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그건 약속 못 하는데.”서윤의 대답에 도현이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그럴 줄 알았습니다.”“왜요?”“지난번에도 그림보다 키스를 먼저 선택했으니까.”“그건 도현 씨도 똑같았잖아요.”서윤이 스케치북을 품에 안았다.“싫었어요?”“아니요.”“그럼 됐네.”도현은 반박하지 않았다.서윤은 두 사람이 그린 메모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스케치북을 책장에 꽂았다.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돌아섰다.“그러면 연습 방법을 바꾸면 되겠다.”“어떻게.”“시간 제한.”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사이》에서 나 그릴 때 삼십 분.”“짧습니다.”“한 시간?”“그것도.”“얼마나 필요한데요?”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모르겠습니다.”“사람 하나 그리는데?”“당신이 계속 움직일 테니까.”서윤이 팔짱을 꼈다.“나 가만히 잘 있거든요.”도현이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얄미웠다.“왜 아무 말 안 해요.”“오늘 5분도 실패했습니다.”“도현 씨가 쳐다봐서 웃은 거잖아요.”“그림을 그리려면 봐야 합니다.”“그러니까.”서윤은 잠시 고민했다.“좋아요. 연습 한 번 더.”“지금?”“응.”서윤은 소파에 앉았다.이번에는 등을 편하게 기대고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렸다.“아까처럼 포즈 잡고 있으면 자꾸 신경 쓰이니까 그냥 있을게요.”“뭘 하면서?”“책 읽을래요.”테이블에 놓여 있던 책을 집었다.“도현 씨는 알아서 그려요.”“이번에는 방해 안 합니까.”서윤이 책을 펼치며 말했다.“안 해요.”“확실합니까.”“네.”도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결국 스케치북을 가져왔다.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이번에는 정말 조용했다.서윤은 책을 읽었다.도현은 그렸다.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 가끔 들렸다.십 분.이십 분.처음에는 신경 쓰이던 시선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서윤은 책에 집중했다.다리를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편하게 접었다.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리면 귀 뒤로 넘겼다.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세를 고쳐달라는 말도
월요일 밤.서윤은 도현의 스케치북을 펼쳐보다가 마지막 장에서 손을 멈췄다.흰 셔츠. 풀어진 머리. 웃기 직전의 얼굴.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림도,선을 잡아둔 흔적도 없었다.서윤은 주방에 있는 도현을 불렀다.“도현 씨.”“네.”“이거 뭐예요?”도현이 물컵을 들고 들어왔다.서윤이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봤습니까.”“보라고 둔 거 아니었어요?”“숨기지는 않았습니다.”서윤은 다시 글씨를 내려다봤다.“근데 왜 그림은 없어요?”“못 그렸습니다.”뜻밖의 대답이었다.“왜요?”도현이 옆에 앉았다.“기억이 안 나서.”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를 그렇게 오래 봐놓고?”“셔츠도 기억나고, 머리도 기억납니다.”“그럼?”도현은 잠시 서윤의 얼굴을 바라봤다.“표정이 기억이 안 납니다.”“내 표정?”“네.”“왜?”“계속 바뀌어서.”서윤이 웃었다.“그걸 못 그리는 거예요?”“하나를 고를 수가 없습니다.”처음 거울을 보던 얼굴.자신이 흰 셔츠를 좋아한다고 하자 조금 민망해하던 얼굴.장난치던 얼굴.자신의 손을 잡아끌던 얼굴.그리고 결국 그림 연습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얼굴까지.“그래서 한 줄만 써놓은 거예요?”“네.”서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그럼 연습해야겠네.”“뭘.”“사람 그리는 거.”“《사이》에서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본편은 거기서 하고.”서윤이 소파에서 일어났다.“연습은 지금.”“지금?”“응.”서윤은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들어갔다.잠시 뒤 작은 메모지 묶음과 펜을 들고 나왔다.도현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그걸로?”“어차피 연습인데.”서윤은 식탁 의자를 끌어다 창가에 놓았다.그리고 앉았다.“5분.”“너무 짧습니다.”“그러니까 얼굴만.”서윤은 턱을 괴었다.“시작.”도현이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펜을 들었다.처음 몇 초 동안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서윤이 물었다.“왜 안 해요?”“움직이지 마십시오.”“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말하면서 움직였습니다.
