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차도현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잘했습니다.” 고작 그 한마디였다. 그런데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침대에 누운 뒤에도 계속 생각났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미쳤어. 돈이 필요해서 계약했을 뿐이다. 열두 번의 명령만 끝나면 다시는 만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오후 11시 48분. 도현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기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화면을 몇 번이나 켰다 껐다 했다. 그러다 문득 계약서에 적힌 숫자가 떠올랐다. 1/12. 이제 열한 번 남았다.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허전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점심때도, 오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괜히 알림 설정까지 확인했다. 소리도 켜져 있었고, 차단된 번호도 없었다. “뭘 기다리는 거야.” 혼잣말하며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나는 급히 화면을 켰다. [차도현]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오늘 밤 10시.] [두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짧은 메시지였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17분. 아직 다섯 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요?] 곧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어디에도 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 시간에 내 전화를 받으세요.] 그게 끝이었다. 두 번째 명령이 전화받는 거라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첫 번째처럼 또 무언가 대단한 걸 시킬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오히려 더 긴장됐다. 내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 9시 50분. 나는 침대 위에 앉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평소라면 대충 입고 있었을 텐데, 괜히 샤워까지 하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전화인데도. 그가 볼 수도 없는데도. 9시 58분. 9시 59분. 시간이 바뀌는 순간, 화면에 차도현의 이름이 떠올랐다. 나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한서윤 씨.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보다 가까이 느껴졌다. “네.” —지금 혼자입니까? “네. 집이에요.”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세요.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은 이미 닫혀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잠금장치를 걸었다. 철컥. 작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잠갔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부터 두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긴장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창문 커튼을 닫으세요.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완전히 닫자 방 안이 어두워졌다. “닫았어요.” —조명은 하나만 남기고 모두 끄세요. 침대 옆 작은 스탠드만 남겼다. 은은한 빛 아래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다음은요?” —재촉하지 마세요. 단호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지금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그의 지시를 기다리게 됐다. —거울 앞에 서세요. 방 한쪽에 있는 전신거울 앞으로 이동했다. 거울 속에는 긴장한 얼굴의 여자가 서 있었다. “섰어요.” —자신을 보세요. “보고 있어요.” —지금 어떤 표정입니까?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거울 속 얼굴을 살폈다. “긴장한 것 같아요.” —또요? “조금…… 궁금해하는 것 같고요.” —무엇이 궁금합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무엇을 시킬지. 어디까지 내가 따르게 될지. 그리고 왜 그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말하기 싫어요.” —좋습니다. 그것도 솔직한 대답이니까. 의외로 쉽게 넘어갔다. —눈을 감으세요.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사라지자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더 선명해졌다. —이제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네.” —어제 무릎을 꿇은 게 싫었습니까? 숨을 멈췄다. 어제부터 외면하고 있던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싫었어요.” —그다음에는? “모르겠어요.” —모른다는 말로 피하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나쁘지 않았어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왜 나쁘지 않았습니까? “그걸 꼭 말해야 해요?” —거부해도 됩니다.