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남자는 다 개새끼다, 아가.”
제 앞에 있는 이 남자가 지금보다 열 살 정도 어렸더라면? 아니, 덩치만 조금 더 작은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당신도 개새끼니까 조심하라는 거예요, 말라는 거예요?’하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탁유환의 앞에서 주눅들고 말았다.
도복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제 나름 노력했으나, 그녀가 쫄아붙었다는 걸 탁유환은 금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그는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겁을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놀랐나?”
“놀랐어요.”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네게 손대겠단 뜻은 아니야. 그래도 어른이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진 마라.”
“네….”
도복희는 혼이 난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아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농담이 아니야. 심우주 그 놈은 조심해야 돼.”
탁유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2층 계단 위에 심우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심우주는 어디 외출이라도 할 참인지 깔끔한 검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윗단추를 두 개 풀어 살짝 드러난 탄탄한 가슴팍에는 가늘고 긴 볼체인 목걸이가 늘어져 있었고, 그의 한쪽 귓불에는 초승달 모양의 실버 귀걸이가 달랑거렸다.
심우주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탁유환은 어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채였다.
“저 놈은 치마만 두르면 다 환장하지.”
“풉….”
도복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주의할 점이라도 알려주는 줄 알고 귀를 쫑긋 세웠는데, 그녀의 귀에 꽂힌 것은 난데없는 조롱이었다. 허무해서 웃겼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렵고 불편한 존재였던 이 남자가, 자신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 주려는 것 같아서 기뻤다.
“저 영감탱이가 미쳤나. 애한테 뭔 소릴 하는 거야?”
탁유환의 말을 들은 심우주는 바락 성질을 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린 채 성큼성큼 다가왔다. 도복희는 정말로 두 사람 사이에 싸움이 붙기라도 할까봐 목 뒤로 침을 크게 넘겼다.
그러나 심우주는 예상 외로 그저 얌전하게 두 사람 사이의 빈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뿐이었다. 탁유환과 도복희는 꽤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으나, 심우주가 앉으니 널널하게 느껴지던 소파가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꼼짝 움직이기만 해도 팔과 팔이 닿을 정도였다.
“아, 좁네.”
심우주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에 제 팔을 올렸다. 소파 팔걸이에 붙어 있다시피 하던 도복희의 몸이 자연스럽게 끌려와 그에게 착 붙었다.
“우리 복희, 저 아저씨 말은 신경 쓰지 마. 오빠는 여자면 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
도복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가, 저 새끼 서른 넷이다. 오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더럽게…. 쯧.”
탁유환은 경멸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심우주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겨우 참아내는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때 탁유환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은택의 전화였다. 그 덕분에 두 남자의 대치가 휴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탁유환이 전화를 받자, 심우주는 혀끝으로 입천장을 차며 딱- 소리를 내더니 시선을 돌렸다.
심우주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표정을 싹 바꾸었다. 그는 입꼬리를 길게 당겨 웃으면서 도복희의 작은 코를 살짝 꼬집었다.
“너 그 선지국 진짜로 먹었냐?”
“네. 먹으니까 좀 살겠던데요.”
“하, 이거 웃기네.”
심우주는 웃음을 터뜨렸다.
도복희는 타인과 살갗이 좀 닿는 것엔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노골적으로 끈적하게 굴지 않을 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심우주가 딱히 손장난을 친 것은 없었지만, 조금 전 그가 제 어깨에 그의 팔이 닿는 순간에는 조금 신경을 곤두세웠다. 직전에 탁유환이 남자는 다 개새끼며 특히 심우주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저 동생을 귀여워하는 듯한 심우주의 태도에 그녀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오빠가 떠올라서였다.
오빠의 외모가 제 옆에 있는 심우주와 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심우주가 방금 그녀의 코를 살짝 꼬집은 것처럼, 오빠도 그녀에게 종종 비슷한 장난을 치고는 했다. 우애가 좋은 남매였다.
도복희는 괜히 코끝이 찡해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눈시울이, 코끝이 붉어졌다. 심우주는 순간 자신이 세게 꼬집어 그녀의 콧방울이 빨개졌나― 생각했다. 놀려 줄까 하다가, 이내 그녀의 표정이 곧 울 것처럼 서글프게 변한 걸 보고서 크게 당황했다.
“뭐…. 너, 너 울어?”
“…안 울어요.”