일요일 오후.서윤은 세탁물을 정리하다가 도현의 흰 셔츠 한 장을 꺼냈다.어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제 셔츠면 좋겠습니다.서윤은 셔츠를 든 채 잠시 서 있었다.그러다 침실 쪽을 확인했다.도현은 서재에 있었다.서윤은 옷걸이에 셔츠를 걸었다가 다시 내렸다.“한번 입어보는 건 괜찮잖아.”혼잣말을 하고는 결국 옷을 갈아입었다.자신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도현의 셔츠를 걸쳤다.역시 컸다.소매는 손등을 덮었고 품도 넉넉했다.단추를 아래에서부터 몇 개 잠그다가 손이 멈췄다.어제 자신이 한 말까지 떠올랐다.단추를 몇 개 잠글지는 내가 정할게요.서윤은 거울을 바라봤다.두 개를 더 잠갔다.다시 하나를 풀었다.“이건 너무 노렸나.”다시 잠갔다.그런데 이번에는 답답해 보였다.결국 또 풀었다.혼자 몇 번이나 단추를 만지던 순간이었다.“뭘 그렇게 고민합니까.”서윤이 화들짝 돌아봤다.문 앞에 도현이 서 있었다.“언제 왔어요?”“방금.”“노크는?”“침실 들어오는데 노크해야 합니까.”“오늘부터 해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이 이미 서윤에게 향해 있었다.정확히는 자신이 입던 흰 셔츠를 입고 있는 서윤에게.서윤은 괜히 소매를 당겼다.“왜 그렇게 봐요.”“입어봤습니까.”“사이즈 확인.”“《사이》도 아직 완성 안 됐는데?”“미리 확인하는 거죠.”도현이 천천히 가까이 왔다.서윤은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어때요?”“좋습니다.”“그게 끝?”“생각했던 것보다.”도현이 말을 멈췄다.서윤이 눈썹을 올렸다.“보다?”“좋습니다.”서윤이 웃었다.“구체적으로 말해봐요.”“소매가 긴 것도.”도현이 손을 들어 서윤의 손등을 덮은 소매 끝을 만졌다.“당신 옷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보이는 것도.”손끝이 셔츠 깃으로 올라왔다.“그리고.”도현의 시선이 열려 있는 단추 근처에서 잠깐 멈췄다.“여기까지.”서윤은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봤다.“이거 일부러 이렇게 한 거 아니에요.”“아무 말 안 했습니다.”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서윤은 눈을 감지 않았다.도현도 마찬가지였다.서로의 눈을 바라본 채 거리가 줄어들었다.입술이 닿았다.한 번.짧게 떨어졌다가 다시.이번에는 도현의 손이 서윤의 목 뒤를 감쌌다.서윤은 그의 셔츠 앞자락을 잡아당겼다.몸이 가까워졌다.키스가 길어지면서 결국 서윤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도현이 먼저 입술을 떼었다.서윤이 바로 눈을 떴다.“왜 멈춰요.”“눈 보고 싶다면서요.”“그래서?”“감았습니다.”서윤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 웃었다.“키스하는데 어떻게 계속 봐요.”“아까는 끝까지 보겠다는 얼굴이었습니다.”“그건 하기 전이고.”서윤이 다시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지금은 그냥 해요.”이번에는 도현이 웃었다.“알겠습니다.”다시 입술이 겹쳤다.조금 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누가 먼저인지,얼마나 오래 할지,그다음에는 무엇을 할지.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서윤은 입술이 떨어진 뒤 도현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근데 어제 그거.”“뭘 말입니까.”“리본.”도현의 손이 서윤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네.”“생각보다 좋았어요.”“제가 눈을 가린 게?”“응.”서윤이 고개를 들었다.“도현 씨는 맨날 나를 보잖아요.”표정을 살피고.움직임을 보고.자신이 괜찮은지 먼저 알아차리려 했다.그런데 어제는 달랐다.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로 자신의 손을 기다렸다.“도현 씨가 나한테 맡기고 있는 느낌이었어요.”도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그게 좋았습니까.”“응.”서윤은 망설이지 않았다.“많이.”도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서윤이 손을 올려 그의 뺨을 만졌다.“왜요.”“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왜?”“제가 아무것도 못 보는 상태였으니까.”“그러니까.”서윤은 그의 턱선을 손끝으로 쓸었다.“그런데도 나한테 맡겼잖아요.”도현의 손이 서윤의 손목을 감쌌다.세게 잡지는 않았다.그대로 뺨에 붙여두었다.“당신이니까.”짧은 말이었다.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요일 밤.서윤은 침실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풀다가 손목에 걸려 있던 얇은 리본을 내려다봤다.낮에 포장 상자에 묶여 있던 것이었다.