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만한 말투로 비아냥거리는 차승혁은 곽태민이라는 라이벌이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했다.
모두가 넋을 잃은 순간 그는 권희연을 데리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차는 크리스탈 베이로 향했고 기자들의 모습도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권희연은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어찌 됐든 대중의 궁금증은 해소한 셈이니까.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뒤늦게 차승혁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치 불에 덴 듯 즉시 놓아주었다.
차승혁은 그녀를 힐긋 쳐다보더니 태연하게 손을 내려놓았다.
“생수 한 병 부탁해.”
말을 마치고 피곤한 듯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조수석에 앉은 김훈이 잽싸게 생수를 건네주며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사모님, 여기요. 대표님이 지난 3일 동안 기껏해야 7시간밖에 못 주무셨거든요.”
권희연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생수를 건네받았는데 항상 마시던 브랜드였다. 차승혁의 예리한 관찰력에 혀를 내둘렀다.
뚜껑을 열고 몇 모금 마시자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이때, 시예진이 카톡을 보냈다.
[네 남편 너무 멋있잖아! 완전 폭탄 발언 아니야?]
곧이어 링크도 첨부했다.
기자들의 일 처리는 역시나 빨랐고 불과 몇 분 만에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 영상이 올라왔다.
재벌 총수가 카메라 앞에서 또 다른 기업 오너 라이벌을 향해 선전포고하는 모습이라니, 워낙 보기 드문 광경이라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단 20분 만에 공유 횟수가 1만 건을 넘어섰다.
차승혁이 쉬는 데 방해라도 될까 봐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영상을 재생했다.
화면에 비친 차가운 얼굴은 다소 공격적이면서도 쉽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녀를 껴안았을 때만큼은 표정이 한없이 누그러졌다.
권희연은 귀신에 홀린 듯 동영상을 다운했다.
그러고 나서 댓글을 훑어보았다.
[돈도 많고 잘생겼을뿐더러 능력자에 애처가라니. 이런 남편이라면 쌍수 들고 환영이야.]
[곽 대표님은 어떻게 대응하려나? 얼른 피 터지게 싸웠으면 좋겠네.]
[여자분 완전 여신이 그 자체인데? 생얼이 카메라 앞에서 이 정도라면 실물은 대체 얼마나 예쁘다는 거지?]
차승혁에게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권희연은 그를 칭찬하는 첫 번째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다.
시예진이 또다시 문자를 보냈다.
[최초로 루머를 생성한 사람은 얼른 계정을 삭제하고 잠수타야겠는데? 전혀 확실한 정보가 아니잖아. 이혼하기는커녕 네 남편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사랑이라.
권희연은 곁눈질로 차승혁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트럭 한 대가 지나가자 헤드라이트가 유리창을 비추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 잠시 드러났다가 금세 어둠 속에 가려졌다.
[아니야.]
[원래 당사자는 잘 모르는 법이지.]
권희연도 지금 왜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시예진과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네 말대로 승혁 씨가 나를 사랑하는 게 사실이라면 여자를 위해 물불 안 가릴 사람처럼 보여?]
[아니...]
이것이 바로 키포인트였다.
차승혁은 냉정하고 이성적인 남자였다.
정말 사랑했다면 오히려 기자들 앞에서 그런 공격적인 멘트는 안 했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앞장서서 변호해주고 곽태민에게 선전포고한 건 사랑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감정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사건도 아니었고 어쩌면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른다.
차승혁에게 체면이 늘 1순위였다.
대화를 마무리하고 권희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승혁 씨가 나랑 이혼한다는 소식은 어디서 들었어?]
[매니저라면 마케팅에 빠삭해야 하지 않겠어? 우리랑 자주 협력하는 계정이 있는데 거기 담당자가 알려줬어.]
[출처 좀 알아봐 줄래?]
차승혁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퍼뜨린 소식이란 말이지?
[응, 수소문해보고 다시 연락할게.]
...
더 그랜드 VIP룸.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에 권희연의 허리를 끌어안은 차승혁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디 한 번 해보시죠? 과연 내 곁에서 빼앗아 갈 수 있을지.”
