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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Auteur: 에이르

1화. 첫 번째 명령

Auteur: 에이르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8-04 21:44:42

1화. 첫 번째 명령

통장 잔액은 38만 7천 원이었다.

이번 달 월세는 65만 원.

밀린 카드값까지 생각하면, 당장 필요한 돈은 최소 오백만 원이었다.

나는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한숨을 삼켰다.

다시 켜 봐도 숫자가 달라질 리 없었다.

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면접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들어오시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호텔도, 회사도 아닌 단독주택이 서 있었다.

높은 담장과 검은 대문.

주소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싶어 공고를 다시 확인했다.

[고액 단기 계약직 구인]

[근무 기간 협의]

[비밀 유지 필수]

[급여 선지급 가능]

업무 내용은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 공고를 믿고 여기까지 찾아온 나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백만 원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한서윤 씨?”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나를 내려다봤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단정하게 넘긴 검은 머리와 차갑게 가라앉은 눈.

사진도 없었던 채용 공고와 달리, 남자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네.”

“들어오세요.”

남자는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옆으로 비켜 길을 내주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정리된 거실과 검은색 가구들.

생활감은 거의 없었다.

나는 소파 가장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맞은편에 앉아 얇은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공고 내용은 확인했습니까?”

“네. 그런데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안 적혀 있던데요.”

“적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내 손끝이 살짝 굳었다.

남자는 내 표정을 확인하듯 잠시 바라봤다.

“불법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계약서를 읽고 결정하면 되니까.”

그가 서류철을 내 쪽으로 밀었다.

표지에는 단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계약서]

첫 장을 넘기자 가장 먼저 금액이 보였다.

계약금 오백만 원.

남자는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정확한 금액을 제시했다.

“제 계좌라도 조사했어요?”

“지원서에 희망 금액을 적었잖습니까.”

그제야 기억났다.

얼마가 필요하냐는 항목에 솔직히 오백만 원이라고 적었다.

나는 다음 조항을 읽었다.

[갑은 을에게 총 열두 번의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을은 모든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거부에 따른 불이익은 없다.]

[세이프워드를 말하는 즉시 모든 행위는 중단된다.]

시선이 멈췄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적힌 그대로입니다.”

“명령이라니요?”

“계약 기간 동안 내가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면 됩니다.”

“무슨 지시인데요?”

“그건 미리 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럼 뭐든 시킬 수 있다는 거잖아요.”

“아니요.”

남자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싫으면 거절하면 됩니다.”

“그렇게 쉽게요?”

“거절한 명령은 횟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나는 다시 계약서를 봤다.

이상했다.

오백만 원이라는 큰돈.

열두 번의 명령.

언제든 거부할 수 있다는 조건.

남자에게 불리한 계약처럼 보였다.

“왜 저예요?”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아주 조금 변했다.

“내가 찾던 조건에 맞았으니까.”

“무슨 조건인데요?”

“빚은 있지만, 아무 일이나 할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은 사람.”

“지금 여기 온 것부터 무모한 것 같은데요.”

“아직 도망가지 않은 걸 보면 그렇기도 하군요.”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나는 다시 계약서를 넘겼다.

접촉에 관한 조항.

신체적 행위는 사전 동의가 있어야 한다.

동의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다.

모든 기록은 계약 종료와 동시에 폐기한다.

마지막 장에는 빈칸이 있었다.

[세이프워드: ______]

“제가 정하는 거예요?”

“네.”

나는 펜을 들었다.

무슨 단어가 좋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빨간불.”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이유는?”

“멈추라는 뜻이 확실하니까요.”

“좋습니다.”

나는 빈칸에 ‘빨간불’이라고 적었다.

그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서명란이 보였다.

“계약하면 바로 오백만 원을 주는 거예요?”

“서명과 동시에 입금됩니다.”

“제가 첫 번째 명령도 하기 전에 도망가면요?”

“위약금 조항을 읽어보세요.”

역시 그렇게 허술한 계약은 아니었다.

계약금을 받은 뒤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으면 두 배를 배상해야 했다.

나는 한참 동안 펜을 쥐고 있었다.

이 계약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살기에는 이미 돈이 너무 부족했다.

결국 나는 서명했다.

한서윤.

남자는 계약서를 받아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차도현.

그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5,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

나는 화면 속 숫자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숨이 조금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첫 번째 명령은 언제예요?”

차도현은 등받이에 기대어 나를 바라봤다.

차분한 눈이었다.

나를 시험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나는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세요.”

명령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말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내 앞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테이블을 돌아 그의 앞에 섰다.

차도현은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무릎 꿇어요.”

숨이 멎었다.

그의 첫 번째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있었다.

