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실에서 시첩으로? 그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정실에서 시첩으로? 그녀는 태자비가 되었다

By:  이화대왕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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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청아는 양주(揚州) 제일의 부호가 낳은 외동딸로, 평생 겪은 고난 중 가장 큰 시련은 배현진에게 속아 혼인한 것이었다. 그는 본래 조정의 육황자로 이미 가정이 있었음에도, 신분을 숨기고 서청아를 기만하여 그녀의 마음을 빼앗았다. 거짓말이 들통나자 배현진은 교묘한 말솜씨로 서청아를 달래 첩으로 삼으려 했다. "청아야, 내가 한 모든 일은 그저 너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다." "네 신분이 너무 비천하니 우선 첩으로 들어오거라. 아이를 낳고 나면, 내 반드시 기회를 봐서 부황께 청해 너를 측비로 봉해 주마." 서청아는 그저 가소롭다는 생각뿐이었고 망설임 없이 떠나려 했다. 그러나 배현진은 허락하지 않았고, 강제로 그녀를 납치해 부에 가두고는 첩으로 삼았다. 후에는 추문이 탄로 날까 두려워 그녀의 부모를 살해하고 서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가로챘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자신의 핏줄을 낳기까지 바랐다. 비통함이 극에 달한 서청아는 배현진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뱃속에 있는 원수의 핏줄을 제 손으로 지우고 부모님을 따라갔다. 다행히 하늘이 가련히 여겼는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시작할 기회를 주었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태자에게 시집가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배경을 찾았다. —— 배현진도 환생했다. 그는 서청아 또한 환생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 몰래 태자 황형에게 시집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기다리면 되니까. 단명할 팔자인 태자가 죽으면, 배현진은 서청아를 포함한 태자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터였다. 그런데 1년, 또 1년이 지나고 온갖 음모와 계략을 수없이 부려봐도 태자는 왜 죽지 않는단 말인가? 심지어 서청아의 배가 불러오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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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네가… 진정으로 태자의 액막이 신부로 시집가겠다는 것이냐?" 건덕제의 위엄 있는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서청아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폐하, 소녀 기꺼이 그리하겠사옵니다." "태자는 병약하여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남은 평생을 과부로 살아야 할지라도 원한다는 말이냐?" "원하옵니다. 부디 폐하께서 혼인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건덕제는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이유가 무엇이냐?" 서청아는 미리 준비해둔 말을 꺼내며 약간 수줍은 듯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소녀는 예전에 태자 전하를 뵌 적이 있사옵니다. 그때부터 전하를 향한 연모의 정이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사옵니다." 태자의 용모가 워낙 빼어나 대위국(大魏)에는 그와 비할 자가 없으니, 여인이 그를 연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네 마음이 가상하다만, 허나 네 신분이…" 건덕제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스쳤다. 태자는 건덕제가 가장 아끼고 총애하는 아들이었기에, 태자비 또한 마땅히 명문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규수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태자가 몹쓸 병에 걸려 궁궐의 어의들도 속수무책인 상황이었다. 아들이 이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는 민간에서 명성이 자자한 방사를 불러들였다. 방사는 태자의 안녕을 보전하려면 반드시 액막이 혼례를 치러 기운을 북돋워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황방을 붙인 후 궁으로 찾아온 여인들 중 서청아의 사주가 유일하게 일치했다. 성은 서씨고, 양주 출신으로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하는 상단 가문이었다. 허나 그녀의 신분이 확실한지, 가문이 깨끗한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양주에서 경성(京城)까지는 말을 타고 전력 질주해도 왕복 한 달 반이 걸리는 거리였고, 태자에게는… 그만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건덕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알겠다. 태자를 향한 네 정성이 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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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현재의 태자는 수년째 병석에 누워 있어 곧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운 처지였다. 건덕제는 방사의 말을 믿고, 전국에 황방을 붙여 태자의 액막이가 되어줄 여인을 찾았는데, 사주만 맞으면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든 동궁에 들어가 태자비가 될 수 있었다. 이 일은 전생에도 일어났던 일이었다. 다만 그때 그녀는 이미 연왕부에 감금된 상태였기에, 감시하는 몸종의 입을 통해서 겨우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몸종은 황방에 적힌 생년월일시가 그녀의 사주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고 했다. 