도복희는 눈물 방울이 떨어지진 않았으니, 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게 꼬집지 않았는데?”
당황한 심우주의 낯빛이 조금 붉어졌다. 남자치고는 조금 밝은 편인 피부는 그런 것이 금방 티가 났다.
“우주.”
탁유환이 서늘한 목소리로 호명하며 심우주의 뒷목을 콱 움켜쥐었다.
“애 울리지 마라. 은택이 손님이다.”
“아니, 아무것도 안 했―”
“아가.”
탁유환은 심우주의 변명은 듣기도 싫다는 듯 말을 끊고 도복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탁유환이 자신을 ‘아기’ 혹은 ‘애기’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새끼 손을 부러뜨려 줄까.”
나직한 음성은 심우주를 대할 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저 그녀의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한 과장된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꽤 살벌한 문장이었다. 도복희는 정말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냥, 잠깐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그랬나.”
탁유환은 그녀가 말하는 ‘예전 기억’이 어떤 내용인지는 묻지 않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태도가 기댈 수 있는 ‘어른’의 것만 같아서, 그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것 같은 제 과거사를 다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예쁜 애가 사연 있으면 더 예뻐 보인다?”
심우주가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탁유환에게 무력으로 제압 당한 지가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도복희는 심우주가 분위기를 환기시켜 준 덕분에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하마터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구한 제 팔자를 하소연할 뻔했다. 그런 깊고 어두운 이야기를 꺼냈다가 좋게 풀린 적이 없었다. 동정심에 잘해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보통은 부담스러워했다. 더러는 제 상처를 들추며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인간도 있었다.
“출근이나 해라.”
탁유환은 화를 억누르는 것처럼 아래턱에 힘을 준 채 말했다.
“그러지, 뭐!”
그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해맑게 느껴질 정도의 쾌활한 톤으로 대꾸하는 심우주였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도복희에게 찡긋 윙크를 날렸다.
“퇴근했는데 가고 없으면, 오빠 서운하다?”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능글맞은 멘트를 남긴 심우주가 차고 방향 뒷문으로 향했다.
심우주의 외모를 표현하자면, 여자들은 보통 그를 ‘아, 그 키 크고 잘생긴 사람?’으로 기억했고, 남자들 중엔 가끔 ‘제비’라든지 ‘호스트바 선수’와 같은 단어로 공연히 비아냥거리는 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심우주가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에 속한다는 걸 뜻하는 방증이었다.쌍꺼풀 없는 눈매가 날렵했다. 자칫하면 날카롭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는 생김새였다. 그러나 남성 평균보다 약간 밝은 피부톤에 짙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심우주는 늘 밝은 갈색으로 염색하여 그 분위기를 상당히 중화시킨 편이었다. 느긋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에서는 중간톤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러운 말들이 흘러나왔으니, 진중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했다. 30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완성된 심우주의 외적인 모습과 분위기는 가벼워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것조차 의도한 것이었다.심우주는 심각하거나 진지한 분위기를 못 견뎌했다. 꽤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서 심우주가 당연히 그런 가벼운 사람이기를 기대했기에 그렇게 자라났는지도 모른다.엄마는 젊은 시절에 나름 인지도 있는 배우였다고 했다. 파파라치가 따라붙을 정도는 아닌 듯했고, 오전 늦게 주부를 타깃으로 한 드라마에 왕왕 출연하여 식당에 가면 사인 한 장을 부탁 받는 일이 많았다. 그마저도 심우주가 초등 저학년이 됐을 무렵엔 이른 저녁에 방영하는 작품에도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는 바람에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사라진 까닭에 그녀의 전성기엔 얼마나 위세를 떨 수 있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미혼의 여배우와 재벌가 사내에서 난 아이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없느니만 못한 존재였으니 없는 것처럼 숨어서 살아야 했다. 대신 용돈이 부족해서 편의점 라면 코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는 또래와는 다르게 심우주의 지갑은 늘 두터웠다. 친구 중 누구도, 심지어 선생조차도 심우주의 부모를 본 적이 없는데, 심우주는 그 미스터리한 부모에게서 늘 이상할 정도로 용돈을 많이 받는 애였다. 그 두둑한 지갑에서 나온 여유 덕
