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형을 제거한 이는 다름 아닌 경무제였다.그의 존재는 본디 육제 곁을 보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전시가 끝난 마당에 경무제가 굳이 그 약점을 곁에 둘 까닭이 없었다.허나 죽이더라도, 쓸모 있는 죽음이어야 했다. 누가 문제를 일으키는 자인지 드러낼 수 있다면, 설령 그가 사황자든 삼황자든, 누군가 억지로 육제에게 죄를 덮어씌운다면, 그때는 경무제가 직접 진실을 밝히고, 그 죄를 들어 벌을 내려 다른 이들의 본보기가 되게 할 작정이었다.결국, 경무제가 더욱 의심한 이는 택원이었고, 그는 그를 대리사에 가두어 사건을 철저히
경무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를 의심하는 자들 중에는, 너와 호인이 엮여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택원은 움찔하며 상처 입은 다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었다.“아바마마께서 소자를 의심하신다면, 차라리 소자를 죽이시옵소서.”“나는 너를 의심치 않는다.”경무제는 그를 부축해 일으키며, 마치 애틋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네가 저 황위를 탐하지 않는데, 어찌 호인과 관련이 있겠느냐.”하지만 이 말은 곧 그를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택원은 입술을 다물고 눈썹을 찌푸렸다.“아바
백 번 양보하더라도, 혹여나 자기가 주명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괜히 그녀를 알아보았고, 더구나 소은이 준 약방문이 심상치 않다고 의심했으니, 그 약방문이 정말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괜한 시비가 붙을 수 있었다.더구나 택문과 강준은 이추생의 눈에 한패로 비쳤다. 그는 스스로 되물었다. 주명을 구할 뜻이 없다면, 그 책임을 피하려고 과연 약방문을 내놓을까?아니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 약방문을 차방에 남겨두었을 것이다. 초면부터 감히 선왕부를 거스를 리 없고, 설령 무슨 음모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휘말릴까 두
주명은 물처럼 묽은 먹물을 꺼내어 편지를 적셨다. 그러자 감춰져 있던 글씨가 하나하나 떠올랐고, 그녀는 그 내용을 읽자 얼굴빛이 살짝 바뀌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곧 편지를 정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새로 들여온 차를 정돈하였다. 며칠 전과 다름없이, 곁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태연한 몸가짐이었다.···이추생은 차방을 나온 뒤, 약방문을 꺼내어 다시 살펴보았다. 겉모습은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육황자부로 발걸음을 옮겼다.“오늘 선왕부에 들렀다지.”택문이 흘깃
주명은 이추생이 아무 말 없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은 바짝 끌어안았다가 또 살며시 흔들며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을 터였다.그녀는 이추생이 조금 두려웠다. 그가 결코 착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적 떼에게 끌려갔을 때, 그녀를 구해준 이가 바로 그였으나, 그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품어준 것이 아니었다. 도중에도 여러 차례 그녀를 내버려 둘 생각을 했었고, 그때마다 주명이 애교를 부리며 눈물로 붙잡았기에 결국 함께 가주었을 뿐이었다.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다정해진 것은,
소은은 그 말에 담긴 뜻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약방문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그의 ‘노력’이 있어야했다. 아이를 갖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은 약이 아니라, 바로 강준이었다. 그가 정성을 들인다면, 굳이 이 약을 쓸 일도 없을 터였다.“결국 세자께 청해야 하는 일이었군요.”소은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저는 세자께서야말로 간절히 바라시는 줄만 알았습니다.”강준은 조용히 대꾸하였다.“내가 간절한 건 맞다. 말을 잘못한 게지. 정작 내가 청해야 할 건, 네가 나를 좀 더 아끼는 마음이로구나.”그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