또한 육혜수가 배현진에게 서청아를 태자부에 액막이 신부로 보내 건덕제의 환심을 사자고 제안했지만, 배현진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환생한 후, 서청아는 태자에게 시집가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배현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배현진은 황실의 귀한 혈통인 데다 생모 또한 총애받는 귀비였지만, 서씨 가문은 일개 상인 가문에 불과했다. 그러니 배현진을 상대하는 것은 마치 하루살이가 거대한 나무를 뒤흔드려는 것과 같았다. 만약 혼자였다면 세상 끝 어디든 숨을 곳이 없겠느냐마는, 서청아에게는 부모님이 계셨다. 태자에게 시집가는 것만이 그녀가 숨을 돌릴 유일한 방법이었다. 설령 태자가 정말 병으로 죽는다 해도, 건덕제가 살아 있는 한 배현진은 함부로 그녀를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그렇게 시간을 벌며 차근차근 미래를 계획하면 되는 일이었다. "아가씨, 만약 폐하께서 아가씨가 이전에 양주에서 혼인했던 사실을 알아내시면 어떡합니까?" 설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혼례를 치르지도 않았고 혼서도 가짜라지만, 그래도 노비는 걱정됩니다." 서청아는 이미 진작부터 이런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두었다. 태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황제를 기만하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그녀에게 더 좋은 방책은 없었다. "그저 상황을 보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서청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일이 터지면 그저 누군가에게 속아 혼인했던 것이라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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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서청아는 평정심을 되찾고는 수줍은 척하며 그를 밀어냈다. "서방님, 오늘 밤은 안 됩니다. 제가… 월경을 시작했거든요." 배현진은 동작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월경? 네 월경은 매달 초가 아니었느냐?" "2년이나 지났는데 서방님께서는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군요." 서청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매달 말쯤에 합니다." "그렇군." 배현진은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마음속의 요동을 억누르며 서청아를 품에 안고 말했다. "내일 남쪽으로 장사를 하러 가야 한다. 아마 다음 달 말이나 되어야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예상대로였다. 전생에서도 배현진은 이 시기에 경성을 떠났었다. 서청아는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는 아쉬운 척 연기했다. "그렇게 오래 가십니까? 보고 싶을 겁니다." "나도 보고 싶을 것 같구나." 배현진은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두어 번 더 만지작거렸다. "집을 지킬 하인들을 더 구해 두라고 집사에게 일러두었다. 외출할 때면 하인들이 따라붙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서청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보호는 무슨, 명백한 감시지. 전생처럼 내가 육혜수에게 발견되어 진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겠지.' 그녀는 겉으로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배현진은 서청아의 아리따운 얼굴을 보자 더욱 마음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그녀를 꽉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돌아오면 반드시 네게 잘 보답해주마. 우리도 어서 아이를 가져야지." 서청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내면의 혐오감을 억눌렀다. 이른 아침, 배현진은 길을 떠날 채비를 마쳤고, 서청아는 직접 문 앞까지 배웅을 나갔다. 아침 햇살 속에 서 있는 그녀는 연분홍색 옷차림에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희고 눈매는 부드러웠으며,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배현진은 마차의 휘장을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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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육혜수는 마차 벽에 몸을 기댄 채, 소맷단의 자수를 손끝으로 천천히 매만졌고,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배현진이 외실을 두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난 몇 년간 왕부에는 측비도, 첩도 없었기에 육혜수는 배현진이 자신에게만 지극정성인 줄로만 알았다. 게다가 배현진은 거의 매일 밤 그녀의 방에 머물며 금슬 좋게 지냈으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그는 그녀의 몸에 손도 대지 않을 뿐더러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했다. 혹여 그녀의 분내라도 몸에 배면 즉시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밤이면 행방이 묘연해지는 일이 잦아졌다.