“어딜 간다고 그래, 돈도 없는 게.”최지호는 꼭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인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가로막듯 심우주와 도복희의 사이에 비집고 섰다. 심우주도 키가 상당히 큰 편에 속했지만, 호리호리한 편인 그와 다르게 최지호는 덩치까지 훨씬 컸으므로 도복희는 마치 자신의 앞에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난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지,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비켜.”“형, 그만해.”“내가 뭘 했다고 그만하래. 너나 그만하고 비켜, 나 복희랑 얘기 중이잖아.”어느 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남자가 대치 중인 거실의 공기가 변했다.도복희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해졌다.남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인지 티를 내는 것을 쑥스러워했다. 네 명 중 누구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로 살기로 했다’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서로의 일상에 자리 잡은 그들이기에 주변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형제로 봐 주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집에서 함께 지내며 도복희도 그걸 느꼈다.그런데 지금, 도복희의 거처 문제를 두고 남자들 사이에 충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우애에 금이 가는 것만 같아 괴로워졌다. 누군가는 고작 여자 때문에 흔들릴 신의라면 애초에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여우가 사람을 홀린다.’‘구미호는 사람을 홀려서 간을 빼 먹는다.’그런 말들은 세상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다. 진실은 도복희 그녀도, 그녀의 엄마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연구된 적 없는 숨은 존재였고 구미호족은 이미 절멸했으니까.‘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우리는 사람을 해하는 존재가 아니야.’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러나 도복희는 육류, 특히 육회나 선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게 되는 자신에게 인간의 피와 간을 탐하는
“아기 이 집에서 내보낸다.”탁유환의 발언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형제처럼 지내는 네 명의 남자들 사이에서 큰형 노릇을 하는 탁유환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변덕스러운 성정도 아니었으므로 강은택은 그가 이미 뱉은 말을 쉽게 바꾸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탁유환은 흥신소에 들이닥친 양아치들이 도복희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와서 ‘직접적으로 맞닥뜨린 일은 없고 아마 급하게 숨다 다친 모양이다’라고 둘러댄다고 한들 좋은 수가 될까. 아마 그 정도로는 그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것이다.탁유환은 등을 돌려 제 뒤에 서 있던 도복희와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큰 몸을 접어서 마치 작은 아가씨 앞의 기사가 된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탁유환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상황이 도복희에게는 좀 낯설었지만, 크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아가.”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조금 전 강은택을 질책하던 그에게서 풍기던 싸늘한 기운은 온데간데 찾아볼 수 없었다.“…네.”그래도 도복희는 바짝 긴장한 채였다. “이런 곳에 있지 마라. 응?”언제나처럼 명령조였지만 어쩐지 오늘 탁유환이 뱉는 말투는 마치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도복희는 그런 그의 앞에서 차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네…. 그런데 저 정말로 어디 맞거나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정말루요.”도복희는 강은택 대신 해명이라도 하듯 늘어놓았다. 강은택에게는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녀의 말이 꼭 ‘저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여기 조금 더 머물면 안 될까요?’하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처럼 들렸다.“다행이군.”탁유환은 커다란 손으로 도복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는 눈치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리한 편에 속했다. 단순함이 장점이자 단점인 강은택마저 읽었을 그녀의 속내를 탁유환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내 회사 근처에 빈 오피스텔이 있어. 혼자 지내기엔 괜
흥신소 사무실에서의 사건을 가장 늦게 알게 된 사람은 탁유환이었다. 그 주 토요일까지도 바빠서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그도 일요일에는 주말 낮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던 중이었다.거실의 커다란 1인용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탁유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작은 몸이 기다란 소파에 엎드려서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도복희는 두꺼운 판타지 소설책을 읽으며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었다. 그녀가 심심해하는 것 같아서 탁유환이 일부러 사 온 책인데, 도복희는 그것이 탁유환이 이미 소장하고 있던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다.“…큭.”탁유환은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발목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은 짐승이 귀를 쫑긋 세우듯 도복희가 그 웃음소리에 홱 그를 돌아봤다.“저 보고 웃은 거죠?”“아니다.”“거짓말.”“그래, 거짓말이다.”도복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왜요. 제가 책 읽는 모습이 웃겨요?”“네가 웃긴 게 아니라 이 집에 나 말고 글자 읽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게 어색해서 웃었어.”탁유환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이 집에 있는 다른 놈들은 머리통이 밥통이거든.”“…푸핫.”신랄한 뒷담화에 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헙’ 하고 갑자기 숨을 들이키며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그 말 듣고 제가 웃었다고 소문 내면 안 돼요.”괜한 걱정이었다. 스스로 입단속을 하느라 잠시 손에서 놓은 책이 파라락― 소리를 내며 접혔다. 읽던 구간을 놓친 도복희가 작게 ‘으앗’ 소리치며 허둥지둥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 엎드려 있는 도복희의 바지 밑단이 조금 걷히며 그녀의 하얀 다리에 남은 멍 자국이 드러났다. 푸르뎅뎅하던 것은 이제 노르스름한 빛을 띠며 옅어져 가는 중이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충격의 흔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다리는 어쩌다 그랬나.”탁유환의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아, 이거.”흥신소 사무실의 창고에 숨으면서 어딘가 부딪힌 것이었다. 그 순간에는 몰랐으나