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오히려 도망가기 어려워졌다. 정말 싫었다면 끊으면 됐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목소리가 작아졌다. “잘했다고 말해줘서요.” 통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혹시 그가 웃고 있을까. 내 말을 우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눈을 뜨세요.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예상보다 훨씬 붉어져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똑바로 보세요. 도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말하세요. “뭐라고요?” —나는 명령받는 것이 싫지 않다고. 입술이 굳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까? 부정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던 순간. 그가 내 손목을 잡았던 감각.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그의 연락을 기다렸던 나. “사실이에요.” —정확히 말하세요. 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봤다.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었다. “나는…… 명령받는 게 싫지 않아요.”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 “명령받는 게 싫지 않아요.” —누구에게? 심장이 세게 뛰었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인님에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온몸이 달아올랐다. 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반응을 기다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잘했습니다. 또 그 말이었다. 그 한마디만으로 가슴이 이상하게 조여 왔다. —두 번째 명령은 여기까지입니다. “이게 끝이에요?” 아쉬움이 너무 노골적으로 묻어나왔다. 도현이 낮게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더 원했습니까? “아니에요.” —거짓말이군요. “질문에 꼭 다 대답할 필요는 없다면서요.” —배운 건 기억하고 있군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오늘은 푹 쉬세요. “다음 명령은 언제인데요?” 또다시 질문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는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기다립니까? “계약 일정이 궁금한 것뿐이에요.” —그렇게 해두죠.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동안 검게 변한 화면을 내려다봤다. 잠시 뒤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진 한 장이었다. 계약서 오른쪽 위에 새로운 숫자가 적혀 있었다. 2/12. 그 아래 짧은 문장이 따라왔다. [이제 열 번 남았습니다.] 나는 그 숫자를 한참 바라봤다. 열 번이나 남았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열 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현관문이 열리자 익숙한 공기가 먼저 느껴졌다.서윤은 신발을 벗고 여행 가방을 안으로 밀었다.“아.”도현이 뒤에서 들어오며 물었다.“왜요?”서윤은 대답하지 않고 거실을 한번 둘러봤다.며칠밖에 비우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반가웠다.식탁 위에는 떠나기 전 꽂아둔 꽃병이 있었고, 벽에는 아직 액자를 기다리는 사진들이 있었다.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찬장 안의 머그 두 개도 보였다.“그냥.”서윤이 웃었다.“집이다.”도현이 현관문을 닫았다.“여행 가서도 집에 오고 싶다더니.”“막상 오니까 더 좋아.”“강릉보다?”“그건 비교하면 안 되지.”서윤이 손을 내밀었다.“가방은 나중에 풀자.”“뭐부터 하려고요?”“엽서.”도현이 웃었다.“역시 그것부터군요.”두 사람은 여행 가방도 그대로 둔 채 식탁에 마주 앉았다.서윤은 가방 안쪽에서 엽서 두 장을 꺼냈다.자신이 도현에게 골라준 밤바다.도현이 자신에게 골라준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여행 둘째 날 서로 한 문장씩 적었던 것.서윤이 엽서를 손에 들었다.“바꿔요.”도현이 밤바다 엽서를 건넸다.서윤도 창가 엽서를 내밀었다.“같이 볼까?”“네.”두 장이 동시에 뒤집혔다.서윤은 도현이 쓴 문장을 읽었다.어디에 있어도 당신이 편하게 웃으면 그곳이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서윤의 눈이 그대로 멈췄다.한 번 읽고.다시 읽었다.“……이걸 그때 썼어요?”“네.”“벤치에서?”“네.”“나 바로 옆에 있었는데?”“그러니까 썼죠.”서윤은 엽서를 내려놓지 않았다.“이거 반칙 같은데.”“무슨 반칙입니까?”“내 건 되게 간단하단 말이야.”도현이 이미 서윤의 문장을 읽고 있었다.같이 걷다가 우연히 바다가 나온 밤.“저는 이게 좋은데요.”“너무 짧잖아.”“그래서 좋습니다.”도현이 밤바다 사진을 손끝으로 한번 쓸었다.“제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기도 하고.”서윤이 그의 엽서를 다시 봤다.“도현 씨는 왜 이렇게 길게 썼어.”“한 문장입니다.”“글자 수가 다르잖아.”“그