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육혜수가 사람을 시켜 배현진 곁의 시종을 매수했고, 그제야 그가 2년 전 양주에서 한 상인의 딸을 만나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여인이 경성까지 배현진을 찾아왔고, 그는 아내인 육혜수가 알까 두려워 일부러 별채까지 마련해 여인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어쩐지 2년 전부터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배현진은 매번 비단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렸고, 절정에 달해 흥분할 때면 그녀를 ‘청아야’라고 부르더라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육혜수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애칭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을 대역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육혜수는 손수건을 꽉 쥐었고, 눈에서는 질투심이 터져 나올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녀가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 제가 보기에 왕야께서는 그 상인 놈의 딸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신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대놓고 불러 데려와 첩으로 삼지 않고 저토록 꽁꽁 숨기셨겠습니까? 아마도 그 여자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렸다가 폐하께 청해 측비로 삼으려 하시는 모양입니다!" 그 말은 육혜수의 심장에 바늘처럼 박혔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자국이 남았다. 누군가 연왕의 총애를 가로채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천한 상인의 딸이라니! 서청아는 추월을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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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원래 건덕제는 배현진에게 강남으로 가서 조운 업무를 감독하라고 명하며 한 달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으나, 일 처리가 영민한 배현진은 예정보다 일찍 임무를 완수했다. 마음만 먹으면 강남에 며칠 더 머물며 경치도 구경하고 여유를 부릴 법도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배현진은 마음 한구석이 줄곧 불안했고, 마치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일을 마치자마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수하들을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갔다. 경성 거리에 들어선 마차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렸고, 배현진은 차분히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배현진의 가장 유능한 호위무사인 도람이 마차의 휘장을 걷어 올리고 몸을 굽히며 물었다. "왕야, 이미 경성에 도착했습니다. 배씨 저택으로 먼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왕부로 가시겠습니까?" 배현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배씨 저택으로 먼저 가고 싶었다. 떠나 있는 동안 내내 서청아가 눈에 밟혀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태자의 혼례날이었고, 황자로서 마땅히 동궁에 가서 축하하고 연회에 참석해야 했기에, 배씨 저택에 먼저 들렀다가는 자칫 시간을 지체할까 우려되었다. "왕부로 먼저 가자꾸나." 배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동궁으로 갈 것이다." 도람이 대답하고 휘장을 내린 뒤, 마부에게 속도를 높이라고 지시했고 마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달렸다. 골목 두어 개를 지났을 때쯤, 앞에서 갑자기 흥겨운 풍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배현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짜증스러운 듯 휘장을 살짝 걷어 올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성대한 혼례 행렬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고, 붉은 혼례 가마가 유독 눈에 띄었다. 가마꾼들은 보폭을 맞춰 가마를 메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시위와 어멈, 노비들이 따랐으며 풍악을 울리는 악사들까지 가세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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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관원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 멍하니 있다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게… 설하와 추월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배현진은 머릿속이 웅웅거리더니 청천벽력이 내리친 듯했다. '태자비 곁에 있는 몸종들의 이름이 서청아의 아이들과 똑같다니. 세상에 어찌 이리도 기막힌 우연이 있단 말인가?' 배현진의 뇌리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태자의 액막이 신부로 시집간 이가 정말 서청아란 말인가!' 그 생각이 들자 배현진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고, 안색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본왕에게 급히 처리해야 할 용무가 생각나서 이만 가보도록 하마."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는데, 걸음걸이가 어찌나 빠르고 급한지 바람을 일으킬 정도였다. "여섯째 형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칠황자가 급히 그를 불렀지만 배현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랑 끝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배현진의 마차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배씨 저택으로 달려갔다. 대청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마중 나온 집사의 멱살을 움켜쥐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청아는 어디 있느냐?" 집사는 그의 눈에 서린 살기에 다리가 풀려 '퍽'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빌었다. "전하, 부인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사람을 시켜 사방으로 찾고 있으나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죽여주십시오, 전하!" 