곽태민은 피식 웃더니 TV를 향해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산산조각이 났고 휴대폰도 찌그러졌다.
비서 주지민은 옆에서 찍소리도 못했다.
사람들은 곽태민이 상냥한 줄만 알았지 이렇게 무자비한 모습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면 치열한 사업 판에서 어찌 단기간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겠는가?
곽태민은 차승혁의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도 화가 났다.
다정한 스킨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속으로 훤했다.
사귀는 동안 차마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차승혁에게 선수를 빼앗길 줄이야.
한 번 해보라니? 아주 자신만만하군.
권희연이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지금까지 받은 선물을 4년 동안 고이 간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직접 돌려주러 찾아올 이유가 뭐 있겠는가?
이내 바닥에 놓인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당시 가난한 학생이라 비싼 선물을 사주지 못했지만 권희연은 전혀 싫은 티를 안 냈다.
곰 인형, 오르골, 볼품없는 로즈골드 도금 목걸이...
지금 다시 들여다보면 그냥 쓰레기였다.
그런데 여태껏 보관해두고 있었다니.
곽태민은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서류 가방에서 녹음 펜을 꺼내 전원을 켜고 반복해서 들었다.
“널 좋아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이미 결혼했어.”
“넌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잖아.”
“미우나 고우나 내 남편이야.”
눈빛은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주지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지?”
...
검은색 벤틀리가 크리스탈 베이로 천천히 진입했고 별장 입구에 멈추어 섰다.
비좁은 공간에 침묵이 이어졌다.
차승혁이 눈을 번쩍 떴다. 권희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재빨리 따라나섰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남자의 뒷모습은 유난히 쌀쌀맞아 보였다.
그제야 차승혁이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만 해도 선뜻 나서서 도와줬기에 전혀 개의치 않은 줄 알았다.
차승혁은 집에 들어와서 신발을 갈아신은 뒤 검은색 코트를 벗어 현관 캐비닛 위에 올려두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번은 없어요.”
방금 카메라 앞에서 보여줬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권희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설명을 보탰다.
“곽태민을 만나러 간 이유는...”
차승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과 전 남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말을 마치고 나서 침실로 들어갔다.
권희연은 제자리에 서서 그의 모습이 거실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설명조차 듣기 싫을 정도로 열을 받은 건가?
예상외의 전개에 그녀는 막막했다.
화가 난 이유는 정확히 몰랐지만 어찌 됐든 그녀로 인해 벌어진 소동은 분명했다.
난데없이 연루된 차승혁 입장에서 바쁜 와중에 아내 일까지 대신 처리해야 한다는 점만 봐도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법했다.
이내 재빨리 침실로 따라 들어갔다. 차승혁은 옷장 앞에 서서 문을 등지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권희연이 설명했다.
“옛날에 받았던 물건을 돌려주려고 찾아갔을 뿐이에요. 이참에 완전히 관계를 끊으려고 했죠.”
차승혁은 셔츠의 마지막 단추를 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나랑 결혼한 순간부터 이미 끝난 사이인 걸 몰라요?”
차승혁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싸늘한 눈빛으로 힐긋 쳐다보았다.
“이혼할 생각이 없다면 전 남친에 대한 마음은 일찌감치 접어요.”
희미한 담배 냄새가 코끝에 맴돌더니 금세 감쪽같이 사라졌다.
잠시 후 권희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음을 접으라니?
설마 아직도 곽태민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한 번 버림받고 나서도 상대방을 잊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쪽팔려서라도 이런 누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권희연은 곧바로 뒤돌아서 그를 쫓아갔다.
차승혁이 욕실로 향했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걸어가 문을 벌컥 열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곽태민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4년 전에 이미 정리한 사람이에요. 날 모욕하지 마...”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제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서 있는 차승혁을 발견했고, 그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권희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방금 들어온 거 아닌가? 어떻게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벗을 수 있지?
이내 뒤돌아서 도망갔다.
하지만 곧바로 손목이 덥석 붙잡혔다.
그리고 살짝 잡아당기자 남자의 품에 쏙 안겼다.
곧이어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끝까지 얘기해봐요.”