아침.서윤은 눈을 뜨자마자 옆을 확인했다.도현은 없었다.“……도현 씨?”대답도 없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작은 테이블 위에 휴대폰 하나만 놓여 있었다.도현의 것이었다.“어디 갔지?”욕실 문도 열려 있었다.서윤은 급하게 겉옷을 걸치고 객실 문을 열었다.그 순간.“어디 갑니까?”복도 끝에서 도현이 걸어왔다.한 손에는 종이봉투.다른 손에는 음료 두 잔이 들려 있었다.서윤이 멈췄다.“어디 갔었어요?”“아침 사러요.”“말도 안 하고?”“자고 있었습니다.”“깨우지.”“여행 마지막 날인데 더 자게 두고 싶었습니다.”도현이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어제 지나가다 봤던 빵집 열었길래 다녀왔습니다.”서윤은 그제야 봉투를 받았다.따뜻했다.“이거 내가 먹고 싶다고 했던 거?”“네.”“기억했어?”“당신이 가게 앞에서 세 번 봤습니다.”“세 번이나?”“네.”서윤이 웃었다.“들어와요.”둘은 창가에 앉아 늦은 아침을 먹었다.바다가 조금 보였다.서윤은 빵을 뜯다가 갑자기 말했다.“오늘 집 간다.”“네.”“진짜 빠르다.”“어제도 같은 말 했습니다.”“오늘은 느낌이 다르잖아.”서윤은 마지막 빵 조각을 도현 쪽으로 밀었다.“먹어요.”“당신 먹으십시오.”“배불러.”“아까 맛있다고 했잖습니까.”“맛있는 거랑 배부른 건 별개야.”결국 도현이 받아먹었다.서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괜히 웃었다.“왜 봅니까?”“그냥.”“사진?”“아니.”이번에는 정말 아니었다.서윤의 한 장은 이미 어제 아침에 끝났으니까.오히려 궁금한 건 도현의 사진이었다.“도현 씨.”“네.”“아직 안 찍었죠?”도현이 커피를 마셨다.대답하지 않았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 표정 뭐야.”“무슨 표정입니까.”“찍었네.”“마지막에 확인하기로 했습니다.”“그러니까 지금 말고.”“체크아웃하고 나서.”“왜?”“여행 끝까지 기다리죠.”서윤은 입술을 삐죽였다.“알았어.”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출발할 때는 가지런했던 가
사진 부스를 나온 뒤에도 서윤은 몇 번이나 지갑을 열었다.방금 넣은 네 컷 사진이 그대로 있었다.첫 장은 둘 다 카메라를 보고 있었고.두 번째는 서윤이 도현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세 번째는 도현이 서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순간.마지막은—“또 봅니까?”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얼른 지갑을 닫았다.“아니.”“봤잖습니까.”“내 지갑인데 내가 보든 말든.”“그건 맞습니다.”도현이 웃었다.서윤은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물었다.“도현 씨 것도 줘봐.”“왜요?”“잘 넣었나 보게.”“똑같은 사진입니다.”“그래도.”도현이 지갑을 꺼내 보여줬다.사진은 카드 사이 안쪽에 들어가 있었다.서윤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거기서 빼면 안 돼요.”“언제까지요?”“계속.”“새 사진이 생겨도?”서윤이 잠시 생각했다.“그건 그때 생각하고.”“기준이 없네요.”“내 마음이 기준이야.”“가장 어려운 기준인데.”“싫어요?”“아니요.”도현은 지갑을 다시 넣었다.“따르겠습니다.”서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그 뒤로도 한참을 걸었다.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관광지를 찾아가지도 않았고 유명한 곳을 검색하지도 않았다.작은 가게를 구경하고,편의점에서 음료를 하나 사고,벤치가 보이면 잠깐 앉았다.그러다 어느 순간 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나 다리 아파.”도현이 바로 주변을 둘러봤다.“숙소 갈까요?”“응.”“택시 부르죠.”“얼마나 걸리는데?”도현이 지도를 확인했다.“걸으면 삼십 분 정도.”“택시는?”“금방입니다.”서윤이 잠깐 고민하다가 그의 팔에 매달렸다.“택시.”“걷는 건 끝?”“오늘 충분히 했어.”“파도랑 뛰기까지 했으니까요.”“그건 운동으로 치면 안 돼.”“왜요?”“재밌었으니까.”도현이 웃었다.“재미있는 운동도 있습니다.”“오늘은 없어.”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서윤은 침대에 엎어졌다.“못 움직이겠다.”도현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씻고 누우십시오.”“조금만 있다가.”“
“진짜 하나도 힌트 안 줄 거예요?”“네.”도현의 대답은 여전히 단호했다.서윤은 결국 그의 손을 놓았다.“됐어. 나도 이제 관심 없어.”“정말입니까?”“응.”“그럼 다행이고요.”서윤이 바로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근데 이미 찍은 건 맞아요?”도현이 웃음을 터뜨렸다.“서윤.”“왜.”“관심 없다면서요.”“그건 방금 전의 나고.”“십 초도 안 됐습니다.”“사람 마음은 변하는 거야.”도현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서윤의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둘은 그렇게 골목 끝까지 걸었다.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던 길이었다.그러다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었다.서윤이 머리카락을 붙잡았다.“아, 잠깐.”도현이 웃었다.“오늘도 머리가 난리네요.”“강릉이 나한테 왜 이래.”“바닷가니까요.”“도현 씨는 멀쩡하잖아.”“짧으니까 그렇죠.”서윤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아 잡고 주변을 둘러봤다.그때 멀리 작은 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큰길에서 옆으로 빠지는 좁은 길이었다.“저기로 갈래요?”“저기요?”“응.”“뭐 있는지 압니까?”“몰라.”서윤이 먼저 방향을 틀었다.“그래서 가보는 거야.”도현도 따라왔다.“오늘 여행 방식에 완전히 적응했네요.”“그러게.”좁은 길을 따라 몇 분쯤 걸었을 때였다.먼저 들린 건 소리였다.파도.서윤이 걸음을 멈췄다.“또 바다야?”길 끝으로 내려가자 작은 해변이 나타났다.아까 지나온 곳보다 사람이 훨씬 적었다.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여기 좋다.”이번에도 검색해서 찾은 곳은 아니었다.그냥 길이 보여서 들어왔고,그 끝에 바다가 있었다.“오늘은 바다가 자꾸 나오네.”서윤이 말했다.“우리가 바다 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까요.”“그렇게 현실적으로 말하지 마.”도현이 웃었다.둘은 모래 위로 내려갔다.서윤은 이번에는 파도 가까이까지 갔다.물이 밀려오자 뒤로 물러났다.다시 다가가고.또 피했다.도현은 조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도현 씨도 와요.”“신발 젖습니다.”