배현진은 집사를 내팽개치고 곧장 서청아의 별채로 달려갔고, 방문을 거칠게 열었으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탁자 위의 찻잔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책장에 꽂혀 있던 책 몇 권도 사라졌으며, 그녀가 양주에서 가져온 짐들도 모조리 사라진 상태였다! "서청아." 배현진은 주먹을 꽉 쥔 나머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가슴 속 분노가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모든 단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자에게 시집간 여인이 바로 서청아라는 사실을! '아니, 그럴 리 없어.' 설령 그렇다 해도 배현진은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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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새벽빛이 조각된 창살 사이로 스며들어 동궁 침전 바닥에 잘게 부서지는 빛줄기를 드리웠다. 서청아가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배연우는 어젯밤 잠든 모습 그대로 얕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전각 밖을 향해 나직이 불렀다. 전각 문이 열리고, 청록색 궁중 복장을 한 여관이 설하와 추월, 그리고 몇 명의 궁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세면도구와 새 옷, 장신구가 들려 있었고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서청아의 몸단장을 도왔다. 곁에 서 있던 여관의 이름은 성유주였다. 그녀가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자비 마마께서도 이미 들으셨겠지만, 전하께서는 기이한 병을 앓고 계셔서 낮에는 주로 혼수상태이십니다. 하여 폐하와 황후 마마를 뵙는 자리에 동행하시기 어렵습니다." "허나 전하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해두셨으니, 오늘은 소인이 태자비 마마를 모시고 가겠습니다. 소인이 곁에 있을 터이니 마마께서는 부디 안심하십시오." 성유주는 궁궐 생활을 오래 한 베테랑이었다. 각종 의례와 규칙을 훤히 꿰고 있는 그녀와 동행한다면, 최소한 예법에 어긋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서청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해주시게." 반 시진 후, 몸단장이 끝났다. 서청아는 석류빛 궁중 복장을 갖춰 입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부인네의 머리 모양인 부인계로 틀어 올린 채 금빛 비녀를 꽂았다. 화장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어우러졌다. 그녀는 일행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먼저 양심전(養心殿)으로 가서 건덕제를 알현했다. 문안 인사를 올리자 건덕제는 배연우의 상태를 몇 마디 묻고는 그녀를 물러가게 했다. 양심전을 나온 서청아는 여관을 따라 봉의궁(鳳儀宮)으로 향했다. 전각 안에는 은은한 침향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황후는 창가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태자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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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주인들이 이야기를 나누자, 노비들은 알아서 멀찍이 물러났다. 배현진의 눈빛이 순식간에 음산하게 변했다. "청아야, 나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서청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지난날의 연모 따위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차가운 비웃음만이 감돌았다. "연왕 전하께서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정녕 마음속으로 그 이유를 모르시는 겁니까?" 그녀는 일부러 '연왕 전하'라는 네 글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배현진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 알게 된 것이냐? 육혜수가 말해준 것이냐?"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청아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지금의 저는 태자비이고 전하의 형수입니다. 전하와 저는 이미 아무런 사이도 아닙니다."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배현진이 서청아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억눌린 목소리로 분노를 쏟아냈다. "잊지 말거라, 우리에겐 혼서가 있다. 넌 내 여자라고!" 서청아가 비웃음을 흘렸다. "전하, 설마 그 혼서가 가짜라는 사실을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 정곡을 찔린 배현진은 할 말을 잃은 채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후, 그는 참지 못하고 서청아의 손을 붙잡았다. 태도가 한풀 꺾인 그는 달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청아야, 널 속이려던 게 아니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상인의 딸이라는 네 신분으로는 내 정비는커녕 측비 자리조차 가당치 않았으니까. 내가 널 속인 건 다 너를 아끼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내 이미 다 방도를 마련해 두었다. 네가 내 아이를 갖게 되면, 어떻게든 부황께 청해서 네게 측비의 명분을 드리고 당당하게 내 곁에 머물게 해주려 했다고." "태자에게 시집가서 액막이를 한 게 나에 대한 화풀이라는 걸 안다. 청아야,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겠다고만 한다면, 태자와의 혼약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마." 