세이프워드를 말해도 됐다.

그런데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싫습니까?”

“……아니요.”

“그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몸을 붙잡았다.

“무릎 꿇어요, 한서윤 씨.”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차가운 바닥이 피부에 닿았다.

차도현은 손을 뻗지 않았다.

나를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얼굴이 뜨거워졌다.

“잘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 계약에서 정말 위험한 건 그의 명령이 아니었다.

그 명령을 따르고 싶어지는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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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56화. 사라진 아침

    그 정도면 충분했다.내가 없는 회의를 견디는 동안 도현은 옆에 있었고, 아무것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그런데 며칠 뒤.이번에는 내가 반대쪽 자리에 서게 됐다.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도현이 없었다.처음에는 평소처럼 먼저 일어났겠거니 했다.욕실을 봤다.없었다.거실.없었다.주방에도 커피만 남아 있었다.침실로 돌아와 협탁을 확인했다.메모도 없었다.휴대전화도 보이지 않았다.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연결음.한 번.두 번.세 번.받지 않았다.다시 걸었다.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별일 아닐 수도 있었다.회의가 일찍 잡혔을 수도 있고.아래층에 잠깐 내려갔을 수도 있었다.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먼저 올라왔다.나는 메신저를 열었다.[어디예요?]보냈다.읽지 않았다.[도현 씨.]하나 더.여전히 반응이 없었다.아침 일곱 시 십이 분.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시간인데, 사람이 없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집 안이 지나치게 조용하게 느껴졌다.나는 현관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신발은 운동화 한 켤레가 없었다.“운동 갔나?”혼잣말로 추측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휴대전화까지 안 받으니 더 신경 쓰였다.예전 도현이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 왜 그렇게 불안해했는지 아주 조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그렇다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십 분쯤 지나 휴대전화가 울렸다.메시지였다.[지하 헬스장. 휴대전화 두고 나옴.]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안도감보다 화가 먼저 올라왔다.[알겠어요.]딱 그렇게만 보냈다.그런데 전송하자마자 더 화가 났다.왜 말 안 했지?왜 휴대전화를 놓고 갔지?왜 하필 오늘?머릿속에서 질문이 계속 생겼다.삼십 분 뒤 현관문이 열렸다.도현이 운동복 차림으로 들어왔다.목에 수건을 걸고 있었다.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멈췄다.“일찍 일어났군요.”나는 팔짱을 꼈다.“왜 말 안 했어요?”도현이 바로 상황을 알아챘다.“운동 간 것?”“네.”“한 시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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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님.”그 한마디 뒤에는 더 이상 질투가 없었다.욕망만 남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침.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도현은 먼저 일어난 모양이었다.침대 옆에는 물 한 잔과 짧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아침 회의 8시. 더 자도 됩니다.]나는 메모를 한참 보다가 웃었다.어젯밤 그렇게 사람을 붙잡아 놓고 아침에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의하러 간 사람.정말 차도현다웠다.샤워를 하고 거실로 나오자 도현은 이미 영상회의를 끝내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일찍 끝났어요?”“네.”“왜 안 깨웠어요?”“잘 자고 있었습니다.”“오늘 저도 중요한 회의 있는데.”도현이 시계를 확인했다.“오후 두 시.”“알고 있네.”“당신 일정이니까.”나는 식탁에 앉으며 커피잔을 가져갔다.“근데 오늘은 저 안 들어가요.”도현이 바로 알아들었다.“총괄 없는 회의.”“응.”한 달 전부터 준비한 실험이었다.유럽 총괄실은 새로운 운영 방식을 하나 시험하기로 했다.한 달에 한 번.정확히 두 시간 동안.내가 없는 상태에서 도시 대표들과 부대표, 재무·운영 책임자들이 핵심 안건을 결정하는 회의.이름 그대로였다.[총괄 없는 회의.]처음 카렐이 제안했다.“총괄님이 없는 상태에서도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당시 나는 바로 물었다.“제가 왜 없어야 하죠?”“총괄님이 있으면 사람들이 결국 총괄님 표정을 봅니다.”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내가 압박한다는 뜻이에요?”“직접 압박하지 않아도 그렇습니다.”“왜요?”“최종 책임자니까요.”한예린도 카렐 의견에 동의했다.“실제로 총괄님이 회의에 있으면 마지막 판단을 기다리는 경향이 있어요.”“제가 바로 결정해 달라고 한 적 없는데.”“안 하셔도 기다립니다.”그 말을 듣고 나니 반박하기 어려웠다.사람들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확인했다.내가 고개를 끄덕이는지.메모를 하는지.눈썹이 올라가는지.특히 의견이 갈릴수록 더했다.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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