서윤이 눈을 떴을 때는 방 안이 꽤 밝았다.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침대 끝까지 길게 번져 있었다.그녀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어젯밤 뒤집어둔 휴대폰도 그대로였다.도현의 팔은 자신의 허리 위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진짜 자네.”평소라면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있을 사람이었다.서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도현을 구경했다.평소보다 흐트러진 머리.힘이 완전히 빠진 얼굴.이불 밖으로 조금 나온 손.그 순간 어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서로 몰래 한 장씩 찍기.서윤의 시선이 협탁으로 향했다.휴대폰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고민했다.바다를 보는 도현.젖은 머리로 침대에 앉아 있던 도현.밤길을 걷던 도현.그때마다 조금 더 기다렸다.그런데 지금은—서윤이 아주 천천히 휴대폰을 집었다.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켰다.화면 안에 도현이 들어왔다.잠든 얼굴만 찍으려다 조금 뒤로 물렸다.흐트러진 이불.베개.침대 옆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사람의 슬리퍼.그리고 잠든 도현.서윤은 한참 화면을 바라봤다.찰칵.단 한 장.곧바로 휴대폰을 뒤집었다.“됐다.”괜히 심장이 빨리 뛰었다.도현이 눈을 뜰까 봐 가만히 있었는데—“찍었습니까?”낮은 목소리가 들렸다.서윤이 굳었다.“……자고 있었잖아.”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방금 깼습니다.”“봤어요?”“뭘요.”“내가 찍는 거.”“확실히는 못 봤습니다.”서윤이 경계하듯 휴대폰을 끌어안았다.“그럼 모르는 거야.”“알겠습니다.”“그리고 보여달라고 하면 안 돼.”“마지막 날까지.”“응.”도현이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서윤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왜 웃어요.”“당신이 드디어 한 장 쓴 것 같아서요.”“모른다니까.”“네. 모릅니다.”“진짜 얄미워.”말은 그렇게 하면서 서윤은 웃고 있었다.자신의 한 장은 끝났다.이제 남은 건 도현이었다.시간을
도현의 머리가 거의 마를 때까지 서윤은 수건을 놓지 않았다.“됐어.”수건을 치우자 헝클어진 머리가 드러났다.서윤이 손끝으로 앞머리를 정리했다.“이제 사람 같다.”“그전에는 뭐였습니까.”“물에 빠진 사람.”“바다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요.”“비유잖아.”도현이 서윤의 손목을 잡았다.“이제 당신 차례 아닙니까?”“뭐가?”“샤워.”“아.”서윤은 욕실 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도현을 봤다.“나 씻고 나오면 뭐 할 거예요?”“기다려야죠.”“그냥?”“뭘 원합니까?”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건 내가 씻고 나와서 생각할래.”그녀가 손목을 빼내려 하자 도현이 바로 놓아주었다.서윤은 몇 걸음 가다가 돌아봤다.“자면 안 돼요.”“안 잡니다.”“진짜.”“기다리겠습니다.”그제야 서윤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윤은 편한 얇은 잠옷 차림이었다.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도현은 침대 헤드에 기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서윤이 나오자 바로 화면을 껐다.“뭐 봤어요?”“내일 날씨.”“계획 세운 거 아니죠?”“비가 오는지만 봤습니다.”“와?”“안 옵니다.”“그럼 됐네.”서윤은 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다가 드라이어를 찾았다.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주세요.”“내가 할 수 있어.”“압니다.”서윤이 웃었다.“우리 오늘 이 말 몇 번 하는지 알아요?”“뭘요.”“‘할 수 있어.’ ‘압니다.’”도현도 웃었다.“그래도 주십시오.”결국 서윤은 드라이어를 넘겼다.침대 끝에 앉자 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왔다.도현의 손가락이 젖은 머리카락을 천천히 갈랐다.서윤은 눈을 감았다.“좋아.”“뭐가요.”“여행 와서 이런 거.”“집에서도 해주는데요.”“그러니까 좋은 거야.”도현이 바람을 약하게 줄였다.“아까 제가 한 말이랑 똑같네요.”“뭐?”“낯선 데서도 똑같은 거.”서윤은 대답 대신 웃었다.머리를 다 말린 뒤에도 두 사람은 바로 눕지 않았다.서윤은 창가로 갔다.밖은 완전히 어두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