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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심계피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8-19 07:23:18

쾅― 

현관문이 닫히고 거실에는 다시 탁유환과 도복희 둘만 남았다. 탁유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복희는 ‘이 남자의 유일한 적수는 이 집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심우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갈 데는 있나.”

탁유환이 뱉은 말은 분명 질문이었으나 그는 꼭 다 알고서 말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가야죠, 어디든….”

도복희는 빠르게 대답했으나 말끝을 조금 흐렸다. 거짓말은 못하는 성정이었다. 그러나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마지막 남은 한 줌 자존심마저 버리는 일이 되는 것 같아 그러기 싫었다.

탁유환은 다른 말이 더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듯 잠시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리고 도복희가 아랫입술을 짓씹는 걸 보고선 별 반응 없이 시선을 돌렸다. 

탁유환은 삭막한 남자들의 집의 분위기를 하루아침에 바꿔 놓은 도복희가 싫지 않았다. 아니,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꽤 마음에 들어했다. 귀찮으니 얼른 회복시켜서 내보내라며 혀를 차던 사람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 상황만 봐도 마음 바꾼 게 티가 났다.

삐리릭― 

도어록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강은택이 돌아왔다. 거실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강은택은 탁유환과 도복희가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을 충분히 예상하며 집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꼴을 직접 목도하니 생각보다 더 황당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순간 잊고 말았다.

도복희는 빤히 자신을 보고만 있는 강은택에게 뭐라고 인사를 건네야 할까. ‘안녕하세요’라고 해야 할까 잠시 고민했다.

“다녀…,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영 틀린 것은 아니나 정답이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상황이었다.

탁유환은 그걸 듣고 웃음을 터뜨렸고 강은택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차서 실소했다.

“너, 올라가.”

강은택은 괜히 엄한 목소리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도복희는 ‘넵’ 하고 빠릿하게 대답한 뒤, 허리에 두른 담요를 팔랑거리며 2층에 있는 게스트룸으로 향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계단에 꽂힌 시선들이 제각각 흩어졌다.

탁유환은 자신이 그때까지 미소 짓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자각했는지 민망한 헛기침을 했다.

“크흠.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아.”

강은택이 이제 떠올렸다는 식의 낮은 탄성을 뱉었다.

강은택은 탁유환의 대각선 방향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짧게 상의할 생각으로 등을 기대지도 않았다.

“쟤 며칠만 여기 있게 하면 안 되나.”

“이유는?”

강은택은 복잡한 표정으로 제 짧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마구 흐트렸다.

“불쌍하잖아, 애가.”

“불쌍해서.”

강은택의 말을 따라하는 탁유환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탁유환은 낮게 ‘흐음’ 하고 입소리를 내며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애매한 그의 반응에 강은택은 저도 모르게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도의적인 책임으로.”

강은택은 그 말을 덧붙이고 곧바로 후회했다. 깡패나 다름없는 흥신소 소장이 도의적 책임을 운운하다니. 심우주가 옆에 있었더라면 배를 잡고 넘어가며 노골적으로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

탁유환은 피식 웃었으나 흔쾌히 허락했다.

강은택의 생각에 탁유환은 기를 쓰고 반대할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넘어갈 사람도 아니라 여겼기에, 강은택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탁유환은 더 상의할 것은 없다고 판단했는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택이 네가 잘 간수하고.”

“…어.”

“집이 시끄럽겠군.”

다 들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탁유환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 있었다.

한편, 도복희는 강은택이 계단 위를 가리키며 올라가라고 지시한 것에 얌전히 따랐다. 그는 어쩐지 심기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시킨 대로 한다고 꼭 속마음까지 순종적일 수는 없었다. 객식구가 거실 소파를 떡하니 차지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고작 그런 이유로 기분이 상하기도 하나? 도복희는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금방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넘겨 버렸다.

임시 거처가 된 2층의 게스트룸으로 돌아온 도복희는 침대 옆 구석진 자리에 자신의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심우주가 마음대로 쏟아 부었던 가방은 그녀가 잠든 사이에 최지호가 다시 정리해서 방 한편에 놔두었다. 딱히 감춰 둔 것은 아니었으나 눈에 잘 띄기를 바란 위치 선정도 아닌 듯했다.

도복희는 자신의 가방을 가져와 방 한 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았다. 캔버스 소재인 백팩의 겉은 말라 있었으나 지퍼를 열자 갇혀 있던 습기가 밀려나오며 꿉꿉한 냄새가 났다.

“윽.”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코를 막았다. 빗물을 머금은 지폐의 냄새가 지독했다. 그렇다고 돈을 버릴 순 없으니, 그녀는 쭈글쭈글한 지폐를 모두 꺼내서 바닥에 잘 펼쳤다. 바짝 말려서 쓰면 그만이다.

여벌 속옷 따위를 담아 둔 파우치는 하필 구멍이 숭숭 뚫린 메쉬 재질이라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빗물에 오염되어 있었다. 당장 손빨래라도 할 생각으로 겨드랑이에 통째로 끼웠다.

애초에 짐이랄 것도 얼마 없었다. 더 확인할 것도 없는 것 같아 이제 그만 속옷 빨래를 하러 일어날 참이었다.

“아, 맞다….”

도복희는 반쯤 들었던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다시 앉았다. 자신이 정신 못 차리고 앓아 누운 동안에 가방을 열어 봤고, 신분증을 확인해서 이름을 알았다는 최지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가방 바닥에 가라앉은 작은 카드지갑을 집어들었다. 신원을 확인했다면 당연히 운전면허증도 도로 끼워 뒀을 터였다. 지갑을 꺼내 든 건, 거기도 물기가 분명 남았을 테니 지폐와 함께 바닥에 널어 놓을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도복희는 제 낡은 카드지갑에 신분증은 온데간데 없고 딸랑 도서 대출 카드만 남아 있는 걸 보고서 크게 당황했다.

“어…, 어디 갔지?”

도복희는 황급히 가방을 활짝 열어 헤집듯 마구 뒤적거렸다. 납작하고 네모난 플라스틱이 잡화들 사이에 섞여 있어야 했다.

없다.

그러고 보니, 도복희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물건인 핸드폰도 없었다. 그래봤자 이미 2년이나 쓴 것이라 팔아 먹어도 딱히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신분증도 사실 그랬다. 가져가 봤자 어디 쓸 데도 없을 텐데.

그제서야 도복희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들이 남의 가방을 열어 본 것은 보호자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해서 였다고. 그런 이유에서라면, 제 운전면허증과 휴대폰을 가져 갔다가 도로 넣는 걸 깜빡 잊었을지도 모른다. 덜렁거리는 제 성격을 생각하면, 남도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강은택이 자신에게 방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한 것이 몇 분 되지도 않았다. 도복희는 누군가 ‘방 밖으로 나와도 된다’고 알려주기 전까지 얌전히 있을 생각이었다. 원래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 도복희는 사라진 소지품의 행방이 너무도 궁금했다. 그녀는 잠시 손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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