“저도 평범하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도복희의 대답을 듣고 최지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떠오른 그대로 물었다.“네가 착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적어도 최지호가 보기엔 그랬다. 도복희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 정도로 바보 같이 착하고 순해 빠졌다. 그래서 궁금했다. 대체 그녀는 왜 스스로를 그렇게 낮춰서 표현하는지. 그저 겸손을 떠는 것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냥, 숨기는 게 좀 많은 사람이요.”도복희는 사실 숨기는 것보단 속이고 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집에 비밀 없는 사람 없어.”고작 숨기는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이 집에 머물 자격이 없는 건 아니야. 최지호의 말은 도복희에게 그렇게 들렸다.“저 그럼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돼요?”“나가라고 한 말 아닌데….”도복희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지호가 귓바퀴를 조금 붉혔다. 어쩐지 그녀가 조금 더 머물러 주길 바라는 제 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서였다.“그럼 염치 없지만, 조금만 더 잘 부탁드릴게요.”도복희는 구김살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웃었다.“아!”용건이 끝났으니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최지호가 그녀의 ‘아’하는 탄성에 옮기던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도복희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거처 알아보는 거 도와주신다고 한 거요.”최지호는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꿔 나가겠다고 할까봐 잠시 긴장했다. 저도 모르게 추리닝바지를 잠깐 쥐었다가 놓았다.“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오빠.”뿌듯해야 할 감사 인사를 듣고 그는 어쩐지 김이 빠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지호는 ‘고마워요’란 말 뒤에 따라붙은 호칭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하고는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목에서 기름칠하지 않은 로보트처럼 삐꺽대는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방금 뭐라고 불렀어?”“네? 오빠요....”도복희는 자신이 무슨 말 실수라도 했나 싶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아저씨라고 부르기에는 나이 차이가 얼마 안
“아직 해가 중천인데?”심우주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도복희가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큰 키 덕분에 어느 문이든 드나들 때마다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최지호였다. 턱을 들자마자 도복희와 눈이 마주치니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일요일인데, 어디 다녀오세요?”도복희의 시선이 그의 비어 있는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마트 다녀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아, 응…. 잠깐 배달.”“배달요?”도복희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최지호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손을 제 등 뒤로 숨겼다. 배달을 다녀왔다는 그의 손에는 거무스름하게 약간의 흙이 묻어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썩 보여 주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나무 배달.”최지호는 마지못해 꺼내 놓는 사람처럼 짧게 대답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듣고서 흥미로워하는 여자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도복희의 또래와 이야기를 나눌 일 자체가 딱히 없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그 동그란 눈에 깃든 호기심 어린 빛이 금방 사그라들 거라고 여겼다.“우와. 그냥 꽃집 한다고만 들었는데!”도복희는 손뼉을 짝― 치더니, 신이 난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꽃집 운영하는 거 맞는데, 외곽 쪽에 온실 하우스도 있어.”“대박, 대박. 저 언제 한 번 구경 가면 안 돼요?”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최지호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구경?”“네!”최지호의 눈이 느리게 꿈뻑거렸다. 그녀를 바라보며 예의상 하는 말인지 가늠해 보고 있었다. 그러나 도복희의 표정에 뜬 신호는 분명한 흥미였다.“…그래. 그럼 너 쉬는 날 한번 같이 가자.”“쉬는 날요?”도복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최지호는 아직 그녀가 강은택의 사무실 아르바이트에 나가지 않게 된 사연을 모르고 있었다.“아아. 저 다시 백수예요.”“아…, 그래?” 최지호는 심우주와 다르게 덜컥 ‘왜’를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