서청아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저에 대한 미안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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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누가 네 마음대로 별원에 가서 헛소리를 지껄이라고 했느냐?" 배현진의 목소리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눈빛에는 예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이 살기만이 가득했다. 육혜수는 목이 졸려 숨을 쉬기 힘든 와중에도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왕야, 저는… 저는 그런적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 배현진이 차갑게 비웃으며 육혜수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네가 가서 청아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청아가 어찌 갑자기 떠났겠느냐!" 바닥에 세게 넘어진 육혜수는 목을 부여잡고 격렬하게 기침하며 몰아치는 숨을 들이켰다. "다시 한번 말하마." 배현진은 음침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내 일에 참견하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매정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육혜수는 겨우 숨을 가다듬고 배현진의 차가운 표정을 바라보며, 억울함과 불만이 순식간에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초라한 행색으로 일어나 눈물을 머금은 채 붉어진 눈으로 소리쳤다. "왕야께서는 잊으셨습니까? 누가 왕야의 정식 혼례를 치른 왕비인지 말입니다! 저 몰래 외실을 들인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까짓 여자 때문에 저한테 이러시다니요. 혼례 첫날밤 저에게 하셨던 그 맹세들을 정녕 다 잊으신 겁니까?" 그녀의 눈물에도 배현진은 아무런 반응 없이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육혜수는 뒤쫓아가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히스테릭하게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왜 변한 겁니까? 평생 저한테 잘해주겠다고 했잖습니까!" 배현진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동요도 없었으며, 어조는 잔인할 정도로 평온했다. "변했다고? 내 마음을 언제 네게 준 적이 있었느냐?" 이 한마디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육혜수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그녀는 순간 얼어붙었고 울음소리마저 뚝 끊겼으며,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배현진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배현진은 그녀를 더 이상 쳐다보지도 않고 뿌리친 뒤 곧장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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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동궁에서. 서청아는 침전에 들러 배연우를 살펴볼 생각이었다. 침전 입구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태자께서 아직 혼수 상태이시니, 태자비 마마께서는 돌아가 주십시오." 공경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서청아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인물을 바라보니, 검은색 경장 차림에 꼿꼿한 체구,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사내가 품에 검을 안고 서 있었다. 동궁 안에서 검을 차고 있으니, 보통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서청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 서 있던 성유주가 한 걸음 나서며 그 사내를 엄하게 꾸짖었다. "묵풍아, 무례하다! 태자비 마마께서 전하를 뵈러 오셨는데 네가 어찌 여기서 앞을 막아선단 말이냐!" 묵풍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물러서지 않았으며, 더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저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서청아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문 앞을 지킬 뿐이었다. 성유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서청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사과 섞인 어조로 말했다. "태자비 마마, 이 자는 전하의 근접 호위무사인 묵풍이라고 합니다. 줄곧 전하의 안위를 책임져 왔는데, 성격이 곧고 본래 규율을 따지는 데 서툴러 마마를 불쾌하게 해 드렸으니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옵소서." 서청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호위무사가 충심으로 주인을 지키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 전하께서 아직 주무시고 계신다면 본궁은 이만 들어가 방해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돌려 설하와 추월, 그리고 다른 궁인들을 데리고 침전 입구를 떠나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에 들어서자 궁인들이 차를 올리고 물러났다. 서청아는 찻잔을 들어 올렸고 손끝에 닿는 찻잔의 온기를 느끼며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성유주에게 나직이 물었다. "성 상궁, 듣기로 태자 전하께서 기이한 병을 앓고 계셔서 낮에는 주로 혼수 상태이고 밤에만 깨어나신다던데, 그것이 정말이냐?" 성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비 마마, 그렇사옵니다. 전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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