?”언제나처럼 명령조였지만 어쩐지 오늘 탁유환이 뱉는 말투는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저 정말로 어디 맞거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루요.”도복희는 강은택 대신 해명이라도 하듯 늘어놓았다. 강은택에게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녀의 말이 꼭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다행이군.”탁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도복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속했다.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강은택마저 읽었을 그녀의 속내를 탁유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내 회사 근처에 빈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지내기엔 괜
흥신소 사무실에서의 사건을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탁유환이었다. 그 주 토요일까지도 바빠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그도 일요일에는 주말 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중이었다.거실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탁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몸이 기다란 소파에 엎드려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도복희는 두꺼운 판타지 소설책을 읽으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탁유환이 일부러 사 온 책인데, 도복희는 그것이 탁유환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큭.”탁유환은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발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듯 도복희가 그 웃음소리에 홱 그를 돌아봤다.“저 보고 웃은 거죠?”“아니다.”“거짓말.”“그래, 거짓말이다.”도복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왜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이 웃겨요?”“네가 웃긴 게 아니라 이 집에 나 말고 글자 읽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웃었어.”탁유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이 집에 있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이 밥통이거든.”“…푸핫.”신랄한 뒷담화에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헙’ 하고 갑자기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말 듣고 제가 웃었다고 소문 내면 안 돼요.”괜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입단속을 하느라 잠시 손에서 놓은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접혔다. 읽던 구간을 놓친 도복희가 작게 ‘으앗’ 소리치며 허둥지둥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 엎드려 있는 도복희의 바지 밑단이 조금 걷히며 그녀의 하얀 다리에 남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푸르뎅뎅하던 것은 이제 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충격의 흔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다리는 어쩌다 그랬나.”탁유환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아, 이거.”흥신소 사무실의 창고에 숨으면서 어딘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저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도복희의 대답을 듣고 최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물었다.“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적어도 최지호가 보기엔 그랬다. 도복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 정도로 바보 같이 착하고 순해 빠졌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그녀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서 표현하는지. 그저 겸손을 떠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냥, 숨기는 게 좀 많은 사람이요.”도복희는 사실 숨기는 것보단 속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집에 비밀 없는 사람 없어.”고작 숨기는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이 집에 머물 자격이 없는 건 아니야. 최지호의 말은 도복희에게 그렇게 들렸다.“저 그럼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돼요?”“나가라고 한 말 아닌데….”도복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지호가 귓바퀴를 조금 붉혔다. 어쩐지 그녀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길 바라는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그럼 염치 없지만, 조금만 더 잘 부탁드릴게요.”도복희는 구김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아!”용건이 끝났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최지호가 그녀의 ‘아’하는 탄성에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복희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처 알아보는 거 도와주신다고 한 거요.”최지호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겠다고 할까봐 잠시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추리닝바지를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뿌듯해야 할 감사 인사를 듣고 그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호는 ‘고마워요’란 말 뒤에 따라붙은 호칭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하고는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로보트처럼 삐꺽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오빠요....”도복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