검은색도 아니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짙은 남색.부드럽고 폭이 넓었다.서윤은 잠시 그것을 만지작거렸다.그러다 침대에 앉아 책을 보던 도현을 돌아봤다.“도현 씨.”“네.”“나 갑자기 해보고 싶은 거 생겼어요.”도현이 책을 덮었다.“뭡니까.”서윤은 리본을 손가락에 걸고 흔들었다.도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그건 어디서 났습니까.”“택배 상자.”“그런데요.”서윤은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눈 감아봐요.”“왜요.”“일단.”도현이 서윤을 바라보다 순순히 눈을 감았다.서윤은 잠깐 고민했다.그리고 리본을 그의 눈에 대봤다.아직 묶지는 않았다.“이거 해도 돼요?”도현이 바로 알아차렸다.“눈을 가리려고?”“응.”“당신이?”“오늘은.”잠깐의 침묵 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서윤은 그의 뒤로 돌아갔다.리본을 느슨하게 묶었다.“보여요?”“아니요.”서윤은 도현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반응이 없었다.이상했다.늘 자신을 바라보던 눈이 보이지 않으니 같은 사람인데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도현 씨.”“네.”“진짜 안 보여요?”“안 보입니다.”서윤이 웃었다.“왜 웃습니까.”“그냥.”서윤은 그의 앞에 섰다.손끝으로 뺨을 만졌다.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이번에는 턱선.목.어깨.서윤의 손이 닿는 방향을 따라 도현의 고개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게 재미있었다.“어때요?”“생각보다 신경 쓰입니다.”“뭐가.”“당신이 어디에 있는지.”서윤은 일부러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지금은?”도현이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왼쪽.”“맞았어요.”서윤은 다시 반대편으로 움직였다.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도현의 오른쪽 뺨에 입을 맞췄다.도현의 손가락이 순간 움찔했다.서윤이 바로 봤다.“놀랐죠.”“조금.”“좋아
토요일 오후 두 시.서윤은 거실 바닥에 앉아 택배 상자를 뜯다가 손을 멈췄다.상자 안에는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가 들어 있었다.도현이 주문한 것이었다.“이건 뭐예요?”책장에서 책을 정리하던 도현이 돌아봤다.“《사이》에 둘 겁니다.”“스피커?”“음악 듣고 싶다고 했잖습니까.”서윤은 포장을 벗겨냈다.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스피커였다.“벌써 사요? 아직 방도 없는데.”“미리 써보고 별로면 바꾸려고 합니다.”“철저하네.”서윤은 전원을 켰다.휴대폰과 연결한 뒤 평소 듣던 재생목록을 틀었다.잔잔한 음악이 거실에 퍼졌다.생각보다 소리가 좋았다.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합격.”“빠릅니다.”“좋은데 뭘 더 봐요.”서윤은 그대로 러그에 누웠다.천장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도현은 다시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몇 분쯤 지났을까.서윤이 손을 들었다.“도현 씨.”“네.”“여기 와요.”“왜요.”“그냥.”도현이 다가왔다.서윤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누워봐요.”“여기에?”“응.”도현이 러그에 누웠다.둘이 나란히 천장을 바라봤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악만 흘렀다.한 곡.두 곡.세 번째 곡이 시작될 때 서윤이 옆으로 손을 움직였다.손등끼리 닿았다.도현이 손을 뒤집었다.서윤의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그 사이로 들어갔다.“이것도 《사이》에서 하고 싶어요.”“바닥에 눕는 것?”“응.”서윤은 눈을 감았다.“아무것도 안 하고.”“정말 아무것도?”서윤이 눈을 떴다.“왜요. 못 믿겠어요?”“최근의 당신을 생각하면 조금.”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진짜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있거든요?”“알겠습니다.”“책만 읽을 수도 있고.”“네.”“낮잠 잘 수도 있고.”“네.”서윤이 고개를 돌렸다.도현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근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좀 어렵긴 하겠다.”“뭐가.”“아무것도 안 하는 거.”도현이 웃었다.서윤도 따라 웃었다.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입을 맞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